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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서울서머나교회, 죽은 자(故 김성수) 설교로 예배 |
예장합신 "비성경적 비신학적 요소 많다"… '추종금지'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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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신앙> : 엄무환 목사 】 “예배만 있을 뿐 목양은 없다.”고 주장하는 서울서머나교회. 나아가 “예배 설교는 고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동영상으로 한다.”는데. 예장합신은 ‘고 김성수의 추종을 금지하는 결정’을 했다. 지난 해(2015년) 경북 경주 코모도 호텔에서 열렸던 예장합신(총회장 안만길 목사) 제100회 총회에서 신학부는 서울서머나교회 고 김성수 목사에 대한 신학검증 결과를 보고했다. 신학부가 보고한 내용 중 결론부분은 다음과 같다. “교단 산하 모든 교회는 고 김성수의 저술과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할 것을 제안한다.” 이 보고서는 참여한 총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그대로 통과됐다. 예장합신 총회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추종을 금지하도록 결정을 내린 서울서머나교회 고(故) 김성수 목사는 1988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수로 활동하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고 2004년 남가주서머나교회를 개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서머나교회를 개척, 2012년 4월 1일 창립예배를 시작으로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목회 사역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은 2013년 3월 6일 김성수 목사는 목을 매 숨졌고 부검 절차를 거쳐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이후 장례를 준비하면서 교회 관계자들과 유족들은 사망원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김 목사가 사망한 이후에도 서울서머나교회 신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김 목사가 생전에 설교한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고, 교회 창립 당시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에 가입한 이후 지금까지 가입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와신앙>은 예장합신 총회가 추종금지를 결정한 서울서머나교회에 대해 KAICAM이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기 위해 KAICAM 목회국장인 이영용 목사와 전화인터뷰를 했다. 이 목사는 “올해 새로 발령받아 근무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잘 모르겠다.”면서 그러나 “서울서머나교회와 관련하여 <교회와신앙>에서 제보한 내용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재조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서울서머나교회 최득희 예배팀장은 <교회와신앙>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서울서머나교회는 예배만 있을 뿐 목양은 없다.”면서 “예배 설교는 고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동영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교회와신앙>이 최 팀장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현재 서울서머나교회 담임목사는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안동옥 목사이며, 평신도인 팀장 7명이 교회 행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결정하여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팀장은 “알아서 뽑는다.”고 최 팀장은 말했다. 담임이었던 김성수 목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서울서머나교회. 그래서 매주 동영상 설교로 예배를 드리며, “설교는 있으나 목양은 없다.”는 교회, 그리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안동옥 목사가 형식상 담임목사로 하여 여전히 독립교단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 분명 기존의 전통적 교회완 달라도 너무 다른 교회이다. 문제는 이런 교회를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있으며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다.
예장합신 총회는 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에 대해 비성경적, 비신학적 설교로 규정하고 추종금지를 결정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형식상의 담임목사는 존재하지만 그러나 실제 담임목사가 존재하지 않는, 그 결과로 나타난 “목양은 없고 설교만 있다.”는 서울서머나교회의 운영 방침이다. 이 점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방치할 경우 앞으로 목회자가 없어도 설교 동영상만 있으면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변종 스타일의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9절의 말씀으로 한국교회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다음은 예장합신 제100회 총회가 결정한 고 김성수 목사의 신학검증 보고서 내용 중 설교와 관련된 사항 및 결론 부분이다.
[ 예장합신 제100회총회 신학부 보고서 ] 서울서머나교회, 고 김성수 목사의 신학검증 보고서 1. 설교 내용과 관련한 몇 가지 오류들 (1) 선택에 대한 운명적인 오해 김성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 땅에서 행함의 유무가 천국 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결정되어 역사 속으로 내려온 이들이 성도이고 그들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이미 창세전에 갈라져 있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완료의 상태에 들어가 있는 성도는 이 땅에 죄인으로 보내져 자신의 불가능을 폭로 당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비유 강해 14, 마 25:31~46, 구역교재) 김성수: “하나님이 여러분을 역사 속에 보내서 죄의 종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내신 것처럼 무력한 자로 폭로해내신다.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해내신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다 쓰신다. 누가 간음한 자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이시다. 누가 진짜 신랑인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화 하셨다. ... 새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입는다고 말씀한다. 먼저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문제다. 죄인됨이 폭로된다. 하나님이 볼 때는 죽은 자다. 강시다. 네가 죽은 자인 것을 알라. 내가 치장한다. 그런데 왜 니가 강시에 치장하느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과 군중 앞에서 결국 간음한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 있었다. 최초의 간음현장은 에덴동산이었다.”(2012년 산상수훈 16번). 비판 ⇒ 김성수는 구원을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의 선택경륜 안에서 폐쇄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돌트 신경(Ⅰ.1-4)은 창세기 1-3장의 순서에 따라 구원의 실행은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시작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일어난 타락으로 시작한다.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결정된 구원의 대상이 누구인지 먼저 계시하지 않으시고, 성자를 보내어 택자의 구원(생명)을 획득하게 하시고, 이 구원을 택자에게 수여하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 즉 복음 설교를 듣게 하셔서, 성령께서 택자들에게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을 일으켜 구주를 영접하게 하심으로 드러내신다. 이와 같이 영원 안에서의 선택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펼치시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난다. 구원의 결정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실행은 신자의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작정에 의해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앙의 행위가 가능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언약 안에서만 실행이 된다(창 15, 17장). 또한 그에 대한 슬픔,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선택의 열매들을 자신에게서 살핌으로 얻게 된다(돌트신조 첫째 교리 12항). (2)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고 있다. 비판 ⇒ 김성수의 주장에 의하면 정죄 심판의 원인이 사람의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심판자이시며, 정죄 심판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돌트 신경 Ⅱ.6). 성경은 교훈하기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그는 이해하기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이미 이루신 성도가 이 땅에 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강림이 아직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약속으로 보며, 성령께서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으로 믿지만, 그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구원을 주장함으로 우리의 믿음이나 삶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더 이상 인간은 책임 있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은혜 언약의 특징이 훼손된며 은혜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벌코프는 선택보다 언약을 중요시 했다. 벌코프는, 선택이 마지막에 오는 것이었다. “선택은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 첫 번째 말이지만, 신자가 고백할 때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지평선을 나타내주며, 언약의 영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돌트회의에서 핵심 이슈중 하나는 선택의 작정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돌트신경은 첫째 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아야 할 인류(제 1항),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아들을 보내심(제 2항), 복음 설교자를 보내심(제 3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음(제 4항),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제 5항), 어떤 사람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며 어떤 이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옴(제 6항), 그리고 나서 제7항에서야 제한된 수의 사람들을 오직 은혜로 선택하심이 나온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가장 먼저 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은밀한 뜻으로서 창조 이전의 오묘한 일에 속해 있으며, 언약은 시간 속에 드러난 일로서 언약 백성에게 속해 있어(신 29:29), 선택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앞서게 하고 지배하도록 하면, 언약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당사자로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어, 거룩한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3) 언약이해의 오류 ① 옛언약과 새언약의 분리 김성수: “아무튼 그러한 새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옛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옛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그런데 그 옛 언약의 대상자였던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앞에서 완전히 실패자로 드러나 버리지요? 옛 언약이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파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 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너희 인간들은 옛 언약에 의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새 언약을 미리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라’는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사전 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로마서 1,129쪽). 비판 ⇒ 김성수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옛 언약이 파기가 되었으며,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보완적이고 연속적인 한 언약을 대립이나 대조로서 분리시킨다.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의 중보자는 공히 예수 그리스도시다. 단지 실체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옛 언약의 의식법과 정결법과 같은 그림자로서 성격이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경륜상 차이가 있을 뿐, 중보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 면에서 본질상 동일하다. 율법은 두 언약 안에서 죄를 폭로하고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규범 역할도 한다. 이는 옛 언약 교회와 새 언약 교회는 두 교회가 아니라,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성화의 은혜를 입은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② 옛언약에 대한 오해 김성수: “옛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 안지키면 죽는다 입니다.”(롬 1,129쪽). 비판 ⇒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과 지금의 교회가 구원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구약교회와 신약의 교회가 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은 뒤에 언약을 체결할 때인 시내산에서 받았다. ③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오해 김성수: “성도는 죽은 자, 불순종의 상태로 이 땅에 보냈는데 산 자인 척한다. 산 자인 척하는 것이 죽음이며, 사람들은 산 자인 척하는 행위를 성화라 부른다. 새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입는다고 말씀한다. 먼저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문제다. 죄인됨이 폭로된다. 하나님이 볼 때는 죽은 자다. 강시다. 네가 죽은 자인 것을 알라. 내가 치장한다. 그런데 왜 니가 강시에 치장하느냐?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군중 앞에서 결국 간음한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 있었다. 최초의 간음현장은 에덴동산이었다(산상수훈 16번). 비판 ⇒ 김성수는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되려는 것이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도덕적인 율법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위한 우호적인 안내자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복음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율법은 나의 원수이고 나를 정죄한다. 반면에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복음과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 율법은 더 이상 나의 원수가 아니라 나의 친구이다. 율법은 결과적으로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속하며, 핵심에 있어서 도덕적인 율법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위한 우호적인 안내자인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칭의된 사람 안에서만이 아니며...죽은 신앙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2절). (4) 창세기 3장에 대한 그릇된 해석 김성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나약함을 확연하게 구별해 줌으로 해서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과 힘으로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납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존재에서 가르치시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었다”(창세기1, 162쪽).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이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시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창세기1, 198쪽). “선악과는 하나님이 왜 만들어 놓으셨을까? 그것도 제일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그것은 그것을 따 먹어라! 그리고 내 은혜 받아 산 자가 되라는 이유에서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를 반드시 죽이셔야 했다. 왜? 언약을 하셨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 죽고 죽으리라 라는 반복이다. 이것이 나중에 야베스에서 복의 복으로 확 뒤집어진다.” 비판 ⇒ 김성수는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와 혼란스러운 적용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교훈적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보기를 기뻐하시는 의지이다. 아담은 이러한 교훈적 의지에 순종할 수 있는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자유를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험에 통과할 수가 없는 존재이거나, 애초부터 순종을 기대하지 않으시고 금지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따라서 아담은 불순종하고 심판을 받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를 들어, 애초부터 아담은 순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없었다고 말하면 잘못이다. 아담은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선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수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를 혼동하며, 그 결과 운명론적 이해를 전개하며 그것을 은혜론으로 왜곡하고 있다. (5) 심각하게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 김성수: “창조 셋째 날이 담고 있는 구속사 안에서의 영적 메시지를 살펴보면, 성경에서 물과 바다가 대조되어나올 때 항상 물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그래서 창세기의 다섯째 날 만들어진 바다 속의 생물 중에 타닌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창 1:21의 그 큰 물고기, 타닌이라는 단어는 용, 뱀, 바다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것으로 묘사를 하기도 한다”(창세기1, 84쪽).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반드시 너와 결혼할 것이고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비유 강해 11) “창세기를 잘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나 에녹 같은 산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라인인 인물들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선택 밖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바로 산 자들에게만 성경을 주신 것이다”(창세기1, 21쪽) 비판 ⇒ 김성수는 심각히 잘못된 알레고리 해석의 오류를 보이고 있다. (6) 율법 폐기주의를 주장한다. 김성수: “우리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다른 상태를 가지고 이 땅에 왔다”(비유 강해 14번). “성경은 순종치 않음에 가뒀다고 하는데 순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가짜다”(산상수훈 16번). “생각해 보세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를 하게 되면 인간의 행함에 의해 믿음의 진위가 결정이 되는 이상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는데 인간이 행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해 내지 못하면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제품에 인간의 행함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이상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인간 측에서의 어떤 불순물도 가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십자가 은혜라는 하나님의 행함에 의해, 자신의 옛 사람의 심장에 칼을 꽂는 자기 부인의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 측의 노력과 공로가 가입된 불순물 묻은 믿음과 가짜 믿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착한 일을 많이 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측에서의 착한 일이나, 선한 행위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함에 의해, 구원에 있어서 인간 측에서의 모든 행함을 부정하는 그런 행함으로이어지지 않는 믿음은 가짜라는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예수님의 비유, 242-243). 비판 ⇒ 신자의 선행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믿음을 부인하거나 모순된 것이 아니다. 선행이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을 오해하여, 마치 선행이 믿음의 진위를 결정하는 근거이며 따라서 인간이 믿음을 결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오류이며 또한 왜곡이다. 올바른 개혁신학은 신자의 믿음은 그 자체가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러한 선물을 주신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거룩한 성화의 일을 행하시므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임을 가르친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또한 반드시 성화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로 믿음의 진실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교훈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의 말씀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행함으로 드러내게 된다는 원리를 교훈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가 선행을 하여야 할 필요를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4문의 답). 당신은 이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5문). 만일 아무도 이 생애에서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선포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와 의를 더욱 간절히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이며...성령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점점 더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답, 고전 9:24; 빌 3:12-14; 요일 3:1-3).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계명을 완전히 순종할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나는 전혀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한다거나, 새롭게 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믿음의 진위를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7)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오해 김성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땅에서 행함의 유무가 천국 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비유 강해 14). 비판 ⇒ 이 말은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권과 은혜로 얻게 된다는 면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거 이러한 논리를 펴는 마음 저변의 생각은 인간은 누구나 죽은 자요 강시라는 사상이 깔려있다.(그는 인간을 실제로 강시와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산상수훈 16번). 그는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일방적인 방향만을 본다. 작정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시되 그들을 교훈적 의지에 따라 판단을 하시는 방향도 또한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사용이 되었으나,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이 교훈적 의지에 따라서 판단을 받고 공의와 심판을 받는 것임을 말하지 않는다. 이사야 10장의 5절과 6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집센 백성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앗수르를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을 우리는 읽는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같이 짓밟을 것이이어늘...”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이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진 하나님의 손의 몽둥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분명하게 성취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을 이룬 앗수르는 그 행한 일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12절) 여기에 보면 앗수르는 예루살렘에 대해 행한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앗수르는 그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먼저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도구를 사용하셨지만 앗수르가 완악하며 교만한 마음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앗수르의 악한 행위는 악한 행위대로 심판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8) 기성교회를 가짜 기독교로 규정하는 오류 김성수: “따라서 올바른 복음이 교회에 떨어지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교회가 붕괴되고, 가짜 신자들이 와해가 되며, 가짜 종교 행위들이 빛을 잃어, 밖에서 보면 교회가 더 어수선해지는 것 같고, 열심도 없어지는 것 같고, 지리멸렬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가짜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 공격을 당하거든요. 그런데 그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고 골수와 관절과 영혼까지 쪼개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 안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조작해 놓은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 기독교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진짜 복음을 들어보지는 못할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구원파나 신천지나 다락방 같은 그런 유의 이단소리를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로마서1, 122-123). 2. 결론 (1)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 김성수의 강론 내용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사료됩니다. (2) 그의 적은 누룩이 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사단적인 요소가 많아 보입니다. (3) 억지로 성경을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후 3:16). 연약한 신자들이 미혹에 이끌리어 굳센데서 떨어질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단 산하 모든 교회는 고 김성수의 저술과 강론을 읽거나 듣거나 그것을 추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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