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구속과 "8자"회로
2017년 11월 3일 한로 닷새전
어떤 이가 살아가다가 어쩌구니 없는 일이거나 어떤 돌발적 사건으로 낭패를 당한다. 그 낭패가 겉보기로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당한 사람에게는 심적 거리낌(흔적) 비슷한 것으로 남는다. 그렇다고 그 거리낌이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정신적 상흔(트라우마)처럼 신경증이나 강박관념 나아가 편집증(파라노이아)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낭패를 당한 그 사람은 대부분 그 탓을 타인이나 타자에게 돌릴만하거나, 자기로부터 직접적인 원인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자기의 원인이 아니기에 그 탓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만 있으면 그 사람의 맘이 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탓이 사람 자신의 오류이거나 잘못이 아닌데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오류와 과오가 자기 탓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도덕적 사회적 책무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단지 짊어져야 할 짐일 수 있다. 그 짐을 벗을 수만 있으면 좋을 것인데 ... 하는 순간 이런 망상은 저 세상에서 있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스토아의 현자들은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삶이고, 또한 짐이란 그 짐을 잘 지는 만큼이나 그에 해당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약간의 불편함이라고들 한다. 갈만하다면 그 짐이 그의 경우에 알맞은 것이다. 혼은 몸과 같이 가는데, 몸을 지지하지 않고 혼이 가는 경우는 없다. 그 혼은 몸과 접접에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아는 물질적 몸과 비물질적 혼의 이중성이다. 몸은 혼의 관여가 언제나 부담스럽지만 혼은 몸 없이 다. 두 바퀴는 같은 방향으로 굴러 가는 것처럼 보일 때, 삶이 평온해 보이리라.
거북스러울 때도 있다. 어느 쪽도 같은 길을 가기를 거부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마치 베이트슨이 말하는 이중구속인 경우가 있다. 갑 이 을에게, 채용과 관련하여 “너하고 싶은 말을 해 봐라”라고 할 때, 을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을이 말을 안 하고 꽁하게 있을 수도 없다. / 한 부인이 남편 자랑을 하는데 다른 부인이 “그래 남자로서 멋져”라고 상세한 점을 말하면 첫째 여인은 둘째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경우거나, 그 부인이 기분이 안 좋아서 남편 욕을 해대는데 다른 부인이 “그래 그 남자 싸가지가 없어”라고 하면 첫째 여인이 둘째여인에게 속으로 내 남편 어째 안다고 지랄이야 하면서 화제를 바꾸고, 심하면 니가 내 남편을 어찌보고 하면서 딴 소리 하는 경우에서도, 이 다른 부인의 경우들이 이중구속이다. / 사회에서는 을이 갑에게 자신도 모르게 예속적이고 노예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을이 갑에서 벗어났을 때쯤에서 깨닫게 되면 괜찮은 경우다. 면접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입사원서로서 자기 소개서를 들고 가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고, “다음 기회에”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벗어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이야기를 심사자들이 알아듣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이다. 그러다가 강원랜드의 청탁자들만이 입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결국 내가 “이중구속”에 빠져 있었구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무슨 말을 또는 생각을 해도 결과는 을이 당하게 되어 있다. 상층의 원리가 먼저 있는 사회에서 을은 이중 구속 상황에 있을 수 밖에 없다. / 짐을 내려 놓으려고 하면 소속이 없어지고, 짐을 지고 소속의 명령을 따르면 고뇌가 덮친다. 저 사람 괜찮다고 하면 그 편으로 가라고 하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편으로 안을 생각을 못하냐고 핀잔을 주는 것도 이중구속이다. 다른 상황에서 비슷하지만 서로가 달리 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보면. 자기도 모르게 길을 막아놓고 공사를 하거나 또는 다른 어떤 사고로 더 이상 갈 수 없을 경우가 있다. 그 길을 가야만 하기에 공사가 끝나기를, 또는 사고가 치워지기를, 기다리며 다시 실행할 준비로서 제자리 지키기 또는 제자리걸음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것을 어떤 이들은 그가 미래가 없다거나 또는 능력도 없이 지위에 앉아서 해결하지도 못한다고들 한다. 그것은 전자의 담당자의 탓이 아니다. 그 탓을 말하는 자의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탓을 말하는 자는 상대를 맘대로 비난하고, 또한 요구사항을 주장하지만, 그 당하는 사람은 그 때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제자리걸음 밖에는. 그 사람이 길이 뚫려서 갈 수 있을 때 문제가 풀린 것 같지만, 이미 그 자리에 머문 적이 있는 그 흔적은 거울효과처럼 남아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경우 뒤돌아본다고 하는 데, 거울처럼 자신의 앞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할 수 없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거울 속의 자신은 거울 밖의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거울 속이 움직인다고 자신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현실 상황에서 움직임이 가상(또는 망상)의 앞이라는 미래에 자신을 맡겨 행할 수 없다. 그럼에도 거울 속의 타인(자신이 아니라) 또는 타자를 보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굴뚝 속에 같이 들어갔다 나온 두 청소부 중에서 얼굴에 검정이 묻지 않은 청소부가 얼굴에 검정이 묻은 청소부보다 먼저 얼굴을 씻으러 간다. 그래서 불자(佛者)가 왕에게도 농담할 수 있다. 돼지 같다는 소리를 들은 스님이 왕에서 부처 같습니다 라고. 부처 같은 이는 사물에서 돼지를 보지 않고 부처를 보았는데, 돼지 같은 인간은 부처같은 인간을 보고 돼지처럼 보는 것이다.
비추어본다는 비유가 거울만도 아니고 타인만도 아니다. 현실의 모든 표상들에게 빛을 비추어 준다는 상층론자들에 비해, 심층에서 모든 생성에게 빛을 발하게 해준다는 비유도 있다. 사람과 사물에서 스스로 빛을 내게 하는 원광 또는 원천도 있다. 나의 맘이 선하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맘도 선하다고 느낀 루소는 절대왕정에서 젠체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이들이 감옥 속에 있다고 느꼈다. 루소는 그 사회라는 감옥 밖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많은 이들은 그 감옥 같은 사회에서 희희락락 안락하게 지낸다. 그럼에도 우물가에서 기어 다니는 어린애가 우물로 가고 있으면 누구나 달려가서 그 애를 안아 올린다고 생각하는 이는 루소였다. 사람들은 거울을 쳐다보는 것보다 더하여 마치 자석의 효과와 같은 공명(共鳴)의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 지구는 돌고, 지구 스스로 자석을 만들어 남극과 북극을 만든다. 그 중간은 남극도 북극도 아닌 무풍(무자력선)의 지대가 있을까? 어떤 이는 이 자리를 찾기 위해 막대자석을 잘라보았다. 잘라진 두 막대자석은 각각이 남북을 갖는다. 이 상반된 힘의 존속을 모순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벩송은 착각(l’illusion)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 맘속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자기장과 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한쪽의 삶의 장을 자기의 삶의 장이고 나아가 그 삶이 맞다고 여기고, 다른 삶의 장을 거짓(오류) 또는 모순이라고 비난하고 혐오하고 배척한다. 참으로 황당한 비난에 대해 현자는 길을 떠난다고들 한다(일반인은 여행을 여기에 비유 하지만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 루소는 산으로 식물 채집을 떠나고, 들뢰즈 표현으로 노마드인은 산보를 떠나고, 불가에서 사키야무니는 걸승을 만나고 세속을 떠난다. 그런 방식이 남아있는 나라는 그래도 건강한 나라다. 신자유주의에 찌든 꼴꽁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면, 마치 그들이 이 나라(신자유주의 속)를 떠나 있는 자들처럼 이야기 한다(최순실이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둥, 자한당의 공공언론이 죽었다둥 .. 어이없다.)
현재는 지속하고 있는 점이라고 한다. 점은 두께, 강도, 속도, 힘, 열, 정열, 욕망을 지닌 다양체이다. 이 점은 다른 점을 만나 이어져야 선이 된다. 이 직선이든, 곡선 또는 선분이든, 호이든 간에 한계(경계)를 지닌 측면 때문에 항상 국가 또는 권력에 포획되고 예속된다. 선이든 면이든 체적이든 한정된 것을 논하는 학문을 어용과학 또는 권력과학이라 한다면, 점의 움직임(유동)으로써 점이 달리고 흐르고 가로질러 매끈한 평면을 만드는 것은 삶의 질을 향상하고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도시(폐쇄적 집단)에서도 산보를 하거나 속세를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다. 그 점은 두께나 강도 때문만이 아니라, 삶의 실재성으로써 하나이기에, 이중구속이든 거울효과든 자석효과든 양면성의 대응(적대)관계가 아니라 전(안감)와 후(겉감)을 항상 존속하면서 시간적으로 전미래를 향하여 나아간다. 안감의 회로와 겉감의 회로가 삶에서 기억과 외부지각으로 본 것은 벩송이다. 이 점을 중심으로 안과 밖이라는 수많은 회로를 “8자회로”라 본다. 미래란 과거의 회로를 미래로도 돌게 한다. 그 회로 999가 돌아감에서, 천(천개의 점이고)에다가 하나를 더(천하나) 보탤 때 그것이 창조이다. 미래는 과거의 총체를 잘 혼융해서 점을 밀고 나가 다른 하나를 만들게 되면 창조이고, 그 창조로 나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빗금으로 길을 찾기 위해 나아간 길들이 많은지에 따라(수 많은 회로를 만들고), 그 나라의 미래가 있다. “8자회로”는 과거를 잘 정리하고 생명적 덩어리로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적폐청산 잘하여, 많은 다른 회로들을 새로이 덩치로 뭉쳐나가는 것이 미래의 희망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회로의 수를 무수히 많이 만드는 것 자체가, 편차를 다양하게 생성하고 빗금으로 벗어나는 운동 자게가, 많으면 많을 수록 창조의 빛을 밝히고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
아마도 내 "8자"로 사는가 보다. 스토아처럼 숙명을 인정하고 자연의 뜻대로 ...
(50V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