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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바뀐 문성공 안향선생(1부 行狀編) -성균관인터넷신문 수선지(首善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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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효재 | 작성일 | 2011/08/18 |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바뀐 문성공 안향선생(제1부 行狀編)
[俛宇先生文集-곽종석 지음]에 있는 [書晦軒安先生行狀後]에 쓰여져 있기를, 맹자(孟子) 뒤 1500년이 되어 공자(孔子)의 도(道)로 천하 만세를 인도한 이는 회암(晦庵) 주자(朱子)이다. 기자(箕子) 뒤 2000여년 만에 미개하였던 우리나라를 회헌 안선생이 공자를 숭모하도록 하고, 주자학(朱子學)을 창도하여 참된 유학의 연원을 무궁하게 연 公은 주자와 비할만하고, 이를 두고 동이(東夷)를 개벽(開闢)한 기자가 재현했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중국 안에서 태어났고, 주자(周子-염계 주돈이를 말함), 장자(張子-횡거 장재를 말함)가 있어서 그 단서를 앞세우고 있었으나 선생은 동이에서 태어나 정자(程子-이천 정이를 말함)의 낙양이나 주자(朱子-회암 주희를 말함)의 무원과는 거리가 만리 정도가 아니고 이전에도 어두워서 단서를 얻을데가 없었다. 이때에는 호족인 원나라가 북쪽에서 집권하고 있었으나 북방학자들은 미처 정주학을 알지 못하였고, 강한(江漢) 조복(趙復)과 노재(魯齋) 허형(許衡) 등 몇 명의 학자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이 정주학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논한다면 선생의 공은 주자와 견주는 것도 곤란하다 하겠으나 이 어찌 맹자가 이른바 “호걸지사(豪傑志士)는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정밀하게 보고, 깊이 기뻐하고, 익숙하게 체득하고, 독실하게 믿는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같은 습속을 털어 없애고 사람들의 비방을 감수하면서 조금의 의심도 없이 새로운 일을 창도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세대가 멀어지면서 유문(遺文)이 유실되어 선생을 사모하는 후학들이 단서를 찾아 진도(眞道), 성덕(成德)의 차례를 얻을 수 없으므로 논하는 이들 중에 더러 선생을 포은(圃隱-정몽주를 말함) 이하의 제현아래에 두는데도 이의가 없으니, 이는 대개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 덕을 아는 이가 적도다.<下略> 하였다.
문성공께서는 고려 말기에 활동하였던 대 유학자로서 1289년(고려 충렬왕 15)에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함께 공자, 및 주자의 화상을 가지고 들어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공맹사상(孔孟思想)의 집약서인 성리학(性理學)을 최초로 도입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에서의 실천도덕을 강조한 주자학(朱子學)을 힘써 보급하면서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리 믿고 있었다.
위 [書晦軒安先生行狀後]에서 처럼 공자의 도를 계승한 맹자를 이어 천하 만세를 인도한 이가 바로 주자라 하였으니, 그 단서가 주자학(朱子學)이라 그리 믿고 있었으므로 公의 도통(道統)은 주자를 이었다 할 것이다.
公은 1303년(고려 충렬왕 29)에 국학학정(國學學正)인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으로 보내 공자와 그의 제자 72인의 초상을 봉안해 오게 하고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육경(六經), 역(易), 시(詩), 서(書), 춘추(春秋), 예(禮), 악(樂), 제자(諸子)의 사서(史書)와 주자신서(朱子新書)를 구입해 오게 하였고, 문인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익재 이제현(益齋 李劑賢)등을 보내어 정주(程朱)의 성리서(性理書)와 경서(經書) 만 여권을 사들여 오도록 하였다. 이듬해 6월에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공자와 선성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文廟)의 제도를 갖추게 하는 등 국학으로의 부흥에 크게 힘썻다
이번 수선지의 기획보도 순서에 따라 문성공 회헌 선생님을 만나 뵈러 이제 먼 길을 떠나려 한다.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취재를 해야 하는 모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유학의 조종인 공의 행장을 전함에 있어 너무나 짧은 지면이기에 부득이 [제1부 行狀編]과 [제2부 祠堂編], [제3부 諡號編], [제4부 墓所編]으로 나누어 기사를 쓰며, 특히 제4부에서는 북한에 있는 公의 안자묘(安子廟)와 황해북도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유택(幽宅)을 중점적으로 취재하여 보도하려 한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公의 휘(諱)는 향(珦)이며, 초휘(初諱)는 유(裕)이다. 호는 회헌(晦軒)인데 회암(晦庵) 주희(朱熹)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晦)자를 썻다고 하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243년(고려 고종 30)에 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밀직(密直)인 부(孚)의 아들로 태어나 향년(享年) 64歲가 되던 해인 1306년(고려 충렬왕 32)에 졸(卒)하였다. 公이 하세(下世)할 때만 해도 휘자를 향(珦)으로 썻는데, 훗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裕)자로 이름이 바뀌어져 버렸다. 소위 피휘법(避諱法)에 걸린 것이다. 조선의 제5대 국왕인 문종(文宗)의 휘가 향(珦)이였으므로 모두가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公의 휘자도 초명인 안유(安裕)로 바뀌었다. 그것도 귀신도 모르게 말이다.
1318년(고려 충숙왕 5)에 왕이 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명하여 公의 초상을 그려 문묘에 봉안하였는데, 이 초상화가 현존하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되어 국보 제111호로 지정하여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이며,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賜額書院)인데,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셈이다. 처음엔 1541년(중종 36)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는데, 훗날 1548년(명종 3)에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내려오면서 서원의 강학정신을 강화하고, 공인된 국가기관으로 활성화하기 위하여 관찰사 심통원에게 청하였다. 이에 국왕에게 사액을 계청하였더니 대제학 신광한에게 명하게 되었는데, 신광한은 소수서원으로 상헌함에 따라 국왕의 친필로 소수서원이라는 네 글자를 사액하게 되었다.
소수서원의 묘우(廟宇)에는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곳은 크게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에는 강학당(講學堂)과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그리고 장서각(藏書閣)이 있으며, 제향을 모시는 제향공간에는 묘우(廟宇)와 전사청(典祀廳)이 있어 매년 봄.가을로 두 번의 향사를 지낸다. 이곳 묘우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을 함께 배향하였다. 이외에 영정각(影幀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 안향의 영정과, 보물 제 717호인 신재 주세붕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고, 또 회암 주희,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선생의 영정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소수서원을 나와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순흥안씨 참찬공파의 시조인 안자미(安子美)의 사단(祠壇)이 있다. 안자미는 公 의 증조고이고, 조고(祖考)는 추밀공 안영유(安永儒)로 이곳에서 약 6km 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부석면 감곡리 지장산 서쪽 언덕에 신좌을향으로 모셔져있다. 고(考)인 태사공 안부(安孚)의 묘는 실전되고 없어 후손 순원군 응창이 순흥추원단(향려단)에서 시조사단 옆에 사단을 만들어 배향하고,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세사를 올린다.
公의 묘(廟)는 본래 황해남도 연백군 송천리에 있으며 해방전까지만 해도 매년 음력 9월 12일에 기신제를 봉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북녘땅에 있으므로 찾을길이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6.25사변이 있었을 때 공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 내려온 분이 있었으니 公의 24대가 되는 종손 안재찬(安在燦) 옹이다. 현재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 안자묘(安子廟)에서 廟를 수호하며 세사를 지내고 있다.
내일은 경기도 의왕에 있는 안자묘를 찾아 종손으로부터 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그리고 그길로 곧장 임진각으로 달려 판문점을 통해 판문군 눌목리에 있는 公의 유택(幽宅)을 찾아서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려 한다. (제1부 끝)
[成均館 首善志 명예기자 이효재(기사제보 lee-hyojae@hanmail.net)] 출처 :조선왕릉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 [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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