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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_ 안정효
임병석이에게 ‘헐리우드 키드’라는 별명을 붙여 준 사람은 밴드부에서 나팔을 불었으며 장군의 아들하고는 이름만 닮았을 뿐이지 주먹 쓰는 것은 전혀 소질이 없었던 김두한이었거나, 아니면 하얀 피부가 너무 얇아 속에서 흐르는 피가 내비치는 듯 얼굴이 발그레하고 계집애처럼 연약한 몸집이 ‘조막’만 하대서 대추씨라는 소리를 들었던 김규호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억되는데, 물론 그것은 썩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일제 시대 때부터 주먹으로 만사를 해결하려는 학생이 유난히 많았던 터여서 ‘깡패 학교’라는 자랑스럽지 못한 명칭이 붙은 신창 고등학교에 적을 두었던 책가방 시절에는 극장 아니면 인생을 보낼 곳이 없었기에 너도나도 영화관 주변을 헤매고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좀 과하게 영화 구경을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우리 ‘황야의 7인’이었으며, 또 그 가운데에서도 병석이가 유별나게 영화를 많이 보았을 뿐 아니라, 어디서 그렇게 부지런히 주워듣고 알아 내 가지고 와서 우리들한테 얘기를 전하는지 헐리우드에 대한 소식통이라면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병석이를 감히 쫓아갈 인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들 어느 누구도 그 별명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정보라고 하면 정말로 우리 학년뿐 아니라 신창 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직원 1천6백 명을 통틀어서 병석이를 따라올 경쟁자가 아무도 없었다.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자주 벌이던 영화배우 이름 쓰기 시합에서 그가 거침없이 발휘하고는 했던 실력으로만 미루어 봐도 그렇다. 이기는 사람이 도시락을 빼앗아 먹기로 하고는 두세 명이 둘러앉아 동시에 외국 배우들의 이름을 아는 대로 써내려가는 시합이 어느 해부터인가 교실에서 가끔 열리고는 했었는데, 아마 모르면 몰라도 이런 시합이 날마다 열리기만 했더라면 병석이는 단 한 번도 도시락을 안 싸가지고 다니면서 중·고등학교 6년을 거뜬히 졸업했으리라.
|생략 부분 줄거리| 이처럼 영화에 대한 지식에서 병석이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병석이는 영화 얘기라면 늘 열을 올렸다. 단체 관람 영화 선정을 놓고 고민하는 교무 주임에게 병석이는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율리시즈>라는 영화를 추천했고, 그 일을 계기로 선생님들은 병석이에게 ‘영화 구신’이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다. 한편 병석이는 자신의 삶을 흥미진진한 영화쯤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철저히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나는 자신의 환경과 상황에 대해 무책임하고 어딘지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병석이가 나중에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황야의 7인이란 신창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년에서 부지런히 영화 구경을 다니고 프로그램도 하나같이 열심히 수집했으며 지리적으로는 모두 굴레방다리에서 아현동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던 아이들로 이루어진 자연발생적 집단이었다. 당시에는 학군제 따위가 없이 중학교도 이미 경쟁 입시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고, 그래서 어느 학교라도 서울의 각 지역은 물론이요 지방에서 올라온 ‘유학생’들까지 뒤섞여 함께 다녔었다. 한데 우리 학년에서는 공교롭게도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다 ‘서울의 서부’라고 불리던 서대문 지역에 모여 살았고, 마침 인원도 일곱 명이어서,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이라는 존 스터지스 감독의 멋진 서부 영화가 들어오자 우리들은 냉큼 그 명칭을 훔쳐다 쓰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자칭 황야의 7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그 영화가 수입된 다음이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겨우 한두 해 전부터였으며, 그 전에는 별다른 명칭도 없었으려니와 우리들 패거리의 인원이 항상 꼭 일곱 명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하고 다른 세 명은 서울 태생이기는 했지만 병석이만 해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왔고, 김두한은 중학 2학년이 되어서야 대구에서 전학 와 우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황야의 7인이라는 제목을 우리 집단의 명칭으로 쓰자고 주장한 사람은 나였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정말로 존 스터지스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내가 어느 한 사람을 영화 감독을 본격적으로 좋아한 첫 대상이 바로 존 스터지스였다. 나중에 알프렛 히치콕, 캐롤 리드, 윌리엄 와일러, 르네 끌레망, 잉그마 베르히만, 끌로드 를루슈 등등 다른 감독들의 세계에 탐닉하기는 했어도, 중학생 시절 나에게 있어서는 존 스터지스 같은 예술 영웅이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윌리엄 홀든과 일리너 파커가 주연하는 <브라보 요새의 탈출(Escape from Fort Bravo)>이었고 그 다음에 어느 추운 겨울날 비원 근처에 있던 문화 극장에서 <무법지대(Bad Day at Black Rock)>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무법지대>를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감격은, 그 날 얘기를 나누고 함께 흥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옆에 없어서 그 감동이 너무나 사무쳐서였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도 나로 하여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생략 부분 줄거리|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직전에 나는 병석이, 축농증, 대추씨와 함께 경남 극장에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적발되어 정학을 받는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보는 성향이 달라져서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와 에로티시즘의 농도가 짙은 영화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학 둘째 날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되어 우리들은 낙제를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야의 7인은 병석이의 제안으로 세계일주에 나서기로 한다. 그러나 곧 이들은 세계일주를 하려면 여권 등 필요한 서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하고 만다.
병석이는 사랑하는 방법이 대단히 이상했다. 하기야 지금부터 겨우 한 세대 낡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첫사랑이라는 것이 본디 벙어리 냉가슴앓이로 시작되어 혼자 끙끙 고민하다가 짝사랑으로 끝나기가 보통이기는 했지만, 병석이의 습관성 짝사랑에는 독특하고도 묘한 면이 있었다. 어디가 독특하고 묘했는지를 설명해 보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병석이가 처음 사랑했던 여자는 경남 극장에서 과자 부스러기와 사이다와 프로그램 따위를 파는 구내 매점원이었다. 병석이는 그 때 중학교 3학년이었으며, 하도 기막힌 계집아이라고 성화를 부리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해서 하루는 나도 그를 따라 극장으로 가서 직접 실물을 살펴봤다. 껌이나 과자를 담은 조그만 나무상자에 멜빵을 달아 메고는 객석을 돌아다니는 열서너 살 된 그 가냘픈 계집아이는 아무리 잘 봐 줘도 내 눈에는 기껏해야 안델센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 정도였는데, 병석이는 자꾸만 나를 붙잡고 이러는 것이었다.
“쟤 도나 리드처럼 생겼지? 판판한 뺨하고 조용한 눈을 보라구. 꼭 도나 리드 같아. 안 그러니? 영락없는 도나 리드야.”
이 무렵 황야의 7인 가운데 병석이와 나, 그리고 대추씨는 도나 리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멋진 다리를 백만불짜리 보험에 들었다는 시드 샤리시니, 스탠리 도넨의 <비는 사랑을 타고(Singin′ in the Rain)>와 헨리 코스터 감독의 <도미니끄 수녀(The Singing Nun)>에서 그토록 즐겁게 노래하던 테비 레이놀즈니, 세 번째 남편 마이클 토드가 죽었을 때 찾아와서 많은 위로를 해 주었던 가수 에디 피셔를 그의 아내 데비 레이놀즈로부터 빼앗아 결혼해 버린 엘리자베드 테일러니, 버지니아 메이요니, <프렌치 캉캉>에서 유쾌하게 바람기가 드세었던 프랑소아즈 아르눌이니, 남국(南國)의 정서가 물씬하던 해디 라마르니, <커버걸(Cover Girl)>에서 연두빛 치맛자락을 날리며 진 켈리와 현란한 춤을 추었던 리타 헤이워드니 하는 예쁜 여배우들이 아무리 많았어도 우리들은 그 아무도 미모와 인격과 덕망에 있어서 도나 리드를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고 믿었다.
|생략 부분 줄거리| 현실에서 도나 리드를 찾았던 병석이는 그 도나 리드를 재현시킬 대역으로 매점 소녀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병석이는 절대 자신의 감정을 나서서 고백하는 법이 없었다. 늘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짝사랑을 중단해 버리곤 했다. 이런 식의 병석이의 사랑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대상을 옮겨 가며 반복되었다. 결국 그는 평생토록 현실 속의 사랑을 찾지 못했다.
병석이의 삶에 있어서 가시적인 몰락의 징후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그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얼마 후에 징집 영장을 받았을 때였다. 대학에 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입영 시기를 연기하는 특전도 주어지지를 않았고, 어쨌든 나중에라도 병역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불가피하게 그가 처한 운명이었는데, 문제는 그 운명을 받아들일 생각이 병석이에게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나라가 두 토막이 나서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고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적으로서 대치하는 이 나라의 해괴한 현실로 인해서 사회로 진출하기 전에 무려 30개월이나 군대에 끌려가 젊음을 낭비해야 한다는 조건을 병석이는 참으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전혀 타의에 의해 군대에 적을 두고는 지극히 인위적인 계급으로 인해서 인간성이 탄압을 받는 조직 사회에 그는 도저히 제발로 걸어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 2학년일 때, 징집 영장을 받아 놓고 두어 달 고민하던 끝에 그는 그의 청춘을 병정놀이에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편지를 병불이 아버지에게 남겨 놓고 집을 나가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징집 제도만 이 나라에 없었다면 병석이는 그렇게 빨리 젊은 나이에 퇴락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그렇게 비참한 삶을, 그리고 그렇게 덧없는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고, 남들은 다 겪어 내는데 못하겠다고 도망친 병석이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을 테니까 원인 분석은 그만하고 실제로 그 다음에 헐리우드 키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해 보겠다.
병역 기피자가 된 그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온갖 잡스러운 허드렛일을 하며 생존을 계속했고,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병석이네 동네 판잣집들이 모조리 철거를 당하는 바람에 가족과 연락이 끊어져 거의 2년 동안이나 나는 병석이의 행방조차 찾을 수가 없게 되었었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두었을 무렵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현숙이와 경복궁에서 첫눈이 내리던 날 데이트를 하다가 신분을 알 수 없지만 카메라를 목에 두른 것을 보니 관광객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일본 남자와 놀러온 소미 누나를 우연히 만났고, 부모는 모르지만 누나는 알고 있었던 병석이의 주소를 나에게 가르쳐 주어서 드디어 나는 그를 찾아 나설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포항으로 그를 찾아갔던 날은 직행 버스 길가의 들판에 하얗게 덮인 눈 위로 말라죽은 코스모스 줄기들이 앙상하게 버티고 서서 바람에 흔들거렸고, 차에서 내렸을 때는 콧물이 나도 모르게 줄줄 흐를 만큼 매서운 날씨였다. 병석이가 기거한다는 대폿집은 지붕에 눈이 푹신하게 쌓인 1층짜리 기와집 다방을 옆에 끼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붙어 있었는데, 페인트가 비늘처럼 벗겨진 양철 간판 밑으로 베니어 문짝을 열고 들어가니 연탄 난로에 주전자가 놓여 있었고, 여기저기 대여섯 개의 누런 주전자가 허연 막걸리 얼룩을 입은 채로 술방 앞 쪽마루에 흩어져 놓였으며, 비닐 장판을 씌운 탁자에는 필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젓가락통과 재떨이만 덩그라니 놓였고, 벽에는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더러운 달력과 불조심 포스터가 걸려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네 시경이어서 장국 손님 두 명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밤마다 술판이 벌어지는 세 개의 방에서는 아무렇게나 옷을 겹겹이 끼어 입은 작부 두 명이 화투를 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여자는 약국에서 파는 싸구려 흰 안대를 눈에 했다. 주인은 외출하고 없었다.
내가 임병석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안대를 댄 여자가 아래위로 나를 훑어보고는 누구냐고 물었으며, 고등학교 동창이라면서 이름을 밝혔더니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와 엽차 한 잔을 따라 주고 나더러 난롯가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화투를 계속했다.
15분쯤 기다렸더니 베니어 문이 열리고는 지게를 진 병석이가 들어섰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불능자(不能者). 그것이 그를 보고 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어휘였다. 그런 단어가 우리말 사전에 나오기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 무엇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사람. 막걸리통 세 개를 지게에 얹어 메고,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쓰고, 연탄재로 시커멓게 더러워진 면장갑을 끼고, 노동자처럼 낡고 두터운 솜옷을 걸치고, 얇은 헝겊 목도리를 두르고 들어선 헐리우드 키드. 앙상하게 야윈 얼굴에 오랫동안 쫓기며 살아온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 그리고 방 안에서 화투를 치는 두 여자를 힐끔거리며 자꾸만 죄를 지은 듯 시선을 피하려는 태도.
분명히 그는 불능자였다.
“어떻게 날 찾아 냈니?” 지게를 벗어 놓고 악수를 한 다음 술통을 부리며 병석이가 물었다.
“누나한테서 주소를 알아 냈어.” 나는 방에 있는 두 여자가 듣지 못하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연락하고 오면 혹시 네가 나를 피하려고 자취라도 감출까봐 그냥 찾아왔어. 어떻게 지내는지 꼭 만나 보고 싶어서 말야.”
“피하긴.”
병석이는 따라오라고 손짓을 하고는 술집 뒤켠에 붙은 쪽마당에다 처마 끝에서부터 기름종이를 밑에 받친 함석 지붕을 이어 바깥담까지 덮어서 만든 좁다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부엌을 거쳐 뒷문으로 나가서 벽에 기대어 쌓아 놓은 연탄 더미를 지나 비닐을 두 겹 씌워 병풍을 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겨우 신발을 벗어 놓을 자리만 남겨 놓고 널빤지로 마루를 깔아 놓은 방이 있었다. 지붕을 얽은 각목에서 그대로 삐져나온 못, 지퍼가 달린 옷장, 파리똥이 앉은 채로 덩그라니 천장에 매달린 60촉짜리 전구 하나, 뒷벽에 놓은 12인치짜리 고물 텔레비전, 그 위에다 이빨 빠진 사발에 모래를 담고 심어 놓은 선인장 한 그루, 양은 냄비 두 개, 몇 개의 라면, 방바닥에 흩어진 김치국물 얼룩이 난 몇 권의 주간지, 귀퉁이 장식술이 다 빠져 버린 방석 두 개, 구석에 둘둘 말아 쌓아 놓은 이부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그리고 충격적으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신문지를 바른 널빤지 벽에다 다닥다닥 붙여 놓은 영화 프로그램들이었다.
병석이가 그토록 정성들여 수집한 프로그램들이 이 골방, 헐리우드 키드가 지금까지 일으켜 세운 이 왕국, 인간 임병석의 세계를 빈틈없이 화려하게, 더덕더덕 지저분하게 장식해 놓았다.
|생략 부분 줄거리| 병석이는 양순이라는 싸구려 안대를 한 여자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면서 그녀의 방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이후 병석이는 양순이를 떠났고, 나와도 다시 소식이 끊겼다. 내가 병석이를 다시 만난 것은 제대한 뒤 충무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제3조감독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거렁뱅이 신세가 된 병석이에게 조명 보조 일자리를 얻어 주었으나 첫 날 폐쇄된 공간에서 엄청 고생한 병석이는 다음 날 일을 그만둬 버리고 만다. 어느 날 병석이는 <무책임한 두 주일>이라는 시나리오를 들고 나를 찾아온다. 병석이의 시나리오는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병석이의 시나리오를 당장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일을 추진하던 중 병석이의 시나리오가 수많은 영화들의 표절로 이루어진 걸작품임을 깨닫게 되고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다.
<무책임한 두 주일>은 대단히 치밀하고도 교묘하게 엮어 놓은 무책임의 걸작품이었다. 말하자면 <……두 주일>은 그 전체가 하나의 표절 짜깁기 작품이었고, 그것은 치밀하고도 효과적이며 또한 대단히 아름답게 꾸며 놓은 모자이크 작품으로서, 그 나름대로 하나의 독립된 생명까지 지니는 모조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완벽한 모조품을 조금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도공이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모조리 깨뜨려 버리는 장면을 영화나 TV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그 예술 정신에 감탄해서 콧등이 시큰거리다가도 비슷한 장면을 이 사람 저 사람 자주 그들의 작품에서 편리하게 써먹는 꼴을 보면 식상해서 역겨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모조품이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그 속에 혼이 없게 마련이었다. 아름답게 물감을 칠한 예쁜 조약돌로 아무리 완벽한 모자이크 풍경화를 그려 놓는다고 해도 어찌 그 그림이 시슬리나 터너의 풍경화를 따라가겠는가. 그리고 시슬리나 터너가 어떻게 자연 그 자체를 따라가겠는가.
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내가, 비록 일류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도 영화라면 빠지는 구석이 없다고 스스로 자처해 온 감독이었던 내가, 다른 것도 아니요 영화 대본을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속이 메슥거리고 창 밖으로는 또 다른 피곤한 하루가 부옇게 동터 오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악몽을 꾸었다. 고무 호스처럼 흐느적거리고 흡반이 달린 병석이의 긴 팔이 나의 온몸을 칭칭 감아 들어오는 악몽을. 나는 가위에 눌려 숨이 차서 아침 아홉 시에 깨어났고, 온몸이 축축하고 끈끈하게 느껴져서 보니 침대의 시트와 내 잔등이 식은땀으로 펑 젖어 있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구역질이 나서 일어날 수가 없었고, 피로를 풀기 위해 두어 시간 잠을 벌충하려고 한참 동안 몸을 뒤척였지만, 사방이 너무 환한데다가 어느 새 병석이에 대한 분노가 시퍼렇게 머리를 드는 바람에 쉽게 잠이 오지를 않았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세수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고는 촬영장으로 나갔다.
|생략 부분 줄거리| 병석이가 주고 간 시나리오가 표절의 걸작품임을 알게 된 후, 나는 사태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등에 휩싸인다. 이미 영화 제작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고, 새 영화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 중단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다시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나에게는 이상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우리들이 열광해 온 영화들도 대부분 그 이전 작품의 모방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힌 것이다. 적어도 나 자신은 병석이의 창작품에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제작된 영화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렇게 요란한 성공을 거두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도 정작 이 작품을 창조한 임병석은 나타날 줄을 몰랐다.
병석이가 이렇게 끝내 나서지 못했던 까닭은 나에게 80만 원을 달라면서 <무책임한 두 주일>의 시나리오를 떠맡기고 행방을 감춘 다음 서너 달이 지나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해 그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 황야의 7인은 그가 죽은 날짜도 확실히 모른다. 7인 가운데 그의 장례식에 갔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 연락을 받지 못했었다.
병석이는 어느 날 밤 자정이 조금 넘었을 때 술이 취해 광화문 국제 극장 앞에서 무단 횡단을 하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택시에 치어 죽었다는데, 그 기사가 어느 조간 신문 한 귀퉁이에 아주 조그많게 났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문에 실렸던 그 기사를 황야의 7인은 아무도 보지를 못했는데, 다른 동창 누군가가 술 좌석에서 코주부를 만나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야, 너하고 친했던 그 애 있지? 극장 많이 다니다 정학 받고 세계일주 떠났던 애 말야. 그래. 이름이 임병석이었지. 걔 얼마 전에 신문에 났더라. 어느 신문인지는 잊어버렸지만. 광화문 네거리에서 차에 치어 죽었다던가 뭔가.”
이 허망한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 날 밤 늦게까지 나는 거실에 앉아 병석이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서부의 사나이> 게리 쿠퍼도 죽었고, <와로크>를 떠나간 헨리 폰다도 죽었고, <셰인> 알란 랏드와 셰인을 졸졸 쫓아다니던 조이 소년 브랜드 드 와일드도 죽었고, 제임스 딘도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레이스 켈리도 교통사고로 죽었고, 타이론 파워는 <솔로몬과 시바>를 촬영하다 솔로몬의 의상을 걸친 채로 세트장에서 심장마비로 죽었고, 타이론 파워 대신 솔로몬 왕 역을 맡아 영화를 완성시킨 율 브리너는 암으로 죽었고…….
나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랫동안 헐리우드 키드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대해서 생각했다. 진심으로 쓴 작품인지 아니면 장난 삼아 나에게 갖다 주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가 만든 시나리오가 영화의 꼴을 갖추고 화면에 비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그의 비밀을 영원히 비밀로 덮어 둔 채로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에 대해서.
죽음은 전염성 정신 질병인 모양이어서, 타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병석이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했고, 병석이와 더불어 나 자신의 일부가 함께 죽었다고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무책임한 두 주일>의 탯줄로 우리 두 사람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고 슬프고 답답하고 우울한 삶, 헐리우드 키드가 낭비해 버린 삶, 그 삶은 옛날 흑백영화처럼 우중충했지만, 이제 와서 그의 생애가 내 마음 속에서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기는 하더라도 하나하나의 삶은 저마다 아름다운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헐리우드 키드의 삶은 어디가, 과연 어디가 아름다웠던 것일까?
|생략 부분 줄거리| 나는 헐리우드 키드 임병석의 생애에 대한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거실 책장을 가득 채운 비디오 테이프를 둘러본다. 거기에는 <무책임한 두 주일>의 테이프도 거의 스무 개 가량,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채 진열되어 있다. 나는 가끔 비디오 테이프 앞에 있을 때 시체 안치소에 와 있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수많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배우들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요즘 그 유령들의 집단 속에서 병석이의 모습을 가끔 본다. 병석이는 무슨 죄라도 지은 듯 내 눈치를 살피고 그냥 서 있기만 한다. 나도 그냥 기다린다.
오늘도 그는 영원한 벌을 서는 죄수처럼 거기에, 비디오 테이프의 벽 앞에 그렇게 서 있다. 셀룰로이드 유령들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파에 앉아서 기다린다. 병석이가 언제까지 거기 그렇게 서서 기다리기만 할 것인지 어디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그냥 기다린다.
그렇게 꼼짝도 않고 버티기만 하는 내가 사뭇 마음에 걸리기라도 하는지 그는 잠시 더 머뭇거리더니 주춤주춤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기다린다. 병석이가 어떻게 하려는지 보려고. 병석이는 내 앞에서 멈춰 서더니 다시 내 눈치를 살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얘기해 주기를 기다리듯이. 하지만 나도 기다린다. 나는 한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병석이가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나는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자 한참 잠자코 서 있던 병석이는 무슨 못된 일을 꾸미기라도 하는 듯 좌우를 둘러보고는 나에게로 더 가까이 와서 머리를 수그리고, 내 귓전에다 대고,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야 명길아, 경남 극장에 <무책임한 두 주일>이 붙었대. 우리 포스터권 사서 그 영화 보러 가자. 거기 도나 리드도 볼 겸 말야.”
안정효(安正孝, 1941~ )
서울 출생. 1983년 <실천문학>에 장편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으로 게재)로 등단하였다.
주로 전쟁과 관련한 세대의 고통과 절망을 보여 주는 작품을 썼다.
주요 작품으로 「하얀 전쟁」, 「가을바다 사람들」, 「은마는 오지 않는다」, 「미늘」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포인트 영화에 올인한 병석이의 발자취
작품 해설
한 인물의 일대기
이 소설은 평범한 한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씌어진 전기적 소설이다. 임병석이라는 인물의 학창 시절의 모습부터 성인의 모습,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의 일대기를,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윤명길)’가 가장 가까운 친구인 임병석의 생애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임병석의 학창 시절부터 시작해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임병석의 모습까지 그의 몰락해 가는 생애가 ‘나’의 관찰자의 시각을 통해 분석적으로 서술된다.
한 세대의 문화사적 기록
이 작품은 전후에 영화에 몰입하였던 세대의 문화사적, 풍속사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0년대 후반 이후의 TV, 비디오, 오디오 등의 현대적인 매체가 거의 일반화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영화가 지친 영혼을 잠시 환상 속에 쉬어 가게 해 주는 가장 유력하고 매력적인 문화적 매체였다. 이 세대의 주인공인 임병석은 어릴 적 즐겨 본 헐리우드 영화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이없게 생을 마감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일생인 동시에 한 세대의 진솔한 문화사적 기록인 것이다.
핵심 정리
갈래장편 소설, 전기 소설, 일대기 소설
배경195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시점일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영화라는 환상을 꿈꾸며 살다 간 한 인물의 비극적 일생
•4·19 세대를 성장시킨 문화사적 풍토와 그 속에서의 꿈과 좌절
작품 내용
주인공 임병석 소개 |
•‘나’가 임병석이 헐리우드 키드라는 별명을 갖게 된 상황을 회고함. •병석이는 학교의 단체 관람 영화 선정을 계기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영화 구신’으로 소문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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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이의 학창 시절 |
•황야의 7인은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적발되어 정학을 받음. •낙제의 위기에 처한 황야의 7인은 병석이의 제안으로 세계일주를 계획하나 여권 문제에 부딪쳐 포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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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이의 애정 행각 |
•병석이는 도나 리드를 닮은 매점 소녀를 시작으로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그의 현실 속 사랑은 성취되지 못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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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이의 몰락 |
•대학에 실패하고 병역을 기피하면서 병석이는 점점 몰락해 가기 시작함. •‘나’는 애꾸눈 여자 양순이와 함께 사는 병석을 찾아감. •한동안 연락이 끊긴 병석이는 어느 날 <무책임한 두 주일>이라는 직접 쓴 시나리오를 ‘나’에게 주고 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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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깨달음 |
•기대 이상이었던 병석이의 시나리오로 영화 제작을 시작한 ‘나’는 후에 그것이 표절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어 심한 배신감을 느낌. •‘나’는 우리가 열광해 온 영화의 대부분도 이전 작품의 모방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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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이의 죽음 |
•‘나’는 우연히 동창으로부터 병석이의 교통사고로 인한 어이없는 죽음을 전해들음. •‘나’는 헐리우드 키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함. | |
인물 소개
나(윤명길)
이 글의 서술자. 병석이의 생애를 옆에서 지켜보는 인물. 훗날 영화감독이 되어 병석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함.
임병석
헐리우드 키드란 별명을 가진 명길의 친구. 평생 영화에 파묻혀 현실 부적응자로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