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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
2. 육체의 송사를 끝냄
2019. 11. 24. 김치현 목사
(히브리서2장14~18절)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육체의 문제 우리는 다 피와 살을 가진,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피와 살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다고 했지만 이 말은 그가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 오셨으니까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사람이셔야만 했다는 말을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의식주의 문제,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생긴다. 인간에게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육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고, 먹고 자는 시간이 삶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육체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백 년의 짧지 않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육체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생존하는데 보내야 한다. 우리 인생을 정리해서 기록해 보면 몇 줄 안 될 것이다. 생존의 문제를 빼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우리는 고기도 먹어야 한다. 우리 딸들이 동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비디오를 보고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더니 2년 만에 빈혈이 걸려서 다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려면 아주 철저하게 음식 관리를 해야 한다. 소나 사람이나 DNA를 보면 별 차이가 없는데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혀야 하는,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는데서 악이 발생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내가 살려면 남에게 해를 끼쳐야 한다. 이것은 육체가 있어서 생기는 문제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살자니까 악이 발생하고 고통이 발생하는 것이다. 꼭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재해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는지 모른다. 쓰나미가 발생해서 수십만 명이 죽고 지진이 발생해서 수천 명이 죽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우리에게 육체가 없다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육체 때문에 고통받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문제가 생기니까 ‘이런 육체를 누가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이런 육체를 만들어 놓았는가? 성경에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온다(민16:22, 렘32:27).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진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를 원망한다면 그 불만과 원망은 결국은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육체를 만들어 놓았는가? 왜 육체 때문에 아프고 병들고 고통받고 이별하는 슬픔을 겪어야 하는가? 고대의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적인 육체를 가진 사람을 만든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신들 중에서 가장 저급한 신이라고 생각했다. 육체를 저급하게 여기니까 육체를 만드신 분을 저급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육체는 저급하고 정신은 고상하다고 생각해서 육체를 극복하고 벗으려고 노력한다. 한편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차피 주어진 삶이니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육체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존 문제를 빨리 해결해 놓으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쓸 돈을 마련해 놓고 일찍 은퇴해서 여행을 다니거나 파티를 하며 즐기겠다는 것이다. 허무하고 괴로운 문제가 생기면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우리도 육체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온 집안이 어둡고 힘들다. 이런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따져보고 원망을 해야 하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 우리가 육신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창세기 3장부터 부끄러움과 고통이라는 문제가 나오기 시작한다. 육체에 대한 불만과 고통은 타락 이후부터 언급되기 시작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이후로 벌거벗음이 부끄러워져 부끄러움을 가려야 했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남자는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수고해서 땅을 경작해야 했지만 그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 생긴 일이다. 타락 이전에는 여자가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았고 노동을 해도 땀이 흐르지 않았는가?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해산의 고통이 없었다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먹고 살 수 있었다는 것도 아니라 인간의 고통의 시작을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자는 출산이 가장 고통스럽고 남자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우니까 이것을 들어서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것을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땅을 경작하지만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여 우리에게 주신 환경이 우리에게 고통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환경이 고통스러운 것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 타락 이후에 자기 목적이 생기고 자기가 무엇이 되려고 하며 자기를 지키려는 것이 생기면서 불편하고 불행한 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고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산의 각종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상태로 돌아가자면 하나님이 보시는 자리로 가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으로 돌아갈 때 우리에게 타락 이전의 상태가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이 불행해진 것은 자기를 보존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키려고 하면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이 끝없는 불행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서는 우리가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는 것이 골골이 축복이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왜 하나님만 좋아야 되는가, 우리가 좋고 우리가 즐겁게 살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꼭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사람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 때 행복이 생기고 삶의 의미가 생긴다. 내 인생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있을 때, 내 인생을 쏟아 부을 곳이 있을 때 의미가 있게 되고 행복해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와서 풀이라도 뽑고 낙엽이라도 치우면서 그런 데라도 쓰일 때 사람은 존재감이 생기게 된다. 존재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쓰일 곳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귀히 여겨지고 쓰일 곳이 있기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쓰이도록 지어졌다. 왜 우리는 이렇게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는가? 쓰일 곳이 있기 때문이다. 쓰여 질 때 우리는 만족이 생기고 의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손주를 돌보는 일을 할 때 십 년은 더 산다는 통계가 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치매도 빨리 온다. 사람의 몸은 쓰지 않으면 퇴화되게 되어 있다. 쓸수록 더욱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쓰여 지도록 지어졌다. 무엇인가를 위하도록 지어진 것이다. 사람은 이것도 위할 수 있고 저것도 위할 수 있지만 인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졌다. 하나님의 표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존재로 지어졌으니까 이 일에 쓰여야 한다는 부르심을 갖게 될 때 사람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시한 데서 의미를 찾거나 자기의 존재감을 가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전혀 없다 해도 바울이 말한 대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생기면 살고 죽는 것을 넘어서는 사람이 된다. 살아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면 사는 것이 좋고 죽어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면 죽는 것이 좋으니까 살고 죽는 것을 넘어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생에서 살고 죽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표현되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소망을 가지는 데에서 정리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표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날 존재로 지어놓으셨다. 내가 무엇이 되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내 이름을 내고 나를 보존하는 세계에 있으면 육체를 가진 것이 끝없이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표현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어진 인생의 자리에 오게 되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쓰임이 되고 감사가 된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는데 내가 나를 보면, 스스로 목적을 갖게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만족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람이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부적합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목적을 가지면 자기에게 맞지 않게 된다. 욥의 고난 욥기는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 앞에 사탄의 송사 때문에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다. 보통은 인과응보나 상선벌악의 개념으로 세상의 일들이 어느 정도는 해석이 되는데 욥은 전혀 해석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다. 갑자기 도적이 쳐들어와서 종들을 죽이고 가축들을 빼앗아 갔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욥의 소유를 불태웠으며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집이 무너져서 자녀들이 죽었고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모든 소유를 빼앗아가는 일이 생겼다. 욥이 잘못해서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당연한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욥에게 닥친 고난은 전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욥은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았다. 하나님은 흠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난 욥을 세상 앞에, 천사들 앞에 자랑하고 싶었다. 그만큼 욥은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인데 이 사람에게 갑자기 이런 고난이 닥친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해석이 안 되는 고난과 슬픔이 많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이에 대해서 욥기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태초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심히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진다. 정말로 좋은 것이 있는데 혼자 웃고 있다고 만족이 되겠는가? 기분좋은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표적으로 욥을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자랑에 대해서 송사했다.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셔서 욥의 소유가 많고 자식들이 잘 자라니까 순전한 것이지 욥의 소유와 육체를 치면 당장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할 것입니다.”라며 송사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송사를 끝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육체가 고난을 받으면 원망을 할 것이라는 사탄의 송사를 끝내기 위해서 욥이 고난을 받도록 허락하셨다. 구약은 어떻게 보면 옹색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눈을 하늘의 사정으로 돌리게 했다. 하나님의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육체 가운데 살고 있고, 육체 가운데서 우리는 이유 있는 고난과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난이 닥쳤지만 욥은 원망하지 않았다. 재산을 다 잃었고 자녀들을 다 잃었어도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했던 것이다. 이에 사탄은 다시 여호와께 욥의 육체를 쳐 보라며 송사했다. 그래서 욥은 온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어야 했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했고 욥의 친구들이 와서 보고 일주야를 함께 했지만 욥의 고통이 너무 처참하여 아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욥도 결국 자기의 태어난 날을 탄식하고 저주하기에 이르렀고 친구들과 논쟁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뭔가 욥이 모르는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모르는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그 고난이 받아들여지겠는가? “아! 주님,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무리 깨끗하고 의롭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존재다. 하나님은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라고 하셨다.(욥40:8) 이것이 구약의 대답이다. 사람이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하나님을 불의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하면서 토기장이가 자기 필요대로 그릇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라고 불평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피조물의 위치를 알면 그럴 수 없다. 욥은 결국은 갑절의 소유를 얻고 출중한 열 자녀를 낳았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보상이 되겠는가? 새로 자녀를 낳았다 해서 잃은 자녀들에 대한 슬픔이 다 없어지겠는가? 그래도 구약에서는 이렇게밖에 설명해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이 문제가 다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예수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을 했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광야는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가장 열악한 곳이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시련의 장소다. 거기서 육체 없는 사탄이 육체를 가진 예수를 시험하고 조롱한 것이다. 이제껏 인류를 대표하는 큰 인물들은 이런 자리에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려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육체 없는 천사를 더 흠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그래서 현실을 무시한 관념적 세계에 빠지거나 현세를 떠난 내세를 소망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욥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하나님과 사탄이 기다렸듯이 광야에서, 인간의 생존이 가장 열악한 자리에서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오는가? 이것이 우리 인생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은 끝없이 의식주 문제로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들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는가? 신명기 8장 2-3절에는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는 분들을 보면 쉽게 온 분들이 별로 없다. 새 가족 모임에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교회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다. 그 이유는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며 가난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이 더 분명하게 들리게 된다. 시편 119편 71절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고난이 없어도 성경공부를 할 수 있고 교회도 갈 수 있는데 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 했고 왜 고난 속에서 주의 율례를 배워야 하는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분명하게 들리게 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고난에 대한 대답이다. 이 자리에 오면 곳간에 먹을 것이 가득한 것보다 내 인생에 골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훨씬 복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에는 내 곳간에 먹을 것이 가득 찬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덧붙여진 정도밖에 안됐는데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면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서 인생의 어떤 부분을 열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사람이 된다. 이보다 영화롭고 복된 인생이 없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사탄에게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구약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문제가 분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보다 능력을 가진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경우가 많다. 구약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경험했지만 예수에게 와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시험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씀 때문이다. 육체를 보존할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는 말씀으로 살게 때문에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 대답은 예수님만의 특별한 대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사람이면 누구라도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할 수 있다.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로 표현되는 일에 쓰일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육체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찬송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이끄신 것이다. 여기서 사탄의 송사가 그치고 천사가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소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광이다. 이것을 알게 될 때 인생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끝이 나게 된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형제들이 사랑을 받는가?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형제다. 옆구리를 찌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형제다. 옆구리를 찔러서 분노가 폭발하면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옆구리를 찌르니까 말씀이 나오는 인생이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이다. 이 영광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성된 그의 나라가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승리를 가져오셨다. 힘이나 노력이 들어가는 승리가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위치에 있기만 하면 되는 승리였다. 그래서 주 예수의 승리는 자신 만의 독특한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승리였다. 사탄의 송사가 그치고 천사가 사람을 섬기게 되는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 예수님은 마지막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사탄의 모든 송사를 끝내셨다.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라며 누가 부끄러움을 알게 했느냐고 하셨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부끄럽게 만든 자, 송사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송사나 욥의 육체에 대한 송사, 그리고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하며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던 그 모든 송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군중들과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를 조롱하는 말로 나왔던 것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27:40)하였고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라며 조롱했다(마27:42). 그 자리에서 예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걸 수 있는 기대가 무엇이었겠는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내서 로마 군인들을 멸하고 상황을 뒤집어 놓거나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는 예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위대한 순종이 아니라 약하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 안에 모든 사람이 포함될 수 있다. 약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에도 내려올 수 없는 이 사람 바로 우리의 메시야고 우리를 구원할 사람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왜 우리에게 구원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안 되는 그것을 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잘나고 싶고, 잘 성취한 것을 내어놓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안 되는 그것을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우리가 뛰어내릴 수 없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드러나야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으로 우리가 회복되는 것이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내려와 보라며 조롱해도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 이 사람이 우리의 운명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이 자리에서 다른 어떤 것이 나왔다면, 뛰어내릴 수 있고 천사들을 불러들여서 상황을 뒤집어 엎는 것이 나왔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약한 존재로 하나님의 혜택을 받아야 되는 구원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의 뛰어내릴 수 없는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필요였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자기 형상으로 지으셔서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잔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이 사람이 가장 영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인생은 함께 영화로워지게 된다. 그때 우리가 육체 때문에 가졌던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게 된다. 내 육체에 고통이 없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없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표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이 육체가 아닌 다른 육체를 가지고 산다는 말인가, 아니면 육체를 벗고 산다는 말인가? 육체를 갖고 오감을 느끼며 사는 동안 우리는 아프고 춥고 배고픈 것을 다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다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이 될 때 인생의 모든 의문과 고난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내 인생을, 십자가에 매달면 뛰어내릴 수 없는 이 인생을, 우리가 안 되는 그것을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신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다.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내려올 수 없는 그 육체를 불만스러워 했는데, 예수는 그 육체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승리하신 것이다. 창세 이래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끈질기게 해 온 사탄의 송사를 예수는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육체로 끝내신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천사인가, 사람인가? 이것이 신약에 와서 재정의 되었다. 사탄은 계속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며 송사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이 사람을 보고 백부장과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했다고 하였다.(마27:54, 막15:39) 백부장을 통해서 이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새롭게 정의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육체의 불편함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고 가장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절대적으로 묶여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참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육체의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드러내는 문제의 최전방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열악한 육체의 환경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가장 명백하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사탄의 송사를 끝내기 위해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천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부름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말로 참 하나님 아들임이 십자가에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일 이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5장 12절에는 죽임당한 어린양에게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모든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인생의 참된 영광과 보화를 죽임 당한 어린양,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올 수 없는 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땅 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이 삶이 아프고 슬픈 모든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고 살려낼 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이 우리는 지고의 복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땅 위에서 인생으로 사는 것을 영원토록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인생으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육체를 가지고, 생노병사의 운명을 가지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땅 위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당신이 꼭 필요로 하셨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겐 끝없이 육체의 송사가 있지만 예수께서 연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뛰어내릴 수 없는 사람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 포함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함께 누리는 사람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스러운 인생을 세상 앞에 전해서 육체로 인해 고통하고 원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찬송이 되도록 되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