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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義城) 김씨(金氏)의 문과 급제자 총람
해제 인동 장달수
급제 인원의 총 수는 99명이나 그 중 5명이 중시에 급제(두 번 급제) 하여 실제 급제하신 분은 94분입니다
(적색 표시) 안동 청계공 계와
(청색 표시) 칠봉 후손(해저 등)계가 가장 많고
사재 모재 계열과 관석 계(서계 김담수) 가 그 다음으로 많습니다.
표시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1)김효손(金孝孫) 1373(공민왕 22)∼1429(세종 11).
태조(太祖) 2년(139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5위(15/33)(문과 병과에 해당 함)
본관은 의성(義城). 할아버지는 연일(燕日)이고, 아버지는 존성(存誠)이며, 어머니는 정양생(鄭良生)의 딸이다.
1393년(태조 2) 진사시에 합격, 예문관한림(藝文館翰林)에 임용되고,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이 되어 별사전(別賜田)의 신규발급을 혁파시켰다.
1402년(태종 2) 춘장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환관(宦官)과의 반목으로 파직되었다가, 1410년(태종 10) 38세에 사헌부장령에 발탁되고, 이어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거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랐다.
1412년 대간(臺諫)의 고신서경법(告身署經法)을 부활시켰고, 함흥에 있는 환왕비문(桓王碑文)의 개찬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충청도도체찰사 박자청(朴子晴)의 부사(副使)가 되어 조운(漕運)의 불편지역인 태안일대의 지형을 답사하고 지형도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어서 지형조사(知刑曹事)·좌대언(左代言)을 지냈으나, 세종 즉위 때 비위사건에 연루되어 진천에 위리안치되었다. 7년 만에 석방되어 1426년(세종 8)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함경도일대의 진보(鎭堡) 설치상황을 현장답사하였고, 1427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거쳐 경기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형조·예조의 참판을 지냈고, 특히 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1429년 대사헌에 제수되어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상벌제도의 공정한 실시를 시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그해 말에 갑자기 죽었다.
2)김섭(金涉)
태조(太祖) 5년(13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10/33)
본관 의성(義城) 호 소정(疎亭)
증조부는 서지(瑞芝) 조부는 태권(台權) 아버지는 거익(居翼) 처부는 민중손(閔仲孫)
생원으로 급제 관직은 대사성.
3)김피(金彼) 김해 출신
태종(太宗) 2년(14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2위(22/33)
용비(龍庇) 후손 아버지는 김지승(金祗承)]
생원시에 합격과 동시에 문과 급제 교리 역임
4)김숙검(金叔儉)
태종(太宗) 17년(141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探花郞]위(3/33)
용비(龍庇) 후손 증조부는 지예(之銳) 조부는 광부(光富) 아버지는 로(路)
외조부는 김중원(金仲源) 처부는 윤충보(尹忠輔)
관직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5)김순(金淳) 미상∼1462(세조 8).
세종(世宗) 14년(143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亞元]위(2/33)
아버지는 판서 석아(錫我)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으로 식년문과 급제하고, 1443년 우헌납(右獻納)이 되었으며, 양전(量田: 토지조사)에 대한 편의정책을 올렸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1450년(문종 즉위년) 사예(司藝)로서 충청·전라·경상도체찰사의 종사관이 되어 연변의 주·현의 성터를 살폈다. 이듬해 성주목사가 되어 하삼도(下三道)의 축성사업을 전담하였다.
1453년(단종 1) 형조참의에 이어 겸지병조사로 경상도에 가서 거제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형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할머니의 상으로 경상도 영산에 거처하였으나, 특명으로 기복(起復)하여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57년 대사헌·이조참판·병조참판이 되었으며, 가을에 동여진(東女眞) 부락에 살고 있는 낭북얼케(浪卜兒哈)에 이어서 그의 아들 아비차(阿比車)가 변방을 침입해오자 이를 토벌, 평정하였다.
1459년 경창부윤 겸 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강원도진휼사가 되었고,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가지고 왔던 칙유(勅諭)의 뜻을 아뢰고, 또 자유책로(刺楡柵路 : 국경 부근에 나무로 만든 경계를 일부 헐어 길로 틈)를 청한 것을 보고하고 돌아왔다.
1461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6)김통(金統) 1408(태종 8)∼1454(단종 2).
세종(世宗) 17년(143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위(11/33)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중시(重試) 을과3등(乙科三等) 9위(19/19)
본관은 의성(義城). 자지(子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진(永珍)이고, 아버지는 소윤 호지(好智)이며, 어머니는 사극명(史克明)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가 되고 이어서 저작(著作)·박사를 거쳐 형조좌랑으로 재직중,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부교리(副校理)를 역임,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그 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1451년(문종 1) 예조정랑에 올랐으나, 영릉소상제(英陵小祥祭)를 잘못 주관하였다고 탄핵받아 면직되었다. 평소 벼슬살이를 즐겨하지 않았던 그는 이 기회에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대동강하류 평양 부근으로 낙향, 자연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7)김한계(金漢啓) 안동 출신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위(12/33)
본관은 의성(義城). 거두(居斗)의 증손으로, 조부는 천(洊)이고, 아버지는 현감 영명(永命)이며, 어머니는 이지유(李之柔)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집현전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451년(문종 1)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직제학을 거쳐 1454년(단종 2) 성균관직강이 되고 이어 승문원교리를 겸하였으며, 또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승정원부승지를 지내고 다시 정언이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같은 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으나 사양하였다.
8)김명중(金命重) 일명 김명중(金命中)
세종(世宗) 26년(144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위(12/33)
용비(龍庇) 후손. 증조부는 광부(光富) 조부는 로(路) 아버지는 숙량(叔良)
외조부는 대제학 윤소종(尹紹宗)
참봉으로 문과에 급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역임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17위(27/33)
증조부는 태권(台權) 조부는 거익(居翼) 아버지는 담(澹) 외조부는 오한(吳僴)
숙부는 문과급제 대사성 김섭(金涉)이다.
생원시에 합격과 동시 문과급제 관직은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역임.
10)김양중(金養中)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21위(31/40)
자는 홍후(洪厚)
용비(龍庇) 후손. 증조부는 광부(光富) 조부는 로(路) 아버지는 숙온(叔溫) 형은 집의 명중
처부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의 아들 민무휼(閔無恤)
주부를 지냈다.
11)김익령(金益齡)
세조(世祖) 5년(14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7/33)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발영시(拔英試) 3등(三等) 23위(39/40)
아버지는 김통(金統) 손자가 모재 김안국(金安國) 이다
생원으로 문과 급제 관직은 이조좌랑(吏曹佐郞)이다.
12)김운추(金運秋)
세조(世祖) 8년(14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18위(28/33)
증조부는 태권(台權). 조부는 거익(居翼). 아버지는 담(澹) 처부는 윤희(尹熺)
숙부는 문과급제 대사성 김섭(金涉)
생원으로 급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홍문관교리(弘文校理)역임
13)김한철(金漢哲) 안동
예종(睿宗) 1년(146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30/33)
자는 자명(子明)
증조부는 거두(居斗) 조부는 천(洊) 아버지는 영명(永命)
외조부는 이지유(李之柔). 처부는 남상치(南尙治)
형은 문과급제 승지 한계(漢啓)
생원(生員)으로 문과급제 관직 예조정랑(禮曹正郞)
14)김전(金巓) 괴산 출신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3/33)
[생원시]예종(睿宗) 1년(1469)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 4위(34/100)
[진사시]예종(睿宗) 1년(1469) 증광시(增廣試) 2등(二等) 11위(16/100)
자는 자앙(子仰)
용비(龍庇) 후손 증조부는 로(路) 조부는 문과 정언 숙검(叔檢) 아버지는 사정(司正 안중(安中)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5)김원(金瑗) 서울 거주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7/33)
자 백옥(伯玉)
아버지는 통훈대부 한학교수 허의(許義)
관직은 예조정랑(禮曹正郞)
16)김갱수(金鏗壽)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11/33)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자는 인로(仁老)
용비(龍庇) 후손 증조부는 로(路) 조부는 숙온(叔溫) 아버지는 문과 양중(養中)
관직은 홍문관 전한(典翰) 역임
17)김세우(金世瑀)
연산군(燕山君) 7년(150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을과 3위(6/35)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근(公瑾). 아버지는 칙정(勅正)이다.
생원시를 거쳐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에 활을 잘 쏘아 말 한필이 하사되었으며, 좌참찬 신준(申浚)의 집에서 분경(奔競 : 대관이나 권세가에게 좋은 벼슬자리를 차지하려는 운동)하는 자들을 체포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1509년(중종 4) 병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 군수를 지냈다.
18)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서울 거주
연산군(燕山君) 9년(1503) 계해(癸亥) 별시(別試) 2등(二等) 1[亞元]위(2/8)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중시(重試) 3등(三等) 1위(4/6)
연산군(燕山君) 7년(1501)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2위(2/100)
연산군(燕山君) 7년(1501)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1/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증조부는 문과 통(統) 조부는 문과 익령(益齡) 아버지는 참봉 연(璉)이며
처부는 송림군(松林君) 이효창(李孝昌)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증조부 조부 본인 동생 정국 아들 여부(汝孚)가 모두 문과에 급제 했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辟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19)김정국(金正國) 1485(성종 16)∼1541(중종 36).
중종(中宗) 4년(1509) 기사(己巳) 별시(別試) 갑과(甲科) 1[壯元]위(1/18)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4위(4/100)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25위(30/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은휴(恩休).
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연(璉)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수 지(芝)의 딸이며, 안국(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문인으로는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을 비롯하여,『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己卯黨籍)』·『사재척언(思齋摭言)』·『경민편(警民篇)』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20)김홍(金洪) 거주지 서울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12/33)
중종(中宗) 31년(1536) 병신(丙申) 중시(重試) 3등(三等) 3위(5/5)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6위(21/100)
자는 치천(稚川)
아버지는 세진(世震) 외조부는 송연종(宋連宗)
관직은 군수 역임
21)김세헌(金世憲) 서울 거주
중종(中宗) 32년(15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19/27)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3위(8/100)
자는 원중(原中)
조부 허의(許義) 아버지는 원(瑗)
관직은 정(正)
22)김희삼(金希參) 1507년(중종 2)∼1560년(명종 15)거주지 성주(星州)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15위(18/19)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2위(92/100)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사로(師魯), 호는 칠봉(七峯),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치정(致精)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 계공(季恭)의 딸이다. 김취성(金就成)·이광(李光)·송희규(宋希奎)의 문인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이조(吏曹)·병조(兵曹)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또 사옹원정(司甕院正)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치(白雉)와 기맥(歧麥)의 상서가 있었고, 어사(御使)의 상신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천곡(川谷)의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부인 숙부인은 정부인에 추증된 청주곽씨이다
아들 우홍(宇弘)은 문과 에 급제하여 밀양부사가 되고, 우굉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우용(宇容)은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이 되고, 우옹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추증되니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딸은 이응명(李應命)에게 시집갔다.(註 부인 의성김씨의 묘지명을 남명 조식 선생이 찬하였다)
23)김극일(金克一) 1522년(중종 17)∼1585년(선조 18). 안동 천전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11/33)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증 통례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병절교위 세경(世卿)의 딸이다.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커서는 아우 명일(明一)·성일(誠一)과 함께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의부위·사용을 거쳐, 1551년에 승문원정자·저작·박사가 되었다. 1553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얼마 뒤 형조좌랑·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홍원현감(洪原縣監)을 역임하였다.
1556년 청홍도도사(淸洪道都事)를 거쳐, 1558년 성균관직강·형조정랑·예조정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경상도도사를 거쳐, 1560년에 다시 예조정랑이 되었다. 얼마 뒤 군기시첨정과 평해군수를 역임하였다.
1566년에는 사재감첨정을 거쳐 다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569년(선조 2) 성균관사성과 사도시정(司䆃寺正)을 거쳐, 외직으로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성주목사 시절 『계몽익전(啓蒙翼傳)』을 간행해 스승 이황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 1575년 밀양부사에 임명되고, 1582년 내자시정, 이듬해에는 사헌부장령을 겸하였다.
그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했고,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다. 문장은 고결하고 창고(蒼古)해 한 글자도 진부한 말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시에 뛰어나 시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시는 매우 정교했고 사실을 인용함에 비유함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시상은 깨끗하고 세련미가 있었다고 전한다. 저서로는 『약봉일고(藥峰逸稿)』 가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배위 숙부인 이씨는 동지중추부사 위(葳)의 따님이다.
아들이 없어서 동생 귀봉 수일의 아들 철(澈)을 후사로 삼았다. 4녀를 두었으니,
맏사위 조정(趙靖)은 호가 검간(黔澗)이며 퇴계 문인으로 대과에 급제 봉상시정.증 이조판서
둘째사위 류기(柳裿)는 겸암선생 운룡(雲龍)의 아들로 낭천현감(狼川縣監)이며.
셋째사위 이윤여(李胤呂)는 생원이고.
넷째사위 장여화(張汝華)는 인동장씨 안양공의 후손. 호는 사계(砂溪)로 진사(영주 금광리)
철(澈)은 아들은 시온(是榲)이니 표은 선생으로 숭청처사라 칭하였다.
표은은 8남 7녀를 두었으니.
방열(邦烈)은 生員이고。방형(邦衡),기(炁),방걸(邦杰)은 大司成이고,방찬(邦贊),
방조(邦照),방현(邦顯),방겸(邦謙)이다。
사위는 권극중(權克中)이고,김휘세(金輝世)는 문정공(文貞公) 계암(溪巖) 김령(金坽)의 아들로 호는 송파(松坡)로 용궁현감과 공조좌랑을 지냈고. 권극정(權克正)은 권별(權鼈)의 아들로 生員이고,정자고(鄭自固)이고,김종급(金宗汲)은 문절공 김담(金淡)의 후손인 한성부 서윤 김우익(金友益)의 손자이고,이유오(李兪吾)는 진성이씨로 풍기군수 이송(爾松)의 아들이고,권두경(權斗經)은 충정공(忠定公) 충재 선생 벌(橃)의 5세손으로, 호는 창설재(蒼雪齋). 생원시와 대과에 급제, 영산현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24)김여부(金汝孚) 거주지 서울
명종(明宗) 4년(15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26/34)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2위(52/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기복(基福). 익령(益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연(璉)이고, 아버지는 판서 안국(安國)이며, 어머니는 송림정(宋林正) 이효창(李孝昌)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관직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25)김우홍(金宇弘) 1522년(중종17)~1590년(선조23) 거주지 상주
명종(明宗) 8년(1553) 계축(癸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11위(21/41)
자는 면부(勉夫). 호는 지족당(知足堂). 이계(伊溪)
증조부는 종혁(從革), 조부는 치정(致精). 삼척부사 칠봉선생 희삼의 장자.
외조부는 청주곽씨(淸州郭氏) 습독(習讀) 인화(人和).
1546년(명종1 병오)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양시 입격.
1553년 (명종 8 계축) 별시(別試)에 급제하고. 10월에 삼척부사에 제수된 부친 칠봉선생을 모시고 성주에 내려가 선조 묘소를 참예하고 돌아와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한림에 탁용되었다. 1558년(명종13 무오)에 승정원 주서가 되고 1560년(명종 15 경신)에 부친 부사공이 별세하시자 3년간 시묘를 하고 1562년(명종17 임술) 병조좌랑이 되고. 1563년(명종18 계해) 경상도 도사가 되어, 과만되자 다음해 함양군수(咸陽郡守)가 제수되었다, 1572년 나주목사가 되었다, 고봉 기대승이 죽자 제문을 지어 조문하였고.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였다. 1575년(선조8)년 광주목사(光州牧使) 로 전임되었다.
이항이 죽자 제문을 지어 조상하였다. 그 뒤 통정대부에 승차하여 영흥부사가 되었다가. 밀양부사을 지내고 과만되자 성주로 돌아왔다. 나주와 영흥에 유애비가 세워 졌다.
배위 淑夫人은 善山金氏이고 아들 행가(行可)는 통정대부 안협현감이고, 손자는 극성(克誠), 장(璋) 규(珪) 림(琳) 원(瑗)은 직장(直長)이고, 각(珏)이다.
26)김계조(金繼趙)
명종(明宗) 16년(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17/36)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4위(29/100)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자는 중소(仲紹)
아버지는 예조판서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관직은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에 그쳤다
27)김우굉(金宇宏) 1524(중종 19, 갑신)∼1590(선조 23, 경인). 거주지 상주(尙州)
명종(明宗) 21년(1566) 병인(丙寅)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17)
명종(明宗) 7년(1552)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1[壯元]위(1/100)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아버지는 부사 칠봉선생 희삼(希參)이며,
어머니는 곽씨(郭氏)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역시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가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우옹(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그는 영천으로 달려 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 속수서원(凁水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이신 숙부인 남양홍씨는 찰방 윤최(胤崔: 검간 조정의 외조부.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의 사위, 허백정 홍귀달의 손서)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셨으니.
장남 득가(得可)는 창녕현감(昌寜縣監)을 지냈는데 선정비가 세워졌다.
차남 달가(逹可)는 영릉참봉(英陵參奉)이고。사위는 류성구(柳成龜)이다。
현감 득가(得可)는 송재 이우(李堣)의 손자인 첨정 만취헌(晩翠軒) 빙(憑)의 따님을 맞아
아들 진사 률(瑮)과 사위 전생서 참봉 정이룡(鄭而龍)을 두었고, 측실 아들은 현(玹)이다
사위 류성구(柳成龜)의 아들은 암(巖)이다.
손자 진사 률(瑮)의 아들 추임(秋任)은 희릉참봉(禧陵參奉)이고。추길(秋吉)은 生員이고
사위는 生員 李擥와 司畜 李一圭이다。
참봉 정이룡(鄭而龍)의 아들은 형세(亨世)이고。헌세(憲世)는 宣陵參奉이고。영세(榮世)는 生員이다。
28)김우옹(金宇顒) 1540년(중종 35)∼1603년(선조 36). 성주(星州) 사도실
선조(宣祖) 즉위년(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위(11/33)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3/100)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며 부제학 개암 우굉(宇宏)의 동생이다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졸하였다.
처 외조부인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 學制七條〉를 손수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도 청하였다.
또한,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 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한강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생활중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 〈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 〈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 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서애 유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 등과 가까워 정치적으로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동인(東人)으로서, 서인 정철(鄭澈)·이경률(李景慄)·이징(李澂) 등이 쟁단을 일으키려 한다 하여 파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에 대하여 만은 존경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선생은 부인 김씨에게서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고 공의 셋째 형인 감찰(監察) 우용(宇容)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양자(養子)로 삼아 후사(後嗣)를 이으니, 바로 효가(孝可)로 일찍이 강음 현감(江陰縣監)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공보다 8년 뒤에 별세하였는데 장례하여 부묘(祔墓)하였다. 현감은 1남 3녀를 두었는바, 아들 욱(頊: 호는 사월당(沙月堂))은 진사(進士)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이고. 사위는 하산(夏山) 성초벽(成楚璧), 서하(西河) 노형필(盧亨弼), 광산(光山) 노사영(盧思永)이다. 욱은 남녀(男女)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며, 공의 측실(側室)에 딸이 하나 있다.
29)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 무술)∼1593년(선조 26, 계사) 안동 천전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3위(33/33)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9위(24/100)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청계공 진(璡)의 넷째 아들로 무술년(1538, 중종 33) 12월 을사일 정해시에 임하현 천전리(川前里) 집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
경상우도병마절도사•초유사•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재임 중.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시호:문충(文忠). 증 이조판서
선생의 자손
선조 15년(1582)년 부군 45세 때 검제로 이거(移居)하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
0 아들 셋, 딸 셋으로,
장남 * 집(潗)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이고,
차남 * 역(湙)의 자는 호원(浩源) 종사랑(從仕郞)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27세에 졸하다
삼남 * 굉(浤)은 종사랑(從仕郞)이다.
장녀는 * 홍수약(洪守約)장사랑(將仕郞) 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권태일(權泰一) (호는 장곡(藏谷). 대사간, 전라감사 형조참판) 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 김영조(金榮祖) (호는 망와(忘窩). 6번 어사, 부제학, 대사헌, 이조참판)에게 갔다.
측실 소생 아들은 넷이고 딸은 둘로
아들 * 잠(潛)은 훈도(訓導)이고, * 심(深), *침(沈), *명(溟)이며,
장녀는 *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0 집(潗)은 아들 넷과 딸 넷을 낳았는데,
장남 * 시추(是樞)의 호는 단곡(端谷) 생원이고,
차남 * 시권(是權)의 호는 봉파(鳳坡) 진사이고,
삼남 * 시강(是杠)의 호는 행촌(杏村) 진사이고
사남 * 시절(是梲)의 자는 자고(子高) 생원이다,
장녀는 * 오여벌(吳汝橃)(호는 경암(敬菴). 교리. 대구, 청송, 창원부사)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김연조(金延祖)(호는 광록(廣麓), 문과 급제. 정자(正字) 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 권상충(權尙忠)(호는 월곡(月谷), 충재 권벌의 증손자 증 집의)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0역(湙)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0굉(浤)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是梲)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 김응조(金應祖)(호는 학사(鶴沙). 승지, 대사간, 한성우윤) 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 신열도(申悅道)(호는 나재(懶齋). 정랑, 정언, 울진현감, 장령)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모두 90여 명이다
주) 사위 김영조와 손서 김염조, 김응조는 형제간이며, 안동 미동의 유연당 김대현의아들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30)김복일(金復一) 1541년(중종 36, 신축)∼1591년(선조 24, 신묘) 안동 천전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33/34)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8위(78/100)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아버지는 생원 청계 진(璡)이며,
학봉 성일(誠一)의 아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으며,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취부인 숙인 예천권씨는 증 참의 지(祉)의 따님이며, 후취부인 안동권씨는 현감 심언(審言)의 따님이다. 숙인 예천권씨는 2남 2녀를 두웠으니,
장남 지(潪)는 선교랑(宣敎郞)이고, 차남 숙(潚)은 준재였는데 일찍 졸하였다.
사위 최현(崔晛)은 호가 인재(訒齋)로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강원감사를 지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고 완성군(完城君)에 추봉되었다.
사위 최정호(崔挺豪)의 호는 저곡(樗谷)으로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냈다.
지(潪)의 아들 시진(是振)은 영흥전 참봉이고, 다음은 시각(是桷)이고.
딸은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김업과 박경현(朴景賢), 이질(李晊), 박시화(朴時華)에게 출가하였다. 감사 최현의 아들 최산휘(崔山揮)는 청송부사(靑松府使)이며 완산군(完山君)으로 추봉되었다. 정언 최정호는 2남을 두었는데, 최충망(崔忠望), 최충량(崔忠亮)이고, 딸은 금양원(琴養元), 생원 남자(南磁), 김려(金礪)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현손 남녀 약간 있다. 후 부인 숙인은 자녀가 없었다.
31)김제민(金齊閔) 1527(중종 22)∼1599(선조 32). 거주지 부안(扶安)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4)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3위(18/100)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
증조부는 문과급제 교리 운추(運秋) 조부는 보현(溥賢)이고, 아버지는 호(灝)이며, 어머니는 김석옥(金錫沃)의 딸이다. 일제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화순현감·순창군수, 1586년 전라도사를 지낸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대둔산 아래 주둔, 왜군을 맞아 싸웠고, 난이 끝난 뒤 학문연구에 전심하였다.
특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정통하였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버렸다. 저서로는 『오봉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2)김요립(金堯立) 1550(명종 5)∼미상 거주지 서울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5위(13/27)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8위(98/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공(士恭), 호는 서봉(西峰). 조부는 문과 예조판서 정국(正國)이고, 아버지는 문과 계조(繼祖)이며, 어머니는 이찬(李澯)의 딸이다.
1592년에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운반의 임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1599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되고 이듬해 지평(持平)이 된 뒤, 1601년 사도시정(司䆃寺正)·장령(掌令)·사간·사성(司成)·상의원정(尙衣院正)·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였다.
시와 서화에 이름이 높아 선조가 일찍이 ‘선서재자선화학사(善書才子善畵學士) : 글씨가 훌륭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학자)’의 8자를 써서 내려주었다고 한다.
33)김희률(金希律) 1559년(명종 14) 거주지 교하(交河)
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20/33)
자는 여칙(汝則) 아버지는 김흡(金潝)
관직은 첨정(僉正)에 그쳤다.
34)김응룡(金應龍) 거주지 성주(星州)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6/12)
개명 김정룡(金庭龍) 자는 시견(時見)
조부는 참봉 관석(關石) 아버지는 서계(西溪) 담수(聃壽)
관직은 예조정랑(禮曹正郞)
35)김용(金涌) 1557년(명종 12, 정사)∼1620년(광해군 12, 경신) 안동 천전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위(11/40)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귀봉 수일(守一)의 아들. 외조는 조효분(趙孝芬).
학봉 성일(誠一)의 조카이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옮겼다가 천연두가 발병하여 사직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인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헌납·부수찬·지평을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교리에 재임중 독운어사(督運御史)로 나가 군량미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루어져 후원하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서인에 의하여 축출되자, 탄핵을 받아 선산부사로 체직되었다.
이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이건하고 향교를 중수하는 등 문교에 힘썼다. 이후 계속되는 대간의 탄핵을 받으며 경직과 외직을 전전하였는데, 일시 제용감정·필선(弼善)·집의 등 경직에 머물다가 예천군수·상주목사·홍주목사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오직 보민(保民)과 흥학(興學)에 힘썼다.
1609년 봉상시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나이 이미 60세였다.
조정의 당쟁이 날로 심해지므로 맏아들의 죽음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왔다가 4년 뒤에 타계하였다. 안동 덕봉서원(德峯書院)·묵계서원(默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운천집 雲川集》·《운천호종일기 雲川扈從日記》가 있다.
정부인 이씨는 곧 문순공 퇴계선생의 손녀로 첨정 이준(李雋)의 딸이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어질고 글재주도 있었다.
시주(是柱)는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이고, 시건(是楗)은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시정(李楨)은 생원이고, 시릉(是棱), 시상(是相)이다.
두 사위는 진주판관 배상익(裵尙益)과, 생원 이정준(李廷俊)이다.
*맏아들 시주(是柱)는 옥봉 권위(權暐)의 사위가 되어 아들 넷을 두었는데, *희(熙)이고, 임(恁)은 생원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고, 훈(薰), 후(煦)이다.
사위는 넷이니 참봉 이완(李皖)은 문원공 회재 언적(彦迪)의 증손자이고, 주서(注書) 김숭조(金崇祖)는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아들로 호는 설송당(雪松堂)으로 망와 김영조 학사 김응조의 동생이며, 사인(士人) 이업(李㿩)은 참의에 증직되었고, 전상구(全尙耈)는 증직이 호조참의다.
*둘째 시건(是楗)은 매헌(晦軒) 안향의 후손인 호군 안담(安霮)의 사위로 아들이 없어 임 (㶵)으로 후사를 이었다.
*셋째 시정(李楨)은 민절공(敏節公) 백암(柏巖) 김륵(金玏)의 사위로 아들이 휴(烋)이니 참봉 이며, 사위는 김시성(金時聖)이다.
*넷째 시릉(是棱)은 시은당(市隱堂) 이진(李珍)의 사위로 아들 도(壽)는 부호군이다.
*넷째 시상(是相)은 대해(大海)황응청(黃應淸)의 아들 황경일(黃慶一)의 사위로 자식이 없어 종부형의 아들 기(炁)를 후사로 이었고. 사위는 생원 이조영(李朝英 :진성이씨 벽담헌(碧 潭軒) 李掔의 아들)이다.
*사위 배상익(裵尙益)의 호는 치암(癡巖). 아버지는 나주목사 응경이고, 진주판관을 역임.
아들 유화(幼華)의 호는 팔사(八斯). 생원으로 김천찰방(金泉察訪)과 의금부도사를 역임.
아들 유장(幼章)의 호는 유암(楡巖), 은일로 교관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위 이경준(李廷俊)은 예안현감, 사헌부 지평 율원(栗園)이공(李珙))의 아들이다.
아들은 천표(天標)이고,지표(地標)이고,민표(民標)이다.。
시주(是柱)의 아들 *희(熙)는 3자 로。학달(學達)이고,사달(士達)이고,방달(邦達)이다。
임(㶵)의 아들 *태기(泰基)는 掌樂院主簿이고。이기(履基)는 生員으로 동중추이고。익기(益基)는 부호군이고,정기(鼎基)이니 전취 소생이고。유기(有基),관기(觀基)는 후취 소생이다.
훈(薰)의 아들은 *學玉+土이고,학재(學載)이고,학주(學周)이고,학시(學時)이다。
후(煦)의 아들은 *우기(宇基)이고,업기(業基)이고,형기(亨基)이고,홍기(弘基)이다。
휴(烋)의 아들 *학기(學基)는 진사이다。
도(燾)의 아들*선기(善基)는 생원이고。창기(昌基)이고,석기(碩基)이다。
기(炁)는 아들이 없어 *태중(台重)으로 후사를 삼으니 참봉이다.
현손으로 승중손은 *세건(世鍵)이다.
36)김시주(金是柱) 1575년(선조 8)∼1617년(광해군 9). 안동 천전
광해군(光海君) 5년(1613)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7위(17/42)
광해군(光海君) 1년(1609)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1[壯元]위(1/100)
자는 이립(以立)이고, 호는 개호(開湖)
증조는 생원 진(璡)이고, 조부는 찰방 구봉(龜峰) 수일(守一)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운천(雲川) 용(涌)이며 어머니는 퇴계 이황(李滉)의 손녀이자 첨정(僉正) 이준(李寯)의 딸 진보이씨(晉寶李氏)이다. 부인은 옥봉 권위(權偉)의 딸이다.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난데다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 또한 깊었다.
관직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등을 거쳐 병부좌랑(兵部佐郞)에 이르렀다.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김희(金熙)‧김임(金恁)‧김훈(金薰)‧김후(金煦)이다.
유고로 2권 1책의 『개호유고(開湖遺稿)』가 전한다.
37)김지수(金地粹) 1585(선조 18)∼1639(인조 17). 고부 출신
광해군(光海君) 8년(1616)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5위(25/41)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태호(苔湖)·천태산인(天台山人).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제민(齊閔)이고, 아버지는 서(曙)이며, 어머니는 승의랑 정희민(丁希閔)의 딸이다.
교서관교감(校書館校勘)이 되고. 1617년기자헌(奇自獻)·이항복(李恒福)·이원익(李元翼)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해 회령·경원으로 귀양갈 때 그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정자(正字) 및 예조·병조의 낭관을 지냈다. 1626년 서장관이 되어 정사 김상헌(金尙憲)을 따라 명나라에 가는 도중 부벽루에 제(題)한 시를 보고 감탄, 연로에서 수창(酬唱)한 시를 엮어 『조천록(朝天錄)』을 펴냈으며, 이를 본 명나라 사람들이 경모해 마지않았다.
뒤에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시강원의 문학·필선(弼善)·보덕(輔德)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 1628년 종성부사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때 송광유(宋光裕)의 무고한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고부(古阜)로 돌아갔다.
그는 청나라가 새롭게 일어나는 현실에서 존주사상(尊周思想)에 철저했던 인물로, 늙어서는 천태산 밑에 집을 짓고 풍류와 독서로 소일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향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열과 성을 다해 처리했으며, 사람을 대함에 항상 온유하였다.
또한, 매사에 의리를 제일로 삼아 고매한 인격으로 명망을 얻은 당대의 인물이었다. 특히, 시와 그림에 능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부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천집』 3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38)김천해(金天瀣) 1562년(명종 17) 거주지는 성주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4)
자는 대원(大源)
증조부는 윤적(允迪) 조부는 관석(關石) 아버지는 담로(聃老)
외조부는 김순(金珣) 처부는 이준명(李俊明)
관직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다.
39)김시권(金是權) 1583년(선조 16, 계미)∼1643년(인조 21, 계미) 안동 금계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33/33)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51위(81/100)
자는 자중(子中). 호는 봉파(鳳坡).
조부는 문충공(文忠公) 학봉 성일(誠一)이고, 아버지는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지낸 애경당 집(潗)이다. 외조부는 유종례(柳宗禮)이고, 초취는 원주변씨로 직장 광증(廣曾)의 딸이고, 후취 안동권씨는 집(集)의 딸로 충재 선생의 증손녀이다.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의 문인이다.
1634년(인조 12)에 성균관의 학유·학록,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16년(1638) 영동현감(永同縣監)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자 탄핵을 받고 귀향하여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8세 때 어머니가 악성 종기로 인한 통증으로 밤새 고통스러워한 일이 있었는데, 그도 아픔을 못이겨 그치지 않고 소리를 지르니 아버지가 그 까닭을 묻자, “어머니가 통증을 견디지 못하시니, 저 또한 아픈 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아픈 곳이 있어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11세 때 할아버지 문충공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50리 길을 슬피 울며 따라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대간(大諫) 고경명(高敬命)이 그 가족을 아버지 애경당에게 의탁하였는데, 아버지가 분상을 가면서 열 살을 겨우 넘긴 공에게 돌보아주도록 하니 공이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고경명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례를 치르도록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니, 사람들이 역시 학봉 선생의 손자라고 일컬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홍조(李弘祚) 등과 의병을 일으켜 조령을 넘으려는 즈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갔다. 묘소는 의성(義城)의 북쪽 임기(林基)의 병향(丙向)에 있다.
40)김지남(金地南) 1600(선조 33)∼1650(효종 1). 거주지 고부(古阜)
인조(仁祖) 16년(1638) 무인(戊寅) 정시(庭試) 을과(乙科) 5위(6/15)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 12위(17/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대뢰(大賚), 호는 구봉(九峯).
호(顥)의 증손으로, 조부는 제안(齊顔)이고, 아버지는 생원 성(晟)이며, 어머니는 김응별(金應鼈)의 딸이다.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 관계 진출을 단념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려나자 뜻을 바꾸어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다. 1638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기사관(記事官)·호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예조좌랑이 되었다.
1641년 지평(持平)이 되어, 성격이 포악하고 권문(權門 : 권세있는 문벌)에 아첨하는 등 상도(常道)에 벗어난 행동이 잦았던 이조판서 남이웅(南以雄)의 탄핵을 주장하다가 동료들과의 의견대립으로 사퇴하였다.
1646년 다시 직강(直講)이 되고, 그 뒤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재임하다가, 1650년(효종 1) 병조정랑에 임명되어 부임도중 병사(病死)하였다. 평소 마음이 활달하고 조그만 일에 구애받지 않아,호조좌랑에 재직중 물화(物貨)의 출납에 세심하지 못하다 하여 상관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시경』·『서경』 등 경서에 통달하였고, 특히 지평 정두경(鄭斗卿)과 절친하였다.
41)김욱(金頊) 1602년(선조 35) 성주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33)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4위(54/100)
자 신백(愼伯) 호 사월당(沙月堂).
증조부는 칠봉 희삼(希參). 조부는 동강 우옹(宇顒). 아버지는 효가(孝可).
외조부는 박경명(朴景命). 장인은 군수 하경수(河景受: 文孝公 演의 후손)
인조 15년 음직으로 현릉참봉이 제수되고, 다음해 제용감 참봉이 되고,
인조(仁祖) 17년 (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어 다음해 승정원 가주서가 되고, 승문원 정자, 주서를 거쳐 인조 22년 평안도 도사로 나갔다. 인조 24년 사헌부 지평이 제수되고, 인조 25년 공조정랑 겸춘추가 되고, 4월에 興海郡守가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파직되었다.
효종 즉위년(1649년) 대구부사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6년 뒤 서용되어 효종 6년 2월 北靑判官이 제수되어 재임 중 4월 17일에 졸하였다,
42)김주(金迬) 1606년(선조 39)∼1681년(숙종 7). 예천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26/33)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7위(37/100)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 할아버지는 형윤(亨胤)이고,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극계(克繼)이며, 어머니는 신영명(申永命)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정묘년(1627년 인조5) 22세 때 호란이 일어나자 장현광선생이 영남 호소사가 되어 장여한(張汝瀚)공을 예천의병장으로 삼고 공에게 서기의 일을 맡겼다. 난이 끝나자 23세때 여헌 선생을 따라 배워서 지결을 얻었다.
학유(學諭)와 전적을 거쳐 직강(直講)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김천·무장·연안·양산과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함평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오위장(五衛將) 장례원판결사 등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불구당집』이 있다.
공의 전 부인은 순천김씨로 첨지중추부사의 딸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정(爾梃)이고, 후 부인은 전주 이씨로 군수 광보(李光輔)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이해(爾楷)이고, 이추(爾樞)는 장단부사 방어사이고, 이표(爾標)이고, 이갑(爾甲)은 성균 생원이고, 딸은 선비 권질(權晊)과 경필회(慶必會)에게 시집갔다. 이정의 아들은 대령(大齡)이고, 딸은 한명욱(韓明勖)에게 출가했고, 이해는 아들을 두지 못하여 백령(百齡)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註)식산 이만부(李萬敷)에게 출가 했고, 이추의 아들은 석령(석령)이고, 딸은 진사 오상흠(吳尙欽)에게 출가 했고, 이표는 아들이 셋인데 백령(百齡: 중부 이해의 양자)이고, 득령(得齡)이고, 극령(極齡)은 황해도 도사(都事)이고, 딸 셋은 권덕(權悳), 권봉문(權鳳文), 채유연(蔡游蓮)에게 출가하고, 이갑은 아들이 셋인데 규령(奎齡), 몽령(夢齡), 익령(翼齡)이고, 딸 셋은 이지봉(李之鳳), 이윤필, 황상엽에게 출가하고. 권질은 아들을 하나 두웠는데 일찍 죽었다. 경필회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춘, 잠, 보, 진, 저, 온, 이고 딸은 권구경, 생원 이창(李昶)에게 출가했다.
43)김극화(金克和) 1606년(선조 39)~미상 거주지는 서울
인조(仁祖) 23년(1645) 을유(乙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8위(13/15)
인조(仁祖) 20년(164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0위(40/100)
자는 달도(達道). 조부는 덕일(德一) 아버지는 기남(起南)
관직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이다.
44)김이재(金以載) 1613년(광해군 5)~미상 거주지 상주(尙州)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4)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3위(73/100)
자는 중후(仲厚)
조부는 서계 담수(聃壽) 아버지는 생원 국원(菊園) 정견(廷堅)
효종 즉위년 성균관 학록. 효종 4년 감찰. 효종 5년 병조좌랑. 효종 7년 만경현령.
숙종 원년 성균관 직강. 숙종 3년 무장현감을 역임 했다.
45)김빈(金賓) 1621년(광해군 13, 신유)∼1694년(숙종 20, 갑술). 예천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26/34)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3위(83/100)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남악선생(復一)의 증손자. 시용(是桶)의 아들. 생부는 시진(是桭).
부친의 명으로 학사 김응조(金應祖) 문인이 되었다.
1651년(효종 2)에 진사가 되고, 1657년(효종 8)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조 좌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서 1671년(현종 12)의 큰 가뭄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문경 사람들이 환송하며 슬퍼하였고, 선정비를 세워주었다.
공이 문경현감 때 구재 (鳩齋) 김계광(金啓光)이 쓴 시
*奉贈金賓如賓之任冠山 * 관산은 문경의 고명(古名)
千年一縣嶺中央、吾軰爲之見未嘗。聞說士民相賀語、使君今日綠衣郞。
숙종 즉위 후 성균 사예, 사간, 사복시 정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 좌부, 우부승지를 지내고, 영해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승지가 되고, 밀양부사에서 경주부윤으로 移拜되었다그뒤 예조, 병조, 형조참의를 지내고, 경신년(남인 대출척) 좌승지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로 광주부사로 수개월 재임 중 나주목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8년 뒤에,남원부사가 되고, 공조, 병조, 이조참의가 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우윤, 호조, 병조참판, 도승지겸 직제학과 한성좌윤을 지내고, 시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공조참판, 예조참판이 제수되었으나 사양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공은 겸손하고 부지런한 학자일 뿐 아니라, 벼슬에 있으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칭찬을 받았고, 남의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한 벼슬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일을 정성을 다하여 소신대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왕이 매우 아끼었다. 공은 자비, 치밀, 청렴, 분별을 다스리는 원리로 삼았다.
사자(嗣子 양자(養子))는 효기(孝基)이고, 사손(嗣孫) 세함(世)은 참봉이다. 세함의 아들은 여성(汝成)과 여암(汝嵒)과 여대(汝岱)이다. 여성의 아들은 시천(始天)이고 시천의 아들은 성운(聲運)이며 성운의 아들은 용수(龍壽)이니 이들이 적손들이다. 여암은 후사가 없고, 여대의 아들은 시흥(始興)이다.
46)김시영(金是榮) 1621년(광해군 13) 거주지는 성주(星州)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27/34)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8위(58/100)
증조부는 담로(聃老) 조부는 천택(天澤) 아버지는 즙(檝)
효종 9년 성균관 학록이 되고 학정, 박사가 되고 현종 4년 전적이 되었다.
현종 5년 공조좌랑이 되었다가 하동현감으로 나갔다.
숙종 즉위년에 형조정랑이되고 다음해 예조정랑이 되고 바로 문천군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풍기군수로 나갔다.
숙종 5년 성균관직강이 되고 다음해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47)김방걸(金邦杰) 1623년(인조 1, 계해)∼1695년(숙종 21, 을해). 안동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5위(25/34)
지촌선생 약전 (略傳) 장달수 편술
공의 성은 김씨이고 휘는 방걸이며 자는 사흥이며 호는 지촌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경순왕의 아들 석(錫)이 의성군에 봉해져서 의성으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 후 휘 용비(龍庇)는 관직이 태자첨사를 지냈는데 공덕으로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첨사공의 아들 휘 선(宣)은 상서 좌복야이고, 복야공의 아들 휘 서지(瑞芝)는 내영고 소윤이고, 소윤공의 아들 휘 태(台)는 좌사윤이고, 사윤공의 아들 휘 거두(居斗)는 공조전서이고, 전서공의 아들 휘 천진(洊進)은 만호이고, 만호공의 아들은 휘 영명(永命)은 신령현감이고, 현감공의 아들은 휘 한계(漢啓)는 부지승문원사이니, 집현전학사로,
문종과 단종을 모셨고, 세조가 정란을 이르켜 왕위에 오르자 남쪽으로 돌아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원사공의 아들 휘 만근(萬謹)은 진사로 통례원좌통례에 증직되고, 통례공의 아들 휘 예범(禮範)은 증직이 승정원 좌승지이고, 승지공의 아들은 휘 진(璡)은 생원으로 증직이 이조판서로 공의 고조부이니 후덕한 선행으로 일세에 칭송 된 분이니 호가 청계선생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다섯 분 모두 퇴계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아름다운 행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장자 휘 극일(克一)은 관직이 성균관 사성으로 호가 약봉(藥峰) 이고, 차자 휘 수일은 찰방으로 호가 귀봉(龜峰)이고, 3자 명일(明一)은 생원으로 호가 운암(雲巖)이고, 4자 성일(誠一)은 증 이조판서 행 경상도관찰사로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으로 호 학봉(鶴峰)이고,
5자 휘 부일(復一)은 종부시정으로 호가 남악(南嶽)이니, 뒷날 향유들이 경산서원을 창건하여 청계선생과 아들 다섯 분을 제향 하였다.
찰방공(수일)의 아들 휘 철(澈) 진사공을 청계공의 命의로 백부 사성공(극일)의 뒤들 잇게 하였다 (이 분이 조부이다). 아버지 휘 시온(是榲)은高節遠識하고, 예학에 조예가 깊고, 시문이 청건하고 법도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니 호가 표은(瓢隱)이다,
병자호란 이후 와룡산에 은거하였다. 그 후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묘비에는 숭정처사김공지묘라 하였다
어머니는 풍산김씨로 사헌부 지평 봉조(奉祖)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계해년(1623년 인조1)12월 2일 표은공의 4자로 태어났다.
(표은공의 8남 7녀 중 차례로 여섯째이다)
1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모하는 것이 성인과 같았다.
일찍이 이질에 걸려 병이 위태로워 부형이 좋은 음식으로 구호하고 자하였으나 울면서 먹지 않았다. 13세에 처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억력이 좋아 논어을 읽고 난 뒤 책을 덮어 놓고 외우는데 한구도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이로부터 경사와 제자백가의 학문이 큰 강물이 흐르듯 하고, 문예가 빛이 났다.
경자년(1660년 현종1) 38세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분관되었다. 일찍이 진주문서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과 서로 논변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문학하는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그로부터 조정의 명망있는 사람들이 다투어 공과 교제하기를 바랐다.
*참고
(과거시험장에서 있었던 일)
지촌은 기억력이 뛰어나 일찍 향시에 합격했지만 어쩐 일인지 대과에는 거듭 실패하였다. 선생이 문과에 급제한 것은 38세로서 비교적 늦은 편이다.
35세 때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재종질이 되는 사람과 함께 서울에 왔더니 당시 시험 감독관이 고향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지촌이 오랫동안 문과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도움을 주려고 했다.
즉 “그대들이 시험지에 모종의 표시를 해 두면 내가 한번 일을 꾸며 보겠노라.”하는 것이었다. 공은 “이렇게 해서 과거에 급제한들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라고 하면서, 제안을 거절하였다.
임인년(1662년 현종3)에 제원도 찰방으로 나갔다가, 을사년(1665년 헌종6)에 성균관 전적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고, 얼마 되지 않아 사헌부 감찰이 되고, 겨울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다음해 다시 예조좌랑이 되고, 정미년(1667년 현종8)에 옥구현감으로 나갔다. 정사를 보살핌에 있어 공평함과 신뢰와 삼가 함을 지키니 얼마가지 않아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장령 윤형성이 사람을 보내 그의 종과 관련있는 송사에 대하여 그 주인의 이름과 관직을 들먹거리며 위협하자, 공이 말하기를 “일을 처리함에 있어 법에 의 할 뿐이니 너의 주인의 관작이 무슨 소용이냐“ 하며 들어 주지 않았다. 이 일로 윤아무개 장령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어떤 사람이 윤형성에게 말하기를 “ 김 모는 맑고 대쪽 같은 사람인데 옛사람 보기가 부끄럽지 아니한가? 그대가 대각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처럼 비루한일을 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하니 윤형성의 얼굴이 붉어지며 아무 소리도 못하였다.
* 참고
45세 되던 해에 전라도 옥구(沃溝) 현감이 제수되었다. 부임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지방에 사는 오씨와 문씨 간에 큰 송사가 있었다. 지촌은 양측을 모두 옥에 구금하고 심문하였다.
문씨 측은 4형제였으므로 각각 따로 넣어 서로 모의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 결과 문씨 형제들의 말이 각각 달라 그들의 주장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자세히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도 감사는 문씨 측의 사주를 받아 이를 묵살하고 오씨 측에 죄를 주려고 했다.
지촌은 굽히지 않고 감사에게 자신의 진심을 주장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해마다 하는 직무 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기유년(1669년 헌종10)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지극히 슬픈 중에도
상례를 치름에 있어 예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다. 임자년(1672 헌종13)
새 어머니 남씨의 상을 당해서도 거성예절이 前喪과 다름이 없었다.
을묘년(1675 숙종1)에 평안도 도사가 제수되자, 대신들이 문사를 외직으로 보낼 수 없다고 주청하여, 체직되고 가을에 다시 예조 좌랑 겸 춘추관 관원이 되고, 병조정랑을 거쳐 겨울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진년(1676 숙종2)에 사간원 정언이 제수되니 좌의정 권공이 참판 박정설(당시 박정설은 사헌부 장령이었다)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김방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는가? 그는 지금의 사람이 아니니 그대와 같이 사헌부에 있으니 범사를 처리함에 있어 가히 법에 따라 처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네“하였다.
여름에 사간원 정언이 제수되고, 가을에 병조정랑으로 옮겼다.
일찍이 입시하니 임금이 손 까락으로 공을 가르키며 “그대는 그 전 대간(臺諫)이 아니더냐? “ 하니 이는 임금이 대간 직을 바꾼 것을 안타가워 함 이였다. 겨울에 사헌부 장령이 제수되었다. 정사년(1677년 숙종3) 장령으로 시폐에 대한 상소를 올리니. (주2)참고. 조정에서 헐뜯는 사람이 많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정언을 바꾸어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가을에 영광군수로 좌천되니, 미수 허 선생이 편지를 보내와 탄식하기를 근래 조정의 상황이 좋은날이 없고 바른 말하는 사람은 모두 외직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영광에 부임하여 깨끗하고 염결하게 다스리다가 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 올 때 가지고온 물건은 담복화(薝蔔花) 화분 하나 밖에 없었다.
기미년(1679년 숙종5)에 사간원 헌납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경신년(1680년 숙종6)에 홍문관 수찬이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얼마 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공은 강호에 물러나 천석암학(泉石巖壑)의 경치를 즐기며,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고, 고기 잡는 어부와 나무하는 자들과 같이 어울렸다.
기사년(1689년 숙종15)에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기사환국) 공에게 부수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와 더불어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3월 사헌부 장령이 제수되고, 4월에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갈암 이현일은 사헌부 장령이다)
종부시 정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가을에 홍문관 수찬이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허심(虛心)으로 정성을 나타내고, 극진한 말을 용납해 받아들이심은 진실로 옛 성왕(聖王)에게 양보하실 것이 없으나, 큰 의논이나 큰 시비(是非)에는 도리어 어기고 거절하시며 시일을 끌고 넘겨서 공론(公論)을 펴지 못하니, 어떻게 국가가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비답(批答)에 나라를 근심하고 사랑하여 진계(進戒)하였다는 말로써 포장하였다.
12월 홍문관 부응교로 승차하여 임금의 구언에 대하여 차자를 올려 9개항으로 폐단을 지적하였다. 다시 사간이 제수되었다.
경오년(1690년 숙종16) 1월에 돌아와 다시 부응교가 되고, 2월 통정대부에 가자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승정원일기 이날 승정원에 출근한 위의 명단을 보면 승지 6명중 도승지 신후재는 휴가 중이고, 좌부승지 오시만은 병으로 출근하지 않았고, 좌승지 김빈, 우승지 이식, 우부승지 김성구, 동부승지 김방걸이 출근하였다. 승지 6명중 4명이 출근하였는데 이중 3명이 의성김씨였다
* 당시 좌승지 김빈(金빈)1621년(광해군13)~1694년(숙종20)
은 호가 갈천(葛川)이고, 시통(是捅)의 아들이며 (생부는 시진(侍振))
남악 복일(復一)의 증손자로 효종(孝宗) 8년(1657)대과에 급제(37세)
도승지, 예조참판에 이름. (예천 금당실. 반송재고택)
* 우부승지 김성구(金聲久)1641(인조 19)∼1707(숙종 33)는 호가 팔오헌(八吾軒)이고 부호군 추길(秋吉)의 아들이고, 개암 우굉(宇宏)의 현손으로(해저의 입향조)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29세), 호조참의, 강원도관찰사에 이름
* 동부승지 지촌 이였다 1623(인조 1)∼1695(숙종 21).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급제. (38세)
지촌은 2월 2일에 동부승가 제수되고, 2월3일부터 3월 3일 까지
승지로 제임 하다 가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승지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해 여름에 병조참지가 제수되고, 겨울에 병조참의가 제수되었다.
임신년(1692년 숙종18)에 다시 병조참지가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왔다. 바로 예조참의가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여름에 사간원 대사간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계유년(1693년 숙종19) 가을 성균관 대사성이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이때 조정의 상황이 멀지않아 참람한 일이 발생 할 것 같아 공이 심히 걱정을 하였다. 겨울에 사간원 대사간으로 불렀으나, 바꾸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갑술년(1694년 숙종20)병조참의 병조참지가 되었다.
숙종20년 숙종이 장희빈을 두둔한 남인 정권을 실각 시키고.
노론을 다시 불러들인 소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기사환국 때 우암 송시열을 비방하고, 당시 영의정 김수항을 탄핵에 앞장섰던 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크게 다쳤는데 공은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타계 하였다.
48)김학배(金學培) 1628년(인조 6, 무진)∼1673년(현종 14, 계축). 안동 임하
현종(顯宗) 4년(166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19/33)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4위(94/100)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운암 명일(明一) 후손. 조부는 시경(是㯳). 아버지는 할옹(豁翁) 암(黯).
승문원에 분관되어 전적. 예조좌랑을 지내고.
1668년 성균관 안에 경서교정청(經書校正廳)이 새로 설치되자 이단하(李端夏)·김만중(金萬重)·박신(朴紳)·홍도(洪覩) 등과 함께 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671년 고성현감(固城縣監)으로 나갔는데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는데, 공이 정성을 다하여 진휼(賑恤)하였으며, 조치를 취하는 것이 모두 조리가 있어 온 경내에 굶어 죽을 염려가 없게 되니, 고을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한 친구가 마침 이웃 고을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도대체 무슨 덕정(德政)을 행하였기에 이처럼 원근(遠近)에서 칭송을 하게 만드는가?” 하였다
경절사(景節祠)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금옹문집》이 있다. 「墓碣銘」(權瑎 撰)
초취(初娶) 흥해 배씨(興海裵氏)는 학생(學生) 택전(澤全)의 따님이며,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 용길(龍吉)의 손녀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세빈(世鑌), 세월(世鉞)이다. 계실(繼室)은 개성 고씨(開城高氏)로서 선무랑(宣務郞) 이절(爾節)의 따님이며, 풍기 군수(豐基郡守) 상안(尙顔)의 손녀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세순(世錞)이고 막내는 세용(世鏞)이며, 장녀는 통덕랑(通德郞) 이보(李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士人) 권덕수(權德秀)에게 시집갔다.
49)김중남(金重南) 1636(인조 14)∼1698(숙종 24). 거주지 성주(星州)
현종(顯宗) 7년(166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8)
현종(顯宗) 7년(166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21위(26/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휘(德輝), 호는 경재(敬齋).
관석(關石) 후손 아버지는 참봉 시숙(是熽)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로 석담 윤우(潤雨)의 딸이다.
1651년(효종 2)에 교서관저작·박사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 참례도찰방(參禮道察訪)·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단성현감을 지냈으며, 1680년 봉사(奉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82년 자인현감을 지냈는데, 이 때 선정을 베풀어 단성과 자인에 아직도 그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그는 집에서는 효친과 애경으로, 관직에서는 충군과 애민으로 일관된 도학정신으로 교화정치에 힘썼다. 저서로는 『경재집』 2권 1책이 있다.
50)김계지(金啓址) 1614년(광해군 6) 거주지 평안도 용강(龍岡)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평안도별시(平安道別試) 병과(丙科) 2위(4/4)
효종(孝宗) 2년(165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8위(23/100)
조부는 덕남(德男) 아버지는 종일(宗一)
찰방과 성균관직강을 역임. 여지도서 용강인물록에 수록
찬성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과 고 참판 김정국(金正國)의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현종이 특명으로 오산서원(鰲山書院)이라고 사액 받았다.
○ 平安道龍岡進士金啓址等上疏。大槪, 爲文敬公慕齋金安國, 思齋金正國書院, 請額事。入啓。승정원일기
51)김성구(金聲久) 1641(인조 19, 신사)∼1707(숙종 33, 정해). 안동 해저 입향조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郞]위(3/33)
현종(顯宗) 3년(1662)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53위(83/100)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 또는 해촌(海村).
고조부는 부제학 우굉(宇宏) 증조부는 득가(得可) 조부는 률(瑮) 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 추길(秋吉). 외조부는 유화(柳華) 처부는 권목(權霂)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무안현감·직강·지평·수찬·정언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상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 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정의현감(旌義: 지금의 제주도) 으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헌납·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 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공은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안동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장달수가 쓴 팔오헌 선생교유인물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부인 안동권씨는 참봉 목(霂)의 따님으로 충정공 충재 선생의 5대손으로 19세에 시집와서 63세로 돌아가셨다.
* 장남 여건(汝鍵)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고。
* 아들 경찬(景澯)은 生員이고。경한(景漢)이고,경헌(景瀗)은 進士이고。경진(景溫)도 進士이다。* 사위는 박명제(朴命濟)와,이증실(李增實)이다.
* 차남 여용(汝鎔)은 生員이고。
* 아들은 경잠(景潛)이고,경잠(景漸)이고,경심(景沉)은 文科에 급제。
* 사위는 김상진(金尙晉)이고,이사중(李師中)이고。막내는 아직 미행이다
* 삼남 여당(汝鏜)은 進士이고。
* 아들은 경린(景潾)이고。경수(景洙)이고,경필(景泌)은 生員이다。
* 사위는 이수홍(李守弘)이고。둘째 딸은 미행이다。
* 사남 여병(汝鈵)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어서 둘째형의 아들 경잠(景漸)을 후사로 하였다.
* 사위는 선비 조해(趙瀣)이니,(본관은 풍양, 호는 소헌(疎軒) 검간 정(靖)의 현손)
* 아들은 시경(時經),흠경(欽經),선경(善經),이경(履經),인경(麟經)이고。
* 사위는 이홍인(李弘仁)이고. 사위는 조경회(曹景淮)이고。막내는 未行이다.
* 사위 홍서구(洪瑞龜)는 생원이고,사위는 정의호(鄭宜瑚),柳濡이다。
(주: 홍서구(洪瑞龜) 본관은 부림. 자는 국진(國珍). 아버지는 주부 상민(相民).)
52)김덕제(金德濟) 1640년(인조 18) 거주지는 지례(知禮)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9/34)
자는 경언(經彦)
용초(用超) 후손. 조부는 여권(汝權) 아버지는 호(鎬)
숙종 3년 성균관 학정. 숙종 4년 오수찰방(獒樹察訪) 숙종 7년 성균관전적.
숙종 15년 예조좌랑. 만경현령(萬頃縣令)
귀호세전(龜湖世典)에 만경공유고(萬頃公遺稿)가 있다(문집 서문은 심산 김창숙이 지었다)
53)김여건(金汝鍵) 1660(현종 1, 경자)∼1697(숙종 23, 정축). 안동 해저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9/39)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자는 천개(天開). 감사 팔오헌 성구(聲久)의 장자.
외조는 安東 권목(權霂). 妻父는 이휴명(李休命.)
28세에 생원시에 합격과 동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다음해인 숙종 14년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되어 승정원가주서 다음해 1월 병좌좌랑이 되고 그해 윤 7월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바로 사헌부지평이 제수되었다.
숙종 18년(1692) 세자시강원 사서(司書) 되고 숙종 19년(1693)에는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홍문관수찬(修撰)이 제수되었다.
1690년 정언으로 재직중 세자책봉하례(世子册封賀禮)에 참석하지 않은 영돈령부사 조사석(趙師錫)을 “교만하고 인신(人臣)의 예(禮)가 없다.”고 탄핵하여 귀양보냈다.
그런데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숙종의 미움을 받아 실각하고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당하여 명천(明川)으로 귀양갔다. 詩文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북천록 北遷錄》과 잡저(雜著)가 전한다.
숙종 23년 공이 타계하자 시종신을 지냈으므로 조정에서 부의를 하였다.
1697년 (숙종 23) 9월 24일 (신축) 승정원일기
禮曹에서 金汝鍵이 사망하였다고 아룀
○ 吏曹[禮曹], 前正言金汝鍵身死, 曾經臺侍。啓別致賻。
54)김세흠(金世欽) 1649년(인조 27, 기축)∼1720년(숙종 46, 경자) 안동 천전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5위(35/39)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6위(86/100)
자는 천약(天若), 호는 칠탄(七灘).
귀봉 후손. 증조부는 시주(是柱) 조부는 임(恁)이고, 아버지는 주부(主簿) 삼기(參基)이며, 어머니는 김광수(金光遂)의 딸이다.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수곶 14년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되어 1689년(숙종 15) 승정원주서가 되고 숙종 17년 성균관전적, 예조좌랑, 숙종 19년(1693) 홍문록·도당록에 올랐다.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698년 교리(校理)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소를 올렸다. 1707년 수찬으로 상소가 지나쳐 장벌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관작을 삭탈당하고 흥양(興陽)에 유배되었고, 1712년(숙종 38)유배에서 풀려나서는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하였다. 筆法이 ‘古高蒼勁’하여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즐겨 썼음.
‘義城金氏 三學士’ 중의 한 사람. 저서:『長皐世稿』
55)김세호(金世鎬) 1652년(효종 3, 임진)∼1722년(경종 2, 임인). 안동 천전
숙종(肅宗) 16년(169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22/40)
숙종(肅宗) 7년(168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9위(99/100)
자는 경백(京伯). 호는 구주(龜洲).
운천 용(涌)의 현손. 증조부는 시건(是楗).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익기(益基). 외조부는 박희문(朴希文). 장인은 권이시(權以時)
숙종 18년 1월 승정원 가주서가 되고 숙종 19년 3월 승문원 정자가 되고 그해 4월 자여도찰방으로 나갔다가 숙종 20년 2월에 예문관검열(檢閱)이 되고 숙종 29년 강원도사. 숙종 36년 병조정랑 숙종 37년 전라도사을 역임하였다
종형 세흠(世欽), 창석(昌錫)과 동시에 이름을 드날려 ‘義城金氏 三學士’로 칭해졌다
경사, 음양, 복서(卜筮)에 정통했으며, 문장은 격조가 높고 건실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金石文의 一人’이라고 推重하였다
세고인 장고세고(長皐世稿)에 유고가 수록되어 있다.
56)김창석(金昌錫) 1652년(효종 3, 임진)∼1720년(숙종 46, 경자). 안동 천전
숙종(肅宗) 16년(169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4위(24/40)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2위(17/100)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몽선도인(夢仙道客).
운천 용의 현손. 조부는 임(恁) 아버지는 일류당(一柳堂) 이기(履基). 어머니 파평윤씨는 충의위 탕빙(湯聘)의 따님이다. 처부는 진사 심정현(沈挺賢)이다
숙종 15년 특명으로 전시에 직부되어 다음해(숙종 16) 식년시에 급제하여 10월에 제원찰방(濟原察訪)이 되고 숙종 19년 2월 성균관전적, 6월 호조좌랑이 되고 7월 알성 무과 초시의 참시관이 되고 10월에 사간원 정언이 되고 숙종 20년 1월 충청도사가 되고 그 뒤 강원도사를 역임 하였다
詩•書•畵 삼절로 일컬어졌고, 더욱 글씨는 조맹부의 松雪體가 묘경에 이르렀다.
‘義城金氏 三學士’ 중의 한 사람이다.
세고인 장고세고(長皐世稿)에 유고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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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김경침(金景沈):1700(숙종 26, 경진)~ 1732년(영조8) 해저 33세 졸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9위(19/44)
자는 중묵(仲黙). 호는 송와(松窩).
조부는 관찰사 성구(聲久) 아버지는 생원 여용(汝鎔) 외조부는 조덕윤(趙德胤)
숙부는 문과급제 수찬 여건(汝鍵)
영조 3년 1월 승정원 가주서. 4월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
58)김극령(金極齡) 1694년(숙종 20)~1764년(영조 40) 예천
영조(英祖) 5년(172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7/41)
증조부는 의금부도사 극계(克繼) 조부는 판결사 주(迬) 아버지는 통덕랑 이표(爾標) 외조부는 김하(金㵑)
영조 6년 가주서. 정조 7년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 저작 박사를 거쳐 영조 10년 1월 사헌부감찰. 영조 11년 병조좌랑. 황해도사(爲黃海都事) 역임
영조 11년 증광시에 영남 사람으로 급제한 사람은 다섯 명으로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학음(鶴陰) 김경필(金景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이다
59)김성탁(金聖鐸) 1684년(숙종 10, 갑자)∼1747년(영조 23, 정묘). 안동 천전
영조(英祖) 11년(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1위(4/42)
숙종(肅宗) 37년(17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1위(41/100)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증조부는 표은 시온(是榲) 조부는 방열(邦烈) 아버지는 태중(泰重)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호군 여만(如萬)의 딸이다. 처부는 務安 박진상(朴震相)이다
김태중(金台重), 갈암 이현일(李玄逸), 밀암 이재(李栽)에게 수학.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인근의 각광을 받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창의소(倡義所)에서 토역문(討逆文)을 각 지방의 유문(儒門)에 보내어 의병에 가담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인하여 안핵사(按覈使)의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었다.
1734년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伯)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용되어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를 역임하였다.
또한 상소하여 치국평천하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이현일(李玄逸)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 정의(旌義)현에 유배되었고, 그 뒤 광양으로 이배되어 배소에서 타계하였다.
문장가로 조정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였다.
저서로는 《제산문집》『隨見雜錄』『漫錄』『知非錄』이 있다.
(장달수가 쓴 제산선생교유인물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60)김경필(金景泌) 1701(숙종 27, 신사)~ 1748년(영조24) 해저
영조(英祖) 11년(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6위(9/42)
영조(英祖) 2년(172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위(34/100)
자는 원중(源仲). 호는 학음(鶴陰).
조부는 관찰사 팔오헌 성구(聲久) 아버지는 여당(汝鏜)
영조 12년(1736) 3월 승정원가주서. 1743년(영조 19) 9월 황산찰방(黃山察訪)
영조 20년 10월 성균관전적, 영조 21년 1월 예조좌랑. 영조 24년 병조좌랑이 되엇다. 정조 21년 윤 6월 15일 아들 한동(翰東)이 전라감사가 되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다. 묘갈명은 입재 정종로 찬하였다.
61)김한로(金漢老) 1704년(숙종 30)
영조(英祖) 17년(174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27/37)
자는 상수(商叟)
증조부는 시정(時鼎) 조부는 용재(龍在) 아버지는 치복(致福)
외조부는 남궁숙(南宮塾) 처부는 강윤집(姜允執)
감제시에 수석하여 문과에 직부 전시되었다.
성현찰방. 성균관전적, 영조 24년 예조좌랑. 병조정랑, 영조 25년 사헌부 지평,
그 뒤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수원부사 병조참의 역임
영조 26년 3월 23일 승정원일기에
文秀曰, 且金瑋, 卽壬辰義兵將號柏巖金玏之後孫。金應濂, 卽鶴峯金誠一之後孫。李憲默, 卽先正臣晦齋之後孫也。
박문수가 아뢰기를
이번 식년시에 급제한 사람으로 김위(金瑋)는 바로 임진의병장으로 호가 백암(柏巖)인 김늑(金玏)의 후손이며, 김응렴(金應濂)은 바로 학봉 김성일의 후손(卽鶴峯金誠一之後孫)이고。이헌묵(李憲默)은 바로 선정신회재의 후손입니다(卽先正臣晦齋之後孫也)。하였다
62)김응렴(金應濂) 1710년(숙종 36)~1761년(영조 37) 거주지 영천(榮川)
영조(英祖) 26년(175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25/51)
자는 성희(聖希)
학봉 성일(誠一) 후손. 증조부는 수(燧) 조부는 두기(斗基) 아버지는 이도(以鍍) 외조부는 금치(琴緻)
승정원일기 영조 26년 3월 26일
庚午三月二十六日巳時, 上御涵仁亭。左副承旨南泰耆, 假注書金永燮, 記事官李宜哲·金聖佑, 率新恩文科一榜·武科甲乙科, 及年七十以上十五歲以下入侍。
金應濂進伏。上曰, 金誠一之幾代孫乎? 應濂曰, 六代孫也。上曰, 何以事國乎? 應濂曰, 當以誠事之矣。
영조 26년 4월 승정원가주서, 9월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 영조 29년 휘릉별검,
영조 32년 3월 사헌부감찰, 6월 병조좌랑, 8월 병조정랑, 영조 33년 4월 성균관 사예, 10월 사헌부 지평 정조 36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63)김이상(金履常) 1718년(숙종 44) 거주지는 상주
영조(英祖) 32년(1756) 병자(丙子) 정시(庭試) 병과(丙科) 4위(8/35)
자는 무숙(懋叔)
증조부는 여광(汝鑛) 조부는 경렴(景濂) 아버지는 국채(國采)
외조부는 강유해(康有楷)
영조 32년 가주서, 영조 40년(1764) 6월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영조 42년 예조정랑. 영조 51년 4월 사헌부 지평이 제수되었다.
64)김택수(金宅洙) 1714년(숙종 40) 거주지는 양지(陽智)
영조(英祖) 35년(1759) 기묘(己卯) 정시(庭試) 병과(丙科) 4위(7/11)
자는 도원(道源) 아버지는 김주령(金舟齡)
영조 35년(1759) 8월 승정원가주서. 영조 47년 성균관 전적. 직강, 병조좌랑 역임
65)김치호(金致浩) 1744년(영조 20)~미상
영조(英祖) 50년(17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2위(32/46)
증조부는 일복(鎰福) 조부는 만웅(萬雄) 아버지는 성환(成煥)
외조부는 백이서(白以西)
관직 불명
66)김희직(金熙稷) 1742년(영조18)~1797년(정조21) 봉화 해저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위(13/35)
자는 공숙(公叔)。호는 표림(豹林)
증조부는 여탁(汝鐸). 조부는 경숙(景潚). 아버지는 호동(虎東). 외조부는 조선상(趙善常)
1777년(정조 1년) 승정원가주서. 정조 9년 11월 명릉별검(明陵別檢) 정조 16년 4월 홍문관수찬. 19년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교리.
67)김굉(金㙆)1739년(영조15)∼1816년(순조16) 거주지 예천(醴泉)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18/35)
영조(英祖) 49년(177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10위(40/100)
자는 자야(子野), 호는 귀와(龜窩),
오우당 근(近)의 후손. 아버지는 생원 니파(尼坡) 광헌(光憲)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49세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57세에 지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59세에 사간원정언을 거쳐 단양군수가 되었다. 62세에 세자시강원문학에서 장령, 사복사정, 경기도사를 역임, 다음해에 헌납, 집의, 교리를 거쳐 수찬이 되었다. 66세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에서 이천도호부사가 되고 74세에 가선대부에 올라 한성우윤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판이 되었다. 1781년에는 스승 대산이 졸하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고, 『영가지(永嘉誌)』 교정 작업을 주도하였다.
고을 원으로 재직 시에는 서리(胥吏)를 엄단하고 위정염간(爲政廉簡)하여 군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으며, 문학에 남달리 뛰어났고 필법이 높아 능히 한 체제를 이룰 만하였다.
68)김기찬(金驥燦) 1748년(영조 24)~1812년(순조 12) 거주지 선산(善山)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3/33)
자는 덕여(德汝) 호는 동곽(東郭)
학봉 성일(誠一) 후손. 증조부 이현(以鉉) 조부는 몽해(夢海) 아버지는 주훈(柱勳) 외조부는 홍대희(洪大熙)
1777년(정조 1) 가주서. 정조 10년 성균관전적, 정조 14년 예조정랑, 경상도사.
정조 16년 사헌부지평, 정조 18년 사간원 정언, 19년 지평, 정조 23년 이조정랑.
사헌부 지평, 1800년(순조 1) 이조정랑, 순조 3년 지평, 순조 8년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문집으로 동곽선생유고(東郭遺稿) 2권이 있고 南征錄과 東征錄이 있다.
69)김치정(金致正) 1749년(영조 25)~미상 거주지 태천(泰川)
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28/33)
증조부는 봉징(鳳徵) 조부는 명좌(命佐) 아버지는 후(垕)
관직은 예조좌랑을 지냈고 순조 28년(1828)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70)김한동(金翰東):1740(영조 16, 경신)∼1811(순조 11, 신미). 봉화 해저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9/60)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증조부는 관찰사 팔오헌 성구(聲久) 조부는 여당(汝鏜) 아버지는 좌랑 경필(景泌).
외조부는 정주현(鄭周賢)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1781년(정조 5) 경릉참봉이 되고 사헌부 감찰이되고 1787년 대륜차(大輪次: 과거의 불합격자에게 다시 보이는 시험)에서 부(賦)에 수석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았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부교리·지평·정언을 거쳐, 1791년 헌납이 되어 수해를 당한 영남지방 재해민의 기곤(饑困)함을 들어 환곡(還穀)의 환수를 연기하여줄 것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수찬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1794년에는 순천부사를 지냈다.
1796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가 1799년에 다시 대사간에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승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저서:『臥隱集』
다산 정약용과 친분이 두터워 다산집(여유당전서)에 많은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정재 류치명이 묘갈명을 지었다.
71)김희성(金熙成) 1742(영조 18, 임술)∼1804(순조 4, 갑자). 봉화 해저
정조(正祖) 14년(179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위(13/47)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33위(63/100)
자는 성지(成之). 호는 해은(海隱).
고조부는 관찰사 성구(聲久). 증조부는 여건(汝鍵). 조부는 경한(景漢). 아버지는 회인현감 택동(宅東). 외조부는 식산 이만부(李萬敷)이다.
정조 13년 9일제에 장원하여 전시에 직부되어 다음해 증광시에 급제
종부시 주부가 되고 1803년(순조 3년)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다음해 타계하였다.
72)김희락(金熙洛) 1761년(영조 37, 신사)∼1803년(순조 3, 계해). 봉화 해저
정조(正祖) 18년(1794) 갑인(甲寅) 정시(庭試) 병과(丙科) 18위(21/50)
정조(正祖) 16년(17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2위(72/10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명(叔明). 호는 고식헌(故寔軒).
고조부는 감사 팔오헌 성구. 증조부는 수찬 여건. 조부는 참봉 경온.
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증직된 두동(斗東)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로 유세원(柳世源)의 딸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92년(정조 16) 사마시에 합격, 몇 달 뒤에 도산(陶山)에서 특별히 과거를 실시 하였는데여기에서 장원하여 전시에 직부 되어 정조(正祖) 18년(1794) 문과에 급제하여 바로 규장각 초계문신(講製文臣)으로 뽑혀 그의 족형인 갈천 김희주(金熙周: 뒤에 참판을 지냈다)와 함께 궁중을 출입하며 여러가지 과제(課製)와 《사서》 조대(條對)에서 자주 장원하였다.
1794년에서 1800년 사이에 삼조(三曹)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을 지내는 동안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말년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자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정조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많은 강제문과 응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편수관으로서 《해동인물고(海東人物攷)》‧《영남명신록》‧《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고식(故寔)》 5권 3책이 있다.
73)김희주(金熙周) 1760년(영조 36)∼1830년(순조 30). 봉화 해저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9/49)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목(公穆), 뒤에 왕명에 의하여 성사(聖思)로 고쳤으며,
호는 갈천(葛川).
내성 망도리(乃城望道里)출생.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시동(始東)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효술(孝述)의 딸이다.
처음에는 권사민(權思敏)에게 수학하였으나 뒤에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를 거쳐, 1795년 단풍정친시(丹楓亭親試)에 합격한 뒤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병조와 예조의 좌랑과 정랑 등을 지냈다.
또한 영해부사·안주목사·우승지·형조참판·한성좌윤·사간원대사간·함길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798년 홍문관교리 때에는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고, 1800년에는 교리에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안악군수(安岳郡守)로서 교육제도가 부실하여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여, 사재(私財) 수백냥을 투자하여 강소(講所)를 신축, 군내의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만년에 재산(才山)의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덕봉(德峰) 아래에는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서 자제들의 교육에 힘썼다.
(장달수가 쓴 갈천선생교유인물록에 자세하다)
74)김호운(金虎運) 1768년(영조 44)∼1811년(순조 11) 안동 천전
순조(純祖) 9년(1809)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1위(4/43)
순조(純祖) 4년(180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5위(85/100)
자는 치길(穉吉)이고, 호는 우간(雨澗)이며, 초명은 김적운(金迪運)이다.
구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으로, 부친 김시홍(金始弘)과 모친 신사주(申思柱)의 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고(雨皐) 김도행(金道行)‧동암(東巖) 유장원(柳長源)‧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8세 때부터 시구(詩句)를 지었다.
1809년(순조 9)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이후 경학(經學) 및 예학(禮學)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예설(禮說)에도 조예가 깊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 『우간문집(雨澗文集)』 6권 3책이 있는데, 1872년(고종 9)에 김진린(金鎭麟)‧김진기(金鎭麒) 등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서(書)에는 스승 김도행‧유장원과 상례(喪禮) 및 『심경(心經)』의 내용에 대해 여러 주석들을 인용하여 문답한 내용이 있다. 잡저(雜著)에는 『대학(大學)』‧『심경(心經)』‧『중용(中庸)』 등의 경전의 내용에 대해, 강록(講錄)하고 차의(箚疑)한 글들이 있다. 또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심통성정설(心統性情說) 등과 같은 성리학의 주요논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기록한 글 등이 있다.
75)김낙례(金樂澧) 1786년(정조 10)~미상 거주지 평안도 용강(龍岡)
순조(純祖) 15년(1815) 평안도별시(平安道別試) 갑과(甲科) 1[壯元]위(1/7)
순조(純祖) 14년(1814) 갑술(甲戌)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3위(43/100)
증조부는 섭(涉) 조부는 표로(彪老) 아버지는 성(珹)
순조 15년 성균관 전적이 제수되고 순조 19년 예조좌랑, 호조정랑이 되고
순조 22년 사헌부 장령이 되고 순조 23년 병조참의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76)김서(金瑞) 1769년(영조 45)~미상 거주지는 의성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3/39)
증조부는 우용(宇容) 조부는 광언(光彦) 아버지는 정신(鼎臣) 외조부는 신태중(申泰重)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77)김용락(金龍洛) 1795년(정조 19, 을묘)∼1864년(고종 1, 갑자). 안동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5위(35/39)
자는 여운(汝雲). 호는 춘고(春皐).
학봉선생 손자 시권 후손 진국(鎭國)의 아들.
순조 19년 성균관 학유로 분관되고 순조 21년 율봉찰방(栗峰察訪)이 되고 그후
순조 28년 사헌부 감찰, 순조 23년 정언, 순조 34년 홍문록에 올라 헌종 1년 홍문관교리가 되어 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水原留守徐能輔에 내리는 교서를 지었다.
헌종 5년 사간원 헌납,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뒤에 병조참의·참지·승정원동부승지를 역임했다.
묘갈명은 서산 김흥락(金興洛)이 지었다
78)김두명(金斗明) 1789년(정조 13) 거주지는 순흥
순조(純祖) 25년(182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48)
증조부는 경한(景漢) 조부는 택동(宅東) 아버지는 희용(熙鏞)
순조 26년 교서관정자. 순조 27년 오수찰방(獒樹察訪) 순조 31년 성균관전적, 32년 예조정랑, 사헌부장령 헌종 4년 사헌부 장령(이때 지평은 만회 김건수였다)으로 불렀으나 부임하지 않자 자인현감(慈仁縣監)이 제수되었다.
79)김여서(金驪書) 1789년(정조 13)~1837년(현종 3) 봉화 해저
순조(純祖) 27년(1827) 정해(丁亥) 정시(庭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28)
증조부는 경온(景溫) 조부는 진동(鎭東) 아버지는 희질(熙質)
외조부는 정래성(鄭來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순조 27년(1827) 승정원가주서, 승문원부정자로 분관되고 순조 31년 사헌부감찰, 사간원 정언 헌종 2년 사헌부 지평 헌종 2년 6월 양산군수가 되었으나 헌종 3년 2월 타계하였다.
80)김규서(金奎瑞) 1798년(정조 22) 거주지는 청주
순조(純祖) 27년(1827) 정해(丁亥) 정시(庭試) 병과(丙科) 22위(26/28)
사재(思齋) 김안국(金安國)의 9대손. 조부는 달현(達玄) 아버지는 유성(維城)
헌종1년 지평을 거쳐 헌종 14년 사헌부 집의를 역임했다
81)김건수(金建銖):1790(정조 14, 경술)∼1854(철종 5, 갑인). 봉화 해저
순조(純祖) 30년(1830) 경인(庚寅) 정시(庭試) 을과(乙科) 1[亞元]위(2/5)
자는 공립(公立), 호는 만회(晩悔).
관찰사 성구(聲久)의 6대손. 조부는 지평 희성(熙成) 아버지는 호군(護軍) 재인(在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종해(宗海)의 딸이다. 가학을 이어받았다.
급제, 2년 뒤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고, 1834년 명릉별검(明陵別檢)에 제수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2월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때 왕명을 받들어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수찬·장악원판사·현풍현감 등을 지냈다. 현풍현감에 재직하면서 아울러 창녕·청도·양산·영산의 4군을 다스릴 때, 밀양포(密陽浦)에 육로로 수송해온 세미(稅米)를 둘러싸고 밀양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자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1847년(헌종 13) 다시 지평에 제수되었고, 홍문관응교·김해부사·승정원우부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한때 경연에서 임금에게 정치의 요체와 중농정책·교육의 진흥 등에 관해 상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만회헌문집》이 있다.
82)김우수(金禹銖):1804(순조 4, 갑자)∼1874(고종 11, 갑술). 봉화 해저
순조(純祖) 34년(18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49)
자는 내석(乃惜). 호는 학포(鶴浦).
개암, 팔오헌 후손. 증조부는 감사 한동(翰東) 생가 증조부는 감역 진동(鎭東)
조부는 진사 희소(熙紹) 아버지는 재선(在善)
정재 류치명(柳致明) 문인.
순조 34년 승정원가주서, 헌종 5년 9월 숭릉별검(崇陵別檢)이 되고 헌종 8년 7월 예조좌랑이 되고 다음해 1월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헌종 14년 1월 홍문록에 올라 4월에 홍문관 수찬이 제수되고 1849년(철종 1) 봉화현감이 제수되었다. 1852년(철종 3) 8월 홍문관교리가 되고 고종 1년 예안현감이 되고 고종 3년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종 3년 의병을 모집하는 영남 소모사가 되었고 고종 7년(1870) 당상관에 올라 돈녕부 도정이 되었다. (이때 나의 고조부 장원상(張原相)은 홍문관 교리로 재임했다)
저서로 학포집(鶴浦集)이 있다.
83)김진우(金鎭右) 1805년(순조 5, 을축)∼1861년(철종 12, 신유). 안동 검제
순조(純祖) 34년(183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26/49)
자는 국원(國元).
학봉 선생 10세 손. 증조부는 주석(柱碩). 조부는 종찬(琮燦).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수(驥壽)이고, 어머니는 선성이씨 광일(光一)의 따님이다.
1834년(순조34)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분관되고,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지내고, 헌종8년(1842) 홍문관 부교리 문신겸 선전관, 홍문관 교리가 되고, 다음해 겨울에(1843)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현풍현감으로 나갔다. 헌종11년 돌아와 사간원 정언이 되고, 다음해 수릉천봉 시 도청(都廳)이 된 후 통정대부에 올라 돈녕부 도정, 공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고, 철종 6년(1855)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된 후 사직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철종7년(1856) 영월도호부사로 나갔다. 다음해 우부승지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강원도 암행어사 이경호(李京鎬)의 탄핵으로 삭탈관직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철종9년(1858) 직첩을 돌려받았다. 이때 부친 첨추공을 위해 옛집(검재 용암고택)을 증축하였으니 부친을 편히 모시고자 함이었다. 철종11년(1860) 첨추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몸을 상하여 철종12(1861)년 3월 26일 타계하시니 향년 57세이다.
부인 숙부인 전주 류씨는 유일로 참봉이 제수된 수정재 류정문(柳鼎文)선생의 따님으로 순조 3년(1803)에 태어나 헌종3년(1837)년에 돌아 가셨으니 공보다 두 살 더 자셨고 공보다 일찍 돌아 가셨다. 아들은 헌락(獻洛)과 경락(景洛)이고 사위는 황재영(黃在英)이다.
84)김상일(金尙一) 1797년(정조 21) 거주지 태천(泰川)
헌종(憲宗) 3년(18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41)
조부는 명추(明秋) 아버지는 형보(亨輔)
관직은 성균관직강. 예조정랑을 역임했다
85)김달연(金達淵) 1809년(순조 9) 거주지 안동 검재
헌종(憲宗) 6년(18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위(34/38)
자는 이활(而活)
학봉 후손. 증조부는 생원 용찬(龍燦) 조부는 태수(泰壽) 아버지는 진락(鎭洛)
1840년(헌종 6) 승정원가주서. 헌종 15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철종 3년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86)김경흡(金慶洽) 1827년(순조 27) 거주지는 순흥
철종(哲宗) 1년(185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4위(24/40)
증조부는 태흥(台興) 조부는 중삼(重三) 아버지는 상현(相鉉)
관직은 황상찰방(黃山察訪)을 지냈다.
87)김진형(金鎭衡) 1801년(순조 1, 신유)∼1865년(고종 2, 을축). 안동 검재
철종(哲宗) 1년(1850) 경술(庚戌)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30/40)
철종(哲宗) 7년(1856) 병진(丙辰) 중시(重試) 병과(丙科) 1[探花郞]위(3/5)
자는 덕추(德錘). 호는 청사산인(晴蓑散人) 겸와(謙窩).
학봉 10세손. 연풍현감 종수(宗壽)의 아들. 외조부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의 주손인 담양부사(潭陽府使) 순암(順庵) 이헌유(李憲儒)이다.
경술년(1850년 철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바로 6품관이 제수되고, 또 바로 조봉대부(4품)가 되어 성균관 전적이 되고, 신해년(1851년 철종2)에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임자년( 철종3) 홍문관 교리겸 지제교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이 되고. 자리를 옮겨 의금부 낭청 문신겸 선전관이 되고, 다시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가 되었다.
철종 계축년(철종4) 이조판서(서기순)의 비리에 대한 상소를 올려 탄핵하자, 수찬으로 있던 남종순이 부군을 탄핵하니, 바로 삭탈관직 되어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을(7월 6일) 가서 석 달 만에 귀양에서 풀려나와, (9월8일) 홍문관 응교 지제교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으로 승진하였다. 갑인년(철종5)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고, 얼마 뒤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을묘년(철종6) 장악원 정(장악원의 으뜸 벼슬)이 되고, 병진년(철종7) 중시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특별승진을 하여 부호군이 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이 되고, 정사년(철종8)에 좌부승지가 되고, 무오년(철종9) 초산도호부사겸 초산진 병마수성독진관이 되었다. 기미년(철종10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자년(1864고종1년) 고종이 등극하자 시정의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조대비(趙大妃)의 비위에 거슬린 구절이 있어서, 삭탈관직되고,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다음해 고종2년(1865) 오월에 귀양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5세였다. 조정에서 바로 복관시켰다. 저서로는 북천록과 남천록, 청사만고 등 6권이 집에 소장되어있다.
부인아주 신씨(鵝州申氏)는 진사 신면조(申冕朝)의 따님이다. 2남 5녀이니
장남 세락(世洛)의 자는 이건(而建)이고. 차남은 회락(繪洛)이다.
사위는 이능득(李能得). 이흥로(李興魯). 권상위(權相瑋). 류병호(柳昞鎬). 박해면(朴海冕)이다
세락(世洛)은 문경공(文敬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선생의 증손자 통덕랑 이수무(李秀懋)의 사위가 되었다. 사자는 익모(翊模)이고, 사위는 권동만(權東萬)이다
회락(繪洛)은 의병활동 중 순직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하였고. 아들은 응목(應穆). 응직(應稷)이고, 사위는 김찬교(金燦敎). 이우선(李友善)이다
익모(翊模)는 독립운동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서훈 받았고, 쌍벽당(雙碧堂) 김언구(金彦球)선생의 주손(冑孫)인 진사 김응규(金應奎)의 아들 김성수(聖洙)의 사위가 되어 4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장환(璋煥)의 자는 특부(特夫)이니 돈와(遯窩) 이만손(李晚孫)의 사위로 학문이 뛰어났으나 일찍 졸하였고, 둘째아들 연환(璉煥)의 자는 기중(器重)으로 독립운동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셋째아들은 규환(圭煥)이고. 넷째아들은 서환(書煥)이고, 사위는 신태희(申泰熙)이다
현손은 상규(象奎). 용규(龍奎). 정규(政奎). 백규(白奎). 갑규(甲奎). 을규(乙奎). 규혁(奎赫)이다. 5대손은 태현(台鉉). 상현(相鉉). 두현(斗鉉). 융현(隆鉉). 준현(埈鉉). 원현(元鉉). 인현(仁鉉). 문현(文鉉). 창현(昌鉉). 호현(虎鉉). 대현(大鉉). 종현(宗鉉). 국현(國鉉). 필현(泌鉉)
진현(眞鉉)이고. 6대 주손은 영택(榮澤)이다
(규환(圭煥)은 장달수의 외조부이다)
88)김구락(金龜洛) 1835년(헌종 1) 거주지 진주(晉州)
고종(高宗) 2년(1865) 을축(乙丑)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31/43)
조부는 영기(永耆) 아버지는 사진(師鎭)
89)김우영(金羽永) 1846년(헌종 12) 거주지 순흥(順興)/ 해저
고종(高宗) 8년(1871) 신미(辛未) 정시(庭試) 병과(丙科) 4위(7/25)
고종(高宗) 7년(18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86위(116/140)
자는 경함(景咸)
6대조는 여건(汝鍵) 5대조는 경한(景漢) 고조부는 택동(宅東) 증조부는 생원 희용(熙鏞) 조부는 두명(斗明) 아버지는 진수(震銖) 외조부는 남기선(南基善)
고종 9년(1872) 성균관학유. 고종 13년 성현도찰방(省峴察訪) 고종 15년 성균관전적. 고종 17년 사헌부지평. 고종 26년 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90)김두병(金斗秉) 1849년(헌종 15) 안동 천전
고종(高宗) 13년(18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14/44)
자는 건칠(建七)
약봉 후손. 증조부는 생원 희수(羲壽) 조부는 진건(鎭健) 아버지는 규락(奎洛)
고종 17년(1880) 사간원정언. 고종 24년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홍문관교리를 역임했다.
91)김상운(金尙運) 1857년(철종 8) 거주지 태천(泰川)
고종(高宗) 16년(187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4위(44/49)
아버지는 규절(奎晢)
고종 23년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을 지내고 돈녕부 도정에 올랐다.
92)김진의(金鎭懿) 1856년(철종 7) 안동 검재
고종(高宗) 19년(1882) 임오(壬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9위(13/23)
자는 미경(美卿)
학봉 후손. 아버지는 평수(平壽)
고종 23년 사헌부 장령이되고 홍문관 교리을 역임했다.
93)김규영(金奎永) 1852년(철종 3) 거주지 안동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5위(8/46)
아버지는 원수(原銖)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94)김홍락(金鴻洛) 1863년(철종 14)∼1943년 안동 임하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27/57)
자는 우경(羽卿)이고, 호는 모계(某溪)
운암(雲巖) 명일(明一) 후손. 아버지는 진억(鎭嶷)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 김흥락이 죽자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1889년(고종 26) 응제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균관 재학 시절, 학업이 우수하여 고종으로부터 『대학(大學)』을 하사 받았다.
1894년(고종 31) 식년시 병과 17위로 문과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아갔다. 1907년(융희 1) 비서감랑(秘書監郞)이 되어 영친왕(英親王)의 가례(家禮)에서 일을 하였다. 이후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비서감기주(秘書監記注)‧선조관(宣詔官) 등을 역임하였다.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다.
유고로 『모계집(某溪集)』이 전한다.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