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병신년 남하(396)가 있기 바로 몇달 전인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396. 고구려의 병신년 남하(396)가 있기 바로 몇달 전인 6년(396)에
397.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1) 남침 후 볼모로 보냅니다. ..논쟁거리로 인정
(2) 왜국이란 (국호)가 백제본기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내려간 후 분리
(3) 볼모 이유가 일본서기에 있는데 왜 선택적인 해석을
하는거죠? 불리해서 인가요?
5개의 지역이 응신지역입니다. (신라와 임나를 제외한 지역입니다). 응신이 가야지역이라면 말이 안되죠.
(4). 399. 백제본기 징발령
(5). 399 비문 기해년, 백잔위서왜화통
(6). 400 비문 경자년 낙동강
(7). 400. 일본서기, 궁월군 120현민 (후에 인덕)
(8). 402. 일본서기, 아지사주 17현민 (후에 반정)
(9). 403. 웅신죽음 (일본서기, 중애왕 173년, 기록)
(10). 403. 아신 위로 사자보냄
(11) 404. 비문 황해도 북부
(12).
405. 응신 28, 405, 아신왕이 죽자,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
이부분을 연결해서 역사복원을 해야합니다.
14년에 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면서[攝政] 태자의 환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혈례(蝶禮)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내어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100명으로써 호위해 보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응신은 한반도 열도에 있었고, 광개토대왕의
남침으로 왜열도로 내려가며, 역사가 풀리게 됩니다.
(1) 조이님 주장은 일본인들의 논리만 반영한겁니다. 선택적인 해석이 보입니다.
(2) 그리고 5세기 기록을 3세기에 넣었다고 주장을 하더라도, 한반도의
3세기를 복원해야합니다.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허구에 동조된 논리에
부합으로 삼국지위지에 80개소국의 난립으로만 말해서는 안됩니다. 나중에
3세기에 힘의 축척이 4세기로 연결된다고 하는데 그 논리의 근거가 삼국사기에
나온 것으로 주장됩니다. 조이님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왜곡되었다만 주장하지 왜곡이전 3세기 한반도 역사는 제시를 못합니다. 삼국사기를 통하여만 역사가 복원됩니다.
첫댓글 고구려의 병신년 남하(396)가 있기 바로 몇달 전인 6년에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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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왜국에 불모로 보낸 것이 396년 여름 5월이구요 , 고구려의 남하는 396년 가을로 추정됩니다.
(12). 405. 응신 28, 405, 아신왕이 죽자,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이으라.”고 말하고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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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왕이 죽은 게 실상은 404년입니다. 아신왕은 왜와 화통하여 404년 황해도의 대방고지를 공격하는데요.
거기서 참패하여 죽게되죠. 그러자 왜에서는 태자 전지를 백잔의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이 왜를 응신조라 생각하면 잘못된 겁니다. 그 당시 왜의 욍은 여휘였습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허구를 허구로 보니냐 아니냐에 따라 역사 해석은 크게 달라지게 되는데요.
이는 일본의 주자엥 동의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실상에 접근하는 역사를 해석하느냐의 문제이죠.
삼국지위지에 80개소국의 난립이라 적은 것은 당시 2~3세기의 한반도 남부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구입니다.
실재로 백제는 234년 고이왕이 최초의 백제가 되는 거고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한 3세기 한반도 역사는 복원하지를 못합니다.
삼국사기는 깁부식이 사대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서술하였음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아야지 민족주의 견해로 보게 되면 ..
고이왕 최초 백제왕 설은 일본학자들의 설이죠...
204년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에 대방군을 만들엇으니.. 일본학자들의 설도 일리가 잇는 이야기이죠..
낙랑국이냐? 낙랑군이냐? 낙랑국은 어디 잇엇느냐?
낙랑군이 버티고 잇는데, 백제 땅은 어디에 잇엇으냐? 가 문제시 됩니다.
@라디오 낙랑군이 평양이구 대방군이 황해도입니다
고이왕의 대방백제는 황해도에 있었고요
근초고왕 시기에 이도한산 즉 한강으로 천도한 겁니다.
@라디오 204년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에 대방군을 만들고요
234년 최초로 고이왕이 백제를 만들죠.
그러다 햬씨가 백제를 인수하는데요. 고구려는 이를 인정치 않고 백제가 아닌 백잔이라 부르게 되는 겁니다
@조이 <을불대왕전>에도 '낙랑백제'라고 하므로,,,,,,,,,,,,,,
한군현의 낙랑군과 백제 땅은 서로 겹치게 됩니다...
일본인 학자들이 고이왕 234년 이후로 제대로 된 백제왕이 출현햇다고 하는 것은...
낙랑군과 백제 땅이 겹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죠.
일본학자들이 고이왕 이후의 왕들을 인정하는 것은.......
그 이전 왕들은 별 볼일 없는 왕으로 취급하는 시각인데... 흠 새겨 볼 가치가 잇는거죠.
이는 식민사관과는 무관하게 보면...
백제 땅 = 낙랑군.
@조이 백제 땅 = 낙랑군.
이렇게 보지 않을려면... 백제 땅을 북한의 백두산 근처로 봐야 해요..
@조이 백제 땅이 백두산 근처로 보면은 산악 지역에다가 나무만 우거져 있는 곳이므로... 현실상 수도로 삼기가 너무 어렵죠.
북한 평양이 중심지인데............
백제 수도 = 북한 평양.
이렇게 보면, 한군현 낙랑군과 백제 땅이 겹치는 현상이 벌어지죠..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아야지 민족주의 견해로 보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역사가 서술될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환빠나 대륙사관 민족사관 식민사관 모두를 부정합니다.
그냥 역사를 역사로 볼 뿐이죠.
안그러면 역사는 그냥 소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당연하죠.동의합니다. 하지만 초기기록 왜곡은 일본이 하는 주장이고, 무조건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판단하는 건 아니다이고, 김부식의 사대주의는 사상에 입각하여 서술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인 판단인거 같습니다. 사서를 보는 판단기준이 편향되면 안됩니다. 본인은 식민사관 부정일지 모르지만, ...그걸게 보입니다.
삼국사기는 한에 들어가는 나라 중에서 마지막 살아남은 1국의 역사를 백제본기로, 한에 들어가지 않는 나라 중에서 살아남은 나라 1국의 역사를 신라로 하고, 여기에 고구려를 더한 겁니다. 이 3국이 한과 관련된 접촉을 한 부분을 다 버린 것니다. 4세기 이전 삼국사기는 (1) 경기도 황해남부, (2) 충청남북도, (3) 전라남북도, (3) 경상남도 서부, (5) 제주도 이전의기록이 없는 공백지역입니다. 가야가 한에 들어가면 기록이 안나오고, 한에서 나오면 기록에 나옵니다. 이런 원칙으로 삼국사기를 파악해야지 무조건 일본인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그걸 답습하면 역사할 이유가 없지요.
삼국사기 초가기록 왜곡은 일본이 주장해서가 아니라 중굳사서 일본서가 삼국사기 모두를 비교 분석한 결과인 거죠.
존님은 비문과 삼국사기 기록의 불일치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조건 일본의 비문조작이라고 몰고 갈 뿐이죠.
눈이 확연히 보이는 불일치를 존님은 그냥 삼국사기를 믿으라는 거죠. 그게 애국인줄 아는거예요.
@조이 그렇진 않아요 . 저도 진왕조가 왜열도로 넘어가서 왜..일본으로 살아남은 거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는거죠.
지금까지 쓰려진 내용으로만 판단하면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뻥친거라고 표현만 헀지 실질적으로 검토하고 반영한게 안 보입니다.. 속고/귀수/침류..초고/구수/사반 동시대에서 조작됐다이지 ..그 후의 3세기 한반도 상황은 전혀 파악이 안된 상황입니다. 그럼 철저하게 삼국사기를 파악해야되는데 .일본인이 쓴 글 을 넘어선 내용이 전혀 안 보입니다.다 각설해도 제일 중요한 한반도 5개지역(일본서기)에 대한 설명을 조이님은 손도 못대고 있어요 다른 내용이 나오면 모르곗지만요.
@John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내용이 있으면 올려보새요
비평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