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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주이씨의 5자등과(五子登科) 2회를 기록한 고려 명문가.
:성주이씨는 문과급제자를 100인 이상 배출한 조선에서도 명문집안이지만 고려 때는 최고의 문벌이었다.
성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시는 이장경(1214~ ? )은 고려 때 안일호장으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좋다.
큰 아들 이백년, 차남 이천년 그리고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까지 다섯 형제 모두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가문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아들들이 더 있었다면 6남 ‘이경년’, 7남 ‘이해년’... 이렇게 이름 지어졌겠다. ^_^)
(※ 0보다 큰 단위 :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京), 해(垓), 시(枾), 양(穰), 구(溝) … 불가사의, 무량대수.)
梨花에 月白하고....(多情歌) - 李兆年 -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제,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이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 자정을 가리키는 지금)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정서를 자규(두견새)가 알고서 저리 우는 것일까)
多情도 病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다정다감한 난 그것도 병인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사후에 중시조 이장경은 아들들이 출세한 덕에 고려에서는 문하좌시중(좌의정) 및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손자 이승경(차남 이천년의 아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원나라의 관리가 되어 공을 세우면서 원나라 황제로부터 농서군공으로 추봉되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원정군 장군이었던 명나라 이여송(1549~ 1598) 장군 역시 이승경의 후손인데,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은 이장경의 손자인 이승경의 서자로 명나라로 귀화한 성주이씨였다.
☜이조년 묘역 전경 : 경북 고령 운수면 대평리 897,
이조년무덤, 증손 이인민 차남 이 수(穗), 이인민의 후손 10세 묵제공 이문건 묘(상계동 한글고비 세움) 등.
※부인묘: 성주 선남면 명포2리 마을회관 옆길,
마을 뒤에 위치, 사당: 침곡재.
가문의 명성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막내 이조년(1269~ 1343, 대제학)의 손자 이 포(1287~ 1373, 검교시중)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오자등과를 이루는 전무후무한 초유의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포(褒)는 13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문하시중, 도첨의 평리를 지냈는데, 슬하에는…
①이인복(1308~ 1374): 1326년 19세에 문과급제, 밀직제학, 삼사좌사, 감찰대부를 거치며 공민왕 때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후 1373년 검교시중(영의정)을 역임하였다.
②이인임(1312~ 1388): 1332년 음보로 나와 전객시승, 좌부승선을 거쳐 개성부판사가 되었다.
1372년 공민왕으로부터 손수 부친의 초상화를 그려 받는 영예를 입었다고 한다.
1368년 수문하시중이 되면서 광평부원군에 책봉, 공민왕 사후에 우왕을 추대해 문하시중(영의정)에 이르자 권력으로 탐학을 자행하다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해 1388년 경산부로 유배 후 병사하였다.
※종계변무의 주인공(?) 성주이씨 이인임
: 중국 명(明)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의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던 것을 조선 태종 때 발견하여 이를 수정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건국 후 200여년에 걸쳐 주청사를 11회나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가, 1584년 황정욱이 수정된 ‘대명회전’을 가지고 오면서 조선과 중국 간의 외교적 마찰을 빚어온 종계변무(宗系辨誣: 왕족 혈통이 무고하게 기록됨을 수정함)의 문제가 겨우 해결되었다. 그것도 홍순언이란 역관의 엉뚱하지만 심성 착한 행동 덕에 그 보답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오모의 역탐, 14대 선조편: ‘조선을 구한 역관 홍순언과 해주 석씨’에서 한바탕 풀어봅시다.)
③이인미( ?? ): 이 포의 3남으로 고려 때 예의판서를 지냈다. 좌의정 하륜의 장인이다.
④이인립(1333~ 1387): 1354년 문과급제, 대제학, 서경부원수를 역임. 형의 권력남용에 실망하여 낙향.
태조 이성계와 사돈관계로 신덕왕후의 경순공주와 아들 이 제가 혼인하였다. 왕자의 난에 피살됨.
⑤이인달( ?? ): 이 포의 5남이다. 유일하게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⑥이인민(1340~ 1393): 음서로 관직에 나섰다 1360년 문과급제, 대제학, 판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아들 이 직(稷)은 조선 개국공신 3등으로 이후 이조판서, 우의정, 세종 때 영의정에 이른 좌명공신이다.
여기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을 보인 이조년(李兆年)계의 문열공파이다.
위와 같이 6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관직에 나섰으며 그 중 5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면서 성주이씨 가문은 려말 공민왕과 우왕시절 가히 가문의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각종 사서에는 물론이요 수지읍 신봉리에 있는 후손 이자견(1454~ 1529, 중종 호조판서)의 묘비에도 기록되어 있다는데 한 문중에서 한 번도 어려운 일을 두 번씩이나 5자등과의 영예를 누린다는 것 역시 아주 어렵고도 드문 경우로 타 가문들이 부러움을 살만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수지읍 인근에 이 포(褒)의 넷째 아들 이인립의 墓와 사당이 모현면 오산리에 있고 그 아들 이 발(潑)의 묘와 후손 결성현감 이 윤의 묘가 같은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대단한 성주이씨 가문이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서는 고려조에 비해 뛰어나지 못하였는데… 그거이가…
중시조이신 이장경이 돌아가시자 본향인 성주군 옥화리 선석산에 좋은 터를 잡아 이른바 명당에 안장하였다.
그 음택 명당터의 발복이었는지 이후로 가문의 영광이 계속해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조에 이르러 역시 그 음택이 명당이었음을 알았는지 세종대왕 때 대왕이 자신의 왕자들의 태실을 그곳에다 두게 되면서 이장경의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성주이씨는 150여년간 중시조 이장경의 음택 발복의 덕으로 가문이 번성해 왔으나 국왕의 명으로 음택을 태실로 내주고는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20, 서오치의 남쪽으로 중시조의 묘를 이장시키게 되었다.
이후로 가문이 전보다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주이씨의 발복을 앗아간 사람이 결국은 조선왕가 전주이씨가 되는 것이다.
◆조선왕가 태실의 고장 성주, 세종대 왕자태실 (사적 444호) ◆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조선 최대의 태실 유적지인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이 모여있다.
장자 문종을 제외한 왕자 18태실과 손자 단종의 태실까지가 모두 한 자리에 있다.
성주군 선석산 아래 태봉의 정상에 있으며,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까지 19기가 한 곳에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5 왕자의 태실들은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들이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형제들의 태실을 파괴한 둘 째 세조의 태실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에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어 다른 태실과 차별을 두었다.
최초의 태실조성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의 태실터는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던 곳인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고자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세종대 왕자태실: 성주 월항 인촌리 산 8, (안평대군 등 세조를 반대한 5명의 태실은 훼손되어 있다.)
※인근에 태종의 胎室址(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 봉산마을 뒷산) 과 단종의 태실址(성주군 가천면 법전리, 고시원 삼거리 우측 봉우리)가 있었는데, 태종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단종의 태실은 세종대 왕자태실로 이봉되었다.
(2) 동래정씨의 문벌자랑. (15명의 정승이 태어난 집터, 회동대감댁) - 조선.
: 회동대감댁은 중구 회현동1가 203- 2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은행본점 정문 좌측으로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다. 이곳 임당생가터에 처음 자리를 잡은 이는 첨사공파조 정 필(6세)의 후손인 수부 정광필이다.
부산시 양정동 화지산에 자리한 동래정씨 중시조 정문도선생의 묘는 동래정씨 문중에서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익장마을에 있는 13세 정 사(賜) 진주목사, 정난종 부친)의 묘와 함께 양대 정묘(鄭墓)로 불리우는 음택명당 중의 대명당으로 동래정씨 문중에서는 전국 명혈 중의 이 두 곳을 가장 으뜸으로 여기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동래정씨의 종가집이었던 회동대감댁은 조선 제일의 양택 발복 명당으로 아주 유명하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수부선생이 처음 그 곳에 집터를 잡아 정착한 후 이곳 회동대감댁 집터에서만 모두 15분의 정승이 배출되었으니 두 곳의 명당음택과 회동대감댁 명당양택 등 모두 조선 제일의 명당터만 누린 동래정씨 가문은 음택, 양택을 두루한 명당터의 발복 덕(?)인지 조선조 그 거센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가문에서는 외척질 할 흔한(?) 왕비님 한 분 배출하지 못했으면서도 조선 500년을 혼탁한 정치싸움판에 거의 휩쓸리지 않고 가문을 빛내가면서 영달을 꾀하였으니 이를 무엇으로 설명하리.
또한 이 분들의 생몰의 면면을 차분히 살펴보게 되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 모든 분들이 거의가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를 누리시면서 명예롭게 이름을 남기셨으니, 참 다른 집안의 일이라도 무시기 복이란 것이 한 쪽으로만 몰려 터져서 그런지 우리네 다른 가문들을 아주 부럽게 만들어 버린다.
역사적으로는 볼 때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 이후 급부상한 신안동 김씨와 동래 정씨 두 명문가가 혼인을 비롯한 긴밀한 밀월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상호 가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승 벼슬복을 벼락으로 받은 동래정씨의 간략한 세계도를 보자~ 중시조를 거쳐서 5세에 이르러…
▣(05세) 정자가: 전옥서령, 아들: ①보(輔) ②필(弼), 두 아드님에서 교서랑파와 첨사공파로 나뉜다.
◈(06세) 정 보: 교서랑파시조, 아들: ①승종(承宗) ②승충 ③승조 ④승유 ⑤석 ⇒ 정승종으로 이어지면서
▷(11세) 정양생: 양도공파시조, 아들: ①구(矩) ②규 ③부(符) ④절 ⇒ 장남과 3남의 후손에서…
▷(12세) 정 구: 의정부찬성, 정절공
▷(12세) 정 부: 한성부윤 ⇒ ▷(13세) 정흠지: 중추원사, 문경공 아들: ①갑손 ②창손(昌孫)
▶(14세) 정창손: 영의정, 대제학, 청백리, 충정공.
▶(15세) 정 괄(佸): 좌의정, 공숙공. ☜ 여기까지가 큰 집 교서랑파로 2명이 정승이 나왔다.
◈(06세) 정 필: 첨사공파시조, 아들: ①춘령 ②춘민 ③춘로 ⇒ … (09세) 정지형: 아들 ①승원 ②승보.
◆(10세) 정승원(承源): 예문관응교 ⇒ (11세) 정 혜: 판사복시사로 이어지는 장손집안에서...
▷(12세) 정귀령: 결성현감, 아들: ①옹 ②삼 ③사(賜) ④유 ⑤급 ⇒ 3남의 자손에서…
▷(13세) 정 사(嗣): 진주목사, 연안군 아들: ①난손 ②난수 ③난종(蘭宗) ④난원 ⑤남무 ⇒장남, 3남 자손.
▷(14세) 정난종: 이조판서, 동래군 아들: ①광보(光輔) ②광필(光弼)
▷(15세) 장남 정광보: 창원도호부사 ⇒ ▷(16세) 정사룡(士龍): 대제학
▶(15세) 차남 정광필: 영의정, 대제학 아들: ①노겸(勞謙) ②휘겸 ③익겸 ④복겸(福謙) ⇒ 장남, 4남.
▷(16세) 장남 정노겸: 남부주부 ⇒ ▷(17세) 정유인 ⇒ ▶(18세) 정지연(芝衍): 우의정.
▷(16세) 사남 정복겸: 강화부사
▶(17세) 정유길(惟吉): 좌의정, 대제학 → 김상용, 김상헌의 외조부, 임당공파시조
▶(18세) 정창연(昌衍): 좌의정, 아들: ①광성(光成) ②광경(光敬) ⇒ 형제자손 모두 벼슬.
■(19세) 정광성: 형조판서, 아들: ①태화(太和) ②치화(致和) ③만화(萬和)
□(20세) 정태화: 영의정, 아들: ①재대(載岱) ②재악(載岳) ③재항 ④재륜 ⑤재숭(載嵩)
▷(21세) 정재대 ⇒ … ▶(24세) 정홍순(弘淳): 좌의정, 충헌공
▷(21세) 정재악 ⇒ … ▶(26세) 정원용(元容): 영의정, 문충공 ⇒ ▶(28세) 정범조(範朝): 좌의정.
▶(21세) 정재숭: 우의정.
▶(20세) 정치화: 좌의정 ⇒ … ▶(23세) 정석오(錫五): 좌의정, 정간공.
■(19세) 정광경: 이조참판, 아들: ①지화(至和) ②채화 ③지화(知和) ④이화
□(20세) 정지화: 좌의정 ⇒ … ▶(25세) 정존겸(存謙): 영의정, 문안공.
◆(10세) 정승보(承甫): 응교 ⇒ … ⇒ ▶(18세) 정언신(彦信): 우의정, 도원수.
세계보(世系譜)에 보이는바와 같이 첨사공파, 임당공파, 동래군파는 한 뿌리로 모두 15분의 정승이 배출되었는데 임당공파 직계가 11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제부터 회동대감댁 터에서 벌어진 400년간의 동래정씨 집안의 출세현황을 살펴보자.
(위의 동래정씨 세계보를 참고해 가면서 살펴보면 잘 보일 것이다.)
처음 이 집터로 들어온 사람은 중종 때 ①영의정을 지낸 수부 鄭光弼(15세: 1462~ 1538, 77세)이었다.
이후 첨사공파에서만 이 터를 중심으로 직계가 12분, 가문에서는 모두 17분의 정승이 배출되었다.
◾수부公의 손자에서 정복겸(福謙,16세)의 아들이 ②좌의정 임당 정유길(17세:1515∼ 1588, 74세)이고,
◾임당선생은 선조 때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정창연(좌의정), 손자 정광성(형조판서)까지 임당의 직계 3대 신도비가 사당동 동래정씨 선영 내에 서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61, 62,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부公의 증손에서 정노겸(勞謙,16세)의 손자가 ③우의정 정지연(18세:1527∼ 1583, 57세)이다.
◾임당공파시조 정유길의 아들이 ④좌의정 수죽 정창연(18세:1552∼ 1636, 85세)이다.
►정창연의 손자 중 장남 형조판서 제곡 정광성(廣成,19세)의 장남이 ⑤영의정 정태화(20세:1602∼ 1673, 72세)이고, 차남이 ⑥좌의정 정치화(20세:1609∼ 1677, 69세)이다.
►정창연의 손자 중 차남 이조참판 정광경(廣敬,19세)의 3남이 ⑦좌의정 정지화(20세:1613∼ 1688, 76세)
►정창연의 맏 손주 영의정 정태화의 막내아들(5남)이 ⑧우의정 정재숭(21세:1632∼ 1692, 61세)이다.
▷정치화의 증손으로 ⑨좌의정 정석오(23세:1691∼ 1748, 58세)가 있고,
▷정치화의 현손이면서, 정석오의 조카가 ⑩우의정 정홍순(24세:1720∼ 1784, 65세)이다.
▷정지화의 현손으로 ⑪영의정 정존겸(25세:1722∼ 1794, 73세)이 나왔고,
◾정태화의 차남 지돈녕부사 정재악(21세)의 현손으로 ⑫영의정 정원용(26세:1783∼ 1873, 91세)이 나왔고,
정원용의 손자가 ⑬우의정 정범조(28세:1833∼ 1898, 66세)로 동래정씨 문중의 마지막 정승이었다.
이상까지의 13분의 동래정씨 정승들의 평균수명을 계산해 보면 최장수는 헌종, 철종 때 두루 삼정승을 거치었고, 고종이 즉위할 때 원상이 되어 국정을 맡아보았던 정원용이 91세이고, 최단명하신 분이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정지연으로 57세에 졸(拙)하였으니 동래정씨 정승님의 평균수명이 물경 71세에 이른다.
위와 같이 한 줄기인 첨사공파(임당공파, 동래군파)에서만 13분의 정승이 배출되었고, 또한 조선 후기에 권문세도가의 중심에서 세도정치를 동래정씨 가문과 함께 펼쳐온 북촌 장동김씨(=신안동 김씨)의 원조가 되는 안동김씨의 ⑭우의정 김상용(명종16년(1561)∼인조15년(1637)과 아우 ⑮좌의정 김상헌(선조03년(1570)∼효종03년(1652)이 모두 정유길의 외손자들로 이곳 회동대감댁 산실에서 태어나고 또 외조부 임당공에게 공부를 배우며 이곳에서 성장하였으므로 실지로 15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당 터라 한 것이 거짓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외에도 같은 첨사공파의 다른 줄기에서도 ⑯우의정 정언신(18세: 1527~ 1591, 65세)이 배출되었다.
동래정씨 6세에서 갈라진 교서랑파에서도 두 분의 정승이 배출되었는데, 동래정씨 최초의 정승으로 세조, 예종, 성종의 3대에 걸쳐 삼승을 두루 거치며 원상을 지낸 ⑰영의정 정창손(14세: 1402~ 1487, 86세)과 연산조에서 좌의정에 올랐던 아들 ⑱좌의정 정괄(15세: 1435~ 1495, 61세)이 정승을 지내셨다.
조선조에서 무수한 정승을 배출한 동래정씨의 묘자리들은 어떠하길래?
우선 첨사공파의 묘역은 크게 서울 사당동과 경기도 군포 두 곳에 선영을 마련하여 음택을 쓰고 있다.
첨사공파의 13세 정 사(嗣)의 3남, 14세 동래군 정난종(이조판서)가 먼저 군포에 자리를 잡았다.
◈ 동래정씨 동래군파 묘역( 군포시 속달동 산3- 1, 수리산 기슭, 경기기념물 115호).
: 동래군파(정난종, 14세) 파시조인 ①허백당 정난종, ②장남 정광보(1457~ 1524), ③차남 수부 정광필(1462~ 1538) 및 ④수부의 차남 정휘겸, ⑤수부의 4남이며 임당공의 부친이신 정복겸(강화부사) ⑥수부 3남 정익겸과 그 의 차남 정유신, 그의 5남 정유청, ⑦ 수부의 5대손으로 영의정 정태화의 차남 좌의정 정치화 등의 음택이 이곳에 모여 있다. 즉 허백당을 중심으로 수부의 아들과 손자 등 동래정씨 첨사공파 선영 중 먼저 조성된 곳으로 이다.
◈ 동래정씨 임당공파 묘역( 동작구 사당동 산32- 83, 유형문화재 61호).
: 묘역 내에 임당 정유길의 임당시조비를 비롯해 아들 좌의정 정창연(신도비, 묘), 손자 병조판서 정광성(신도비, 묘)가 유형문화재 61, 62,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곡 정광성의 아들 영의정 정태화, 3남 예조판서 정만화 형제가 함께 있으며,
정태화의 장남 공조참의 정재대, 3남 양주목사 정재항, 한계공 정재한(정만화의 차남),
정창연의 차남으로 정광성의 아우 이조참판 정광경, 그의 장남 찰방공 정지화(至和), 손자 능주목사 정재후 등.
잘 정돈된 묘역에는 재실(상덕재)와 사당(회현사) 뒤쪽 좌우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사당동과 회현동의 지명유래.
회현동(會賢洞): 동래정씨의 회동대감댁을 비롯 김상현 형제 등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의 의미.
사당동(舍堂洞): 역시 동래정씨 임당공파의 묘역에 큰 사당(祠堂)이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다.
과연 성주이씨도 동래정씨도 명당만의 발복으로 그런 가문의 광영을 누릴 수 있었을까?
동래정씨는 조선 8대 명당 중 2개의 음택을 차지하고 양택의 명당까지 더하여 그런 복을 누렸을까??
그렇다면 과연 명당의 발복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차례에는 조선의 풍수지리에서 음택 명당에 대해 한 번 알아봄세~~~ (조선의 명당터).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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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햐~발복 명당터가 정말 맞기는 맞나봐요..
근래에도 재벌가나 대통령들 낸 짐안들은 명당에 조상들 묫자리를 썼다더니...
전 오늘 '태실'에 대해 처음 알았어요.
새로 태어난 왕자의 태(탯줄을 말하나요?) 역시 명당에 묻어 발복을 기원했나보군요!??
나 울 알딸딸 탯줄 아직 보관하고 있는데..지금이라도 울 애들 탯줄 어디 명당 찾아 삼만리..살짝 묻어놓고 올까??ㅎㅎ
글구
일십백천만억조경해..까지만 알고 있었는데..그 위로도 시.양.구..할~~!
조까지 셀 일도 없는디...^^
이 많은 내용 자료 알아듣기 좋게 손 보신다꼬 욕보셨습미데~!!
회현동 사당동이 그런 의미가 있는곳인줄 몰랐네요~~
동래정씨가 양반이라든 아버지말씀이 그땐 걍 큰소리치시는건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니
감사하기 이를데 없나이다~~~
늘~감사합니다!!^^
동래정씨 문중이 엄청 양반이라지유.....
이많은 사진 올리시느냐고~~ 하나아저씨 얼마나 힘들었을까~~~
노고에 감사드려요.
늘 좋은 글에 감사 드리며,..
그래서 돈 많은 집안들은 미리 명당자리를 잡아두고 물색하고 하나벼유 유명지관이랬나 뭐시랬나 사람한테요
많은 돈을주고 전국의 유명한사람을 물색해서 한다고 하더군요
대단들해요 오늘도 너무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