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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전경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화촌>
↓ 뒤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 의민공 및 배위교지義敏公 및 配位敎旨
↓ 의숙공 및 배위교지 義肅公 및 配位敎旨
↓의민공 균묘 義敏公 均墓 ↓ 의민공 신도비 義敏公 神道碑 ↓ 의숙공 신도비 義肅公 神道碑 ↓ 의민공 의숙공 신도비 義敏公 義肅公 神道碑 최한 1)주벽-최균(崔均, 1537~161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운철(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강(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1) 최강(崔堈, 1559~1614)
고성지역 임란 의병활동과 재지사족/ 함안조씨 ! 1. 고성지역의 전투와 의병활동 고성지역에서 전개된 임란 당시의 전투는 전쟁의 전체 과정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唐項浦 해전 등은 전쟁의 흐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당시 최전방이었던 이 지역에서도 일차적으로 사족으로 성장해 오던 가문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족의 의병활동 참여는 이들이 향촌에서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우선 자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였고, 점차 여타의 지역의 의병장과 합세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성지역 사족들이 주도하여 벌인 대표적인 전투는 九萬 전투와 담티고개라 불리는 墻峙嶺 방어, 背屯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九萬 전투를 들 수 있다. 구만지역은 지형상 당항포로 바로 이어지는 배후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미 이 지역은 전주최씨 중심의 사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崔均과 崔堈의 창의로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朴連弘, 丁俊, 崔勇虎, 崔角虎, 崔振虎, 安信甲, 鄭廓 등이 함께 의병전쟁에 참여 하였다. 이 전투 과정에서 구만면 鵲旨洞 만석꾼 羅應壁, 羅彦鱗, 羅致紋 일가가 왜적에 의해 몰살 당하게 되는데, 崔均과 崔堈 형제가 전투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왜적을 물리치게 된다. 마암면에서 궐기한 李達도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담티고개 방어를 들 수 있다. 담티고개는 당시 진주와 고성의 경계로 지세가 험하여 왜적의 침입이 어려운 곳이었으며, 영남 일원의 보급창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9월에 쳐들어온 왜적에 대항하여 싸운 배둔 전투에서도 崔均과 李達이 중심이 되어 싸우고 鄭廓, 朴連弘, 崔한, 丁俊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고성의 사족들은 의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고성에서 싸운 趙凝道는 함안조씨 趙 旅의 5세손이며 전주판관 趙 鵬의 아들이다. 함안에 인접한 고성에서 의병운동에 참여한 것은 함안의 재지사족으로서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606년(선조 39)에는 趙亨道가 고성현령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들의 의병활동과 관직제수는 전후에 지역에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전후의 지역사회에서 수령과 재지사족들 사이의 관계는 대개 타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당시 부세 납부 등 과 관련하여 양반들의 사회적 특권은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전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복구사업에서 그 결과물의 최대 수혜자는 양반층이었다는 점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던 전주 최씨 집안의 경우 고성지역의 전후 복구과정에서 고성의 사회경제를 주도하는 가문으로 당연히 부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전쟁의 참화가 계속된 것은 아니었고, 주로 영남의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성의 경우 전 시기 동안 사실상 전쟁 상황이 실질적으로 계속 되었던 최전방 지역으로서, 고성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들의 노력과 전후 이들의 향촌에서의 영향력은 다른 지역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16, 17세기 향촌에서의 양반사족 발전의 일반적 경향과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후의 고성 양반층은 전국적 의미에서 크게 드러난 양반사족으로서의 성장이라기보다 향촌에서의 사족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인근 지역의 유력 가문들과의 지속적인 혼인관계, 경제적 토대의 확대 등의 노력을 통하여 고성지역의 유력 사족가문으로서 계속 지위를 지켜나간 것으로 보인다. 2. 임란 이후 재지사족의 성장 고성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일차적으로 국가와 양반지배층이었는데, 특히 일부 사족들이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임란 이후 국가의 전후 복구사업 노력의 하나로 力田法이 시행된다. 역전법은 시행 주체로서 지방의 유력층에 주목하고, 그에 관련된 각종 행정지원 업무를 지방관에게 위임하여 지방관과 지방 유력자층 상호간의 긴밀한 협조를 통한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점차 조건이 되는 곳에서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개간사업이 추진되었다. 고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쟁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유력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九萬 전투에서 몰살당한 羅氏 가문을 대신하여 의병장 최강과 최균 형제의 전주 최씨 가문이 의병운동의 공로와 함께 전후 고성사회의 사회경제 활동을 주도한 가문으로 재편되어 나갔을 것이다. 의병활동을 통하여 고성지역에서 鄕論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고, 전주최씨 입향조부터 세거하여 온 구만지역은 唐項浦의 배후지로서 분지 형태의 넓은 농경지가 확보되어 있는 곳이다. 고성의 서원 건립은 보통의 다른 지역처럼 17세기 이후에 대부분 세워졌다. 임진왜란 이전의 서원으로는 李암을 배향하기 위한 金鳳書院이 있으며, 義敏公 崔均과 義肅公 崔堈을 배향하기 위해 1633년(인조 11)에 건립한 道山書院이 있다. 도산서원은 점차 전주최씨 문중서원으로서 서원의 성격이 변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1709년(숙종 35)에 건립 된 柳村書院에는 沈光世와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李達이 배향되어 있다. 이달은 1842년(헌종 8)에 도산서원에서 移奉된 인물이다. 1738년(영조 14)에 건립된 昆義서원에는 부사 李云吉, 현령 魚淵, 직제학 魚變甲, 문효공 魚孝瞻, 집의 李義亨 등이 배향되어 있다. 마암면에 있는 葦溪書院은 1844년(헌종 10)에 건립되었고, 대사헌 李仁亨, 집의 李義亨, 수찬 李翎, 臥龍軒 李顯, 思簡公 李美, 展敬齋 李후, 新川齋 李應星 등 함안이씨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중서원이다. 그 외 19세기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로서 貞節公 許麒, 參奉 許千壽, 利見窩 許栽 등을
배향한 道淵서원, 참의 趙凝道, 의사 朴愛祥을 배향 한 新道洞祠, 東皐 諸哲孫, 忠毅公 諸沫, 贈參判 諸弘祿을 배향한 雲谷서원, 花山君 千萬里를
배향한 虎岩祠 등이 지금 고성 지방에 남아 있다. 고성의 의병 복원 사액서원 / 고성 도산서원[道山書院].| 한국의 서원(書院) ❏소 재 지: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127 ❏문화재지정: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5호(1983.7.20지정) ❏배향인물: 최 균(崔 均) 최 강(崔 堈) ❏창건연도: 1623년(인조 1) ❏사액연도: 1713년(숙종 39) ❏향 사 일: 3월 중정(中丁) 연 혁 조선 1623년(인조 1)에 왜적을 물리친 의공 최균(崔均)과 의숙공(義肅公) 최강(崔堈) 두 형제의 공을 높이 새기고, 이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이다. 1713년(숙종 39)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60년에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배향인물 1)주벽-최균(崔均, 1537~161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운철(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강(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고성지역 임란 의병활동과 재지사족/ 함안조씨 ! @ 고성지역 임란 의병활동과 재지사족 (함안조씨) 1. 고성지역의 전투와 의병활동 고성지역에서 전개된 임란 당시의 전투는 전쟁의 전체 과정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唐項浦
해전 등은 전쟁의 흐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전후의 고성 양반층은 전국적 의미에서 크게 드러난 양반사족으로서의 성장이라기보다 향촌에서의 사족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인근 지역의 유력 가문들과의 지속적인 혼인관계, 경제적 토대의 확대 등의 노력을 통하여 고성지역의 유력 사족가문으로서 계속 지위를 지켜나간 것으로 보인다. 2. 임란 이후 재지사족의 성장 고성 사회는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만큼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크게 파손된 지역이었다.
고성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일차적으로 국가와 양반지배층이었는데, 특히 일부 사족들이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고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쟁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유력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일부 가문이 중심이 되어 복구사업이 추진되었다. 건축물 강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양지문은 앞면 3칸 ‧ 옆면 1칸 규모를 가진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양지문 왼편에는 앞면 3칸 ‧ 옆면 2칸 규모의 오른편에는 앞면 4칸 ‧ 옆면 2칸 크기를 가진 진수재를 배치하였다. 참고-고성군지,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성의 의병 http://blog.daum.net/segon53/15860330
복원 사액서원 / 고성 도산서원[道山書院].| 한국의 서원(書院) 玗岡(裵在基) | 조회 35 |추천 0 | 2012.01.26. 09:45 고성 도산서원[道山書院] 도산서원(道山書院)
❏소 재 지: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127
❏문화재지정: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5호(1983.7.20지정)
❏배향인물: 최 균(崔 均) 최 강(崔 堈)
❏창건연도: 1623년(인조 1)
❏사액연도: 1713년(숙종 39)
❏향 사 일: 3월 중정(中丁)
연 혁
조선 1623년(인조 1)에 왜적을 물리친 의공 최균(崔均)과 의숙공(義肅公) 최강(崔堈) 두 형제의 공을 높이 새기고, 이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지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이다. 1713년(숙종 39)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60년에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배향인물 1)주벽-최균(崔均, 1537~161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운철(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강(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고성지역 임란 의병활동과 재지사족/ 함안조씨 ! @ 고성지역 임란 의병활동과 재지사족 (함안조씨) 1. 고성지역의 전투와 의병활동 고성지역에서 전개된 임란 당시의 전투는 전쟁의 전체 과정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唐項浦 해전 등은 전쟁의 흐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당시 최전방이었던 이 지역에서도 일차적으로 사족으로 성장해 오던 가문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사족의 의병활동 참여는 이들이 향촌에서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우선 자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였고, 점차 여타의 지역의 의병장과 합세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성지역 사족들이 주도하여 벌인 대표적인 전투는 九萬 전투와 담티고개라 불리는 墻峙嶺 방어, 背屯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九萬 전투를 들 수 있다. 구만지역은 지형상 당항포로 바로 이어지는 배후지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미 이 지역은 전주최씨 중심의 사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崔均과 崔堈의 창의로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朴連弘, 丁俊, 崔勇虎, 崔角虎, 崔振虎, 安信甲, 鄭廓 등이 함께 의병전쟁에 참여 하였다. 이 전투 과정에서 구만면 鵲旨洞 만석꾼 나응벽(羅應壁), 나언린( 羅彦鱗), 나치문(羅致紋) 일가가 왜적에 의해 몰살 당하게 되는데, 崔均과 崔堈 형제가 전투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왜적을 물리치게 된다. 마암면에서 궐기한 李達도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다음으로 담티고개 방어를 들 수 있다. 담티고개는 당시 진주와 고성의 경계로 지세가 험하여 왜적의 침입이 어려운 곳이었으며, 영남 일원의 보급창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9월에 쳐들어온 왜적에 대항하여 싸운 배둔 전투에서도 崔均과 李達이 중심이 되어 싸우고 정곽(鄭廓), 박연홍(朴連弘), 崔한, 정준 (丁俊)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고성의 사족들은 의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고성에서 싸운 조응도(趙凝道)는 함안조씨 조려(趙旅)의 5세손이며 전주판관 조붕(趙鵬)의 아들이다. 조응도는 고성의 假將으로서 복병장 정유경(鄭惟敬)과 함께 적극적으로 왜병과 싸워 전공을 세웠으며, 1597년(선조 30) 3월 24일 거제 기문포(器問浦)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함안에 인접한 고성에서 의병운동에 참여한 것은 함안의 재지사족으로서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606년(선조 39)에는 趙亨道가 고성현령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들의 의병활동과 관직제수는 전후에 지역에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전후의 지역사회에서 수령과 재지사족들 사이의 관계는 대개 타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당시 부세 납부 등 과 관련하여 양반들의 사회적 특권은 여전히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전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복구사업에서 그 결과물의 최대 수혜자는 양반층이었다는 점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던 전주 최씨 집안의 경우 고성지역의 전후 복구과정에서 고성의 사회경제를 주도하는 가문으로 당연히 부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전쟁의 참화가 계속된 것은 아니었고, 주로 영남의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성의 경우 전 시기 동안 사실상 전쟁 상황이 실질적으로 계속 되었던 최전방 지역으로서, 고성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들의 노력과 전후 이들의 향촌에서의 영향력은 다른 지역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이 16, 17세기 향촌에서의 양반사족 발전의 일반적 경향과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후의 고성 양반층은 전국적 의미에서 크게 드러난 양반사족으로서의 성장이라기보다 향촌에서의 사족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인근 지역의 유력 가문들과의 지속적인 혼인관계, 경제적 토대의 확대 등의 노력을 통하여 고성지역의 유력 사족가문으로서 계속 지위를 지켜나간 것으로 보인다.
2. 임란 이후 재지사족의 성장
고성 사회는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만큼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크게 파손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전쟁 복구는 가장 시급한 과제였고, 이의 해결을 주도하는 가문이 고성의 향촌사회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부상할 것은 분명하였다. 임진왜란은 이런 의미에서 지역에 거주하는 양반사족층의 존재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성에서 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일차적으로 국가와 양반지배층이었는데, 특히 일부 사족들이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임란 이후 국가의 전후 복구사업 노력의 하나로 力田法이 시행된다. 역전법은 시행 주체로서 지방의 유력층에 주목하고, 그에 관련된 각종 행정지원 업무를 지방관에게 위임하여 지방관과 지방 유력자층 상호간의 긴밀한 협조를 통한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점차 조건이 되는 곳에서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한 개간사업이 추진되었다.
고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쟁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유력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일부 가문이 중심이 되어 복구사업이 추진되었다. 따라서 이들 가문이 전후의 고성 향촌사회를 주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九萬 전투에서 몰살당한 羅氏 가문을 대신하여 의병장 최강과 최균 형제의 전주 최씨 가문이 의병운동의 공로와 함께 전후 고성사회의 사회경제 활동을 주도한 가문으로 재편되어 나갔을 것이다. 의병활동을 통하여 고성지역에서 鄕論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고성사회를 주도하는 가문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주최씨 입향조부터 세거하여 온 구만지역은 唐項浦의 배후지로서 분지 형태의 넓은 농경지가 확보되어 있는 곳이다. 고성의 서원 건립은 보통의 다른 지역처럼 17세기 이후에 대부분 세워졌다. 임진왜란 이전의 서원으로는 李암을 배향하기 위한 김봉서원(金鳳書院)이 있으며, 의민공(義敏公) 최균(崔均)과 의숙공(義肅公) 최강(崔堈)을 배향하기 위해 1633년(인조 11)에 건립한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다. 도산서원은 점차 전주최씨 문중서원으로서 서원의 성격이 변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1709년(숙종 35)에 건립 된 유촌서원(柳村書院)에는 심광세(沈光世)와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이달(李達)이 배향되어 있다. 이달은 1842년(헌종 8)에 도산서원에서 移奉된 인물이다.
1738년(영조 14)에 건립된 곤의서원(昆義書院)에는 부사 이운길(李云吉), 현령 어연(魚淵), 직제학 어변갑(魚變甲), 문효공 어효첨(魚孝瞻), 집의 이의형(李義亨) 등이 배향되어 있다.
마암면에 있는 위계서원(葦溪書院)은 1844년(헌종 10)에 건립되었고, 대사헌 이인형(李仁亨), 집의 이의형(李義亨), 수찬 이령(李翎), 와룡헌(臥龍軒) 이현(李顯), 사간공(思簡公) 이미(李美), 전경재(展敬齋) 李후, 신천재(新川齋) 이응성(李應星) 등 함안이씨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중서원이다.
그 외 19세기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로서 정절공(貞節公) 허기(許麒), 참봉(參奉) 허천수(許千壽), 이견와(利見窩) 허재(許栽) 등을 배향한 道淵서원, 참의 조응도(趙凝道), 의사 박애상(朴愛祥)을 배향한 新道洞祠, 동고(東皐) 제철손(諸哲孫), 충의공(忠毅公) 제말(諸沫), 증참판(贈參判) 제홍록(諸弘祿)을 배향한 운곡서원(雲谷書院), 화산군(花山君) 천만리(千萬里)를 배향한 호암사(虎岩祠) 등이 지금 고성 지방에 남아 있다.
건축물 건물의 배치는 맨 뒤에 사당인 숭의사를 두고, 강당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진수재와 홍학재가 있으며 대문인 양지문이 구(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양지문은 앞면 3칸 ‧ 옆면 1칸 규모를 가진 솟을대문으로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양지문 왼편에는 앞면 3칸 ‧ 옆면 2칸 규모의 오른편에는 앞면 4칸 ‧ 옆면 2칸 크기를 가진 진수재를 배치하였다.
참고-고성군지, 1995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경남의 서원, 선인, 2008 관광고성 http://visit.goseo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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