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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文鮮明 Moon Sun Myu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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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총재 | |
본명 | 문용명(文龍明) |
출생 | 1920년 1월 6일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
사망 | 2012년 9월 3일 (92세)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460번지 |
매장지 |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천성산 |
국적 | 대한민국 |
민족 | 한민족 |
학력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
활동 기간 | 1954년 5월 1일~2012년 9월 3일 |
교파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
수행 성직 |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
칭호 | 참아버님 |
칭호 기간 | 1954년 5월 1일~ |
직업 | 종교인 |
배우자 | 한학자 총재 |
자녀 | 문예진, 문효진, 문혜진, 문인진, 문흥진, 문은진, 문현진, 문국진, 문권진, 문선진, 문영진, 문형진, 문연진, 문정진 |
웹사이트 | 가정연합 홈페이지, Peace TV |
문선명(文鮮明, 1920년 2월 25일 ~ 2012년 9월 3일)은 통일교의 창시자이다.
문선명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의 남평 문씨 집안에서 문용명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남 7녀 중 2남으로 태어났으며, 형 문용수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증조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문윤국 목사로 3.1 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1] [2][3] 그 이후로도 문윤국은 피신을 다니다 강원도 정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집안재산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어 가계가 파산하였다. [4]
1938년에는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다니며, 조선예수교회[5] 계열의 명수대예배당[6]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 창경원이나 흑석동, 상도동 일대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7]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유학하고, 한인학생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8]
졸업 후 귀국한 그는 1943년 12월 최선길[9]과 약혼하였고, 1944년 5월 이호빈 목사의 주례하에 결혼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였고, 1944년 10월에서 1945년 2월 사이에는 경기도경찰부에서 감옥생활을 하며 일본에서의 활동에 대한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1945년 10월에는 금전 문제 때문에 1주일 가량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후, 1946년 4월까지 김백문 목사의 '이스라엘수도원'[10][11]에 참여한다. 이곳에서 김백문은 계시에 의하여 모든 신자가 보는 앞에서, 전세계의 솔로몬왕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12]
1946년에는 가족들을 남한에 남겨둔 채 홀로 월북하여 평양으로 떠나게 된다. 1946년 6월에는 당시 북한 정부(북조선인민위원회)의 신종교에 대한 탄압정책에 따라서, 종교를 사칭해 사기를 쳤다는 명목으로 허호빈이 적발되었다. 문선명은 허호빈과 관련이 있다는 죄목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간첩혐의가 덧붙여졌다.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뚜렷한 혐의가 나타나지 않아서, 사회질서문란죄로 1946년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 종교활동을 통하여 신도 수가 점차적으로 많아졌으나,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다시금 간첩 혐의로 1948년 2월부터 5월까지 평양내무서 및 형무소에 수감된다. 5월에는 흥남노무자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곳에서 1950년 10월까지 강제노역을 당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0일간의 평양 귀환 길에 문정빈, 박정화 등 옥중에서 전도한 네 명의 제자가 따라나섰다. 평양에서 다시 40일간 지승도, 옥세현, 정달옥, 김원필 네 명의 제자를 수습하여 평양을 떠난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떠나,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13][14].
서울에 1주일 간 체류 후, 1951년 부산광역시로 피난하여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하여 1952년 완성하면서 부산과 대구광역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한다. 지승도, 옥세현, 김원필, 이기완, 강현실 등이 초기의 신자였다. [15] 1953년에는 대구로 개척 전도를 하며 세력 기반을 넓혀 나갔다.
1954년 5월 서울로 기반을 옮기며 공식적으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였다.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이다, 1955년에 통일교를 믿는 이대 연대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 및 퇴직 명령이 내려지면서 기반이 약화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10월에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이 나고, 문선명은 100일간의 수용소 생활을 마친다. 그의 아내 최선길은 수감기간 동안 문선명과 신흥 종교인 통일교에 대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으며, 교도소에 이혼장을 들고 찾아와서 이혼을 종용하였고, 결국 이혼하였다. 같은 시기, 용산 청파동으로 본부를 옮기고 정착한다.
1957년 교리서 《원리해설》(1966년 《원리강론(原理講論)》으로 증보되었음)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 일본(최봉춘), 1959년에 미국(김영운, 김상철)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초창기부터 해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59년 청파동에 통일산업 공장을 세우며, 경제사업을 시작한다.
1960년부터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라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다. 1960년에는 문선명과 한학자의 성혼식과 3쌍의 초대교인들이 참가한 축복결혼식이 열렸다.[16] 1961년에 33쌍이 더 축복결혼에 참여함으로써, 총 36쌍이 탄생하였다.[17] 같은 해, 장녀 문예진과 장남 문효진이 탄생하였다.[18]
1963년에 72쌍의 축복결혼식이 있었으며[19], 1964년에는 차녀 문혜진이 탄생하였으나 1주일 만에 사망하였다.[20] [21] 1965년에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였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회동하였다.[22] 1966년에는 종교간의 화합을 내건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23] 1968년 1월 1일에는 하나님의 날을 선포하였으며,[24] 같은 해에,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여 승공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반대한다’거나 ‘공산주의를 박멸한다’는 뜻의 ‘반공’(反共) 또는 ‘멸공(滅共)’보다는,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뜻의 ‘승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25] 또한, 이 해 2월 22일에 430가정 축복식이 있었다.[26]
1970년 9월에는 세계반공연맹 일본대회를 개최하였다.[27] 1971년에는 기반을 미국으로 옮긴다.[28]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는 닉슨 대통령을 지지한다. [29] 문 목사는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and Unite)」라는 구호하에 닉슨을 옹호하였다.[30] 1974년과 1975년에는 미국 국회에서 초청하여 "One Nation under God"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31] 1976년에는 워싱턴 마뉴먼트와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집회를 하였다. 워싱턴 마뉴먼트 집회에는 30만 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그는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말하였다. 그해 연말 뉴스위크는 그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32]1977년 2월 23일 자신의 생일에는 미국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통일교가 세상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하는 자가 망하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주장한다.[33] 1978년에는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제1회 세계언론인대회를 개최한다. [34] [35]
70년대의 미국에서의 선교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 등의 반발이 거세어졌고, 유대인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결국 그는 관습에 따른 선교헌금에 대한 이자소득의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1984년 7월 20일, 미국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에 많은 종교인들의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36] 이후 문선명은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 13개월 만에 출감했다.[37]
문선명은 각국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 교육 등 전분야에 걸쳐서 국제적인 사업을 펼쳤다.[38]
문선명은 천주평화연합(UPF)이라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민간 차원의 세계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를 모태로 하여 기존 UN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즉, 현재까지 UN을 이끌어온 국가대표들을 하원으로 설치하고 새롭게 종교계, 문화계, 교육계의 국제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상원을 창설해 이것이 하원을 보완하고 하원이 그것을 존중하고 현실화한다는 방안이다. 이를 통하여, 양원의 상호존중으로 글로벌 이슈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기구는 기존 유엔이 각국 정부 대표들로 구성, 운영되는 데 반해, 192개 유엔 회원국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계 지도자들이 민간인 신분을 유지하면서 자국 대표로 참여하는 범세계적인 민간 기구이다. 이를 통하여, 지역주의와 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존 유엔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평화 정착, 분쟁 해결, 빈곤 추방 및 환경 보전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39] [40][41]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에 평화통일가정당(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설립하여 지난 18대 총선에 전 지역구에 국회의원 후보를 내었으나, 의석 확보는 실패하였다. 이후 네팔에서도 같은 이름의 정당을 설립하여, 1명의 당선자를 내었다.[42][43]
(주)일화[44] 통일중공업(주)(현재 S&T 중공업)[45], 일신석재 [46], 평화자동차 등의 여러 기업을 운영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여 왔다. 특히, 평화자동차는 북한 지역에 자동차 공장을 세워 휘파람이라는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어 남북교류에 기여하고 있다.[47] 그러나 현재 평화자동차의 운영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양도되었다.
문화예술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에서 유니버셜 발레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선화예술중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다.[48]
교육계에 있어서는 앞서 언급한 예술학교 뿐만 아니라, 경복초등학교, 선정중학교, 선정고등학교, 선문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청심국제중학교, 청심국제고등학교 등 특수목적고등학교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는 UTS(Unification Theology School)를 설립하였으며, 브리지포트 대학을 인수받아 경영하고 있다.[49][50]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성남 일화 축구팀이 활동중이다. 또한 브라질 상파울루에도 소로카바라는 프로축구팀을 인수받아서 운영하고 있다.[51]
또한, 피스컵이라는 축구 경기도 주관하고 있다.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대회가 열렸으며 2007년 제3회 피스컵까지 열렸다. 1회 대회에 PSV 에인트호벤, 2회 때 토튼햄 핫스퍼, 3회 때 올림피크 리옹이 우승했다. 2009년 제4회 대회는 스페인 마드리드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올림피크 리옹, 레알 마드리드, 세비야 FC, 리가 데 키토, 유벤투스, F.C. 포르투, 성남 일화 등이 참가했다.[52] 이 대회에 이어 2006년부터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피스퀸컵(Peace Queen Cup)도 2년마다 개최하고 있다.
문선명은 16세 되던 1935년 부활절에 기도 중 예수로부터 '인류 구원 사업에 대한 엄중한 당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통일교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 재림주로 믿으며 "참부모님"이라 칭한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기초로 삼는 등 기독교와 유사한 교리를 표방하고 있으나, 여러가지 세부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와는 다르다.
통일교의 기본 교리 체계로 《원리원본》, 《원리강의안》, 《원리강론》 등을 낸 바 있으며, 이 중 《원리강론》은 제자 중 한 사람인 유효원 회장이 집필한 것으로 통일교 교리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기본교리서인 원리강론은 유효원 회장의 저작으로 전편 7장, 후편 6장으로 되어 있다. 전편은 창조원리·타락론·종말론·구주론·부활론·예정론·기독론으로, 후편은 제1-5장까지의 복귀원리와 제6장의 재림론으로 되어 있다.[53]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설악면 일대에 1995년부터 천주청평수련원[54], 청심국제병원[55], 천정궁 박물관[56] 등을 세운 데 이어, 200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화교육기관인 청심국제중학교·청심국제고등학교를 설립 인가받아 새로 개교했다.[57] 한편, 2005년 무렵에는 여수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한 정부의 기업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일대에 대규모 부지의 매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58] 현재는 여수엑스포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여수 화양지구 해양관광 레저단지 개발이 문선명의 계획하에 (주)일상해양산업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다.
2008년 7월 19일, 서울 서초구 반포에서 회의를 가진 뒤 그와 그의 일가족과 신도들이 탄 전용 헬리콥터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청심국제병원 방면으로 귀환하던 중 악천후 속에 헬기가 장락산 정상 부근에 추락,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문선명의 일가족을 비롯하여 승무원까지 탑승자 전원이 무사히 대피했고, 그 후 헬기는 폭발하여 전소되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6명의 탑승자는 모두 무사하며 중경상을 입은 3명을 제외한 문 총재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경미한 상해만 입고 전원이 청심국제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59]
2009년 1월 31일은 문선명의 구순이었다. 이 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미국의 조지 W. 부시, 한승수 등이 축하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통하여,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 장미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을 보내왔다. [60] 2009년 3월 김영사를 통해 문선명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61]이 출간되었다.
2012년에도 7월 19일 피스컵 개회선언을 하였고[62] 8월 2일 모교인 오산고등학교를 방문[63]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8월 13일 감기와 폐렴 합병증으로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 입원하였고, 병세 호전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 같은 달 31일 가평군 청심국제병원으로 옮겨졌으며, 2012년 9월 3일 그 곳에서 향년 92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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