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세계대회 참가 평가
예상외의 선전, 재평가된 한국여자탁구
마지막 결승에서 숙적 중국에게 분패함으로써 세계선수권 2연패의 꿈은 비록 좌절됐지만, 우리 한국이 세계정상의 실력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할 수 있었던 까닭에 제33회 세계대회는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전해에 열린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에 패한 것에 이어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에서 체코에게 패배하는 등, 이에리사와 정현숙 선수가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불과 50여 일의 강화훈련을 마치고 세계대회에 출전한 것이었다.
특히 사라예보의 영광을 지켜온 히로인 이에리사가 2년 전의 제 페이스를 못 찾고 있는 데다 박미라 선수의 은퇴로 약화된 복식조의 불안정 때문에 세계선수권 방어는 처음부터 힘겨운 것으로 예상됐고, 사실상 4강 진출조차 의문시 되었었다.
무엇보다 전해 11월 스칸디나비아 오픈대외에서 당시 세계 랭킹 8위인 체코에게 단 1회전에서 허무하게 무릎을 꿇은 악목이 채 가시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급성장한 소련, 헝가리, 체코, 스웨덴 등의 동구권에 맞서 예선리그를 통과하는 것이 무척 힘겨운 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처럼 불안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세계챔피언의 저력을 과시, 한 세트도 내주지 않으면서 완승 가도를 치달려 예선 1위를 마크했다. 또 준결승전에서 맞선 일본팀마저 3:0으로 스트레이트로 꺾음으로써 왕좌에 오른 중국 이상으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대회 이전의 예상을 뒤엎은 한국의 선전은 50여 일의 강화훈련으로 재기한 두 주전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의 눈부신 활약이 그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특히 2년 전 사라예보 세계대회의 주역 이에리사 선수에 가려, 2인자에 머물러 있던 정현숙 선수가 이번 대회에서만은 이에리사 선수를 능가하는 활약상을 보였을 뿐 아니라, 박미라 선수의 은퇴로 재구성한 이에리사.정현숙 복식조 가동이 세계 최강의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었다.
사실상 이번 대회를 앞두고 세계탁구 전문가들은 중국탁구의 재등장과 일본의 두각, 서구의 진보, 그리고 동구 각 국의 등장과 이의 도전을 주목하는 경향이 짙었었다.
그러나 단체전에서 우리 선수들의 펼쳐 보인 쾌조는 세계탁구 전문가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데 충분했다.
세계탁구는 한국여자탁구의 끈기와 최상급의 실력을 재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단체전 초반 흐름을 뒤엎고 복식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에이스 장립 선수를 정현숙 선수가 꺾어 당연히 이겼어야 할 게임을 지고 만 것을 실로 함께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우리는 안티 러버의 변칙 플레이어 갈신애에게 이에리사와 정현숙 선수가 모두 농락당한 것이 너무나 뼈아팠다. 이 패배는 우리보다 1400배의 등록 선수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에 비해 가까스로 선수를 확보하고 있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패배였다.
사전에 안티 러버에 대한 연구와 대전 경험이 있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무엇보다 컸다. 그러한 여건이 전혀 조성되지 않은 것은 당시 지도자들의 정보 파악력이 현저히 뒤떨어진 한국탁구의 숙명적인 불행이기도 했다.
중국으로서도 대 한국전에 신인 갈신애 선수를 기용한 것은 큰 모험이요,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이는 중국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주전으로 기용해온 장립, 호옥란, 정희전 등의 에이스 중 장립 선수를 제쳐놓고는 뚜렷한 전력이 될 만한 선수가 없었다는 것으로 입증한다. 어쨌든 중국은 결국 비밀 병기 갈신애를 기용, 한국의 허를 찌르는데 완전히 성공했다.
그렇더라도 그 전해 11월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에서 세계 랭킹 8위의 체코에 졌던 우리 한국이 불과 50여 일의 강훈으로 세계정상의 실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한 것을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다.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선수들 자신에게 심을 수 있었고, 2년 후에 빼앗긴 세계왕좌의 자리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정현숙 선수만이 준준결승(8강)까지 진출하고 이에리사 선수 등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 본선 1,2회전에서 탈락한 개인전의 참패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상황이었으며 일말 큰 교훈을 남겼다.
우리는 항상 단체전에 너무 큰 비중을 둠으로써 단체전의 주전으로 활약하는 이에리사와 정현숙 선수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 두 선수를 지원 사격해줄 만한 보조선수를 키우지 않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이에리사.정현숙이 단체전의 매 게임에 기용되어 두 선수의 특기와 허점이 너무 노출된 것도 어쩔 수 없는 패인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벌인 강화 훈련 때처럼 선수들이 필승의 자세와 집념으로 체계적인 훈련을 계속하고 탁구의 보급을 서둘러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들 이을 제2진의 육성을 서두른다면 계속 세계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대회에서 얻은 성과요, 교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이번 대회 8위를 목표로 출전한 한국 남자팀은 10위에 그치고 말았다. 1969년 뮌헨에서 열린 제30회 세계대회에서 한국 남자탁구는 4위에 입상된 바 있었지만, 오래도록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필자로서 제33회 세계대회의 크고 작은 일들을 정리하며 돌이켜보게 되는 일은 중국과의 결승전이 있던 바로 그날이다. 그날은 우리 한국의 고유명절인 설날 새벽 7시경이었다.
지금 같이 TV 중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KBS 라디오 방송에서 급히 현지의 경기실황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 새벽 제례시간도 잊은 채 전 국민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희비를 따라 함께 엇갈리며 가슴을 조아렸다.
특히 토털 스코어 2:2로 타이를 이루게 되었을 때,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환호와 마지막 단식에 나선 이에리사가 갈신애와 힘겨운 상황을 이어가는 경기실황을 해설하는 이경호(당시 국제이사) 선생의 안타까운 음성이 지금도 귓가에 선하게 들리는 듯하다.
만약 그날 우리가 다시 한 번 제패의 영광을 안았다면 우리의 고유명절은 더없이 빛났을 것이고 온 국민들에게 더없이 커다란 선물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또 우리 탁구의 붐은 계속되었으리라는 아쉬움도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위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경기가 끝난 뒤 세계탁구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한국선수들의 분전을 우승한 중국 이상으로 칭찬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일본 탁구계에는 빗발치는 비판을 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국여자탁구의 저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우리 선수단은 이런 칭찬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스포츠 경기에서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없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상에 오른 것만큼 뛰어날 순 없기 때문에 눈물 젖은 분전의 아쉬움을 안은 채 우리 선수단은 차기 대회 재 제패를 목표로 다시 재무장해야 함을 다짐했다.
북한의 박영순 선수, 개인단식 우승
제33회 세계대회의 스포트라이트는 예상을 뒤엎은 여자 개인단식 우승자에게 쏟아졌다. 준준결승에서 한국의 정현숙 선수에게 역전승했던 북한의 박영순 선수가 바로 그 주인공.
조직위원회에 엔트리를 제출할 때 북한의 바로 그 단 한 명의 여자선수였던 김영순 이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박영순을 김영순으로 바꾸는 위장술로 우리 선수들을 혼란에 빠뜨린 셈이었다.
경기 직전 얼굴을 보고 안 일이었지만 그는 전해 개최된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출전, 단체전 준결승전의 1번 단식에 나서 우리의 이에리사 선수에게 1:2로 패한 바 있었다.
당시 18세로 평양에 있는 대학에 재학중이며, 이에리사와 비슷한 루프성 드라이브를 주무기로 하는 전진속공형 선수라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 세계무대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었다.
이번 대회에서도 북한에서 출전한 단 1명의 선수라는 이유로 약간의 관심을 끌었을 뿐, 세계챔피언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3회전에서 만나 헝가리의 로탈레드 선수를 3:2로 물리치고 준준결승에서 우리의 정현숙 선수와 대결, 3:2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전에서 대전한 소련의 페르드만 선수 역시 3:2로 이기고, 세계랭킹 2위였던 중국의 장립 선수와 만난 결승에서도 3:1로 가볍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한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1만여 관중이 주시한 가운데 이날의 하이라이트로 벌어진 여자 개인단식 결승에서 왼손잡이 박영순은 1세트부터 중국의 장립 선수를 물고 늘어져 15:10으로 리드를 지켰다. 다만 게임 종반에 연달아 범실을 저질러 24:26으로 첫 세트를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예의 2,3,4세트에서 강력한 포어핸드 드라이브로 열화의 공격을 퍼붓더니 21:12, 21:14, 21:15로 완벽한 승리를 이끌었다.
박영순 선수가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우리 선수단은 준준결승전에서 정현숙 선수가 듀스의 접전 끝에 그에게 패배하고 만 아쉬움을 돌이켜야 했다.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하여 생각지도 않았던 우승을 차지해 기쁘다.’며 담담하게 승리의 소감을 밝힌 박영순 선수는 상대선수인 장립 선수와 심판들에게 악수조차 나누지 않고, 단 한 점의 미소도 스치지 않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우승의 순간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던가, 소리를 지르며 껑충 뛰어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박수갈채에 환성을 보낸다던가 하는 것이 선수의 본능일진대, 선수로서는 일생의 염원이기도 할 탁구여왕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그토록 무표정하고 무심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조차 국가로부터 지시된 행동이었을까?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전혀 누리지 않고 말 그대로 순간 속에 묻어버림이 지켜보기에도 안타까웠다.
그런 연고로 그날 열린 환송파티 석상에서는 장립이 정치적인 제스처로 적당히 져준 게 아닌가 하는 설이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순 선수는 무서운 신예로 분명 세계탁구에 우뚝 설법한 훌륭한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남북 분단의 비극으로 우리와 항상 적수로 대결해야만 했지만 돌이켜보면 박영순 선수가 중국의 장립 선수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내심 같은 민족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우리 민족이 탁구에 풍부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증명된 셈이지 않은가?
이후에도 박영순 선수는 77년 영국 버킹검에서 열린 제34회 세계대회에서도 개인단식 우승을 차지, 세계대회 2연패의 영광을 차지했다. 박영순 선수는 북한에서도 최고급 관리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영웅의 칭호를 받았고, 세계탁구 여왕으로서의 신화를 남겼다.
그러나 평양에서 개최된 79년 제35회 세계대회에서 4회전까지 진출했으나, 중국의 통린 선수에게 2:3으로 역전패 당해 3연패의 꿈을 이루는데 실패했다. 이후 81년 유고 노비사드에서 열린 제36회 세계대회까지 북한의 주전으로서 크게 활약했던 그는 그해 말, 북한의 고급 관리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며 은퇴했다.
그리고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그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82년, 아기를 낳다가 잘못되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화려하게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살아갈 앞으로의 나날을 오래 지키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간 그의 소식에 우리 한국 탁구계 또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 주요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