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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조문학사 개관(現代 時調文學史 槪觀) 자료실
2015.12.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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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시조문학사 개관(現代 時調文學史 槪觀)
【시조문학의 개관(槪觀)】
우리 문학의 전통으로 계승해 온 시조문학은 조선시대에 꽃을 피워 오랜 동안 정형문학(定型文學)의 한 장르로서 그 위상(位相)을 전승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조선조 말엽에는 전승(傳承)이 끊어질 정도로 작품 활동이 적어졌었다. 거기에 일본의 압박과 함께 시가문학(詩歌文學)이 아무 말살 단계에 있을 무렵, 1903년부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창작으로 인해 다시 계승의 맥을 찾게 되었다.
가조문학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전승해 온 문학 작품으로, 5천년 역사 위에서 현금 우리가 외국의 고유 문학 작품으로 내놓을 수 있는 전통문학으로서 소개해 주고, 또 자랑할 수 있는 문학 형태의 일종이다.
이러한 문학 작품의 한 장르가 오랫동안 진흙 속에 묻혀 햇빛을 못 보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우리 문학을 지키려는 힘이 약하며, 내 것에 대한 애착심과 전통문화의 가치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육당(六堂)의 작품이 창작 발표되면서부터 현대시조의 싹은 트기 시작하였고, 그 후 1910년대에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ㆍ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ㆍ요한((耀翰)ㆍ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 등의 작품이 발표되었고, 1920년대에 와서야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ㆍ가람 이병기(李秉岐)ㆍ김억(金億) 등이 현대시조의 3산맥을 이루어 현대시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노산(鷺山)의 현대시조 속에는 ‘멋’을 감득할 수 있었으며, 형태의 자유로움도 찾아보겠으며, 가람의 작품에서는 ‘우리들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격조(格調)’를 찾았고, 여기에 ‘소박한 우리 생활의 참모습’도 감지할 수 있었고, 김억(金億)의 작품에서는 ‘생활관(生活觀)의 시화(詩化)’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세 산맥의 시조작품관은 다음 세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로 인하여 현대시조 부흥기를 맞아하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때 시조문학의 이론도, 노산ㆍ가람이 주로 동아ㆍ조선, 그리고 [조선문단] 등에 발표하여 새로운 시조문학의 부흥을 부르짖고 나섰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특수한 문학의 한 집단을 가진 것이 곧 시조문학임을 자각하면서, 70년간 발달해 온 시조문학의 자취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초기(初期)의 시조문학】
현대 시조문학의 초기를 살펴보면, 1903년 싹이 트기 시작하여 1908년 이후 육당(六堂)과 춘원(春園)ㆍ요한(耀翰)ㆍ담원(薝園)의 시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사실 <백팔번뇌(百八煩惱)>의 출간은 1926년에 했지만, 1910년대를 전후하여 작품을 창작해 온 시인은 앞에 언급한 4, 5인에 불과했다.
<깨진 벼루의 명(銘)>
다 부서지는 때에
혼자 성키 바랄쏘냐?
금이야 갔을망정
벼루는 벼루로다.
무른 듯 단단한 속은
알 이 알까 하노라.
최남선의 <깨진 벼루의 명(銘)>은 고풍(古風)ㆍ고의(古意)와 회상의 안타까움 같은 시상(詩想)으로 일관된 세계였다. 여기에 비하면 춘원(春園)은 언어의 묘미를 달각(達覺)하여 자기화하면서 언어-시어의 다스림을 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의 <매월당(梅月堂)>은 고조(古調)의 풍미를 받아 현대감각으로 이식(移植)하려는 시정신이 있다. 대화체 시어의 다스림도 이 시대로서는 높은 격을 살려놓았다.
한편 주요한(朱耀翰)은 예리한 자기의 지(知)ㆍ절씨/span>(情)ㆍ의(意)에 대한 조화된 작품세계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적 감정의 요리가 잔잔한 강심(江心) 같은 품위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봉선화>에서도 똑 같은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중기(中期)의 시조문학】
시조문하그이 중기(中期)는 1920년대와 30년대, 1945년 해방까지를 넣어보았다. 1920년대에는 육당(六堂)ㆍ춘원(春園)ㆍ주요한(朱耀翰)ㆍ김억(金億)ㆍ설의식(薛義植)ㆍ박영만ㆍ담원(薝園)ㆍ노산(鷺山)ㆍ가람ㆍ양주동(梁柱東) 등의 활동이 있었고, 시조문학의 이론에 있어서는 한 줄기 꽃을 피운 듯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가람은 신시대의 문학으로서의 시조작품의 부흥을 부르짖었다. 그는 시조가 우리의 전통문학으로서의 또 다른 발전의 여지가 있음을 피력하였다.
(1) 노산(鷺山)과 가람의 세계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국학사상(國學史上)의 연구가요, 한국적 정신 선양(宣揚)에 있어 제1인자라는 점, 그리고 그의 시작품 내용과 사상면에 있어 동양적인 유교사상이 광활하게 작용하고, 그 사상이 작품 안에서 향유하고 있음을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감득(感得)할 수 있다.
노산(鷺山)의 시를 보면 첫째로, ‘기(氣)’와 ‘정(精)’ㆍ‘의(義)’의 삼위일체화(三位一體化)를 엿볼 수 있으며, 둘째로, 그의 시에서 ‘지(知)’ㆍ‘인(仁)‘ㆍ‘용(勇)’의 삼위일체화(三位一體化)도 체득할 수가 있다. 이런 사상을 현대의 한국 시인들에게서 감지감득(感知感得)할 수 있는 시인들이 없음은 곧 동양적 인 사상, 한국적인 사상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내 것’과 ‘내 정신’에 대한 결여가 반증되고 있음도 현대시에서 알 수 있다고 본다.
노산(鷺山)의 ‘기(氣)’와 ‘정(精)’ㆍ‘의(義)’의 사상, ‘인(仁)‘ㆍ‘용(勇)’의 사상, 이것은 우리들 현대인들의 생활과 정신에 있어 가장 지음적(知音的) 존재가 되어 있음은 동양의 정관적(靜觀的)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유교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근본으로 노산(鷺山)은 시작(詩作) 생활을 해 왔으며, 시 작품 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는 ‘기(氣)ㆍ정(精)ㆍ의(義)ㆍ지(知)ㆍ인(仁)ㆍ용(勇)’의 육도관적(六道觀的) 사상 배합임을 작품을 통해 볼 수가 있다.
<동해송(東海頌)>
썰물이 아침을 싣고 수평선 밖으로 나가더니
밀물이 저녁을 안아다 이 언덕에 풀어 놓나.
동해는 세월을 씹으며 번둥거리고 누웠다.
온갖 어족이랑 산호랑을 삼키고서
해와 달만은 언제나 뱉어 버리고
동해는 영원히 여기 늙지 않고 누웠다.
<동해송(東海頌)>에서 정관적(靜觀的)이면서도 그 내부에서 깊고 높게 자아의 기(氣)를 외치고 잇음을 김자할 수 있다. ‘동해는 세월을 씹으며 번둥거리고 누웠다.’는 조용한 속의 높은 기(氣)의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동해는 영원히 여기 늙지 않고 누웠다.’는 영원한 자아독상(自我獨像)과 동해와의 정관적인 대화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지혜로운 교류 속에 자기가 안립안좌(安立安坐)하고 있는 기(氣)의 세계는 노산(鷺山)의 시작세계(詩作世界)에서만이 우리가 감득할 수 있는 현대시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산(鷺山)의 시에 있어 의관세계(儀觀世界)는 허다하다. 그는 자연과 인간생활,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만흥 시의 소재 가운데서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의관세계(儀觀世界), 비유적으로 표현한 의간세계(儀觀世界)가 있음을 그의 시인다운 풍모와 시 가운데 넘쳐흘러 자리분한(自利憤恨)을 막아주고, 이끌어주고, 가리켜주고, 인지상덕(忍之相德)하게 해 주고 있는 시인의 작품이다.
<새 지도를 그려본다>
인간의 역사란 묘표(墓標)도 없는 옛 무덤
폐허의 남은 지역마저 산불처럼 타고 있다.
어디서 조종(弔鐘)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산도 끝났네. 물도 끝났네.
다만 빈 하늘 빈 바다 빈 마음
시인은 막대 끝으로 새 지도를 그려본다.
38선의 원한을 안고 살아온 한국 민족에겐 마음 밑바닥에 통일의 염원이 깔려있고, 이 염원을 위하여 우리들은 매일같이 묵상(黙想)과 기도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거천하지폐거(居天下之廢居)하고, 입천하지정위(立天下之正位)를 상상해 보지 않는 남아가 어디 있을 것인가.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흔적이나 푯말이 어디에 박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대대손손 살아온 오늘이다.
폐허의 남은 땅마저 불기둥이 타고 있는 현실 앞에 선 노산(鷺山)은 티끌 같은 자기의 존재를 이미 달각자각(達覺自覺)한 도인(道人)이었기에, 행천하지사도(行天下之士道)를 부르짖고, 빈 하늘과 빈 바다와 빈 자기 마음을 안아보는 대도인(大道人)의 풍모를 상상해 본다. 한 인간으로 돌아온 노산(鷺山)은 막대를 짚고 서서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는 순간, 그 막대 끝으로 세계의 자기 지도를 그려보는 대도인(大道人), 대시인의 위상(位相)을 상기해 본다.
<탱자꽃>
여기는 바닷가 어느 마을 탱자 울타리
가다가 주춤 서서 부질없는 그이 생각
어루만져 보는 가슴 속의 탱자꽃.
연약하고 가냘픈 꽃송이, 꽃잎에까지도 노산(鷺山)은 그냥 스치고 가질 않는다. 탱자꽃 한잎에 선심세계(善心世界)와 인관세계(仁觀世界)의 꿈을 엮고 있는 어진 마음의 표현이 충만히 넘침을 감지할 수 있다.
노산(鷺山)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이미 천재요, 암기력(暗記力)이 좋기로 이름 높은 시인이기도 하다. 고희(古稀)의 나이에도 자기가 쓴 시는 모조리 술술 외며 옛날 시작품, 고사(古事)의 인용, 선현(先賢)의 담론(談論)ㆍ시가(詩歌) 등을 기억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인(道人)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 모두가 노산(鷺山)의 지혜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갈매기’와 ‘바다’와 ‘자기’가 일체화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한 듯한 이 작품을 보아도 그의 지혜의 척도를 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 창작사상, 시 정신을 생활화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이다. 노산(鷺山)은 앞의 몇 가지의 규명에 의하여 시와 같이 생활할 수 있고, 또 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한 시인의 성장과 성숙이 어떠한 만족의 정신 방향을 지침하는 일도 된다. 한국민족은 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살아온 겨레이다. 압박도, 굴욕도, 생활도 다 같이 겪은 우리는 불안한 표류에 불안한 정착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노산(鷺山)이 살아온 동정(道程)이며, 한국인 전체가 살아온 도정(道程)이었다. 이런 생활이 거듭해 온 한국의 정신―사상의 상황은 언제나 주체의식을 잃고 살아온 지난날인데, 노산(鷺山)은 모름지기 주체의식―민족의 전통을 이어온 사상가요, 시인인 것이다.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있어 노산(鷺山)은 실로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니, 첫째는 역사적인 점에 있어서 시조 창작 50년이라는 선구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둘째는 질적인 면에서 그의 작품이 최고의 지보(地步)를 확보하고 있을뿐더러, 셋째 양적인 면으로도 1인이 2천 수(首)라는 최고의 작품수를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존재인 것이다.
우리 방으로는 창(窓)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宇宙)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이는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창(窓)>의 첫 수이다. 비약적인 표현을 시화(詩化)한 것이 성공한 작품으로 꼽히는 시조이다. <창>의 좁은 세계에서 영원에의 희귀를 연상하는 가람의 시관(詩觀)은 한국의 현실과 과학의 발전상, 한국 고유의 역사적 의식을 조화했다고 본다. 가람의 <창>이 밝은 광명의 미지세계라고 한다면, 의미면(意味面)에서 상통되는 장순하(張詢河)의 <통일대한(統一大韓)>은 자기 철학의 깊이를 가진 고조화된 시적 의미를 사긴 세계라고 보고, 민족과 역사, 자연과의 조화의 세계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조가 외면성의 운율의 세계보다 내면성의 내재율적인 면에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는 입증을 가진 작품세계이다.
가람은 농촌에서 자랐고, 농촌에서 숨을 거둔 농촌의 아들이기에 농춘을 옆에 앞씨/span>네 두고, 살다가 농촌에 조용히 묻힌 순수한 시인이다. 그는 명예도, 금욕도, 권력도 다 헌신짝같이 버리고, 던져놓은 시인ㆍ학자의 양심을 지니고 살다가 죽어간 시인이다.
<볕>
보릿잎 파릇파릇 종다리 종알종알
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던져 두고
따듯한 언덕 머리에 콧노래만 잦았다
볕이 솔솔 스며들어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
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
이 몸도 저 하늘로 동동 떠오르고 싶다
이 <볕>의 삼상(心象)에서도 흙의 사상은 그의 여우언한 고향처럼 생각하고, 일생을 살아온 시인작품마다 사용된 언어 속에는 흙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첫 수의 농촌의 봄 들판을 연상케 하는 시관(詩觀)은 관찰하는 눈과 생각이 일치되게 표현의 대상으로 표출되어 있다. 둘째 수에서는 공사상(空思想)에 자아의 공간적 존재의 의미를 시화(詩化)했고, 그 의미에 운율적인 면은 협소한 듯하다.
<볕>에 심어진 농촌 춘월의 농부와 농촌 여인들의 생활 양상이 눈에 선하게 떠오는 듯하다. 아주 쉽고 순수한 한글 전용으로 대화하듯 우려(流麗)하게 흐르는 언어의 배열 배합은 가람의 특징이며, 그의 시 구성의 기본적인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러기에 현대시조의 생활화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2) 30년대의 시조문학
1930년대는 많은 시조작가들이 활동했다. 30년대 초에는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ㆍ가람 이병기(李秉岐)ㆍ주요한(朱耀翰)ㆍ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ㆍ설의식(薛義植)ㆍ조종현(趙宗玄)ㆍ김억(金億)ㆍ박영만ㆍ김기림(金起林)ㆍ서항석(徐恒錫)ㆍ박종화(朴鍾和)ㆍ김팔봉(金八峯) 등의 작품이 주로 발표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조국애와 동포애ㆍ향수ㆍ정한9情恨)의 시세계로 일관하여 작품을 창작하였다.
<우리집 오동(梧桐)>
설의식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더니
봄이요, 기을이요, 어제런 듯 8년이라.
그래도 오는 양하여 내 못잊어 하노라.
설의식(薛義植)의 자연동화와 자아이입(自我移入)의 세계는 고조(古調)의 틀 안에서도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박영만의 시조 <춘사(春詞)>는 그가 1910년대와 20년대에 발표한 작품에 비하면 많은 발전을 했으며, 생생한 시어의 결합은 곧 그간에 자기화한 언어의 선택에서 배합된 작품세계의 구축일 것이다.
또 김기진(金基鎭: 八峯)의 <무제(無題)>는 현대화된 멋을 부려본 작품이었다. 현대 감각의 차원 높은 ‘무제’의 세계를 구축했다.
박종화(朴鍾和)의 <인생>은 인생무상을 읊어 민족적인 애달픈 정한(情恨)을 그려냈고, 시간성과 공간성의 융합 속에 인생의 허무 상념을, 그의 작품으로 능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조종현(趙宗玄)의 <인간>은 망각에로의 여로가 있고, 이 망각에의 재현이 있다. 여로와 재현의 위상 표출은 인간의 오관작용(五官作用)에 의한 직관의 힘에 대한 조력적인 체공관(滯空觀)으로 직결된다. 모든 세상 만물에 대한 체공사상(滯空思想)은 인간 본래의 본관이며, 자연내원(自然內願)의 광선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그의 시세계는 이러한 인간의 내원(內願)에 대한 일체를 체념하는 마음속에서 시적 진실이 공존공유(共存共有)할 수 있다는 증득(證得)이 시화(詩化)되어 있다.
(3) [문장]지와 동아일보
1930년대 후기에 있어서는 우리 시조문학이 양보다는 질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장응두(張應斗)의 <한야보(寒夜譜)>, 오신혜(吳信惠)의 <수양버들>, 이호우(李鎬雨)의 <달밤>, 조남령(曺南嶺)의 <창(窓)>, 조영상(趙泳翔)의 <님>, 김상옥(金相沃)의 <백자(白磁)> 등의 작품이 [문장]지 추천을 받았다. 이 중 장응두(張應斗)의 ‘실생활에 대한 안정감과 자기 수련의 발굴’, 그리고 오신혜(吳信惠)의 ‘인생을 원시(遠視)하는 자비(慈悲)와 자애로운 본성미(本性美)’와 이호우(李鎬雨)의 ‘예지로운 자아(自我)와 자연과의 동화’ 등의 세계는 1930년대 후기를 장식했다.
또 1930년 2회에 걸쳐 동아일보의 신인 시조작품 모집은 시조문학 30년대 후기를 빛나게 했다. 정문학(丁文鶴)ㆍ이호우(李鎬雨)ㆍ오신혜(吳信惠)ㆍ김상옥(金相沃)ㆍ홍영의(洪永義) 등 5명을 발굴했다. 이 중에 승려시인이던 홍영의(洪永義)의 ‘섬세하고 유미적(唯美的)인 시관(詩觀)은 영향이 컸다. 그는 1972년 10월 세상을 뜰 때까지 <아수나> <여일(余日)> 등 시조와 수필집을 발행했다.
【시조 부흥기(復興期)】
(1) 해방과 시조작가들
1945년 해방과 함께 우리는 현대시조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다시 찾고, 의사 표현의 자유를 찾았던 때문이었다. 노산(鷺山)ㆍ가람을 필두로 많은 시인들이 다시 우리 사조무학을 계승하는 데 붓을 들었다.
해방 전에 시조시인이 20여 명인데, 해방 후로는 40여 명 가까이 되었는데, 이/span>목을 끈 시조시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상경(梁相卿)의 <해방의 종소리>는 얼마나 자유의 나라, 자유의 민족을 원했던가를 알 수 있다. 강산도, 인경소리도, 한을 풀고 자유의 나래 속에 조국 산하를 울림한다는 희열에 넘친 시심(詩心)은 양상경 자신과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정훈(丁薰)의 <동학사(東鶴寺) 가는 길>은 자연의 묘미가 시조에서만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자연ㆍ인간ㆍ동물과 날짐승이 일체화를 이루고 있음을 감득할 수 있다. 백남규(白南奎)의 <백발>은 인생의 허탈감을 매혹시켜 주며, 성성한 백발은 곧 인간의 연륜의 가치를 표출, 표현시키고 있음을 내면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박종옥(朴宗玉)의 <다도해(多島海)>는 바다의 풍경을 시심이 아니면 체득, 표현키 어려운 점을 잘 다루었고, 창파와 백파의 합일화한 자연 배합의 묘미가 잘 조화되어 있다. 고두동(高斗東)의 <공간(空間)>은 배합을 위한 간결한 언어 배열로 자기를 표백시키고 잇다.
이상 열거한 몇몇 시조작가는 일제 말기에 창작 활동을 해 오다가 해방과 함께 활발히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이다.
(2) 1950년대의 시조작가
시조시인들이 1950년대에 와서는 대가족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시조문학의 부흥과 한국인의 전통문학의 관심도가 높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6ㆍ25 전쟁을 치르고 우리는 피와 눈물과 땀의 응결이 있었고, 생명과 자유와 싸움 속에서 시정신을 키운 것이 1950년대의 시인들이다. 작품 활동을 한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김영철(金永鐵)ㆍ김오남(金午男)ㆍ김창호(金昌浩)ㆍ박병순(朴炳淳)ㆍ박일송(朴一松)ㆍ박재삼(朴在森)ㆍ박종화(朴鍾和)ㆍ심혁남(沈爀南)ㆍ양상경(梁相卿)ㆍ이병기ㆍ이은상ㆍ이영도(李永道)ㆍ이호우ㆍ이응창ㆍ이태극ㆍ이항녕ㆍ오신혜ㆍ장순하ㆍ장응두ㆍ정소파ㆍ정훈ㆍ조종현ㆍ최성연ㆍ최승범ㆍ허연ㆍ홍영의ㆍ김기호ㆍ김해성 등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박병순(朴炳淳)의 <무월동방가(無月洞房歌)>는 한국적인 정한의 대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칠석 밤의 차도(次度) 높은 시심(詩心)의 농도가 비범해 가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는 시와 인간의 동일한 생활관을 가진 애국애족의 시정신을 가진 시인이다.
정기환의 여일(餘日)에의 자유자작(自由自作)을 그린 <거미>는 자성(自省)의 거울이다. 거미 같은 인간의 노력을 다시 행각케 한다. 장순하의 <통일대한(統一大韓)>은 민족정신의 발로가 응결된 작품이며, 박일송(朴一松)의 <목련화(木蓮花)>는 자비한 생활관을 표출시켰고, 최승범의 <으름>은 산의 정기(精氣)에 인간의 기력을 융합할여고 애쓴 작품이다.
이상은 1950년대 작품 중에서 골랐다. 다음은 1958년 4월 발행한 <현대시조선총(現代時調選叢)>(가람ㆍ이태극 공편)에 수록한 작가들 중에서 뽑은 것이다.
고두동(高斗東)ㆍ김기진(金基鎭)ㆍ김기호(金琪鎬)ㆍ김상옥ㆍ김상용(金尙鎔)ㆍ김억(金億)ㆍ김영진(金永鎭)ㆍ김오남(金午男)ㆍ김찬영(金瓚永)ㆍ김창호(金昌浩)김희규(金禧圭)ㆍ권덕규(權悳奎)ㆍ나운경(羅雲卿)ㆍ노자영(盧子泳)ㆍ민동선(閔東宣)ㆍ박노철(朴魯哲)박병순(朴炳淳)ㆍ박용묵(朴瑢黙)ㆍ박일송(朴一松)ㆍ박재삼(朴在森)ㆍ박종옥(朴宗玉)ㆍ박종화(朴鍾和)ㆍ변영로(卞榮魯)ㆍ백남규(白南奎)ㆍ서명호(徐明浩)ㆍ서정봉(徐定鳳)ㆍ서항석(徐恒錫)ㆍ설의식(薛義植)ㆍ신영철(申瑛撤)ㆍ심혁남(沈爀南)ㆍ안곽(安廓)ㆍ양상경(梁相卿)ㆍ양주동(梁柱東)ㆍ이광수(李光洙)ㆍ이관구(李寬求)ㆍ이병기(李秉岐)ㆍ이영도(李永道)ㆍ이은상(李殷相)ㆍ이응창(李應昌)이태극(李泰極)ㆍ이항녕(李恒寧)ㆍ이호우(李鎬雨)ㆍ이희승(李熙昇)ㆍ오신혜(吳信惠)ㆍ장순하(張諄河)ㆍ장응두(張應斗)ㆍ장정심(張貞心)ㆍ정인보(鄭寅普)ㆍ정현민(鄭顯珉)ㆍ정훈(丁薰)ㆍ조종현(趙宗玄)ㆍ주요한(朱耀翰)ㆍ최남선(崔南善)ㆍ최성연(崔聖淵)ㆍ최승범(崔勝範)ㆍ최천(崔天)ㆍ최현배(崔鉉培)ㆍ탁상수(卓相銖)ㆍ피천득(皮千得)ㆍ한용운(韓龍雲)ㆍ허연(許演)ㆍ현진건(玄鎭健)ㆍ홍영의(洪永義).
(3) [시조문학]지와 이태극(李泰極)
[시조문학]지는 한국 현대시조문학의 부흥에 있어 큰 역할을 한 터전이었다. 한편 [시조문학]지에 불평하는 분도 있지만, 많은 시조시인이 배출되었고, 훌륭한 창작 생활을 하고 있어 [시조문학]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월하(月河) 이태극(李泰極)은 사재(私財0를 털어가며 잡지의 명맥을 이어갔다.
▶[시조문학] 추천 시인들
이름 | 작품 | 이름 | 작품 |
이방남(李芳男) | <새벽의 육성(肉聲)> | 김시백(金時百) | <열원(熱願)> |
석성우(釋性愚) | <서작이수(逝作二首)> | 이영성 | <달팽이> |
유제하(柳齊夏) | <비화(秘話)> | 장지성(張芝城) | <포도밭에서> |
소재순(蘇在荀) | <가을> | 김호길(金虎吉) | <그리움> |
서벌(徐伐) | <서울> | 김교한(金敎漢) | <억세> |
김태랑(金泰郞) | <석우(石牛)의 노래> | 이정강(李靜江) | <소나기 나린 후원(後園)> |
조병기(曺秉基) | <종(鐘)> | 김제현(金濟鉉) | <경기> |
김준(金埈) | <계절> | 한춘섭(韓春燮) | <천지여 겨레여> |
조오현(曺五鉉) | <直指寺紀行抄> | 조재억(趙載億) | <농암(聾巖)에서> |
전의홍 | <제삿날> | 양동(梁棟) | <위기(圍棋) 1> |
윤금초(尹今初) | <기고백(琦告白) Ⅱ> | 박상륜(朴相綸) | <10월 나그네> |
진복희(晋福姬) | <여자와 반지> | 이환용(李奐用) | <조국> |
선정주(宣珽柱) | <하일(夏日)> | 박평주(朴平周) | <아침이슬> |
김상묵(金相黙) | <월식도(月蝕圖)> | 김동준(金東俊) | <4월마다> |
이경안(李炅晏) | <새벽뜰에서> | 이상범(李相範) | <파문(波紋)> |
이월수(李月洙) | <진양호반(晋陽湖畔)에서> | 유병규(兪炳奎) | <쑥댓불> |
유상덕(柳相德) | <적일(寂日)의 좌(座> | 이금갑(李金甲) | <신연가(新戀歌> |
이은방(李殷邦) | <남북서곡(南北序曲)> | 이준구(李俊求) | <기행시초(紀行詩抄)> |
이한성(李漢晟) | <연가(戀歌)> | 유자효(柳子孝) | <혼례(婚禮)> |
김준현(金准鉉) | <부앙저회(俯仰低徊)> | . | . |
<시조송(時調頌)>
시조가 하도 좋아 나도 얽어 보던 것이
그 벌써 한 20년 어제런듯 흘렀구나.
오늘 또 한수 얻고서 어린인양 들레라.
이태극(李泰極)의 <시조송(時調頌)>이다. 그는 천품으로나, 사고하는 모습으로나, 언행으로나 시조시인다운 천격(天格)을 갖춘 시인이다. 언제 보아도 잔잔한 강심(江心) 같고 그야말로 ‘월하(月河)’라는 아호 그대로 잔잔한 달빛 같은 사도행(師道行)의 인간상을 지닌 시인이다. 앞의 <시조송>이란 작품도 20년간을 시심(詩心)을 가꾸며, 살아온 그의 자화상 같은 시상(詩想)의 구축이다. 어린 양 같은 심정으로 어린이의 동심 같은 천신천품(天心天稟)의 어린 마음으로 하루해를 보내는 시인의 생활 양상을 엿볼 수 있다.
(4) 시조 동인지와 [창자(靑磁)]
현대시조문학의 발전상에서 더듬어보면, 순수한 시조 작품 동인지가 해방 전에는 전혀 없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종합 동인문학지는 있었다. 그래서 1925년 전주(全州)에서 가람을 주축으로 [신조(新調)] 동인지가 나왔고, 1958년 [시조문학(時調文學)]과 1964년 대전(大田)에서 황희영(黃希榮)을 주축으로 하여 [청자(靑磁)] 시조 창작 동인지가 나왔고, 1967년 대구(大邱)의 이호우를 중심으로 [낙강(洛江)]이, 1968년 진주(晋州)에서 박재두(朴績) 중심으로 [율(律)]이, 1972년 토요동인회의 [삼장시(三章詩)]와, 1970년 [한국시조연구회]가 임헌도(林憲道)ㆍ황희영ㆍ이복숙ㆍ김준ㆍ조애영(趙愛泳)ㆍ김해성 등의 참가로 이루어졌다.
동인지 중에서 [청자(靑磁)]가 10집으로 최고의 발간 호수를 이루고 있다. [청자시조문학회]는 [한밭시조동인회라]는 이름으로 발족되었다. 당시 동인들은 남준우(南駿祐)ㆍ황희영(黃希榮)ㆍ유동삼ㆍ김해성(金海星)ㆍ이용호(李瑢浩) 등이었다.
[청자] 제1집에 실린 5인 작품집은 주로 꽃을 소재로 각자(各自)의 작풍(作風)을 보여주었고, 당시 유일한 시조문학지인 [시조문학]에 맞선 최초의 동인지였다. 제2집(1965. 11)에는 임헌도(林憲道)ㆍ채희석(蔡喜錫)ㆍ이교탁(李敎鐸) 등이 가담했으며, 제3집(1966. 3)에는 이복숙이 가담해 구인회(九人會)로 제4집까지 이르게 되었다. 제5집(1966. 6)에서부터는 [한밭시조동인회]란 이름을 [청자시조동인회]라 고쳤고, 10호 발간 기념호로 출판된 <한국시조선집>(한ㆍ영 대역판)에서는 [한국시조문학회]로 개칭하여 동인회 성격을 탈피하여 본격적이고도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5) 1960년대의 시조작가들
1960년대에 와서는 [시조문학]지의 발간과 함께 일간신문(동아ㆍ한국ㆍ조선ㆍ경향ㆍ신아ㆍ서울ㆍ대한 등)에서 신춘문예 현상작품을 모집하여 많은 신인을 배출했다. 다음은 1964년 11월에 발행한 [시조문학]지의 시조시인 주소록에 오른 시인들로서 이 당시 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원은 60명이다.
고두동(高斗東)ㆍ고영(高英)ㆍ김경제(金景濟)ㆍ김기호(金琪鎬)ㆍ김민부(金敏夫)
김상옥(金相沃)ㆍ김석규(金錫圭)ㆍ김어수(金魚水)ㆍ김영진(金永鎭)ㆍ김오남(金午男)
김월준(金月埈)ㆍ김제현(金濟鉉)ㆍ김준(金埈)ㆍ김광희(金光羲)ㆍ김해성(金海星)
박경용(朴敬用)ㆍ박병순(朴炳淳)ㆍ박일송(朴一松)ㆍ박재삼(朴在森)ㆍ배병창(裵秉昌)
배태인(裵泰寅)ㆍ서벌(徐伐)ㆍ서정봉(徐定鳳)ㆍ송선영(宋船影)ㆍ심혁남(沈爀南)
양상경(梁相卿)ㆍ오신혜(吳信惠)ㆍ유성규(柳聖圭)ㆍ유태환(柳台煥)ㆍ이가원(李家源)
이근배(李根培)ㆍ이덕영(李德英)ㆍ이명길(李命吉)ㆍ이병기(李秉岐)ㆍ이상범(李相範)
이영도(李永道)ㆍ이우종(李祐鍾)ㆍ이우출(李禹出)ㆍ이은상(李殷相)ㆍ이태극(李泰極)
이항녕(李恒寧)ㆍ이호우(李鎬雨)ㆍ이희승(李熙昇)ㆍ임영창(林永暢)ㆍ장순하(張諄河)
장응두(張應斗)ㆍ전규태(全圭泰)ㆍ정소파(鄭韶坡)ㆍ정완영(鄭椀永)ㆍ정용근(鄭龍根)
정재호(鄭在琥)ㆍ정태모(鄭泰謨)ㆍ정하경(鄭夏庚)ㆍ정훈(丁薰)ㆍ조재억(趙載億)
조종현(趙宗玄)ㆍ최승범(崔勝範)ㆍ최성연(崔聖淵)ㆍ하한주(河漢珠)ㆍ허연(許演)
다음은 1972년 12월 발행한 [시조문학]지에 기록된 시조시인의 명단이다.
강인한(姜寅翰)ㆍ고두동(高斗東)ㆍ고영(高英)ㆍ김교한(金敎漢)ㆍ김기호(金琪鎬)
김경제(金景濟)ㆍ김만옥(金萬玉)ㆍ김미영(金美英)ㆍ김상묵(金相黙)ㆍ김상옥(金相沃)
김상훈(金尙勳)ㆍ김승규(金承奎)ㆍ김시백(金時百)ㆍ김시종(金市宗)ㆍ김어수(金魚水)
김오남(金午男)ㆍ김이홍(金履弘)ㆍ김영진(金永鎭)ㆍ김월준(金月埈)ㆍ김제현(金濟鉉)
김정휴(金正休)ㆍ김종윤(金鍾潤)ㆍ김준(金埈)ㆍ김준현(金准鉉)ㆍ김춘랑(金春郞)
김태희(金兌曦)ㆍ김호길(金虎吉)ㆍ김해성(金海星)ㆍ박경용(朴敬用)ㆍ박병순(朴炳淳)
박상륜(朴相綸)ㆍ박시교(朴始敎)ㆍ박일송(朴一松)ㆍ박재두(朴績)ㆍ박재삼(朴在森)
박평주(朴平周)ㆍ박항식(朴沆植)ㆍ배병창(裵秉昌)ㆍ 배태인(裵泰寅)ㆍ변학규(卞鶴圭)
서벌(徐伐)ㆍ서정봉(徐定鳳)ㆍ석성우(釋性愚)ㆍ선반주(宣班柱)ㆍ소재순(蘇在荀)
송선영(宋船影)ㆍ심혁남(沈爀南)ㆍ양상경(梁相卿)ㆍ양동기(梁棟埼)ㆍ오신혜(吳信惠)
유동삼(庾東三)ㆍ유병규(兪炳奎)ㆍ유상덕(柳相德)ㆍ유성규(柳聖圭)ㆍ유자효(柳子孝)
유제하(柳齊夏)ㆍ유태환(柳台煥)ㆍ윤금초(尹今初)ㆍ오동춘(吳東春)ㆍ이경안(李炅安)
이근배(李根培)ㆍ이금갑(李金甲)ㆍ이명길(李命吉)ㆍ이방남(李芳男)ㆍ이복숙(李福淑)
이상범(李相範)ㆍ이시영(李時英)ㆍ이영도(李永道)ㆍ이영성(李英成)ㆍ이용호(李瑢浩)
이우종(李禹鍾)ㆍ이우출(李禹出)ㆍ이월수(李月洙)ㆍ이은방(李殷邦)ㆍ이은상(李殷相)
이응창(李應昌)ㆍ이상보(李相寶)ㆍ이정강(李靜江)ㆍ이준구(李俊求)ㆍ이태극(李泰極)
이한성(李漢晟)ㆍ이항녕(李恒寧)ㆍ이환용(李奐用)ㆍ이희승(李熙昇)ㆍ임영창(林永暢)
임헌도(林憲道)ㆍ장순하(張諄河)ㆍ장정문(張正文)ㆍ장지성(張芝城)ㆍ전규태(全圭泰)
전외홍ㆍ정기환(鄭箕煥)ㆍ정덕채(鄭德采)ㆍ정소파(鄭韶坡)ㆍ정변(丁邊)
정완영(鄭椀永)ㆍ정재호(鄭在琥)ㆍ정태모(鄭泰謨)ㆍ정하경(鄭夏庚)ㆍ정훈(丁薰)
조병기(曺秉基)ㆍ조오현(曺五鉉)ㆍ조애영(趙愛泳)ㆍ조종현(趙宗玄)ㆍ조재억(趙載億)
진복희(晋福姬)ㆍ최성연(崔聖淵)ㆍ최승범(崔勝範)ㆍ최재호(崔載浩)ㆍ최진성(崔辰聖)
하한주(河漢珠)ㆍ한분순(韓粉順)ㆍ한춘섭(韓春燮)ㆍ허연(許演)ㆍ황순구(黃淳九)
황희영(黃希榮)
- 김해성(金海星) : <한국현대시문학개설(韓國現代詩文學槪說)>(을유문화사.1978) -
[출처] 현대 시조문학사 개관(現代 時調文學史 槪觀)|작성자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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