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의 의미
안유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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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割禮)란 헬라어로 페리토메(περιτομή)라고 하는데 ‘주위에’라는 뜻의 페리(περι)전치사와 자르다라는 동사 템노(τέμνω)가 합하여 된 말이다. 이는 히브리어 물로트(תוּמ)를 번역한 말로서 자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물(לוּמ)에서 온 말이다. 즉, 할례의 통속적인 의미는 남자의 포피(包皮)를 자른다는 것이며, 이는 종교 의식으로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에돔과 모압뿐 아니라 셈족 일부와 이집트,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부족들과 블레셋인, 바벨론, 앗시리아 등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할례가 고대에 많은 부족들간에 행해졌다고는 하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다른 부족들과는 기원이 다르다. 창 17:10-1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언약의 표징으로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시행하도록 명하신다. 또한 히브리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노예와 그들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행하도록 하셨다(창 17:13, 출 12:48).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지 않도록 육체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예들에게 노예의 표식으로 화인(火印)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이 주인에게 속한 노예임을 잊을 수가 없도록 만든 것과 같은 원리이다. 다만 노예에게 있어서 화인은 수치가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는 영광이 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2장 25절에서 율법을 행할 때 할례가 유익하나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효가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할례가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이란 쌍방간에 이루어지므로 상대적이며, 일방의 불이행으로 파기될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 그 자체는 영원하지만 가변적인 인간과 맺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언약의 내용을 불이행한다면 효력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헌신할 때 언약은 유효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언약은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성문 율법을 주신 후에는 율법의 이행 여부로 순종을 가름하게 되었으므로, 바울이 말했듯이 율법을 행할 때 언약이 유효하고 율법을 법하면 언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는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순종하면 살 수 있으나 주인의 뜻을 거역하면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할례를 받은 자들도 한번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해서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든 내용을 유대인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할례가 유대인을 구원해줄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하면서 맹신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이 많다. 구전 율법을 모아 놓은 미쉬나에는 할례가 마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할례가 언약의 표임을 잊음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그들은 할례를 상대적 가치 대신에 절대적 가치로서 오신(誤信)하였다.
할례는 무조건적인 구원의 표가 아니라 언약을 근거로 한 상대적인 것이다. 할례는 어떤 의미에서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의무가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3에서 할례를 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그때는 권리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범하면 -한 번 범한 것이 아니라 계속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상태- 첫째로는 하나님의 백성의 표인 할례가 무효가 될 것이며 다음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도 박탈당할 것이다.
할례가 무효가 된다는 말은 도로 무할례자와 같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무할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크로뷔tm티아(ἀκροβυστία)인데 끝이라는 뜻의 아크론(ἄκρον)과 덮다라는 동사 뷔오(βύω)가 합한 말로서 끝을 도로 덮다라는 뜻에서 무할례라는 말이 되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2장 26-27절에서 할례를 받고도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매우 충격적인 말을 하고 있다. 즉 25절에서 율법을 범하는 것이 할례자의 할례를 무효로 만든다고 하였으므로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는 경우는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무할례자가 차라리 할례자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할례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다. 할례의 목적은 할례를 받은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을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 할례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할례는 무조건적인 구원의 담보가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할 뿐이다. 사실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할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할례라는 육체의 흔적 없이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순종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을 온전히 지킨 무할례자들이 할례자이면서 성경을 가지고도 율법을 지키지 않은 유대인들을 판단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자신들이 모든 이방인들을 심판하는데 참여할 것으로 믿어왔는데 이러한 위치가 뒤바뀌어 자신들은 심판을 받고 무할례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판단하리라는 것은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온전하다라는 말은 텔레오(τελέω)인데 원래는 끝마치다, 완성하다의 뜻이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인 것(갈 5:3, 약 2:10) 같은데 바울 사도는 왜 그렇게 표현하였는가? 이는 핵심만 말한다면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 안에 있을 때 율법을 온전히 지킨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의 본질을 밝히자면, 육신에다 하는 표면적인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다 하는 이면적 할례가 참 할례인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표면적 육신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고,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하였다. 이는 구약에서 신명기 10:16에서 ‘너희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와 예레미야 9:26에서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할례의 개념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함으로써 매우 제한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할례의 기원은 모세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서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7:22에서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세의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들을 모세 이전의 아브라함에게로 이끌어 가심으로써 율법을 초월한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결국 할례와 유대인의 정의는 신약에서 새롭게 내려지고 있다. 즉, 유대인이든 할례든 표면적인 것만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표면적이라는 말은 〫파네로스(φανερός)인데 원래는 비추다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출생 후 8일이면 모세의 율법(모세를 통한 율법)에 의거하여 모든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시행한다. 이들은 조상의 혈통을 따라 유대인으로 출생할 뿐 아니라 율법에 의한 할례 의식을 통해 완전한 유대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따라서 유대인 사회에서 정식으로 유대인이라 칭함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 통한 혈통과 할례는 모두 표면적인 것들이다. 바울은 표면적인 것들만으로 완전한 유대인이라 칭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들은 출생과 할례를 따라서는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들은 껍데기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대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겉을 보고 유대인을 판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고 유대인을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삼상 16:7)이다. 겉과 속이 다른 유대인은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다. 진정한 유대인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 되고 또한 참된 유대인이 되는 것은 혈통과 할례와는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하는 구원받은 우리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