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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를 호위해 준 이스라엘 군인들>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으로 호위하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갔다.
눈앞에 요단강이 손에 잡힐듯 다가 온다.
건너편에 요르단의 군인들이 역시 총으로 무장한 채 약간 놀란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저기 예전에 있었던 기념 교회 터며 세례를 위한 나무로 만든
구조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이스라엘 여군이 군용 짚에서 내려 조심스레 앞을 경계하며 인도했다.
그녀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앞에 작은 강이 나타났다.
드디어 요단강이다.
오랜 가뭄으로 상상보다도 훨씬 그 강폭은 작았지만 그것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곳인 것이다.
여리고에 인접한 요단은 세상에서 가장 낮게 흐르는 강이다.
세상의 해수면(海水面)보다 무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가장 낮고 낮은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상징이다.
내가 이토록 다른 무수한 성지들 보다 이 장소를 와보고 싶어한 것은
여기서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이 그 위에 강림하시자
그 하나님 나라의 여정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그 여정은 우리를 위한 모델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8:29
<건너편 요르단 국경 안의 세례 기념교회가 보인다>
뒤늦게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행1:8)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인가를 구했었다.
거의 날마다, 하루에도 수십번을 구했었다.
성령님이 내게 오시고 그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 증인으로 사는
삶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때 열어 주신 말씀이다.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함이다.
'아아...이것이 나의 증인 됨...부르심이구나!
이 놀랍고 엄청난 삶을 위해 나를 부르셨구나!'
내 안에 이런 감격과 전율이 절로 솟아났다.
그전에 추상적으로 읽혀지던 그것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만져지는 것이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토록 엄청나다.
'망하게 하는 자'인 마귀가 우리의 눈을 가리워서 보지 못할 뿐,
우리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그 걸어 가신 길과 삶을 닮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14:1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본(本)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과연 우리가 성령님을 '진리의 영'으로서 사모하여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그전에 그저 문자로서 읽혀지던 이 말씀들이 내 영안에서 환히 반응하게 된 것이다.
나의 부르심은 이제 명확하여 졌다.
이제 더 이상 그것으로의 고민은 사라졌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하여,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그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내게 능력의 기름부음이던지!
예수님을 닮아 그 가신 자취, 그 본질적 형상에 이르기를 힘쓰며 사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단 한가지...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형상을 내 안에..내 삶에 채우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나며 흥분되는 천국의 삶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무엇을 찾아서
늘 허덕이는 것은 아닌지요?"
그후 나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고민하는 무수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예 나 자신부터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들의 시초부터 다 닯고자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베들헤헴의 탄생부터 마지막까지 그 가신 길들을 말씀 속에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작된 공생애의 여정을 깊이 주목하며 살폈다.
그것에서 내 공생애의 길들을 조망(照望) 받고자 함이다.
주님이 사신 그 천국의 본질을 나도 닮고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단강에 인접해 있는 요르단 평원>
2006년 즈음의 일이다.
그것이 나의 작은 부흥의 시작이었다.
진리의 성령님께 지도를 구하며 가던 길에서 나는 그전에 보지 못했던,
전율하도록 깊고 치열하며 아름다운 예수님의 진실과 풍경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나는 이 삶을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풍경'....
세상의 가장 남루하고 버려지고 절망의 극한에 이른 그 삶들 속에서 식사를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풍경...
그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익명'(匿名)의 그리스도...
나는 사무치도록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주님이 숨어 계신다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25:40)들을 찾아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
길섶에서.. 뒷골목에서.. 지하철과 벼랑끝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서고 싶었다.
죄인이요 세례와 같이 친구들을 내 작은 카메라로 사귀고 삶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길을 가고 갈수록 보이는 것은 내 안의 '허위'(虛僞)였다.
멀리 멀리 갔다가 지치고 공허하여진 아이처럼 서러움으로 주님을 구할 때에
예기치도 않은 성령님을 보내어 주셨다.
'위로의 영(靈)'...
그분이 오시자 내 안에 어둠과 기갈과 허무가 사라졌다.
그것이 진정한 '복역(僕役)의 때'를 끝내는 보혜사의 위로였다.
2004년 봄 날의 일이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4:19
이 글을 쓰는 도중 이 말씀을 발견하였다.
주님의 길 위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해산(解産)의 수고...그 진통...그 애통(愛痛)이 요구된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그 헌신이 있어야 만져지는 길이다.
주께서 그렇게 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힘겨움이 있더라도 이제 다시는 이 영광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으리라.
붉은 황혼을 마주한 선지자처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그 역정(歷程)들을 말씀 속에서 찾고 찾으며 나아갔다.
그런 여정 가운데서 다다른 공생애를 열어 준 그 장소...
이 요단강의 세례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오랫동안 집착하여 떠나지 못했다.
아니,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여 주셨다.
'주님을 닮는 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길과 본질을 뒤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열으신 그 공생애의 조건....그것이 내 안에 있어야
나도 진정으로 그 시작을 살 수 있으리라'
'공생애의 조건'....
잠잠한 생각 속에 튀어나온 그 말이 거대한 저작(著作)의 주제처럼 온통 나를 사로잡았다.
공생애(公生涯)....
나즈막히 이 단어를 읊조리는데 내 심장에 붉은 피처럼 선연히 스며오는
말씀이 하나 있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5:14)라고 선언한 후에
이 삶을 말하고 있다.
공생애란, 주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온 생(生)을 다 드려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사랑처럼, 그 사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처음 창조처럼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게 내 심비(心碑)에
'불의 정(鋌)'으로서 새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부여하신 그 공생에를 살리라!'
압도하는 영처럼 그것이 내 안에 부어졌다.
오직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위하여 사신 주님의 그 사랑의 강권함이 내 안에 출렁이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사랑이 임하자 내 안에 깊은 회개가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영혼의 자책이 일어난 것이다.
그 전에는 그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추구하고 치달으면 된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을 열망이나 욕구를, 공허한 무엇을 메꾸기 위한,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추구는 아닌가?' 하는 자문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과 진리앞에서 철저히 살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저 막연히 가다가 이 길 끝에서 겨우 그것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언젠가 당연히 설 주님 앞에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추구한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골수까지 파고드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 때, 이 찬양들이 내 안에서 날마다 솟구쳐 나왔다.
'헛된 마음'....
'정결치 않은 영'...
만일 이것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을 진리와 보혈로서, 불로서 다스려 달라고
성령님께 날마다 구하고 또 구했다.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 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혼자 숲속이며 한 줌 햇살과 작은 새들 밖에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빈터를 찾아
얼마나 이 찬양을 부르며 울고 울었는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숨어 있던 자아의 것들...허망함과 비진리들이... 툭툭 튀어 나오던지...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그 회개의 과정을 통해 성령님은 나를 서서히 변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층 맑아진 영혼으로 정말 예수님을 닮아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신 것이다.
아니, 내 영혼이 비워지자 눈이 열리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基業)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威力)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
추상적으로만 읽히던 이 말씀이 손에 잡히듯 너무나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예 바울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 지게 하기 위하여 드린
이 간구를 내 기도로 차용하였다.
역시 날마다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
그분을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엄청난 유업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위력'(威力)만이 아니라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본향의 풍경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지문처럼 내 안에 새겨지기까지 나는 기도했다.
나는 그 삶을 너무나 갖고 싶었다.
마귀는 이 축복과 안목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다.
에덴의 그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시고
부어 주신 그 생기(生氣)...생육과 번성의 신령한 부요, 그 복을 상실하게 하여
'가난한 자'로 만든, 그 마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의 부르심의 축복과 영광의 언약을 상실하게 하여
패망의 골짜기로 이끌어 간 그 망하게 하는자...
그 간교한 세력들이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눈을 가리어,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허덕이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위한 도움의 수단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런 줄도 모르고 가게 하였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그 열심과 그것의 짜릿한 축복을 상실한 것이다.
나는 결코 그 하늘의 부르심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던 중 이 '공생애'(公生涯)란 말을 한자로 찾다가 매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그 '애'(涯)자가 '물가 애'자라는 것이다.
"물가에서 시작 되는 하늘의 삶..!!"
마치 주님의 그 길을 위하여 조성된 문자인양 그것이 다가왔다.
물가로 나오너라
내 곁에 서라
네 목마른 것을 내가 채우리라
어둠에 헤맬때 흘리던 네 눈물
그 눈물을 위해 내가 죽었노라
20대 초 이리저리 휘청이다가 다시 주 앞에 와서 부르던 그 노래...
그 물가...그 사랑...
아아...나는 그 주님이 서신 물가를 그리워 한 것이다.
그 갈릴리와 그 지류인 이 요단이 너무나 보고 싶어진 것이다.
요단강의 그 세례로 부터 예수님의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고후4:4)의 길이
시작되었다.
그 작은 문자 하나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 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땅을 흐르는 이 작은 요단강...
그 세례터를 ...그 물가를 그리워 하고 서기를 너무나도 꿈꾼 것이다.
5.
<그토록 그리던 요단강에 발을 담근채..>
드디어 신을 벗고 요단강에 첫 발을 내디디었다.
언덕 위에서 총을 가슴에 품듯 움켜진 이스라엘의 여군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황토처럼 탁한 그 물에 맨발을 넣는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시력을 잃을것만 같은 강한 햇빛 때문인가?
순간 눈이 뜨거워지고 그 속에 물기가 서림을 느낄수가 있었다.
비록 가뭄으로 작아지고 좁아 졌지만 내 사랑하는 주님이 이곳에 서셨었다.
그 이유만으로 감격이 솟은 것이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 때 갈릴리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 하셨다(마3:13).
그 길은 지금 차로도 한 참을 가야할 먼 길이다.
당시 수많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으므로 나사렛의 목수인
예수님이 그렇게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선 것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주님을 알아 보았다.
성령께서 증거하신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면 어떻게
당황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3:15
그 때, 주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당시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엔 더럽혀진 것들을 씻는 '정결례'(淨潔禮)가 있었다.
요한의 불같은 심판의 메세지에 회개한 많은 이들이 요단강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 죄인들이 받을 세례를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시려 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님은 남들이 스쳐 지나갈 이 부분을 자꾸 바라보게 하셨다.
'모든 의(義)를 이루기에 합당함...'
예수님의 공생애에 첫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삶과 그 형상을 치밀하게 닮고자 하는 내게 이것은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것을 깊이 알고 싶었다.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의 의미를 열어 주세요."
나는 그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자꾸만 구하였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나는 성령님에 대한 이 말씀을 깊이 사랑하였다.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 말씀의 본질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 깨달음은 내게 혁명이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아이처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작은 영역도 일부러 성령님께 구하려고 하였다.
주변을 보니 나처럼 구하는 이들이 너무나 적음에 놀랐다.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순종치 않음이다.
그것이 우리를 풍요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정말 '의'(義)대하여 가르쳐 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린 그 깊이와 본질은 엄청나고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또한 '주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소유하신 가장 본질적인 천국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늘 주님의 형상을 조명하신다.
또한 성령님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증거하신다(요16:8)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 영적 습관,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걸어가신 걸음 하나 하나가 하늘의 본질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감탄하며 나는 오랫동안 이 요단강가에 서신 주님의 얼굴을
말씀으로 뵈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1,22
예수님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그 의....
그것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나게 하는 그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의'였다.
'모든 의'에 대한 많은 깨달음 중에 먼저 나의 마음을 두드린 것은 이 말씀이다.
참으로 오랫만에 젊은 시절 천착하던 로마서를 다시 깊이 읽게 되었다.
이 '의'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는 바울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래 모든 사람이 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그 길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그 '구원의 길이며 하늘의 방도, 대책'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다.
죄인된 우리지만 무한 무한히 사랑하신다.
그리하여 그 영광이 임재와 사랑 가운데 들어 오기를 너무나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속성은 또한 '공의'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죄악을 가지고는 그 사랑과 영광에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다.
사랑할지라도 그 공의라는 진리의 속성을 위배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모든 것을 어그러지고 질서는 파괴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하나님의 선(善)'은 그분의 본질적 속성과 길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것이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hesed),즉 불변하는 언약적 사랑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인자'와 '긍휼', '은총', '사랑'이시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모든 속성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에 오직 아버지의 그 선하심과 뜻만을 이루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갈망이 나타난다.
요단강의 그 세례는 그저 유대인의 결례를 따르는 요식행위가 아니다.
그 주님의 공생애의 조건, 하나님의 아들이 가야하는 길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직 아버지의 뜻, 그 길, 언약이라는 선(善)에 온 생애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공생애(公生涯)다.
이 예수님을 깊이 영의 눈으로 보아야 나도 그 형상을 닮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그 사랑 가운데 갈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그 공의를 충족시켜 하늘 문을 열 방도를 준비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롬3:24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바로 그 장소..>
아아...
나는 참으로 오랫만이 이 요단강의 풍경 속에서 복음의 본질로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나 익숙하게 알아 오던 이 진리가 강렬한 불이 되어 내 심령을 살랐다.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루시려는 그 의....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심판을 받으시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짐으로 저주를 받아 죽으시겠다는 선언이다.
갑자기 심장이 고동치며 그 사랑이 내게 부어졌다.
주님의 길은 이토록 시작부터 십자가의 길을 내딛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받아야할 세례를 죄없으신 분이 기꺼이 받으시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바울의 장엄한 선언을 읽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3:25,26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그 의는 이토록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래 참으셨다.
당신이 예비하신 그 아들이 와서 그 의를 이루기까지 참고 기다리셨다.
이 요단강의 세례는 그 하나님이 오랜 갈망이 성취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라
마3:17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로 부터 성령님이 임하시고 이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의 그 오랜 갈망, 그 사랑, 그 언약을 이루시려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시다.
이것은 모든 공생애를 내딛는 그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음성이다.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물에 잠그시는 순간...
세례 후에 요한의 입을 통해 증거 되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 되기로 작정하시는 순간이다.
세례를 받으시는 그 순간 주님의 죄인이 되셨다.
나를 사랑하사...나를 위하여...
나의 죄 때문에....
나는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고통이며 사랑인가를 읽어내지 못하였다.
요단강에 더럽고 자아의 땀으로 범벅된 에고(ego)의 신을 벗고 맨발을 집어 넣는 순간,
그 주님의 아픔이 설핏 느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제한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고통...
죄를 뒤집어 쓰시는 그 아픔....
그를 따르는 그 어떤 제자가 그 마음과 통증의 의미를 알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어졌다.
너무나 주님의 그 심정을 만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뜨거운 물기가 심장을 타고 솟구친 것일까?
그 세례터에 서서 어쩌지 못하는 통증으로 나는 울고 있었다.
어린 딸 지우가 곁에 있었으므로 애써 그것을 참아내며....
<힘든 촬영에 지쳐있던 지우도 모처럼 웃었다>
6.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우리가 요단강에서 기도를 하며 촬영하는
지켜 보고 있었다.
건너편 요르단의 군인들도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로
하던 일을 멈추고 지켜 보고 있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약간 조급했다.
깊은 기도도 하지 못하고 촬영을 하였다.
나는 언제 또 올지 몰라 좀 더 깊이 요단강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때, 떠오른 비둘기처럼 내게 임한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5-7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죄를 씻기위해 행해지던 율법의 속죄죄로는 온전히
우리의 죄가 사해지지 않음을 강조한다(히10:1,2)
만일 그렇다면 해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하시기 위하여 다른 '한 몸'을
오랜동안 준비하셨다.
온전히 죄를 씻지 못하는 짐승이 아닌, 우리를 동일하게 대신 속죄(代贖)하는 사람을
예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요단강에 나오셨을 때....
그 언약하신 '한 몸'으로 나아가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에 인류의 모든 죄는 주님께 전가(傳加)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 여리고 근처...아사셀의 산의 제물이다!
주님이 이곳에 나아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내 영이 밝아지며 그것을 외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이 막혀 있는 세례터를 올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 가이드 '우리'를 통해서다.
그런데 그와 가고자 하였던 곳은 바로 '아사셀의 산'이었던 것이다.
그 산은 이 세례터와 더불어 이번 촬영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유대광야에서 가장 높고 험한 곳이라 일반적인 차로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곳에 오기 전날 짚 투어(Jeep Tour)를 하게 된 것이다.
"이곳이 저 여리고 에서 이어진 유대 광야의 정상 이군요!
바로 눈 앞에 요단강과 사해가 있고..."
<아사셀 산 정상에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
그 산에 올라서야 나는 여리고, 요단강, 사해, 예루살렘을 있는 가교처럼
아사셀의 산이 중심에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주님께서 그 공생애를 여리고 근방의 이 요단강에서 시작하셨는가 궁금했다.
그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는 여정에서 정말 생각지 않은 놀라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산에 오르고 나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요단 근처에 솟은 이 아사셀에서 죽은 염소로서 오신 것이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라
레16:10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두마리의 염소를 제비뽑고
한 마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안수하여 제사로 드렸다.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하여 뽑힌 염소에게 제사장이 안수를 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그 염소에게 전가되었다.
그 염소는 그 엄청난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어 진다.
그리고 유대광야의 가장 높은 산인 아사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다가
그 절벽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그 염소의 몸이 갈기 갈기 부서지고 그 내장이 다 터지면 이스라엘의 죄는 속죄된다.
유대인 가이드 우리는 그 절벽에 서서 그것을 아주 리얼하게 설명했다.
카메라로 그 바위 투성의 절벽 아래를 촬영하면서 명치 끝이 저려 옴을 느꼈다.
너무나 험한 광야의 길을 걸어와 이 깎아 지른 벼랑으로 떨어지는 염소...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이 같은 염소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았을까>
나를 위해 험한 실 길 오르신 그 발
걸음마다 크신 사랑 새겨 놓았네
그 산에서는 이 노래가 그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세례요한이 주님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이스라엘의...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 되었구나.'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놀랍게도 아론의 자손(눅1:5)이다.
누가는 이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며 모든 계명과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는 흠없는 자들'(눅1:6)이라 기록했다.
이 기록을 읽으며 다시 놀란 것은 '아사셀의 양'을 안수할 것을 명 받은 첫 제사장은
바로 '아론'(레16:6-10)이었다.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세례요한...
그는 아론의 자손이며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율법의 마지막 상징인 것이다.
그에 대한 주님의 증거가 생각났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0-15
뜻밖에 귀가 열리고 깨달아 지는 것이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세례요한은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 선지자보다 나은 자의 칭송을 주님께 들었으며 아론의 후예로서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을 때에, 모든 인류의 죄가 예수님께 덮여진 것이다.
아론이 안수한 아사셀의 그 염소처럼...
이제 허락하라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심이
합당하니라
아아...
주님의 이 말씀을 그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본질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이며...주님이 가시는 모든 길은 이 길의 외연(外然)이 확장되는 것이다.
결국 이 그 길 끝에서 역시 아사셀에서 이어진 그 골고다의 언덕에서
모든 살과 내장을 터뜨려 죽으심으로 주님은 진정으로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10:7
아버지의 그 구원의 길...
그 말씀하신 그 뜻과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인이 받는 그 세례를 자청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기름부음이 되었다.
'나도 오직 아버지의 언약을 받고 그 의를 이루는 아들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그 사랑...그 의...십자가와 보혈..그 사랑에서 나의 모든 추구를
시작하리라.'
용암같은 멈추지 않을 뜨거운 다짐이 터져 나왔다.
그 후에 '어린 양 예수님'은 내 안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사랑...그 의...그 진실...그 길....
나는 너무 너무 너무 그 주님의 삶과 길과 희생을, 그 형상을 갖고자 하였다.
요단강의 이 세례터는 그 주님의 길을 여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것으로 끝나는 의미만이 아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예수님께 비둘기 같이 성령님이 임하셨다.
'성령 세례'가 부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요 본질의 열림이었다.
그 하늘 문이 내게도 열렸을 때 비로소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천국의 작은 아이로서 그 나라를 침노하기 시작하였다.
<아골골짝, 빈들에.. 우리가 서 있었다>
(사진 :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