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정완영 선생의 <조국(祖國)>
조 국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백수 정완영 선생의 <조국(祖國)>
조동화(시인)
백수(白水) 정완영(鄭婉永) 선생은 1919년 김천시 봉산면에서 출생했다. 1941년 미발표 처녀작 <북풍(北風)>등 시조 창작을 했다하여 일경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8.15광복과 더불어 고향 김천에서 여석기(呂石基),김상갑(金相甲),배병창(裵秉昌)등과 「시문학 구락부 」창립회원으로 참가, 이듬해 동지인 「오동(梧桐)」을 창간했다. 1948년경부터 정석모(鄭石謨),박훈산(朴薰山) 등과 친하게 교유(交遊)하고, <조국>등 시조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틈틈히 국토를 순례하였다. 1960년부터 1962년에 걸쳐 청마 유치환 선생을 통해 <애모(哀慕)>,<어제오늘>,<강(江)> 등의 작품으로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추천을 완료했으며, 특히 1962년에는 선생의 최고 대표작이라 할 <조국>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한국 시조단에 그 불멸의 광채를 드러냈다. 1966년 이호우(李鎬雨), 이영도(李永道), 이우출(李寓出) 등과 함께 「영남시조문학회」를 창립했고, 1969년 문화공보부로 부터 창작지원금을 받아 첫 시조집 <채춘보(採春譜)>를 상재한 이래 <묵로도(墨鷺圖)>, <실일(失日)의 명(銘)>, <산이 나를 따라와서>, <백수시선(白水時選)>,<연(蓮)과 바람>,<난(蘭)보다 푸른 돌>, <오동잎 그늘에 서서> 등의 시조집과 <꽃가지를 흔들듯이>,<엄마의 목소리> 등의 동시조집, <나비야 청산 가자>,<다(茶) 한 잔의 갈증>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받은 상으로는 한국문학상, 가람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이 있다. 백수 정완영 선생이 우리 고유의 정형시 시조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기울였다는 사실은, 굳이 박경용 시인이 쓴 저<산이 나를 따라와서>의 발문(跋文) '이 당대 시조의 순교자적 면모'라는 찬사가 아니더라도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시조단의 상식이다. 90년대 이후 문단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 좁은 땅에 시인의 수가 물경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 시인이라는 칭호를 여기(餘技)나 악세사리로서가 아닌 자신이 한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이며, 마음 깊은 곳에 우리 시조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의 맑은 촛불 한 자루를 밝히고 가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 것인가. 인기소설가나 동화작가 가운데는 더러 베스트셀러를 내놓아 고료 수입만으로도 능히 풍요로운 삶을 꾸려간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이 시인 외에 아무런 직업도 가지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더욱이 시조라는 것이 대다수의 관심밖의 문학 장르 인데도 불구하고, 백수선생은 오로지 삼장육구라는 묵정밭에 당신이 가진 것을 몽땅 배팅하고 말았으니 실로 놀라운 경도(傾倒)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수 정완영 선생의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60년대 후반 김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인데, 모교 선배인, 지금은 소설가가 된 심형준 형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는 문학에의 걸음마를 막 시작한 터라 중앙문단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문단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심형준 형이 나를 찾아와 김천의 장정문 시인이 그 해 매일신문과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두메꽃>과 <석굴암대불>이라는 작품이 동시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긴 이야기 끝에 바로 이 김천에 정완영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다는 말을 들려 주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를 판도에 볼 때 그 분이 어느정도냐고 물으니 놀랍게도 국보급 이상이라는 대답이었다. 심형준 형의 이 단언(斷言)은 지금 생각해 봐도 내게 퍽 유익하고 정확한 정보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학교 도서관에는 시에 관한 책이래야 몇 권의 연간집이 고작이었는데, 거기서 서둘러 정완영 선생의 작품 몇 편을 찾아 노트에 옮겨 읊조리며 감격해 하던 일이 곡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후 몇몇 잡지의 독자문예를 들락거리던 인연으로 친정에 온 김남환 시인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어느 여름날 나는 흠모하던 정완영 선생을 난생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김남환 시인과 대구에서 올라온 정표년 시인도 함께였다. 버스로 직지사까지 가서 절 뒤쪽 여울에 발을 담근 채 선생은 시조 이야기를 하고 우리 셋은 주로 듣는 편으로 긴 여름날 하루를 보냈다. 그때 나눈 세세한 이야기들이야 다 잊어버렸지만 선생의 말씀 가운데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시(詩)의 경지(境地)에 관한 것이다. 곧 시에는 경지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박재삼 시인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갈래." 라고 한 시 구절의 오묘함이 그 시인의 높은 경지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그날 선생이 예로 든 시 구절들은 그 외에도 " 세상이 있는 법은 가을나무 같은 것 / 그 밑에 우리들은 과일이나 주워서 / 허전히 아아 넉넉히 어루만질 뿐이다." 나 "아직도 손끝에는 때가 남아 부끄러운 / 봄날이 아픈 내 마음 복판을 뻗어 / 떨리는 가장가지를 볕살속에 내 놓아" 등이 기억나는데 그것들은 주로 박재삼 선생의 시 구절들이었다. 그때까지 조금은 시를 쓴다 했지만 기껏 청맹과니나 다름이 없었던 나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몇 번이고 뇌이며 무릎을 쳤었다. 평범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리는 그 아슬한 구만리 장공(長空)!. 시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러한 비유의 오묘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그 놀아운 명제앞에서 나는 못내 가슴이 떨렸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정완영 <조국> 전문
보다시피 이 작품은 현대시조에서는 가장 보편화된 3수 연작이다. 초(初), 중(中), 종(終) 3장으로 이루어진 시조가 현대시조에 와서 3수로 된 연시조를 가장 많이 보편화시켰다는 사실은 거기에 어떤 필연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대목이지만, 이 작품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첫째 수에서 애달픈 사랑이 서려 마디마디 떨려오는 열 손가락으로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저어하며 조심조심 줄을 고르면, 손이 닿자말자 서럽게 우는 내 사랑하는 가얏고를 말하고, 둘째 수에서는 둥기둥하고 가얏고가 울면 초가삼간 지붕위로 달이 둥실 솟는 가장 한국적 풍경이 떠오르고, 그 소리가 더욱 자지러지면 가녀린 꽃잎마저도 격정을 못이겨 스스로 몸을 떨고 있는데, 종내는 그 애틋한 가락 속에 서러운 겨레의 모습이 연상되는 사실을 말한 다음, 끝으로 셋째 수에 이르러서는 가얏고의 가락이 채 절정에 도달하기도 전에 하늘은 멍이들고 말지만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는 가얏고이기에 그 열두줄은 굽이굽이가 다 사랑뿐인데, 어찌하여 청산(가얏고, 조국)은 말없이 학처럼 야위어 가기만 하느냐고 반문하며 끝을 맺고 있다. 우선 이쯤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조국'이라는 무거운 시제(詩題)와 '가얏고'라는 전통적 제재의 폭력적 결합의 불가사의(不可思議)다. 흔히 제목이 나오면 대개의 경우 그것이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내용이 고만고만하게 따르게 마련인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상식을 단호히 거부하고 제목과는 엉뚱하리만큼 거리가 있는 가얏고의 줄을 고르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종여일(始終如一) 악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급기야 대미(大尾)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내디디고 펼치며 마무리짓는 기법에서 우리가 익히 대해온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경지를 이 시조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이 점을 상징(象徵)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하고 싶다. 말하자면 피가 맺히도록 사랑하는 조국을 한 채의 가얏고로 동일시(상징)하여 시상을 일관되게 이끈 다음 마지막 매듭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도의 상징은 무엇에 의해 어떻게 가능했는가, 물론 이것은 백수 정완영 선생의 여타 시인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남 다른 능력의 소산이라 해서 크게 벗어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부분에 대해서 나는 조금 다른 견해를 덧붙이고 싶다. "천지가 넓다해도 탑(塔) 설 자리는 한 자리듯, 이왕지사(已往之事) 삼장육구(三章六句)에 생애를 걸었거니...."라고 한 그분 자신의 토로(吐露)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조외에는 세상의 모든 일을 도외시하는 그 놀라울 정도의 몰입(沒入)과 집중(集中)이 어느 순간 합일(合一)을 이루어 마침내 이 빛나는 명편(名篇)은 한국시조사 속에 우담바라처럼 피어났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이 작품의 장중한 톤과 그것이 주는 비장미(悲壯美)다. 이육사의 <광야>가 길지 않은 시임에도 불구하고 장중한 남성적 톤을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장엄함을 연출하고 있다. 다 알다시피 시조는 그 형식이 매우 단조로운 우리의 정형시이다. 행의 길고 짧믐의 융통성이 배제된 구속 속에서 동일한 율조 반복의 단조로움을 피하는 길은 행(行)이나 장(章)의 결구에서 적절히 맺고 풀어 변화를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게 볼 때 '내 가얏고여', '흰 옷자락', '여위느냐' 등의 결구는 가히 환상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이 작품은 우리의 감정을 숙연하게 하는 '에인,애절히,서러운,흐느껴,눈물 비친, 통곡, 멍, 피맺힌, 학' 등의 단어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셋째 수 종장 첫 구 '청산아'라는 돈호법(頓呼法)의 사용은 이 명작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청산'이라는 말은 시제 '조국'과 소재인 '가얏고'와 동일시의 대상이라고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거니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결정적 열쇠가 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말에 '-아'라는 호격조사가 붙어 연출되고 있는 돈호법이 종당에는 '여위느냐'라는 설의법과 혼연일체가 되면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장중한 비장미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정완영 선생의 시조 도처에 번뜩이고 있는, 그 마치 멋진 무늬를 연상케하는 탁월한 감각이다. 그것이 특히 두드러진 곳은 둘째 수라 하겠는데 그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라고 한 초장만 보아도 그 감각의 탁월성은 이미 넉넉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둥기둥 줄이 울면'은 청각이고, '초가삼간 달이 뜨고'는 시각으로, 이 두 감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한국적 미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라. 이런 표현은 굳이 가닥을 잡는다면 공감각(共感覺)의 범주에 든다 하겠는데, 이런 탁월한 감각은 보통의 시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완영 선생의 시조에서는 그것이 너무도 흔하게 발견된다는 점은 놀랍다. 이를테면 '천지간 어여쁜 물소리, 새소리를 만져본다.'라고 한것은 청각의 촉각화이고, '대관령 큰 포효같은 설월(雪月)보러 내가 왔다.'라고 한 것은 시각의 청각화이며, '새벽닭 울음소리가 동백처럼 떨어진다.'라는 구절은 청각의 시각화이다. 언어사용에 있어 그가 비록 내노라 하는 시인이라 할지라도 고정관념을 떨쳐 버리기란 쉽지가 않은 노릇인데, 정완영 선생은 기존의 관념을 거뜬히 일탈하여 독보적 표현을 함으로써 늘 신선한 충격을 우리에에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 정지용의 <향수>를 한국 농경시대 최후의 명작이라고들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론적 근거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고향에 이미 농경시대가 지나가 버렸다는데 있을 것이다. 정완영 선생의 조국에 나타난 우리민족의 삶의터전 역시 지나가 버린 그 농경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둘째 수의 '초가삼간'이란 말이 그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장항가는 길>이라는 단수를 보면 "길은 곧장 강으로 가고 / 그린 듯한 초가마을들 // 흰 두루막 고등어 한 손 / 석양에 홀로 장 나그네 // 내 핏줄 감기는 원경( 遠境) / 아 울꺼나, 이 무심을 ." 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조국>에 나타난 '초가삼간'은 바로 이 '그린 듯한 초가마을들'에 자리한 그러한 초가삼간이다. 첫머리에서 1948년경부터 틈틈히 국토순례를 했다고 소개를 했는데, 아마도 이 <장항가는 길>은 그 무렵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조국에 나온 '초가삼간'은 당신이 살던 고향의 그것일 가능성이 높다. 초가삼간 지붕 위에 둥두렷이 떠오르는 달이 있기 때문이다. 시조<조국>에 나타난 정완영 선생이 사랑하는 조국의 모습은 풍요롭고 희망찬 나라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럽고, 눈물을 자아내는, 그러기에 떨리는 열손가락으로 줄을 고를 수 밖에 없는 조국이다. 분단된 남북, 그 많은 젊은 목숨들을 전쟁에 앗기고도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 한없이 통곡하고 싶은, 그저 말없이 학처럼 여위어가기만 하는 그런 조국이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만경평야에 와서>라는 작품에서 당신은 "애홉다, 열루(熱漏)의 땅 / 내 조국은 날 울리고 " 라고 울면서 탄식했던가. 해외에서 축구의 빅 게임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붉은 악마로 몰려가 응원을 하는 신세대들의 영광스런 조국과는 너무도 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이 설령 구차하고 힘든 세월이었다 해도 이 시대가 미칠 수 없는 곡진(曲盡)함과 경건(敬虔)함이 가슴 한가운데 오롯이 자리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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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조에 대한 이해 내지 안목을 넓히는 뜻으로 이와 같은 시조평을 틈틈이 올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로 살아있는 고전이라 할 백수 선생님(현 95세)의 불후의 명편 조국을 싣습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정완영 선생님의 '조국' 가슴이 턱 막힙니다
어린시절 애송했던 시로 조국을 향한 애절하고도
한 맺힌 시풍이 사람 마음을 이유없이 헤집어 놓곤 했으니까요..
이럴듯 서러운 가락으로 조국을 품어내신 정완영 선생님 작품에서
더욱 성스럽고 위대하신 선생님을 뵙습니다
나라솔/송태준 선생님 해설까지 올려주셔서 감사히 감상합니다
이서윤 회장님 감사합니다.
늘 열심히 하시는 모습, 참 보기 좋습니다. 조금이나마 같이 주춧돌 놓는 작업에 동참하겠습니다.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신춘문예당선작품 조국에 대한
이처럼 치밀하고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한줄 한줄 꼼꼼이 읽으며
시조의 깊은 정서와 정신을 배워갑니다 나라솔 /송태준 선생님 성악 솜씨
두고 두고 가슴에 울려옵니다 그 울림이 시조에 대한 사랑과 창작으로 토해져 나옴을
생각하며 늘 감동과 감명에 젖습니다 시조평 자주 접하고 싶습니다 분투노력 감사함 그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