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가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이 아파트 경비원이 애꾸인것을 안 최찬일 형사가 뒤따라가 그를 불러세웠다.
우연일까, 아니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최찬일은 흥분되는 가슴을 누르며 말을 건넸다.
"저, 미안합니다. 여기가 신아 아파트가 맞죠?"
"네, 그렇소마는 댁은 뉘신지."
경비원은 약 47, 8세 가량 되어 보였다. 그는 바람이 차다며 최찬일을 경비실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 아파트는 몇 평짜리나 되죠?"
처음부터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 애꾸의 동태나 어젯밤의 행적을 알아보자면 처음부터 자기가 경찰임을 내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 떠오르는 실망의 빛은 어쩔수가 없었다. 연령은 비슷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나약한 체격이었고 얼굴도 아주 곱상하게 보였다. 말투도 매우 고분고분했고 분위기도 좋은 사람이었다.
"이거요? 이거 전부 열두 평짜리죠.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난데... 왜 방 얻으시게요?"
"아뇨, 그런 게 아니구 뭣 좀 알아보려구요."
"이거 젊은이니까 하는 얘긴데 이 아파트 살 생각은 아예 마시우."
"왜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는요, 보면 몰라요? 아파트가 너무 낡았어요. 아파트가 처음 건립되기 시작할 무렵 지은 거니까 수명이 다 된 거나 다름없죠. 그저 잠깐 세들어 살 거라면 몰라두요. 곧 헐릴 거예요. 뭐 뭐라더라. 어떤 건설 회사에서 뒷 부지까지 한꺼번에 매입해서 새 아파트를 짓겠다나 봐요."
"아, 그렇군요."
찬일은 경비원에게 담배를 한 개비 권했으나 사양했다.
"담배하고 술은 전혀 안해요. 식구들이 전부 교회를 다녀서..."
경비원은 담배 대신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씹었다. 찬일은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형사임을 밝혔다. 이 경비원이 애꾸인 것과 범인이 애꾸인 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첫째 열차 내에서의 목격자들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이 좋은, 그리고 얼굴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고 또 강한 악센트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고 했는데 이 경비원은 똑 떨어진 서울 말씨를 쓰고 있었다. 말씨야 위장을 할수도 있지만 체격 조건은 아무래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최찬일이 형사라는 말을 듣고 경비원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 그러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어저께 사건 때문에... 진남포라는 배우..."
"예, 맞습니다. 어젯밤 그 사건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조사 좀 해 보려구요. 어젯밤 그가 피습당한 상황, 그러니까 시간이나 장소 그밖의 참고 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찾아온 거죠. 혹 무슨 기억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진남포, 그는 최찬일이 알고 있는 대로 부산 뒷골목에서 이름난 씨름꾼에다가 주먹을 잘 쓰는 건달이었다. 부산 어시장을 무대로 같은 또래의 똘마니와 어울려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었는데 다행히 영화사 사장의 눈에 띄어 배우로 새출발한 사람이었다.
영화계에서 한동안 눈에 뜨이지 않아 그가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지금은 S-TV에 전속되어 그나마 커다란 행운을 잡은 셈이 된 3류 액션 배우였다. 그가 잡은 S-TV전속의 기회는 참으로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진남포가 정열적으로 영화계에서 뛸적에 같이 일했던 다른 2, 3류 조연급 배우들의 지금 생활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재주가 없으니 취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아놓은 돈이 많아 장사를 하거나 새로운 생활 터전을 잡을 수 있는 형편들이 아니었다. 작은 출연료에 그나마 진남포 같은 사람의 생활 터전이 되어 준 액션 영화가 관객의 인기를 잃어 퇴조하자 더욱 발디딜 틈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어쩌다 촬영하는 전쟁 영화에 단역을 맡아 뛰기는 했지만 그나마 정말 어쩌다 한번이었고 배역이 안 주어지면 몇날 몇달이고 충무로 뒷골목만 배회할 뿐이었다. 그러니 생활의 어려움이란 짐작할 만도 했다. 그래도 진남포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천적인 기묘한 얼굴 덕과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점수를 따며 살아온 덕분이었다.
배우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도 작은 수입으로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사는 성품이 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돕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찬일이 아는 것은 그것뿐 더 이상의 깊은 사생활이나 그의 생활 방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대략 어떤 게 알고 싶은가요?"
경비원이 난로 뚜껑을 쑤석이며 물었다.
"어제 그분, 집에 돌아와서 피습당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나 하는게 궁금합니다. 가령 누가 찾아왔었고 또 누굴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사실 오늘 나는 비번입니다. 어젯밤 근무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근무하는 김씨가 부인 병환 때문에 하루만 더 수고해 달라고 해서 근무하는 겁니다. 하필이면 어젯밤 내가 근무할때 그런 일이 생겨서 골치가 아파요. 어제 진남포씨가 집으로 돌아온게 밤 7시경이었거든요. 평소와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아파트로 들어가다 말고 이리로 들어왔어요. 오히려 기분이 썩 좋아 보였어요. TV에 나오던 중 가장 큰 배역을 맡았는데 이제 자기가 본격적으로 출연할 장면을 찍을 때가 됐다나요. 사람이 착하긴 해도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죠. 그런데 어제는 유난히 기분도 좋아 보였죠. 여기서 한참 놀다갔어요. 그러면서 오늘밤 대본 연습 좀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그 후 제가 9시 30분경 아파트 각 층을 순찰했어요. 진남포 씨는 4충을 쓰고 있어요. 어제 안개가 너무 끼어서 혹시나 하고 돌았는데 베란다 복도에서 보니까 진남포 씨 방에 불이 커져 있고 대본 외우는 소리가 나고 있었어요. 그 전에도 가끔 대본 연습하는 걸 본 일은 있었지만 어저께는 아주 굉장히 진지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밤 12시 30분경 되었을까요. 머리가 부석부석 한 채 진남포씨가 먹을 것을 싸가지고 또 내려왔어요. 잠도 잘 안 오고 대본도 잘 안 외워져서 머리 좀 식혀야겠다구요. 허긴 전에도 가끔 먹을걸 들고 내려와 같이 놀다갔으니 별다른 생각은 없었죠. 과일도 좀 먹고 과자도 좀 먹다가 진남포 씨가 어쩐지 머리가 찌쁘듯 하다면서 찬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죠.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가부다 했죠. 그런데 한 20분 후에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경비원이 이야기하는 동안 최찬일은 하나 빠짐 없이 요점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있었다.
"그 때가 약 몇 시경이었습니까?"
"한 새벽 1시 10분경 됐을 겁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죠?"
"아, 네 진남포 씨가 내려온 게 12시 30분경이었거든요. 진남포씨가 바람 쏘이러 나가고 내가 일지를 기록한 게 12시 50분경이었어요. 그리고 한 20분 후에 돌아왔으니까 1시 10분경으로 생각하는 거죠."
"무슨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어떤 놈이... 어떤 놈이... 하며 매우 숨가빠했습니다. 저는 바로 112에 신고해서 백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죠."
"진남포 씨 가족은 어떻습니까?"
가족은 여동생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서른 살이 다 된 여동생은 그러나 정상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라고 했다. 장님 여동생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적 여건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직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마흔 다섯 살의 진남포는 여태 독신으로 살아온 것이다. 여동생은 종로에서 일하며 거기서 먹고 자며 이따금 이 아파트에 들른다고 했다.
우발적인 사고가 아닐 것이라고 예견했던 최찬일의 생각은 또다시 수정되어야 했다. 진남포는 1시 30분경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아파트 근처를 거닐고 있었고 그때 누군가 와서 그를 난자하고 도망친 것이다. 진남포가 만일 누구에겐가 전화를 받고 나간 것이라면 아니 누구와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간, 다시 말해서 그를 피습한 사람과 사전 약속이 있어 밖으로 나간 것이라면 경비실에 앉아서 과일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즉 불특정시간에 밖으로 나가서 불특정인에게 피습을 당한 그런 상황이었다. 그가 단순히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생긴 우발적인 사고로 드러났다.
진남포 피습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이라면 전체적인 수사 방향은 진로를 바꿔야 했다. 고강진 사건과 관련이 없다면 특별 수사반에서 수사를 할 게 아니라 관할 경찰서에서 진행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같은 방송국 같은 프로에 출연하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아직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진남포의 역할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시점에서 피습을 당했고 고강진이 피살당했다. 함부로 결정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아파트는 지금 비어 있나요?"
"네, 열쇠를 본인이 가지고 있는데. 아, 동생도 하나 가지고 있군요. 사고가 난 후로는 찾아온 사람도 없고 계속 비어 있는 상태죠."
"어젯밤 이곳에 왔을 때 누굴 만나야겠다든가 혹은 누가 찾아올 사람이 있다든가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없었습니까?"
"그런 말은 없었어요. 아침 10시쯤 외출했다가 오후 1시경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네 시경 나가면서 '아 이렇게'정신이 없으니, 대본을 방송국에 놓고 그냥 왔지 뭐예요' 하며 웃으면서나갔었지요.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게 오후 1시경이었습니다."
"그럼 시간으로 봐서는 이렇게 되는 셈이군요, 아침 10시경 외출했다가 1시경 돌아왔고, 4시경 다시 외출했다가 7시경 돌아왔다. 그 다음 9시 30분경 순찰돌 때 대본 외우며 연습하다가 머리를 식힌다며 내려온 게 12시 30분경, 밖으로 나간 게 12시 50분경, 피투성이가 되서 돌아온 게 새벽 1시 10분경이 되는군요."
"예, 그렇게 되는 셈입니다."
고강진과 진남포가 같은 날 밤 당했다는 동질의 성격 말고도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유사점이 많았다. 그러나 사건 자체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밖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면 몰라도 임의대로 나왔다가 더구나 경비원과 마음놓고 놀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 것이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으니 그가 습격당한 것은 누구의 계획적인 피습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할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리의 불량배 짓이거나 아니면 술먹고 취해서 쏘다니는 건달패로 밖에는 볼수 없다. 그 시간에 이 거리를 나다닐 만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최찬일은 일단 경비원과 헤어져서 마포 경찰서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던 최찬일이 우뚝 서서 무엇을 생각하더니 다시 경비원을 불렀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눈은 어떻게 다치셨나요?"
"눈요? 허허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꽤 오래 됐죠. 군에서 안전 사고를 일으켜 다쳤는데 흉하죠?"
열차에서 사라진 애꾸와 같은 왼쪽이긴 했지만 동일 인물이 아님은 증명되었다. 열차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경비원은 여기서 근무를 했고 더구나 진남포와 같이 있으며 그가 다쳤을 때 도와 주기까지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판단한 그는 마포 경찰서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내일 진남포를 만나 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로도 피습 사건의 상황은 윤곽이 떠올랐다. 문제는 그 시간대에 이 근처를 배회한 불량배를 찾는 것과 이 근처 대폿집을 찾아 늦도록 술마신 자들을 탐문해 보는 일이 남아 있었고 이것은 마포의 형사와 함께 조사하기로 했다.
마포 아파트를 중심으로 2km내의 크고 작은 술집은 자그마치 40여개나 되었다. 이 작은 구역에 대폿집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웬놈의 대폿집이 이렇게 많소?"
대동한 형사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아현동 고개 넘어서부터 마포 극장에 이르는 뒷동네는 아무리 봐줘도 서울 기준으로는 빈촌임이 틀림없었다. 요정 같은 요란한 술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오가며 한 잔의 대폿잔으로 애환을 달래기에 꼭 알맞는 거리였다. 30여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그 시간에 술을 팔았다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렇게 술꾼들 발길이 끊어질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젯밤 만은 상황이 달랐다.
"웬걸입쇼. 어제는 밤 열시부터 손님이 발길을 딱 끊었어요. 원 세상에 손님이 없어도 그렇게..."
아파트와 가장 가까운 '갈매기'라는 대폿집이었다. 드럼통으로 화덕을 만들어 여기저기 세워 놓고 등도 없는 의자를 네 개씩 화덕 주위에 돌려놓았다. 곱창, 순대, 묵, 돼지 불고기, 꼼장어 같은안주와 소주, 막걸리, 맥주 같은 주류를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안개가 끼여서 그런지 밤 11시가 되니까 손님 발길이 딱 끊어졌어요. 그냥 문닫기도 섭섭해서... 아 지금 몇 시죠? 8시. 어제는 이맘 때부터 싹수가 노랬어요. 코앞도 못 알아볼 정도로 안개가 잔뜩 끼였으니 어디 갱신이나 하겠어요. 전부 일찍들 집으로 기어들어갔는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으며 주모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손님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여기도 말이죠. 순대 한 사라하고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이거 지금 소주 마시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닌데..."
"아이구 그럽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중 들어온 손님에게 순대국을 한 그릇 말아 주고는 순대와 곱창을 설겅설겅 썰어 소주와 같이 가져온 주모가 옆에 덥썩 주저 물러앉았다.
"아주머니도 한 잔 드세요."
찬일이 소줏잔 넘치도록 따라부어 주모 앞으로 밀어놓자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홀짝 마셔 버리고는 커다란 순대를 하나 집어들었다.
"속이 씨원하구먼. 자 아저씨도 한 잔 받으시우."
방금 입에서 떼낸 소줏잔을 찬일 앞으로 되돌려놓자 이를 바라보던 최 형사가
"저 아주머니 어젯밤 이 근처에 수상한 사람 못 봤어요? 가령 뭐 밤늦게 돌아다닌다거나 여기서 술먹고 취해서 나갔다거나 아니면 무슨 싸우는 소리를 들었거나..."
"아니긴, 척하면 삼천리지 내가 하나 둘 겪었는지 알아. 이런데서 대폿잔은 팔아도 눈치코치 하나는 기막히다고. 아 글쎄 어저께는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놈이 썩 들어오더니 한 상 뻐근하게 시켜 놓고는 뭐라고 씨부렁이는지 알아. 글쎄 뭐 미국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포 생각이 나서 왔다나? 내 웃겨서 이 자식 나중에 술값 내는 꼬깃꼬깃 구겨진 오천 원짜리 지폐 하나 찾는데 자그마치 10분은 걸렸을 거여. 그러더니 안주값이 비싸니 어쩌니 투정하잖아. 내가 뭐랬는지 알아요. 'X할 자식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놈이 안주값이 비싼지 싼지 어떻게 알아, 나가 재수 없어' 하니까 그냥 도망가더라구요. 요새 세상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한 잔 먹고 취한 척, 그놈의 척 아주 매력 없다구."
하더니 이번에는 대동한 형사에게 한 잔 쪼르르 따라 부었다.
"아주머니 우리는 형사도 아니구 아무것두 아녜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에 어젯밤 요 앞에서 진남포라는 배우가 누구한테 칼침 맞아서 입원중이에요. 그래서 혹시나 찾아볼수 있을까 하고 찾아온 거예요. 오해하지 마시구..."
"아이구 난 또 그것도 모르고. 아유 난 형사고 순경이고 그런 분들 딱 질색이라구요. 뭐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이거 공연히 미안 하구먼유. 근데 그런데 있으면 좋겠네요. 배우도 실컷 보고 가수도 보고. 아이구 내 팔자는 요놈에 곱창 꼬이듯 배배 꼬여가지구... 젊어서 남편한테 소박맞고 평생 요지랄로밖엔 못사니..."
주모는 입을 비죽거리며 한 잔 따라 자기가 마셔 버렸다. 저렇게 혼자 흥분하기 시작하면 말을 시키지 않아도 잘 떠들어댔다. 찬일은 그런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내가 멋진 남자 가수 하나 이리 데려다 한 잔 마실테니 그때 구경하세요. 인사도 시켜 드릴께."
하고 흥을 돋궈 주자 얼굴이 빨개지며 또 입을 비죽거렸다.
"그럼 그땐 내가 살께요."
하고 주모는 소줏잔을 다시 찬일에게 내밀었다, 이때는 놓치지 않고 다가앉으며 본론을 꺼내 묻기 시작했다.
"아줌마, 어제 혹 이상한 사람 못 봤수?
"어제? 이상한 사람이라니?"
"그런게 아니구 어제 늦도록 여기서 술 마신 사람이 있다든가 아니면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어제 뭐 특별한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어제는 하도 장사가 안 돼서 문을 닫으려고, 그때가 12시 가까이 되었지. 그런데 글쎄 뭐 특별한 사람은 기억에 없는데. 글쎄, 뭐 굳이. 아 생각이 나요. 이상하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있었죠."
"그래요.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서 잘 좀 생각해 봐요."
찬일은 놀라서 주모를 바라보았다.
"있죠. 어제 12시가 휠씬 넘었어요. 손님이 워낙 하나도 없어서 혹시나 하고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죠. 사람 그림자도 없으면 아예 문을 닫아 버릴려구요. 그런데 안개 저쪽에서 자동차 불빛이 좍하니 비쳐오더라구요. 눅눅한 날은 사실 술맛이 좀 당기거든요. 그래서 끝까지 기다려 본다구 서성거리는데 자동차 불빛이 탁 꺼지더니 조금 후에 아주 뚱뚱해 보이는 사람이 차에서 내리더라구요. 이상하다는 건 바로 이건데 택시 대가리에 별 모양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거든요. 차는 틀림없이 영업용이고요. 근데 차에서 내린 사람이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아파트 쪽으로 걸어들어갔단 말이에요. 술도 안 마시고 성큼성큼 걸어 가길래 '제길 술도 안 처먹고 가니 샷타나 내려야지' 하면서 문을 닫았는데요. 가만 생각해 보니 웃겨요. 아 돈 주고 타는 택시를 왜 아파트 앞에서 세워서 걸어갔나 하구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차를 타고 아파트 앞마당까지 가지 않고 아파트 밖에서 차를 세워서 걸어들어갔다는 말씀이죠."
"그럼요. 이 앞길이 외길 아닙니까? 아파트가 끝인데 더 갈 데 있나요. 보나마나 아파트로 간 거죠."
12시가 한참 지났다니까 12시 20, 30분 정도? 영업용 승용차에서 내려서 신아 아파트를 향해 걸어들어간 사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그는 왜 차를 아파트 마당까지 몰고 가서 내리지 않고 문 밖에서 내려서 걸어들어 갔을까. 어젯밤 진남포를 습격한 장본인 일까. 어쨌거나 진남포가 습격당하기 전 이 근처에 나타난 사람을 목격한 최초의 사람은 이 갈매기 주점 주모로 밝혀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마을 구조로 보아 이 아파트는 이곳이 종점이 되는 셈이다. 아파트 뒷 공터는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버려진 채 그대로 있었고 가옥들은 한 채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별다른 소리를 못 들었다니 아무래도 마을 한가운데서 당한 게 아니라 후미진 뒷 공터나 그 근처에서 당한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여기서 부딪쳤다. 아무리 뒷 공터를 둘러보아도 사람이 머리를 식히고 거닐 만한 장소는 없었다.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져 있었고 마른 풀더미가 함부로 널려 있는 빈 공터. 과연 이런 곳을 바람을 쐬러 거닐 만한 곳으로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 공터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아파트 경비실을 다시 둘러 확인해 보았지만 실망만 더했을 뿐이었다.
12시가 넘어 이 아파트로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었기 때문에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이 마당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절대 사람들 눈에 뜨일 염려는 없다. 그런 가정을 해본다 해도 진남포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것을 예측하고 숨어 기다린단 말인가. 그 사람이 택시에서 내려 숨어 있었을 것이다는 추측은 타당성은 있지만 논리에는 부족 한 점이 많았다.
핏자국은 아파트 정문에서 4,5m전방 즉 공터나 입구 도로 주변에서부터 발견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공터에는 마른풀이 널려 있어 발자국을 찾는 것은 더더욱이나 불가능했다.
갈매기 주점이 문을 닫은 후에 돌아다녔을 불량배가 없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갈매기 주점이 문을 닫은 게 12시 30분쯤일 것으로 가정하고 진남포가 습격당한 게 12시 50분부터 새벽 1시 10분 사이라면 그 시간의 간격은 불과 20여 분밖에 되지 않았다.
진남포가 12시 50분에 아파트를 나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게 1시 10분이니까 꼭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인데 그는 왜 괴한을 보고 소리 지르거나 사람들의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또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최찬일은 찬바람이 옷소매로 파고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터에 서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침착하고 노련한 그의 태도였다.
"최 형사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
"글쎄요, 저도 아까부터 생각중인데 이거 좀 묘한 데가 있어요."
"그렇지요?"
"네,"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닫았다. 마포서에서 나온 김 형사가 생각 끝에 의견을 제시해 왔다.
"제 생각에는요."
"네."
"만일 진남포가 말입니다. 이건 순 제 생각입니다만. 만일 진남포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근처를 걷고 있을 때 불량배가 아닌, 저희들이 생각하는 진남포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면 말이죠."
"그래서요?"
"만약 그랬다면 이 괴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위협을 하고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다면 조용했겠죠? 그리고 칼로 순식간에 긋고 도망 쳤다면 진남포가 소리 지를 여유가 없었겠죠."
"그도 좋은 착상이긴 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미리 진남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상황이 묘하지 않습니까? 진남포는 일찌감치 나와서 경비원에게 간식을 주면서 같이 놀다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불특정 시간에 나온 그를 미리 알고 밖에서 기다린다는 게 영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 생각은요... 에, 그게 좀."
다시 생각에 잠기던 최찬일은 생각을 굳히려는 듯 다물었던 입을 한참 만에 열었다.
"그 가정은 이런 상황 외에는 더 추측할 수 없습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발적인 사고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던 불량배가 갑자기 나타나서 칼을 휘두를 이유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고 봅니다. 시비가 붙어도 한참 붙죠. 특히 한국 사람이 싸우는 시간보다 워밍업 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려요. 처음에는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며 말 싸움으로 한 시간 보내죠. 말 싸움 끝에 흥분해서 주먹이 오고 가거든요. 아무리 시대가 스피드하게 바뀌었다 해도 이런 동양 대륙적 특성은 안 바뀝니다. 영화를 봐도 그래요."
영화에 도통한 최찬일다운 발상이었다, 그랬다. 영화를 봐도 그렇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 아니면 미국같이 개척의 수난을 겪은 민족은 싸움을 해도 질질 끌지 않는다. 시비가 붙으면 막바로 결투가 시작되고 결투가 시작되면 이내 끝장이 나고 만다, 서부 영화를 보면 이러쿵 저러쿵 말 싸움 할 틈이 없다. 상대가 적이다 하는 판단이 내려지면 주먹부터 올라가든가 정당하게 권총으로 대결하여 끝을 본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결투를 보면 우선 싸울 장소를 정해 놓고 증인을 세워 결투를 벌여 죽을 때까지 싸운다.
그러나 중국 영화를 보면 싸움의 양상이 자못 다르다. 적을 만나면 우선 쑤알라 대며 시비를 가린다, 지리할 만큼 떠들어댄 다음 칼 싸움이나 주먹 싸움을 벌인다. 싸우면서도 계속 떠들어댄다. 우리 나라 싸움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말로써 시비를 건다. 그리고 주위에서 싸움을 말리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이 끝나도 깨끗하게 헤어지는 법이 없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이번에는 주위 사람에게 상대방을 맹렬히 비난한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싸움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강도질을 하기 위해 습격하는 방법 외에 시비가 붙어 벌이는 싸움은 이 범주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기를 마시러 밖으로 나온 사람에게 무엇을 빼앗을 게 있어 습격한단 말인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치뤄진 이 습격에서 최찬일이 생각한 경우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진남포가 당한 습격은 계획적인게 틀림없습니다. 내가 상상한 경우는 이런 거죠. 즉 이러한 경우는 전화 연락이 가능케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 아니면 만나야 한다. 몇 시까지 어디로 나와라 하고 지시하는 경우죠. 물론 진남포가 아는 사람일 것이고 만나려는 이유가 충분하겠죠. 시 간을 맞춰서 경비실에서 나오고 잠깐 쉬었다가 바람 쐬러 간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낸 사람은 칼로 긋고 도망하는 경우죠. 생각해 보세요. 진남포가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또 경비원과 놀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표정이 무척 밝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이 제 추측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거야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겠죠. 이제부터 우리는 진남포의 주변 사람이나 단서를 찾아야 합니다. 독신으로 반평생을 보낸 진남포 주변에 어떤 인물이 있는지는 캄캄합니다. 그러나 찾아야죠. 아마 진남포 자신도 쉽게 털어놓진 않을 겁니다. 자, 일단 방송국으로 갑시다. 더 늦기 전에 찾아내야죠."
둘은 그곳을 떠나 S-TV로 방향을 돌렸다. 제작 담당 이성구 이사를 찾아갔다. 이성구 이사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오후 내내 박문호 형사에게 시달리고 그가 돌아가자마자 Q신문 민 기자가 또와서 시간을 뺏아갔다. 다른 신문 기자도 번이나 왔다간데다 숨좀 돌릴 만하자 최찬일이 만나자고 덤볐으니 짜증이 날만도 했다. 제작 방향도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자 그만 외출했다는 핑계를 대고 따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냥 호락호락 물러갈 최찬일도 아니었고 무조건 피하고만 다닐 방송국 입장도 못되었다.
이성구 이사 대타로 들어선 사람은 지대로 실장이었다. 그러나 지대로 실장이라고 해서 더 달리 뾰족한 단서가 나올 리도 없었다. 진남포는 사건이 나던 날 잊고 온 대본을 찾으러 방송국에 잠깐 들렀고 고강진과 이화영이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밖으로 5시경 나갔다. 누구와 다툰 일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이사 대타로 나온 지대로 실장도 몹시 지쳐 있었다.
두 사람의 탤런트가 갑자기 빠져 버린 데다가 이화영까지 증발되었고 종일 신경쓸일만 생기니 골치가 다 아파왔다.
"미안합니다. 한 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좀 도와주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진남포 씨가 들렀을 때 유난히 기뻐하거나 들떠 있는 표정은 아니었습니까?"
"그런 눈치는 전혀 없었습니다. 평범했습니다. 진남포 씨가 대본을, 들고 나가며 '실장님 오늘 내일은 일이 없어서 집에서 대본 연습이나 하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수고하세요' 하며 나갔거든요. 이화영과 고강진 싸우던 날이긴 했지만 얼굴에 다른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진남포와 고강진 사이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뭐... 고강진이 진남포를 썩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진남포가 서둘러 나갔는지도 모르겠군요. 고강진이 너무 깔끔한 척해서 사람들이 주위에 잘 붙어 있지 않는 게 흠집이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여하튼 진남포가 방송국을 나간 이후로 여기서는 누구도 그를 본 일이 없다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이 방송국에서 거기 까지 두 시간에... 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중얼거리던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갑자기 말을 중단시키고 김 형사와 함께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김 형사님, 오늘 수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몇군데 들러 볼테니 여기서 오늘은 헤어지죠. 정말 오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김 형사를 되돌려 보낸 최 형사는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그는 무엇인가 아직 자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그 무엇을 감지하고 있었다. 가까운 다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조각처럼 굳어진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그 의문은 손끝에 감촉이 닿을 듯 닿을 듯 멀어지는 그 의문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을 향해 막 뛰어나가려는데 뒤에서 급하게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여보세요... 선생님."
깜짝 놀라 뒤돌아본 그는 그만 아차 싶었다. 생각에 골똘하느라고 그만 찻값을 치르는 것을 깜박했던 것이다. 계산을 급하게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를 나올 때 진남포는 분명히 대본을 빠뜨리고 나와서 가지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고강진과 이화영의 싸움이 거의 끝나갈무렵 방송국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가 방송국을 나온 시간은 오후 5시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경비원의 말을 빌리면 그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오후 7시경이라고 했으니 그가 방송국에서 아파트로 돌아오기까지의 두 시간은 공백으로 떠있는 상태가 되었다. 마포에서 방송국까지는 아무리 줄잡아도 자동차로 10분 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나올 때도 지 실장에게 '집에 가서 대본 연습이나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그 후 두 시간이나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두 시간 동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사건 당일 그의 행적 가운데서 가장 진공 상태로 빠진 것은 5시부터 7시까지의 두 시간이었다. 최찬일을 지금부터 그가 두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또 누구와 만났는지를 알아보아야 했다. 방송국 사람들과는 다섯 시에 헤어졌다니 그쪽 사람들에게서는 더 알아 볼 일이 없다. 탤런트실 외에 그가 갈 만한 곳은 배우 협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면 그곳 사람들도 거의가 퇴근할 무렵이다. 또 설혹 그가 배우 협회를 들른다고 해도 대본 연습이 바쁘다고 했으니 오래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의 사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 그리고 그가 만나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한 사람, 대본 연습보다 더 중요한 일을 보아야 할 장소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최찬일이 그 장소와 사람을 점찍고 찾아간 곳은 종로 변화가였다.
최 형사가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이성구 이사는 지대로 실장을 불렀다. 중요 간부도 몇 명 모여 있었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눈을 감고 있던 이 이사가 일어났다.
"오늘 사장님으로부터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첩을 꺼내 뒤적이더니 사장의 지시 사항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사장님 지시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메모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화영 증발 소동을 관리 부서에서 신속히 조사할것. 둘째, 경찰이나 언론 기관에 사내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적극 보안할 것. 셋째, 고강진의 자리를 메울 대타를 신속히 선정할것. 단신인 발굴에도 최선을 다할 것. 넷째, 이번 사건을 게기로 전속 연예인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파악할 것. 이상 네 가지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세번째 사항 중 '흥남 철수 작전'의 주인공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내일 중역 회의를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내일부터 즉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네번째 사항은 아주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특히 요정 출입이나 대마초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사람은 가차없이 조처하겠답니다."
할 말이 있으면 이때 하라는 식으로 이 이사는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지대로 실장만 남고 모두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는 사장님 지시 사항 전달로 간단히 끝났다. 이 이사는 지대로 실장만 남겨놓고 모두 돌려 보냈다.
"탤런트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뭐 말이 아닙니다. 그보담두 오늘 나가야 할 '쇼는 즐거워' 사회자 두 명이 모두 펑크가 나서 못 내보냈습니다. 그게 토요일 다섯 시부터 방송되는 프론데 그쪽에서 무슨 보고 없었습니까? "
"아까 보고받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쇼는 즐거워'가 50분프로거든요. 그래서 그 시간에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특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거 해마다 연말쯤이면 꼭 한 건씩 터져 아주 죽겠습니다. 작년에도 대마초로 '김민자'가 없어지는 바람에 얼마나 애먹었습니까... 그런데 경찰측에서는 뭐라고 합디까?"
다리를 아예 책상에 올려 놓고 머리를 의자 뒤로 젖히고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지 실장을 바라보았다.
"뭐 그 얘기가 그 얘기였습니다."
이 이사는 아까부터 뭔가 말하려는 핵심을 자꾸만 피하는 것 같았다. 뭔가 좋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는 눈치였다.
"지 실장님, 저 좀 어려운 부탁이..."
"아, 말씀하시죠. 제게 무슨..."
"저 다름 아니라...사실은 이번에 Q신문에서 은밀히 조사하고 있는 어떤 사건을 입수했습니다. 사실 지금 탤런트 몇 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데 그 중엔 중견도 몇명 끼여 있습니다."
"블랙리스트라뇨?"
"일부 탤런트들이 탈선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 방송국에도 여자가 세 명 남자가 두 명이나 됩니다. 우리 방송국뿐만은 아니지만 지금 사건도 그렇고 해서 철저히 조사해서 아주 뿌리를 뽑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누굽니까?"
"신화일하고 지금 입원하고 있는 진남포 두 사람입니다."
"진남포가요?"
지대로 실장은 깜짝 놀랐다. 여자 탤런트가 요정이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탤런트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은 종종 있어온 일이었다.
그런데 남자 탤런트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금시 초문이었다.
더구나 진남포가 끼여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남도 아닌데다가 유명한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별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 그가 탈선 행위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화일은 어떤 내용이고 진남포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신화일, 그거 햇병아리가 얼굴 좀 반지르르하다고 벌써부터 얼굴값하고 다녀요. 돈 많은 유부녀 후리고 다니는 모양인데 잘 좀 알아봐요. 엉터리 제보인지도 모르니까요. 삼청동 근처 모 요정에서 누구와 어울리는걸 본 사람도 있다는데. 그리고 진남포는 너무 확실해요. 지금 입원하고 있는 판국에 뒷조사 한다는게 미안하긴 하지만 실장님이 좀 확인 좀 해보시고 그게 사실이라면 퇴원하는 대로 조치하십시오."
"대개 어떤 종류입니까? 제 생각엔..."
"지 실장두 진남포 사생활이 어떤지 좀 아십니까?"
"글쎄요,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게 없어요. 여기 온지도 얼마 안되고..."
"잘못하다가는 우리 방송국 전속 탤런트 때문에 큰 망신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니죠. 이제 망신은 시작된 거나 다름없죠. 고강진 사건이나 이화영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까? 나 참. 그런데 이제 진남포까지 한몫 거들어대니 나 기가 막혀서 이봐요. 지실장님. 아 글쎄 진남포가 유한 마담 전문 안마사로 돌아다닌다지 뭡니까. 한두 군데서만 들었어도 믿지 않을 텐데 이건 뭐 사방에서..."
"아니 진남포가 안마를 하러 다닌다구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그것도 요즈음은 아주 종로에 있는 안마시술소에 대놓고 다닌다니 나 참 기가 막혀. 그러고돌아다니니 그런 꼴 당하고 있지."
지 실장으로서는 정말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그의 생활이 곤궁한것은 대략 알고 있었다. 액션 영화 퇴조로 영화가에서 잠적해 있다가 나타났을 때 그의 생활 수준은 금세 알아볼 만했다.
그러나 그가 안마소에 다니며 유한 마담을 상대로 안마를 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얼굴 가지고는 그런 직업을 택할 수가 없으리라는 판단이 앞섰다.
그러나 이 이사의 태도나 말투로 보아서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사건의 실마리는 이 이사나 지 실장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 희한한 장소에 드나드는 돈푼깨나 흘리고 다니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놀다가는 여자라면 사생활이 깨끗할 리 없다. 둘이 상상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여자들에게 돈을 뜯으려고 협박하거나 공갈치다가 오히려 그쪽에서 깡패를 동원해서 선수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결국 그의 생활이 궁핍하다든가 그가 안마시술소에 드나든다든가 또 집 앞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한 게 다 하나로 엮어지는 얘기죠. 문제는 우리 회사가 얼마나 크게 망신을 당하느냐 이것만이 남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내 속이 안 타겠습니까? 보나마나 이화영, 고강진 그것들 당한 것도 다 그렇고 그런 내막이 있을 겁니다. 지 실장님 진남포 건은 오늘 당장 알아봐서 내일까지 보고하라는 사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어려우시지만 오늘 좀 뛰어 보시고 내일 보고해 주십시오. 이화영이도 지금 있을 만한 곳을 수배해 놓았습니다. 세상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물을 흐려 놓는다더니 되지도 못한 것들이..."
"알겠습니다. 오늘 뛰어다녀 보고 내일 결과를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사실을 나온 지 실장은 곧바로 시내로 나왔다. 날은 벌써 많이 어두워졌다.
그가 찾아다닐 범위는 종로 1가부터 3가까지가 고작이었다. 4, 5, 6가는 그런 사치스러운 장소가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진남포가 자주 드나든다는 안마시술소를 찾아 나서긴 했지만 지 실장은 아무래도 이 이사가 잘못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첫째, 약간은 기형적이기도 한 그의 얼굴 생김생김부터가 어울리지 않았고,
둘째는 그의 평소 성품이나 행동이 그런 짓을 하기에는 썩 어울리지가 않았다. 진남포, 비록 3류 탤런트이긴 했지만 한때는 그래도 날리던 액션 배우였다. 그가 한때를 풍미하던 씨름꾼이라는 것도, 남포동 뒷골목에서 어깨에 힘주던 뒷골목 사내라는 것도 지 실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무대에서 인기 없는 연극 배우로 뛸 무렵 그는 비록 조연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팔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예계 생리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표면으로 나타난 화려함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실생활은 의외로 형편없는 사람이 많았다. 진남포도 연예계에 데뷔해서는 오히려 헤플 수밖에 없었다. 벌기는 잘했지만 관리가 소홀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의 이상한 성격이 또 그에게 약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착할 수가 없었다. 특히 신체적 부자유, 정신 박약 같은 선천성 불구자에게는 더없이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돈도 아끼지 않고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의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이 생기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난폭해졌다.
내가 언제 착하던 진남포냐 싶게 호랑이 같은 성격으로 돌변해서마치 남포동 뒷골목처럼 휩쓸고 다녔다. 그나마 연예인이란 딱지만 없었어도 더 많은 수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타격은 그런 사소한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타격은 삽시간에 외면당한 액션 영화의 영향이었다.
개인적인 인기가 떨어져도 수입에 당장 타격이 오는 연예계에서 영화 자체의 판도가 바뀌니 그 생활 정도는 쉽사리 추측할 만했다.
액션 영화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소위 국산 영화의 칼라화 개발과 대형 스크린 도입에서부터였다,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총천연색 영화에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이 극장 곳곳에 설치되자 제작자들은 앞을 다투어 사극 영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극은 의상, 배경부터가 화려한 분위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궁귈, 대왕, 장군으로부터 왕비 궁녀에 이르기까지 그 의상의 호화로움이란 시청자들의 시각적 효과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극 영화에 정식으로 불을 당긴 것은 신상옥 감독의 '성 춘향' 과 홍성기 감독의 '대 춘향전' 대결에서부터였다. '성 춘향'이 당시 인기 절정의 최은희를 내세워 공전의 대히트를 치자 각 영화사에서는 앞을 다투어 사극 제작에 열을 올렸고 액션 영화는 언제냐 싶게 퇴조해 버린 것이다, 진남포의 얼굴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 후 한동안 유행하던 여름철 납량물 괴기 영화에 드문드문 모습을 나타내긴 했지만 최근 7, 8년 간은 전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기회란 일생에 몇 번은 있는 것이어서 그를 필요로 하는 일터가 생긴 것이었다. 소위 국책 영화인 전쟁 드라마와 범죄 수사용 추리물이 성행하게 되자 제작자들이 찾아낸게 바로 옛날 액션 배우 였던 진남포였다. S-TV에서 출연 교섭이 오자 웬 떡이냐 싶게 선뜻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지 실장이 이 이사의 의견에 선뜻 동조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발자취였다. 비록 생활은 곤궁했지만 그의 굵은 성격이나 생활 태도가 그를 그토록 타락시키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가 재기의 발판을 이제 막 굳히려는 시점에 서서 돈 몇 푼 벌자고 그 따위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로 1, 2, 3가에는 안마시술소가 모두 여섯 개 있었다. 서너 군데를 돌았지만 결과는 지 실장의 추측대로였다.
안마시술소의 안마사들은 80%가 여자였고 나머지가 남자였다.
이들도 그냥 안마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격증을 얻어야 비로소 취업이 가능했다. 보사부 장관의 허가를 얻은 자격자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섯 군데까지 둘러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일하고 있는 곳은 없다고 했다.
벌써 밤 10시가 가까왔다. 이제 남은 곳은 마지막 한 곳밖에 없었다.
현관에는 '대광 안마시술소'라는 간판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다.
지 실장은 안마시술소 앞에서 한참이나 망설이고 서 있다가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건물로 모습을 감추고 있을때 그의 뒤에는 검은 가죽잠바를 입은 사람이 그림자 속에 숨어서 하나 하나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 실장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한참을 서 있던 가죽잠바의 남자가 뒤따라 들어갔다.
안마시술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지 실장은 의외로 시설이 화려한데 놀라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며 서 있는데 예쁜 옷을 차려 입은 여인이 나타나서 안내를 했다.
"제일 조용한 방을 좀 줘요."
"걱정 마세요.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방이든지 다 조용하니까요."
앞장서서 걷던 여인은 2층 제일 구석진 방문을 열고 지 실장을 들여보냈다. 방 안에는 칼라 TV와 화장대, 그리고 룸 히타가 설치되어 있었다. 방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화장대 위에는 남성용 화장품과 머리빗이 진열되어 있었다.
지 실장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아가씨가 방 구석에 얌전히 개어져 있는 이불 위에서 샤워용 가운을 집어 주며 입으라고 건네 주었다.
"아저씨 가운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지하실로 가셔서 샤워하셔야죠"
"그러지..."
"아이, 옷 갈아입으시라니까요."
방에까지 따라 들어온 아가씨는 지 실장에게 가운을 갈아입도록 독촉하면서도 전혀 나가려는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지 실장은 당황했다.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그로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서를 못찾고 있었다.
"어머, 아저씨 이런 데 처음인가 봐요. 제가 옷 갈아입혀 드릴까요?"
하며 넥타이를 풀어 주고 와이셔츠 단추에 손을 대려 했다.
지 실장 이 깜짝 놀라 손을 밀어치려 하자 이 여인이 지 실장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근데 아저씨 어디서 많이 본것 같아요. 혹시 탤런트 아니세요. 그렇죠? 히히 이 집에 배우 사태나겠네..."
하며 키득거렸다. 지 실장은 이 소리에 깜짝 놀랐다. 배우 사태라니 그럼 지금 여기 누가 또 왔다는 말인가?
그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자 여인이 옆에서 히죽거리며 계속 얼굴을 뜯어보았다.
"저 아가씨 여기 좀 앉지."
지 실장은 여인을 앉히고는 주머니에서 만 원권 지폐 두장을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진남포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지 실장은 이곳이 마지막 안마소임을 알고는 큰 마음먹고 손님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자기 말고 또 다른 배우가 있다는 말에 얼핏 진남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인은 서슴없이 돈을 받아 쥐고 그를 또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저씨 샤워하시고 안마하시고 그리고 이 방 담당을 찾으세요. 그럼 제가 올라와서 재미있게 놀아 드릴께요."
"아냐 아냐. 그게 아니구 지금 뭐라고 그랬지? 여기 배우 사태났다고 했지."
"걱정 마세요. 오늘은 아저씨 혼자니까."
"그럼 누가 또 단골로 찾아오나?"
"아녜요, 단골이 아니구요. 여기 오는 배우는..."
여인이 지 실장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여인이 벌떡 일어나 문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하고 묻자 잠시 조용했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경찰요?"
깜짝 놀란 여인이
"누구세요?"
하고 다시 묻자
"경찰에서 왔습니다."
"경찰요?"
깜짝 놀란 여인은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채우며 방문을 열었다.
놀란 것은 여인뿐만 아니었다. 안마소에 찾아온게 뭐 잘못된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이런 시간에 경찰이 노크를 하며 찾아왔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편, 다방을 뛰쳐나온 최찬일 형사도 종로 일대 안마시술소를 뒤지고 있었다. 진남포의 여동생이 장님인데다가 직장이 종로라고 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 장님이 직장을 가질 만한 곳은 안마시술소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몇 군데 둘러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가 여기저기 다니며 찾다가 '대광 안마시술소'에까지 찾아온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는 안마소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지대로 실장을 본 것이었다. 최찬일 형사는 이상한 예감이 떠올랐다.
평소에 진남포의 사생활을 알 만한 사람, 그리고 방송국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공백 두 시간을 메웠으리라고 판단한 사람은 진남포의 여동생이었다. 그 추측대로 찾아오다 보니 이곳까지 온것인데 안마소 앞에서 선뜻 들어가지도 않고 서성거리고 있다가 들어가는 지 실장을 본 최찬일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왜 지 실장이 이곳까지 왔는가 하는 점이 궁금했다. 그의 태도로 보아 이 장소에는 진남포의 여동생이 있는게 분명했고 또 둘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최찬일은 하나의 추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진남포나 고강진 사이에 S-TV 가 개입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직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S - TV자체에서 이 밤중에 진남포 여동생을 찾도록 지 실장을 은밀히 파견해 보냈다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내막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 내막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S-TV 자체에서 이 사건을 계획한 것이라면 내부의 갈등이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에게 신원을 밝히고 확인한 바, 진남포의 여동생이 여기서 일하고 있는 게 분명해졌고 여길 찾아온 지 실장은 2층에 막 입실했음을 알아냈다. 최찬일은 종업원을 앞세워 지 실장이 입실한 209호 방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 실장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지금 저 목소리의 여인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일까 아니면 진남포의 여동생일까. 잔뜩긴장해서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신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