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순교자들 발자취를 찾다 (1) 서울 도림동성당
“육신은 죽여도 내 영혼은 빼앗을 수 없다”
올해로 발발 70주년을 맞는 한국전쟁. 우리 민족의 수난이자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걸어 온 교회사에서도 큰 고통의 시간이었다. 종교를 박해하던 공산군의 총과 칼은 신자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그 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이 났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하느님의 종 신재순 아우구스티노 제외)가 그들이다. 한국전쟁 전후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이북 땅에서 순교해 그 순교지를 찾아가 볼 수 없지만, 이남에도 한국전쟁 순교자들이 순교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순교지들을 찾아 그들의 삶과 신앙을 기억해 본다.
두 순교자를 위한 순교기념관
서울 도림동성당. 성당 옆에는 연면적 101㎡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의 가장 위에 올라 있는 십자가가 이곳이 경당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경당에 가까이 다가가니 건물의 이름이 보였다. ‘이현종 신부·서봉구 형제 순교기념관’. 이곳이 바로 한국전쟁 당시 하느님의 종 이현종(야고보) 신부와 하느님의 종 서봉구(마리노)의 순교지다.
- ‘이현종 신부 · 서봉구 형제 순교기념관’ 내 경당에 자리한 하느님의 종 이현종 신부 조각상. 이 신부는 총을 겨누는 공산군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하느님의 사제임을 고백했다.
순교기념관의 외관은 두 순교자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푸른 돔과 두 순교자가 흘린 순교의 피를 표현하는 붉은 기와로 꾸며졌다. 기념관 내부에는 제대와 독서대, 그리고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12사도를 상징하는 색색의 유리화는 새하얀 벽과 어울려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따듯함이 느껴지는 이 공간은 소규모의 혼인성사를 원하는 이들이나 가족미사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경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어쩐지 하느님의 종 이 신부의 따듯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1950년 4월 15일 사제품을 받은 이 신부는 이곳 도림동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해곡리의 ‘별미’라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이 신부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삼촌과 큰고모, 작은 고모들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 신부는 어려서부터 복사를 서며 성소의 길을 꿈꿔 왔다. 이 신부와 신학교에서 함께 생활한 동창신부들은 이 신부가 자상하고 주변사람들의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처럼 여겼다고 기억한다. 본당에서도 이 신부는 명랑하면서도 다정다감했다. 청년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특히 어린이들이 이 신부를 잘 따랐다.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박일규 신부에게도 많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 두 순교자의 순교 당시 성당에 걸려있던 종. 하느님의 종 서봉구는 순교하던 그 날까지 이 종을 울렸다.
경당 제대 옆에 낡은 종이 전시돼 있었다. 바로 하느님의 종 서봉구가 순교하던 그날까지, 9년의 세월을 타종하던 그 종이다. 서 형제도 이 신부처럼 부모 없이 자랐다. 풍수원본당의 정규하 신부가 데려와 본당의 보육원에서 성장한 그는 성당이 곧 집이었다. 서 형제는 정원진 신부가 도림동본당에 부임하자 정 신부를 따라 도림동본당에 왔고, 줄곧 종지기와 복사로 일했다.
하느님의 사제, 하느님의 일꾼
순교기념관에 전시된 순교자들의 유품을 둘러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두 순교자의 순교터가 나타났다. 이곳은 두 순교자가 순교한 곳이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매장 됐던 자리다. 두 순교자는 전쟁의 긴박한 상황 중에서 공산군의 총부리 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사제임을, 그리고 하느님의 일꾼임을 밝히고 순교했다.
1950년 6월 28일에는 이미 도림동본당 관할 지역은 공산군에 의해 점령됐다. 본당 사제와 신자들은 공산군의 박해를 피해 현재 의왕 하우현본당으로 피난을 갔다. 공산군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이현종 신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고 온 성당과 아직 성당 인근에 남아 있는 신자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이 신부가 성당으로 돌아가 본당을 지키고 신자들을 돌볼 결심을 하자, 당시 본당 주임이었던 박 신부는 좀 더 정세를 보고 가자고 만류했지만, 이 신부의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성당에 돌아온 이 신부는 인근의 신자들을 방문하며 병자성사 등을 집전했고, 서봉구 형제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당을 지켰다. 7월 3일 순교하던 그 날도 두 하느님의 종은 평소처럼 미사를 드리고 성당과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종교를 탄압하던 공산군은 성당을 찾아와 기물을 빼앗고 이 신부의 옷과 신발마저 가져가곤 했다. 언제든 생명까지도 빼앗길 위험 속에 있었지만, 이 신부는 그날도 흐트러짐 없이 로만칼라에 수단을 입고 성무일도를 손에 들고 사제관을 나서고 있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의 신부요.”
- 서울 도림동성당 마당에 설치된 이현종 신부 동상.
성당에 나타난 30여 명의 공산군이 위협적으로 묻자 이 신부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은 “너는 인민의 착취자가 아니냐”며 총을 쐈다. 이 신부는 총탄을 맞고 쓰러진 중에도 공산군을 향해 “당신들이 내 육신을 죽일 수 있어도 내 영혼까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공산군은 다시 총을 난사했다.
그때 총소리를 들은 서 형제가 뛰어 나오자 공산군은 다시 물었다.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나는 이 성당의 일꾼이오.”
공산군은 그 대답을 듣자마자 총을 쏴 즉사시키고 돌아갔다. 총에 맞아 쓰러진 두 사람을 근처의 신자들이 발견했을 때 이 신부의 의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신자들이 이 신부를 돌보려 하자 이 신부는 “사람들이 죽은 나의 모습을 보면 좋지 않으니, 얼굴을 닦아 달라”고 부탁하고 죽어 가는 중에도 “서 마리노가 죽었으니 그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신부와 서 형제는 순교터에 가매장했다가 1953년 10월 이 신부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묘지로, 서 형제의 유해는 광명리 본당 묘지로 이장했다.
두 순교자는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할 수 있었을까. 경당 내 이 신부 조각상의 시선이 그 답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 신부가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그 끝에는 밝게 빛나는 십자가가 있었다.
- 순교기념관 외관. 두 순교자의 성모님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푸른 돔과 두 순교자가 흘린 순교의 피를 표현하는 붉은 기와로 꾸며졌다.
[가톨릭신문, 2020년 9월 6일, 이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