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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morning36! - 강아지 똥 -
지난 한주간은 많이 추웠습니다. 오늘 낼 까지만 추우면 풀린다니까 잘 견뎌봐야 겠습니다. 그러나 추위 뒤에서는 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울한파가 아무리 매서워도 봄은 찾아옵니다.
권정생(1937- 2007)이란 동화작가가 있었습니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라는 외진 시골마을에서 그가 돌아가셨을 때 마을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인 줄 알았던 그의 죽음을 알고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물결에 놀랐고 병들고 가난한 노인인줄 알았던 그가 연간 수 천 만 원 이상의 인세수입이 있던 유명작가라는 것을 알고 또 한번 놀랐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와 풀 한포기도 사랑했던 권정생 선생은 죽기까지 무소유로 자신의 모든 재산은 아이들로부터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주고 간다는 유언장과 꿰매 신은 고무신 하나를 남기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시골 작은 교회 종지기로 문간방에 살면서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누구에겐가 들려주고 싶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는 권정생은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작품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 가운데 <몽실언니>는 나중에 mbc TV에 드라마로 방영됐고 <강아지 똥>은 그림책,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연극으로도 올려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어린이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1990년에 mbc TV에서 방영한 <몽실이>를 시청한 기억이 있습니다. 8.15광복의 혼란과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지만 모진 세파를 꿋꿋이 헤쳐 나가는 '몽실'이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몽실이는 전쟁으로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는 가운데서도 절망보다는 희망으로 꿋꿋이 살아가는 몽실이를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되는 동화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남의 불행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그 불행 뒤에는 아주 큰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포용적인 인간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동화 <강아지똥> 은 이렇습니다, 돌이네 강아지가 골목길에 똥을 누고 갑니다. 강아지 똥은 똥이라며 더럽다고 피하는 참새와 어미닭을 만나 슬퍼하지만 흙이 응원을 해 주고, 겨울이 지나 봄을 맞습니다. 봄비가 내리더니 파란 민들레 싹이 자라났고, 민들레는 강아지 똥에게 거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강아지 똥은 오히려 자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몸을 쪼개어 거름이 됩니다.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민들레는 아리따운 하나의 꽃을 틔웁니다.
뇌 충전에 필요하다니 아래 시 세편 읽어 보십시오.
오늘의 시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헤르만 헤세 -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이 밤 미친듯 속삭이듯
그대에게 왔노라
그대 결코 나를 잊지 못하도록
나 그대의
영혼을 가지고 가노라
이제 그대 내 곁에 있고
모든 선과 악 속에서도
나의 것이니
격렬하고 타는 듯한
나의 사랑으로부터
어떤 천사도
그대를 빼앗아 갈 수 없으리
<이별노래> - 정호승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그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Vietnam 4) / 마지막 회 -
베트남은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 나라다. 나는 주말이면 베트남 남부지방을 즐겨 여행했었다. 남부의 메콩델타(Mekong Delta / 메콩삼각주)에 가서 처음 맞닥뜨린 메콩강(Mekong River)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넓이와 넘실대는 물결만으로도 내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중국의 장강(長江)앞에도 서 봤지만 바다로 빠져나가는 거대한 메콩강 하류는 내가 갖고 있던 베트남사람들에 대한 왜소하고 속이 좁을 것 같은 그런 선입견을 일시에 불식시킬 정도로 과연 동남아시아 최대의 강답게 거대했다. 메콩델타에서는 대개가 배를 타고 관광을 했다.
쌀 운반선인데 푸대가 아니라 낟알(벌크)로 쌀을 운반한다(베트남은 쌀을 3모작한다)
남부에 있는 미토(My tho)란 도신데 메콩강 구경은 이 미토에서 많이 들 한다
도통 매가리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때는 박수 받을 때도 있었지요^^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유택에서
그 당시 개인소유의 오래된 닛산 승용차 한대를 기사포함 기름값 포함해서 월500불에 렌트해서 사용했는데 일요일 하루는 휴무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소유주 겸 기사였던 중국계 베트남인 미스터 안(安)은 토요일만 되면 어디 갈 데가 있으면 가자고 매번 자청해서 나를 괴롭혔다(?). 안의 고향은 호치민에서 남쪽으로 4시간 거리의 빈롱(Vinh Long)성의 한 오지 산속마을이었다. 나는 베트남에 체류하는 1년 동안 그곳을 세 번 다녀왔다. 그곳에는 조금 외져 보이는 논 가운데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에는 안의 조강지처가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마을에는 안의 친척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었다. 내가 갈 때마다 빈롱성(省)의 성도(省都)인 빈롱시(市)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안의 딸인 탐(Tam)이 다니러 와서 내 통역을 하며 자기 어머니 집에 머물곤 했었다. 묵을 때마다 안은 마을 친척집에서 잤고 나는 논 가운데 있는 안의 조강지처 집의 사랑채에서 잤다. 여기서 안의 조강지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호치민시에는 안의 다른 부인이 있었고 안과 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꽤 큰 아들 형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꼬치꼬치 물어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난 꽤나 안의 가족사가 궁금했었다.
안의 조강지처를 첨 봤을 때의 그 가련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빈롱을 갔을 때였었다. 농로를 따라 논 가운데 집 앞으로 우리가 탄 차가 지나가는데 대문 앞에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베트남 삼각모자 ‘농 라웨(Non La Hue)’를 쓴 중년의 베트남여인이 막 논일을 끝낸 듯 흠씬 젖은 피곤한 모습으로 대문에 기대어 두 다리를 뻗고 척 늘어져 앉아있는 것이었다. 안이 차를 멈추고 그녀와 뭐라고 얘길 나누는데 난 그때만 해도 그녀가 안의 조강지처인줄 몰랐었다. 잠시 후 차가 다시 움직이자 안이 어렵게 그녀가 자기부인임을 내게 이해시켰다.
안의 친척집에는 안의 딸 탐이 와 있었다. 탐은 정말 이뻤다. 그 집은 안의 형네 집이었는데 한국인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꽤나 많은 안의 친척과 이웃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탐과 그와 나이가 비슷한 그의 사촌여동생이 같이 있었는데 나는 베트남 탈렌트들이 와 있는 줄로 착각할 정도로 둘은 이뻤다. 그런데 탐의 사촌여동생은 벙어리였다. 나는 순간 하나님을 원망했던 기억이 있다. “하나님,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으면 책임을 지셔야죠?” “너무 가혹 하십니다”
뭔가 그리도 즐거웠을까^^ 이마도 술에 취했 던 듯. 베트남 탈렌트라고 얘기한 두 사촌 미인 자매, 오른쪽이 탐이고 왼쪽이 말 못하는 동생
왼쪽이 미스터 안의 조강지처 그의 딸 탐
오해 받을 만 한 사진?^^
우린 저녁까지 그 집에서 먹고 안이 태워다 주는 대로 나와 탐은 논 가운데 집으로 자러갔다. 안의 조강지처는 농사를 지어 탐의 학비를 대며 모든 희망을 탐에게 걸고 살고 있었다. 탐은 빈롱시에 있는 외국어대학 영문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역시 영문학도답게 영어를 제법 잘했다. 나는 갈 때마다 차안에서 그 당시로는 베트남 최 고액권이었던 50,000Dong(한화5,000원정도)짜리 새 지폐를 탐의 손에 슬며시 쥐어주곤 했었다. 처음 안의 조강지처 집 사랑채에서 자던 날이었다. 밖의 큰 항아리에 받아놓은 빗물로 목욕을 하라고 하고 두 모녀는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목욕을 마치고 깔아놓은 자리에 눕자니 두 모녀가 뒤뜰 외딴곳에서 목욕을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잠은 좀체 오지 않고 안방에서 속삭이듯 나누는 두 모녀의 대화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져갔었다.
그 후로 내가 귀국하고 나서도 탐과 나의 편지교환은 꽤나 오래 지속됐다. 그리고 탐이 결혼해서 빈롱시에서 자기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우리는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내가 멕시코에서 들어와 다시 대우엔지니어링의 부름을 받고 2002년 베트남 푸미(Phumy)라는 곳에 설치되는 GDC(Gas Distribution Center)건설현장으로 나갔을 때 나는 빈롱(Vinh Long)으로 탐을 찾아갔었고 우린 재회했다. 탐은 애기엄마로 직장을 나가는 워킹 맘이 돼 있었고 내가 궁금했던 탐의 엄마는 탐 집에서 손자를 돌봐주며 같이 살고 있었다.
농약공장건설공사는 꼬박 일년이 걸려서 끝났다. 나는 성대한 환송식을 받고 귀국했다. 귀국해서도 그 당시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서 베푼 코스비다(KOSVIDA)농약공장 준공기념식에 참석해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그 당시 대우엔지니어링의 남(南)회장님과 화공사업본부장이 베트남현지 준공식에 다녀오셨는데 어느 날 남회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지소장, 고생 많이 했더구나”
“네 칭찬들을 많이 해서 듣기 좋았다”
“이거 오는 길에 샀다. 수고했다” 하시며 크로스볼펜 세트를 주셨다.
“프로젝트 수행 기를 사보에 올려라”
지금도 그 사보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 제목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였다.
노가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참 좋은 직업이다. 건설현장에서 맡은 사명을 완료하고 현장 문을 나설 때는 내가 해냈다는 자부심과 희열로 때론 눈물이 핑 돌기도하는 직업이 노가다다. 자기성질을 못 이겨 안전모를 집어 던졌던 일, 옆 동료와 일로 다투었던 때도 있었지만 우린 다시 기대 반 설렘 반을 안고 또 다른 현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러 떠나는 것이다.
나는 베트남에 머무는 동안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2박3일간 기차여행도 했고 베트남 최남단과 중국과 국경인 아주 북쪽까지도 가봤다. 사실 베트남얘기는 아직 반도 못했지만 일단 여기서 마친다.
Have a good time!
첫댓글 갑년에 캄보디아 베트남 여행길에 메콩강가에서 나를 붙들고 반가워하던 따이한이 어스름히 이제 생각해보니 池會長과 비슷한 청년같기도하고- - - 겨울이 왔으니 봄이 또한 멀지않도다-{릴케} 춥다고 나발불어도 입춘은 닦아온다-{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