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忠宣王) 덕릉(德陵) 미확인
충선왕(忠宣王, 1275년 10월 20일 (음력 9월 30일) ~ 1325년 6월 23일 (음력 5월 13일)은
고려 제26대 국왕(재위: 1298년, 복위: 1308년~1313년)이다. 초휘는 원(願), 휘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선왕(忠宣王)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憲孝大王)이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다.
몽골식 이름은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 Iǰirbuka)이며, 정비(正妃)는 계국대장공주이다.
고려에서 처음으로 즉위하였다가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이기도 하다.
생애 후반에는 귀국을 기피하고 원나라에 체류하며 만권당을 세워 독서와 학문 연구, 서화 그리기 등에 전념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인종이 죽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백안독고사(伯顏禿古思)의 참소로 토번(지금의 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가
매부(妹夫)인 원 태정제가 즉위하자 유배가 풀려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객사하였다.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덕릉(德陵)에 묻혔다.
충선왕의 행실 가운데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것은, 흉노와 몽골에 아버지가
죽으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를 자식의 것으로 하는 증(蒸)이란 풍습이 있었으므로,
당시 상황에서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물론 자식과도 대립하여
고려 정치를 어지럽힌 것이나, 왕위를 친아들과 조카 둘에게
나누어 주어 서로를 대립하게 만들어 고려에 큰 해악을 끼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원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
포부가 컸던 그였지만, 고려 왕위를 원나라의 명령에 의해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는 부마국 왕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불안했던 자신의 지위 탓에,
충선왕은 지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들마저 살해하고, 조카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을 견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더 많이
살았고, 고려왕이 된 이후에도 원에서 훨씬
오래 머문 충선왕은 그의 몸에 흐르는 피처럼 고려의 반쪽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인터넷자료
고려사에 의하면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고려시대. 권력 싸움속에서 희생양이 된 충선왕은 원나라
황제는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토번, 지금의 티베트로 귀양을 떠나게 됩니다.
북경에서 약 4,200 킬로미터 떨어진 티베트까지 길이 얼마나 힘든지 함께 간 신하
18명 중 1명은 너무 힘들어 가는 도중에 도주했고.
귀양지 티베트 샤갸사원까지 도착하는데 약 10개월 정도 걸렸다고 하며.
샤갸사원은 해발 약 4,000m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도 그곳은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