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성 원불교장유교당 교무
2022년 2월 19일 오전 6:21
<2.19. 특별정진기도14일째>
(선진님 이야기)
각산: 신도형 종사
[辛道亨, 1936~1973]
주요약력
본명은 학규(學珪). 법호는 각산(覺山). 법훈은 종사. 총부 예무, 불목교당 교무, 총부 순교무, 교무과장, 법무실 법무, 동산선원 교무 등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신도형은 1936년 음력 3월 19일, 전남 영광군 영광읍 입성리 도골에서 부친 대현(大賢)과 모친 정인선행(仁陀圓丁仁善行)의 6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 성장한 도골은 영월 신씨(辛氏)들이 500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온 뿌리 깊은 터전으로 인근에서는 토반(土班)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3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도 어린 상주로서 의연하여 친지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 후 부친과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3년여를 집에 머물면서 한문을 수학하여 문리를 터득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건강을 크게 상하여 병고를 겪었다. 건강을 회복한 신도형은 다시 영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전무출신한 친 누나인 신제근(均陀圓辛濟根)의 인도로 신태인교당에서 열린 조전권(曺專權)의 교리강습에 참석했다. 신도형은 그 자리에서 인생의 참뜻을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늘 전무출신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학업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신도형은 전북 익산의 남성고등학교로 전학하여 더욱 공부에 매진하면서 정산종사를 뵙고 법문을 받들게 되었다.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뿐만이 아니라 두터운 신의로 선생님들을 비롯한 급우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신도형은 대학 진학을 앞두고 ‘무엇이 참다운 삶인가’를 누나와 함께 고민하다가 누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정산을 찾아뵙고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신도형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선생님들의 비난으로 곤궁에 처했으나, 한번 결심한 신도형의 서원은 굳건했으며 오히려 대장부의 당당한 기상을 보였다.
신도형의 출가 결심을 전해들은 정산은 ‘큰 도인이 왔다’며 숙연임을 짐작하고 기뻐했으며. 학비 마련이 어려운 것을 알고 “육조와 같은 대법기가 왔는데 학비가 없어 공부할 수가 없다면 말이 되겠는가” 하면서 당시 목포교당의 김현관(恩山金玄觀)과 은부자(恩父子)의 결연을 직접 주선하고 후원해주었다. 신도형은 대학 3학년 때 어려서 얻었던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휴학하고 모악산 대원사에 입산하여 정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구도를 위해 병을 잊은 듯 법열에 차 “대소유무는 마음의 나타난 바요, 시비이해는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다. 동하고 정하는 마음, 마음의 하염없는 곳 시방세계가 다 내 집의 소유로구나”라 했다.
그는 다시 거처를 정산이 경전을 편수하느라 머무르던 장수교당으로 옮겨 지병의 치료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사무치는 신성과 서원일념으로 혈심적공했다. 1963년(원기48) 처음으로 총부 예무를 거쳐 그해 11월 전남 완도 불목교당에 부임하여 불모지의 교화에 심혈을 다했다. 배움이 부족한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을 깨우치는가 하면 무지한 농어민은 농어민대로, 또 지역사회의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감화받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불목리 청년들은 신도형이 지어준 성불가를 부르면서 맨손으로 교당을 지어낸 이야기를 지금도 전설처럼 전하고 있다.
1965년(원기50)부터는 순교무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1966년(원기51)에는 교무과장의 책임을 맡아 각종 훈련과 교리 강습의 대강사로서 법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또 1967년(원기52)에는 대산종사를 보좌하여 법무의 책임을 다했고, 1958년(원기53)부터는 동산선원에서 후진 양성의 큰일을 담당했다. 특히 동산선원에서 강의하던 자료를 편찬한 교전 해설서인 《교전공부》는 오늘날에도 후진들의 공부 지침서가 되고 있다. 신도형은 스승님에 대한 신성과 회상의 대의에 투철하여 선후진간에 신망이 높았다.
교리에 걸림이 없어 어느 경우를 당하든지 공부심으로 이끌어주는 큰 감화력을 갖고 있었다. 맡겨진 책임 이외에도 교단의 공사라면 어느 일에나 참여하여 도움을 주는 공심의 표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의 숙업이었던지 예기치 않은 의료사고로 온 몸이 마비되었으나 한 치의 원망과 아쉬움도 없이 1973년(원기58) 2월 1일 미소와 함께 열반했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열반에 들게 되니 대산을 비롯한 선후진 대중의 비통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대산은 빈소를 찾아 “큰 사람이 다녀갔다. 갑갑하고 슬프기로 말하면 내가 수만 배 더하다” 하며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
“일원대도 영겁법자인 각산 신도형 영가여 중생제도의 큰일이 남아있으니 속히 갔다가 속히 오소서”라 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기념대회를 맞아 신도형의 법위를 정식 출가위로 추존하고 종사의 법훈을 추서하기로 결의했다. 아들 명덕이 전무출신했다. 〈韓正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