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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
들뢰즈, 1972년 7월 발표, en juillet 1972 au Centre culturel international de Cerisy-la-Salle. le colloque « Nietzsche aujourd’hui » tome 1: Intensités, [tome 2: Passion.] Paris, UGE(Union générale d’éditions)., 10/18, 1973 출판 [오늘날 니체란(Nietzsche aujourd’hui?) 1권 강도성들, 2권 정열,]
in L’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1953-1974),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2002, chap. 34, pp. 351-362(avec discussion, 362-364). 재수록.
* 도대체 들뢰즈가 “노마드”라는 개념을 언제 쓰기 시작했을까? - 우선 노모스의 희랍어는 엑센트에 따라 의미가 다른 이중성이다. 하나는 규범이고 다른 하나는 전원이다. - 논문 「유목적 사유」는 1972년에 쓴 것이다. 1969년에 쓴 의미의 논리에서 노마드적 배분(distribution nomade)(§10, 76; §15, 125; §17, 146)과 노마드적 특이성(§19 166)이 나온다. 이 중에서 특히 「19계열 유머」에서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것은 자유롭고 노마드적인 특이성”(166, 번248)이라 한다. 이 경우는 “단수 4인칭(la quatrième personne du singulier)’에서 이다. 이는 문법적으로 비한정어 대명사(les indéfinis: tout, on, aucun, nul)인데 말이다. 우선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서 용어에 대한 적용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가 니체의 권능에 대한 의미에서 위상적과 유형적인 것을 구별하였는데, 위상적 의미에 노마드를 접합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52SKH)
**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라는 개념이 왜 등장하는지를 보면, 생성의 ‘일의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일의적 존재는 정주적이 아닌 유목적 분배에서 성립하며, 그 유목적 원리는 변형가능하고, 하나의 코드로 환원되지 않은 원리로서 작동한다. 얼핏 보아 유목적 원리에서는 차히들로 가득 차 있으며, 감성적인 것의 구체성이 강도로서 드러나는 데, 이런 강도의 상태(또는 덩어리)는 질서라기보다 혼합된 상태로서 카오스(또는 복잡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카오스(아페이론)이 무(無)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지만, 생물학적으로 유전적 힘을 지닌 상태이고 심리학적으로 과거 기억의 총체이다. 이런 총체는 분리해서 위계나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권능이 있고, 어쩌면 그 권능이 ‘왕관을 무정부 상태’라는 표현으로 될 수 있다. 이러한 강도성 또는 권능은 좌표위에 있기보다 위상적이며, 아직 현실화 되지 않은 속성상태와 같다. 이런 권능이 발현되어 양태로서 드러나는 경우에서 양태가 자기를 다시 반복으로 보여주는 재현이 있다. 이 재현이 과거(이전)의 권능과 상태와 결별(단절)이 있을 때, 재현의 반복은 위계든 질서든 코드 속에 안주 한다. 노마드는 이런 안주에 항거하고 저항하는 힘의 발현방식이자 스타일이다. 들뢰즈는 심층과 단절된 재현은 벗은 반복이라하고, 심층의 연결에서 차히의 반복을 하는 것을 옷입은 반복이라 한다. 니체의 표현으로 벗은 반복은 잘난 지성이 자기 모습을 노출하는 것이라면, 입은 반복은 계속적인 회귀와 새로운 반복으로 옷을 입고 또는 입는 그런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 후자의 반복은 영원회귀 속에서 동일성이나 동일한 이데아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까지는 총합한 그리고 아제에 행할 의도(intentionalite)를 포함하는 생성이다. 이 생성의 작동과 현실적 작업 그리고 발명은 현재로서 결정(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생성이 유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기에, 모델도 표본도 없기에 일의성이라 한다. 결국 들뢰즈는 노마드적 분배가 환경 또는 토지처럼 표면적인 분배로서 설명함에서부터, 두께와 내용의 이질 중첩을 통한 차이(이질)반복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새로운 생성, 새로운 발명, 새로운 창작, 새로운 학설의 성립이 정주적(위계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마드의 분배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52SLI)
* 「유목적 사유」에서 노마드는 전쟁기계와 관련 있다. 전쟁기계는 정주적이지 않을 것이니까. 그런데 왜 들뢰즈는 니체에 대해 노마드적인 점이 있다고 보았을까? 니체의 사유가 권능의 의지에서 보면 기존의 비판의 대상을 부셔버리고, 문을 활짝 여는 역할과 같다. 열려진 바깥은 하나 또는 둘의 선택의 길이 아니라 무작위의 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삶은 각각이 자기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노마드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 노마드는 아페이론에서 착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회 또는 문화에서 노마드는 인간이란 신체가 기본단위이고 신체의 작동이 부정되지 않고 긍정으로 행사하는 과정들 전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니체의 노마드는 사회에서 전례된 방식으로 법, 계약, 제도 속에서 즉 코드화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런 고드에 문제가 있어서 탈코드화하였다가 재코드화하는 것도 아니다. 탈코드화란 달리 살아가는 것이며, 게다가 인민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법, 계약, 제도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자기를 제외하고 명령하거나 구경하는 자들이며, 이들이 달리 사는 것은 인민과 동떨어져 사는 것이다. 그래서 포르노와 신학이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면서 나와 더불어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 미래(아제)의 방향이 알 수 없어서 표류하다고 하더라도 함께 나가는 운동이며, 탈영토화의 길을 가는 운동을 말한다. 이런 운동을 니체가 보여준 것은 경구를 통하여 네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외부와 관계이다. 다음(아제) 세상으로 가는 새로운 힘들의 관계이다. 둘째는 체험된 상태들의 강도와의 관계이다. 경험적 총체는 강도이며 기억이다. 추억의 장면이 아니라 기억의 총체성이 드러난 양태들이 노마드이다. 셋째는 경구가 갖는 해학과 아니러니이다. 삶의 교훈과 명언에 묶이어 뻣뻣해 지기보다 웃음으로 경직된 사회를 유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로 중앙에서 제국의 건설에 대해 변방에서 다른 공동체들이 유목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유목민이 전쟁기계로서 전제군주에 맞선다는 것이다. 이런 유목적 단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토지공통체로서 제국에 종속되지 않은 공동체들의 연대가 중요하다. (52S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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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적 사유(Pensée Nomade, 1972) 출판 1973.
오늘날에 있어서 니체는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되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이 물음과 관련하여 과연 누구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이 책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이미 너무 늙었다. 분명히 우리의 앞 세대가 발견했던 니체가 아닌 오늘날의 니체 속에서 실제로 젊은이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 (351, 257)[1, A4 복사물 쪽수이다] [한철연 초기 세대들도 그러하다. 이미 너무 늙었다. 노마드가 되기에는 너무 늙었다.]
그들 자신은 니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일단 이들 젊은이들을 바깥에서 바라보면서 엄격한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니체가 그 자신을 위해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그의 독자들을 휘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어떤 이면 읽기의 권리(droit au contresens)를 선언하였다는 사실이다. (351. 258)
니체에 관해서 논문을 준비하는 젊은이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자신의 행위와 정열 경험의 흐름 속에서 특별히 니체적인 진술을 하는 젊은이들들 말하는 걸까? .... 예를 들어 내가 알기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심도 있게 니체적인 최근의 글들 중에 드샤이(Richard Deshayes, 1954?-)가 시위 도중 유탄을 맞기 바로 전에 쓴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Vivre, c’est pas survivre)”라는 글이다. .. 니체적 젊은이는 니체에 관하여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경험의 흐름 속에서 니체적인 진술을 할 수도 있다. (351-352. 259)
오늘날의 니체는 무엇인가? ... 니체(Nietzsche, 1844-1900), 프로이트(Freud, 1856-1939), 맑스(Marx, 1818-1883) 이 세 사람을 우리 근대문명의 여명처럼 여기는 종합의 위험을 지적해야만 한다. .. 맑스와 프로이트는 아마도 우리 문화의 여명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과 완전히 다른, 일종의 저항 문화(une contre-culture, 반문화)의 여명이다. 근대사회가 코드(codes)에 근거하여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352, 259) [들뢰즈가 니체로부터 근원적 권능을 찾고 난 뒤에, 가타리를 만나서 사회라는 틀에서 코드와 탈코드를 들뢰즈에서 찾은 것 같다. 그래서 떠돌이(걸승, 노마드) 사유를 생각하게 되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니체의 작업은 결코 재코드화에 있지 않다. 그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코드를 넘어서, 스스로를 코드화하지 않으며, 또 코드화 하지 않을 어떤 것을 작용하는 일, .. 우리 자신의 신체, 대지(la Terre)의 신체, 쓰여진 글(l’écrit)의 신체.. 가될 그런 신체(un corps)를 발명하는 일, 바로 이것이 니체의 관심사요 문제인 것이다. (352-353, 260-261) [지속 하는 자연에서 항상 만들어지는 신체, 즉 어제와 이제를 포함한 다음 신체의 자기 형상화과 관심이다. 이 세상의 자기 형상화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52SKF)]
사람들은 코드화(codage)의 주요 도구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왜냐하면 사회란 그렇게 많이 변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회는 실재로 코드화의 수단을 그토록 많이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주요한 세 가지 도구란 법(la loi), 계약(le contrat), 제도(l’institution)이다. (353, 261)
먼저 책과 독자의 관계가 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그런 법에 관한 책들이다. .. 법전들 또는 신성한 책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계약, 즉 부르주아 계약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다른 종류의 책들이 있다. ..너는 나에게 지불하고, 그 대사로 너는 나에게 읽을거리를 준다. .. 다음으로 세 번째 종류의 책들로서 정치적인 책, 또는 표현을 달리하여 혁명적인 책이 있다. (353, 261)
위의 유형들이 서로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 광기(la folie)를 코드화하려는 시도가 구체적으로 다름과 같은 세 가지 형식 이래 행해져 왔기 때문이다.
우선 법의 형식들, 병원(l’hôpital) 또는 요양원(l’asile)
다음 정신분석학의 묘책(le coup de psychanalyse), 정신의학(psychiatrie) 도입
그리고 제도적인 시도들(les tentatives institutionnelle) (353, 262)
사람들은 거기에서(법에서, 계약에서, 제도에서) 코트의 삼중 수단을 발견한다. 법이라는 수단이거나. 계약관계라는 수단이거나, 제도라는 수단이거나 간에 ... 바로 이러한 코드화들 위에서 우리 관료제들(nos bureaucraties)이 번창한다. (354, 263) [정주적 삶의 정초는 코드화일 것이다. 코드는 삶의 형식을 규정(결정)하는데, 통제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행동의 광기에서 신체의 법, 의식의 광기에서 정신과(정신분석), 삶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광기에서 제도가 통제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틀을 갖추는 시기가 산업화와 상업자본주의 발달의 시기이다. 그 시대의 극단화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서구의 식민지 개척이고, 이런 코드화의 발달(?)이 제국주의를 생성하게 하여, 코드의 일원화로 가려는 길목에서 국가들 간의 갈등(제국주의의 모순)이 일차대전이다. 1953년 러시아 관료제의 몰락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스피노자와 니체를 다시 읽는다. - 모순에서 해결을 찾지 못하고, 정주적인 사고에서 유목적 사유로 전환이 필요하다. (52SLD)]
우리 사회가 탈코드화하는 방식, 그리고 모든 말단에 이르기까지 코드들이 빠져나가는 방식과 관련하여 니체는 결코 재코드화(le recodage)를 시도 하지 않는다. .. 니체가 추구하는 탈코드화는 옛날과 현재 또는 미래의 코드들을 풀어내는 상대적인 의미의 탈코드화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코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작요토록 하고 또 모든 코드를 휘젓는 그런 절대적인 의미의 탈코드화(un décodage absolu)이다. (354, 263)
카프카의 글쓰기는 .. 니체가 추구하는 탈코드화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카프카는 독일어에 맞서는 전쟁기계(la machine de guerre)를 독일어 속에서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354, 263)
니체는 또한 독일인과 연관하여 폴란드인으로서 살거나 또는 그러하길 원한다. .... 자신의 흐름들로 하여금 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법 아래에서 작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유, 계약관계를 거짓이라고 부인하면서 동시에 계약관계 아래에서 작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유, 제도를 우스꽝스럽게 뜯어고치면서 동시에 제도 아래에서 작용할 것을 주장하는 사유의 노력은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354, 263-264) [폴란드인이란 이해하기 어렵다. 니체는 독일인에서 벗어나 스위스인으로 살아가면서 독일의 야만성, 독일문화의 참담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고 “니체와 철학”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 게다가 니체의 반시대적 사유는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사고에 대한 비판 위에서 펼쳐진다. 조국의 사유는 곽상도의 사고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한 방향은 이미(어제) 쓰여진 것에 대한 의미부여에 지나지 않고, 사유의 다양체는 이제와 아제에 행해야 할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52SLD)]
분석학의 사례로 ...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과 ... 도널드 위니캇(Donald Woods Winnicott, 1896-1971)이 [한계에 부딪힌 점은] 이런 절차[계약]가 어떤 순간에는 알맞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번역하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안 되는 순간이 있다. .. [반대로] 환자와 같이[함께] 나누어야(partager)만 하고, 같이 시작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354-355, 264-265) [이 두 정신분석가는 프로이트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환자와 함께하지 못하고 계약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짜라투스트라의 경구나 시를 읽을 경우, 이 때의 텍스트들은 실질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결코 법을 세우거나 적용한다고 해서, 계약 관계를 제공한다고 해서, 제도를 확립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 텍스트들에 유일하게 상응하면서도 인지가 가능한 무엇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함께 나눔과 같은 의미의] “함께 타고 있음(être embarqué avec)”일 것이다. 이것은 파스칼에 맞서서 되돌려진, 파스칼의 어떤 것과도 같다(Quelque chose de pascalien retourné contre Pascal). 우리는 일종의 매두사의 조각배(une espece de radeau de la Méduse)에 함께 타고 있다. (355, 265)
그들은 서로 싸우며 서로를 잡아먹는다. 여기에서 모두가 노를 젓는 다는 것은 함께 나누는 것, 모든 법과 모든 계약 그리고 모든 제도를 벗어나 그 어떤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즉 그 어떤 표류를, 그 어떤 표류의 운동을, 또는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의 운동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나는 지금 하께 타고 있음을 극히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말하였다. ... 니체의 텍스트는 새로운 유형의 책이다. (355, 266) [조주선사의 ‘고양이와 칼’에서 양편이 각기 고양이에 대한 하나의 견해만을 주장하지, 각 양편은 고양이를 죽이겠다는 조주선사를 말리지 않았다. 남북이 함께 살겠다고 좁은 뗏목이지만 함께 저어가자고(고난의 행진을 하자고) 하지 않고 양편이 서로가 자기 주장을 하는 순간에 일본과 미국은 반도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기르고 있다. 탈영토화든 탈코드화든 간에 선언적 선택지의 어느 것도 뿌리치고 자주, 자치, 자유의 길로 뗏목을 저어가자, 메두사의 뗏목처럼 그러다가 149명 중에 15명이 남더라도 서로 잡아먹는 야만과 악마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 부일파, 숭일파, 종일파라는 잘난 놈들이 – 마름(주구走狗)인 주제에 - 개돼지 같이 여기는 인민을 잡아먹더라도 제국의 코드(조폭똘마니, 양아치)를 유지하자고 하는 것 같다. (52SLD)]
그러면 이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니체의 경구(잠언)가 지니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 특징들과 관련하여 우선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가 끝없는 대담(L'Entretien infini 1969)에서 밝힌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외부와 관계(relation avec le dehors)이다. 니체의 텍스트를 우연히 펼칠 때, 말하자면 영혼이나 의식의 내부성에 의하지 않는 순간, 본질이나 개념의 내재성에 의하지 않는 순간, 즉 언제나 철학의 원리를 이루어 왔던 것에 의하지 않는 첫 순간들 중의 한 순간(une des premières fois)을 보내게 될 것이다. (355-356, 266)
고다르(Jean-Luc Godard, 1930-)의 영화에서처럼 벽(le mur)을 가지고(avec 더불어, 함께) 그림(le tableau, 화폭)을 그린다. 하지만 여기서 틀(le cadre, 화면)은 그림의 표면의 경계가 아니라, 그 틀은 거의 그 반대의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외부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들어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356, 267) [영화를 비추는 벽이 화폭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면 영화의 화면은 바깥 경치의 단면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리 사진은 단면을 오려낸다. 즉 절단의 면을 구성해 낸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 그들은 숙명처럼 원인도, 이유도, 고려도, 구실도 없이 다가온다. ... 너무도 달라서 증오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이것은 국가의 설립자에 관한 니체의 텍스트 「청동에 비추어본 예술가들(ces artistes au regard d’airain)」(도덕의 계보학, II, 17)의 한 구절이다. 또 카프카의 중국의 벽(La Muraille de Chine)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들은 국경으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진 수도에까지 도대체 어떻게 침투해왔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기에 있으며 또 매일 아침마다 그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우리의 말(notre langue)을 모른다. [‥…] 육식자들이며 또한 그들의 말(마, 馬)들!” (356, 267-268)
내가 믿기에, 니체의 모든 작품에 있어서 [경구에 대한] 이면 읽기의 권리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경구[잠언], 그것은 힘들의 놀이이자, 언제나 서로 간에 외적인 힘들의 상태이다. 경구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의도 지니지 않고, 기표도 지니지 않는다. 기의와 기표는 그것들 자체가 텍스트의 내재성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경구는 힘들의 상태이며, 이 때 힘들 중에서 최후의 힘, 즉 가장 최근의 힘이며 가장 현실적(la plus actuelle)인 힘이자 잠정적으로 가장 최종적임 힘은 언제 가장 외적(la plus extérieure)이다. (357, 268)
니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이용되었고, 왜곡되었으며, 완전히 변형되었음을 밝히는 일이 중요한 때가 있었다. 실제로 장 발(Jean Wahl, 1888-1974),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가 무두인(Acéphale)[1936-1939]이라는 잡지에서 이 같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우리의 싸움은 텍스트의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니체의 이러 저러한 문장에다가 그 문장의 자유 구현의 의미와 그 문장의 외부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외적인 힘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지정하며 재결합하는 일에 관계한다. (357, 269)
따라서 이제 [경구에 대한] 합당한 이면 읽기(le contresense)란 이러한 것이다: 경구를 현상(un phénomène)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 현상을 “사로잡으러(subjuguer, 정복하러)”오는, 또는 현상을 작동하게 하는 그렇지 않으면 현상을 터트리게 하는, 새로운 힘들을 기다리면서 경구를 현상(un phénomène)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358, 270)
그런데 경구는 외부와의 관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구는 강도적인 것(l’intensif)과 관계를 둘째 특징으로 삼는다. 사실 외부와의 관계와 강도적인 것과의 관계는 같은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클로스프스키와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가 모든 것을 말한 바 있다. 나는 앞에서 체험된 상태들(les états vécus)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체험된 상태들을 재현(representation)이나 환영(fantasmes)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 ...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보다 멀리, 언제나 보다 바깥으로 향하도록, 그것으로[법, 계약, 제도로] 흐름으로 만들어야 한다(en faire des flux)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 바로 이런 체험된 상태들이 곧 강도성(l'intensité)이요 강도성들(les intensités)이다. 체험된 상태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강조하여 말하지만 주관적(le subjectif)이 아니다. 그것은 개체적(l’individuel)이지도 않다. (358, 270)
니체는 ..‘강도를 결코 재현과 바꾸지 마십시오. 강도는 사물들의 재현과 같은 기의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어휘들의 재현과 같은 기표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358, 271) [위에서 외적 힘들의 상태(357, 268)에서 기표도 기의도 아니라고 했다.]
니체의 텍스트 속에 나오고 지나가는 모든 고유명사들, 그것은 기표들도 기의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땅의 신체일 수도 있고, 책의 신체일 수도 있고, 또한 니체의 고통받는 신체일 수도 있는 그런 신체 위에서 강도들을 지칭한다.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이름, 그것은 나(moi)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유목주의(nomadisme)가 있다. (358, 272)
니체에게 있어서 고유명사가 언제나 하나의 가면, 즉 작용자(un opérateur)의 가면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359, 272) [작용자(un opérateur), 즉 수학에서 연산자(演算子)와 같은 작동을 한다. 단위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위의 작동하는 방식(강도)에 따라 다른 형성체가 이루어진다. 연산자는 항상 관계상에서 힘들이 작용한다. - 원자론자는 원자의 다양성에 의해 다양한 형성체가 형성되는 데, 비해 연산자는 들뢰즈 말대로 배치에 따라 달리 형성체를 만들 수 있다.]
경구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셋째 특징은 경구가 갖는 해학(l'humour, 유머)과 아이러니(l'ironie)와의 관계이다. 웃음없이, 많이 웃음없이, 자주 웃음없이, 아울러 때로는 미친듯한 웃음없이 니체를 읽는 것은 니체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 (359, 272)
막스 브로트(Max Brod, 1884-1968)가 카프카의 소송(Le Procès)을 읽을 때 청중들이 어떻게 폭소를 터뜨렸는지 이야기하고 있으며,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또한 웃지 않고서는 기쁨(joie)의 한 순간에서 기쁨의 다른 한 순간으로 넘어가지 않고서는, 읽기가 쉽지 않다. 웃음은 기표가 아니다. 분열적인 웃음 또는 혁명적 기쁨, 그것은 위대한 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395, 272-273)
니체에게서 웃음은 언제나 유머와 아이러니의 외적인 운동을 귀착하며, 이 외적 운동은 강도들의 운동, 강도에 있어어의 양들의 운동을 가르킨다. ... 만약 경구 속에서 웃음을 야기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유머와 아이러니의 그 어떤 분배(distribution)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강도들의 그 어떤 나눔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360, 274)
아직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특징이 있다. 이를 위해 위대한 텍스트 도덕의 계보학에 언급된 국가와 제국의 설립자에 관한 구절로 되돌아 가보자. “그들이 숙명처럼 어떤 원인도, 이유도,‥… 없이 다가온다.” 우선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통해 소위 아시아적 생산을 하는 인간들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원시 농경사회의 기반 위에서 거대한 사업을 조직하며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관료 집단과 행정조직을 통해 전제군주가 모든 것을 초코드화(surcoder) 하는 그런 제국기계(machine impériale)의 건설을 인식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서로 구분되는 두 힘을 대립시키고 있다. .. 도덕의 계보 제2부에서 니체가 제기한 질문, 즉 원시적인 부분 공동체들이 어떻게 해서 다른 지배 권력 집단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는지를 연구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엄격하게 상관적인 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현상이 발생함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360-361, 274-275)
먼저 중앙에서는 농촌 공동체들(les communautés rurales)이 전제군주의 관료기계(la machine bureaucratique du despote)속에서 율법학자들, 사제들, 관리들에 의해 점령되고 고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변방에서는 공동체들이 다른 종류의 모험 속으로, 즉 유목적인 전쟁기계(une machine de guerre nomade)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스스로를 초코드화 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코드화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전체집단이 떠나 유목 생활을 하는 것이다.(361, 275) [유목적인 전쟁기계의 성립을 설명하는데, 현실적이었고 실재적이었을까?]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이 같은 유목주의를 시초의[원초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한 장소에 정착한 집단들에게 돌연히 나타나는 모험으로서 – 외부의 부름(l'appel du dehors) 즉 운동(le mouvement)으로서 - 생각하는 일에 우리를 익숙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견해와는 달리 본원적으로 자기의 전쟁기계를 가지고 있는(avec sa machine de guerre) 유목민은 행정기계를 갖춘(avec sa machine administrative) 전제 군주에 맞서 대립된다. .. 전제군주는 유목적 전쟁 기계를 자신 속에 편입시키고 내재화하는 일을 자기의 관심사로 하는 반면, 유목민은 자기가 정복한 제국과 관련하여 행정조직을 발명하는 일을 자기의 관심사로 한다. 물로 이 양자는 그들이 서로 섞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대립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361, 275-276) [셋으로 나눈 이 세 문단은 본문은 한 문단이다. 노마디즘(유목주의)의 생성에 대해 원래 전제군주에 대립으로 이중화를 생성한다고 읽힌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니체에서 왔다는 것이다. 들뢰즈도 이중화가 원래 있었는데 역사는 한쪽만 보아왔다는 점에 대해, 니체가 다른 점을 보았다고 한다.]
철학적 담론은 제국의 통일[단위]로부터 태어나서 많은 아바타[유사 단위들]을 거치면서, 이 동일한 아바타들이 우리에게 제국의 형성과정에서부터 그리고 도시국가로 인도한다. .. (그리스의 참주정치에 관한 레오 스트라우스와 코제브의 저서에서 우리는 이에 관한 모든 종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361, 276)
언제나 철학적 담론[상층 철학, 주지주의]은 통치권의 문제를 구성하는 법, 제도, 계약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었으며, 전제군주의 형성에서 민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정착민의 역사를 관통하는 법, 제도, 계약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표”는진정으로 전제군주의 마지막 철학적 변모에 해당한다. 그런데 만약 니체가 그[이런]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니체가 반-철학(la contre-philosophie)이라는 또 다른 유형의 담론을 최초로 지각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니체는 무엇보다도 유목적 담론(un discours avant tout nomade)을 지각한 것이다. 즉 행정적인 합리 기계(une machine rationnelle administrative)에 의해 또는 순수이성의 관료들인 철학자들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전쟁 기계(une machine de guerre mobile)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게 되는 것이다. (361-362, 276)
우리의 체제 속에서 유목민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을 정착시키 위한 그 어떤 수단도 결코 약화되지 않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그만큼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다. 니체 또한 하숙집에서 하숙집으로 전전하면서 [덧없는] 그림자로 깍아 내려진 이런 유목민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 하지만 유목민이 꼭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362, 277)
이렇게 볼 때, 오늘날에 있어서 혁명의 문제(le problème révolutionnaire)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 또는 국가 장치의 전제군주적이고 관료적인 조직 속에 결코 다시 빠지지 않는 엄격한 투쟁의 단위(une unité des luttes ponctuelle)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국가 장치를 다시 만들지 않을 전쟁기계를 발견하는 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부적인 전제군주적 단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유목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를 이처럼 전쟁기계로 만들고 유목적인 역능(une puissance nomade)으로 만드는 것, 아마도 이것이 니체에게서 보이는 가장 심오한 것일 것이며, 아마도 이것이 경구 속에 나타난 그 모습 그대로 철학과 결별이 함축하는 진수(la mesure de sa rupture avec la philosophie)일 것이다. (362, 277)
원문에는 덧붙여 토론Discussion (362-364)
플뢰쇠(André Flécheux)와 타트(Mieke Taat)의 질문과 들뢰즈가 각각에 대해 응답이 있다.(52SLE)
(9:23, 52SLE) (10:03, 52SLI)
# 인명록
1000 조로아스트르(Zoroastre, Zarathushtra ou Zarathoustra (en persan : زرتشت ; en avestique : Zaraϑuštra ; en grec: Ζωροάστρης, en kurde Zerdest, 기원전 11세기) 이란 북부 Ray 태생. Il est un « prophète », fondateur du zoroastrisme.
100 세자르(Jules César, 태생: Caius Iulius Caesar IV, 전100-전44) 로마 장군, 정치가, 작가. - Imperator Iulius Caesar Divus
O
1475 보르기아(César Borgia, 1475-1507) 추기경, 교화청군대 장군. Borgia est le nom italianisé de la famille Borja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en lat. Renatus Cartesiu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1623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의 심리학자, 수학자, 과학자(물리자,)발명가 및 작가, 철학자.
1770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 관념철학자.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
1844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독일 출신 스위스 국적 고전 문헌학자, 철학자.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 창시자.
1882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심리학자. 대상관계이론의 개척자로써, 아동심리학의 선구자적 역할 …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 거주 작가. Franz Kafka, souvenirs et documents (Franz Kafka, eine Biographie) (1937), Franz Kafkas Glauben und Lehre (1948)
1884 브로트(Max Brod, 1884-1968) 프라하 태생, 이스라엘 텔라비에서 죽음. 독일어 작가 기자.
1888 장 발(Jean André Wahl, 1888-1974) 프랑스의 철학자. 현상학 전문가.
1896 도널드 위니캇(Donald Woods Winnicott, 1896-1971) 영국 심리학자. 대상관계 이론. 위니캇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기능은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사람처럼 느끼지 않는, 주관성 그 자체와 사람됨에 장애가 있는" 정신병리를 거짓자기 장애(false self disorder)라고 불렀다.
1897 조르주 바타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 1897-1962) 프랑스 지성인, 사서직. 문학, 인류학, 철학, 경제, 사회학, 그리고 주제로는 에로티즘, 신비주의, 주권, 초월주의 등 다루는 글을 쓴다.
1899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 유대계 독일 태생 미국 정치 철학자. 지도교수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이다.
1902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1968) 러시아 태생 프랑스 철학자, 정치인. 유럽연합 창설에 기여했다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파리 태생. 프랑스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번역가, 시나리오작가, 화가. 먼 가계 상으로 폴란드 출신이다. Gai Savoir(1954 번역), 니체와 순환논증의 오류(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1969)(Mercure de France, 1969) 이 작품을 푸꼬가 찬사를 보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니체(, Nietzsche)(번역 1971). 비리길리우스(Virgile)의 L'Énéide,(번, 1964)
1906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
1907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 프랑스 작가.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동안 모든 공식적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사상가들(데리다·푸코·들뢰즈·낭시·라쿠-라바르트 등)에게 큰 영향을 주는 동시에 그들과 적지 않은 점에서 여러 문제들을 공유하였다. 끝없는 대담(L'Entretien infini 1969)
1924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및 문학 이론가였다.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
1926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1930 장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스위스계 프랑스인 영화 감독, 각본가, 비평가. 1960년대 프랑스 영화 운동인 누벨 바그를 이끌었던 인물 중 하나.
1954k 드샤이(Richard Deshayes, ) 1971년 시위 도중 경찰에 의해 부상을 당한 자유 마오주의자 고등학생. 체루탄에 맞아 실명하였으나 2017년 31분짜리 근황 비데오가 있다. /
Richard Deshayes : Dans la banlieue de Caen habite et travaille un kiné, tendance ostéopathe, Richard Deshayes. .. Dans l'effervescence d'après Mai 68 il était l’un des dirigeants d'un groupe gauchiste de l'époque, Vive la Révolution ! VLR, on disait aussi Maos Spontex(Maoïstes spontanéistes).
(11:25, 52SLI)

첫댓글 120여년을 제국의 마름으로 지내온 사고를 하는 자들이 퍼트리는 가식에 반하여, 이제는 새로운 아제 인간을 바라는 사유를 하는 노마드적 분배의 풍경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나는 조국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려야하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들뢰즈에게 기다림이 둘인데, 하나는 저세상을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다림이다. <숫타니파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무소의 뿔처럼 나가기 바란다.
1987년이래 “한겨레신문”이래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가 시작되면서, 달리 말하고 달리 글쓰며 달리 사유하는 세대가 등장하였다. 이 세대가 박근혜를 감옥에 보냈고, 이제 종이 시대를 넘어선 SNS 세대가 구태의 사고에 빠진 여론 세대에 대해 전쟁(la guerre)아닌 투쟁(la lutte)과 싸움(le combat, 결투)을 벌이고 있으며: 정부는 정공으로 가라 싸움은 우리가 한다고. - 조국 현상을 보며 (52SMC)
νομή - (la) pâture[방목장]; (le) pâturage[방목장, 방목권, 목축업]
νόμος 협약 규범 la convention / law, rule, code.
νομός "pasture, field; division, distribution; district, province" co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