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66)
앙드레 로비네, 류종렬, 서광사, 1987.
- 로비네(André Robinet, 1922-201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벩송전집과 잡문집 편집책임자.
이 책을 번역하던 때,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이다. 물론 벩송만이 아니라 루소와 프랑스 혁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론이나 전체의 시각을 하나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비네의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66)와 트로티뇽(Pierre Trotignon, 1932-)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Les philosophes français d’aujourd’hui, 1967)을 연결해서 프랑스 철학의 골격을 삼으려 했다.
철없던 시절이라,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에서만의 철학이고, 그리스와 라틴 철학은 별개로 생각했었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에서, 보다 과거로서 이집트와 바빌론은 이집트와 이라크와 이란에 있다고 생각은 순진하다기보다 무지했었다. 철학이라서가 아니라 인류의 삶은 오랜 과정 속에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느 지역에서 어느 것이 발명 또는 발전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지역과 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며, 삶의 오랜 과정에서 99% 더하기에 1%정도 한 것을 위대한 발명 또는 거대한 전진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학문은 하나를 덧보태거나 새로운 싹을 움트게 하는 것이리라.
프랑스 고등학교 역사책에도 기원전의 역사 서술은 없다. 단지 유물로서 또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몇 가지 사실을 전한다. 그 중에서 하나는 베르생제토릭스(Vercingetorix, 기원전 82경-전46)라는 족장이 로마의 군대에 대항하여 산중에서 오랜 저항을 하다가, 붙잡혀서 로마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것이 기록에 있다고 한다. 이 위대한 저항인에 대한 조각과 회화는 매우 많다. 프랑스 저항정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골족에 대한 기록은 시저(Caesar 전100-전44)의 갈리아 전쟁기(Bellum Gallicum, 전58-51)의 것이 전부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기록이 중국에서 기록된 것을 참조하듯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번역 당시에는 ‘아그레제’라는 단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었지만 인명의 약력을 알 수도 없었다. 지금도 삐에르 트로티뇽은 프랑스 위키피디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를 찾기 위해 구글 속에서 한참이나 이리저리 서핑해서야, 그가 1932년생과 경력을 찾을 수 있다. 트로티뇽은 벩송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내고, 릴 대학 교수를 역임했는데도 위키피디아에 없다는 것이 낯설고 이상하다. 프랑스가 이상한(특이한) 나라이긴 하지만 말이다. (53NME)
** 데카르트로부터 프랑스 철학이라는 사상이 있다고 할 경우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 방법서설(Le Discours de la méthode (1637) - 자아는 아무래도 종세의 관념적 규정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종교에서 탈피, 상층에서 표면으로 자아가 내려왔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1446년 한글이 창제되고, 불교와 유교가 한글로 번역을 시작하면서, 인민의 자의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고 할 때, 무려 거의 두 세기가 빠르지 않는가? 새로운 세기에 우리는 스스로 문제제기하고 해결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생명에 대한 관점에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더불어 규소의 시대임을 자각하게 할 지도 모르지만, 자급자족이라는 문제에서 무기가 아니라 토지로 사유 전환이 있을 것이다. 개인은 이기심이 아니라, 인성으로 함께 살림(산다)이라는 필연성을 깨닫게 될 것 같다. 데이터 실재적 총체로부터, 8천만, 토지에 대해 손발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느끼에 할 것 같다. (53OKB),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66)
제1장 중세 철학 11-58
제2장 근세 철학
제3장 현대 철학
결론
* 참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Les philosophes français d’aujourd’hui, 1967)의 목차에는 1. 사르트르, 2. 메를로-퐁티, 3. 프랑스의 현상학 경향들, 4. 철학과 철학의 역사, 5. 20년 후, 즉 철학의 위기를 다룬다.
*** 내용 #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66) [1977년 4판]
[아래 ( ) 번역 쪽수이다]
제1장 중세 철학
* * * [문화적 세상: 알퀭]
796년에 알퀭(Alcuin, 730-804)은 [투르에 있는] 마르무티에 수도원의 승계권을 이어받다. (번 11) ... 카롤링거 왕조 사람들의 눈에 알퀭은 뷔데(Guillaume Budé, 1467-1540)였다.(14)
그레고와르 드 투르(Grégoire de Tours, 538-594) (13)
오를레앙 학교의 설립자인 테오뒬프의 전성기, (16)
* * * [자연적 세상: 에리우게나]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는 대머리왕 샤를의 궁전에서 “자연의 분할”에 관하여 여러거지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16)
잠정적인 위상학은 우시아(Ousia)에 의해서 세메이온(sêmeion)을, 즉 본질에 의하여 표시 기호를 완성한다. 산수, 즉 무명수에 관한 과학은 보에티우스(Manlius Boethius, Boèce, 480경-524)에서 집적된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기억이 에리우게나에게 되살아나도록 한다. 수는 사물의 실체이고 기호의 근거이다. (18)
그리스어를 즐겨 사용하는 에리우게나가 단자(Monade)라 부르는 단위는 산술학의 원리이고 자연의 열쇠이다. .. 창조자는 단자 속에 치수, 무게, 수 뿐만 아니라 힘, 능력, 지성도 넣어 둔다. 알랭 드 릴르(Allain de Lille, 1114-1202)와 라이프니츠(Leibniz)는 단자로서 각각의 사물을 일자이자 무한자로 만든다. (18-19)
* * * [지적 세상: 안셀무스]
베크 대수도원에서 지내는 여러 해 동안, 안셀무스는 신의 본성과 존재를 추론에 의해 증명하려고 힘쓴다. (19)
고닐롱(Gaunilon ou Gaunilo, 990경-1083경) (21)
* * * [이성의 뿌리-영혼: 위그]
문화적 세계, 자연적 세계, 지적 세계를 다룬 알퀭, 에리우게나, 안셀무스는 지성의 능력에 관해 주목한다. 위그(Hugues de Saint-Victor, 1096-1141)의 크리스트교 신앙의 성례(聖禮)(De sacramentis fidei chritianæ 1141 [Des sacrements de la foi chrétienne](미완성작) 교육론(Didascalicon ou Eruditio didascalica (vers 1135) (22)
* * * [분할과 결합, 개별과 보편: 아벨라르(변증론자)] [제1르네상스?]
이제 중세 철학의 비판적인 국면이 전개된다. 아벨라르(Pierre Abélard, 1079-1142)는 “완전한 주의(主意)(attention pleine)”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철학적 추론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를 탐구한다. (24)
지성은 베르그송(Bergson)에 있어서처럼 단순한 것, 순수한 것, 그리고 상태 – 실재적 실체 속에서 함축되어 있으면서 지성 속에 전개되지 않는 그러한 상태 – 에 호소한다. “나의 시각은 결합된 것을 분할 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분할로서 간주한다.” (24)
과학적 주의 집중은 여러 개별자들을 종과 유로 나눈다. 그의 주의 집중은 많은 개별자들을 속성으로 가질 수 있는 “여러 보편자들”을 결정한다.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경-1121경)의 뒤를 이어 아벨라르 역시 관념적인 해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24-25)
꾸쟁(Cousin)은 “아벨라르와 데카르트는 의심할 바 없이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두 철학자이다”라고 한다. 질송(Gilson)과 강디약(Gandillac)은 이 철학자의 “합리주의”에 관한 이해를 떠나서 이 판단을 인정한다. (25)
나의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 1132), L'Histoire de mes Malheurs), 편지 「Historia calamitatum. Epistola I) (« Histoire de mes malheurs. Lettre I », vers 1132)」 (28)
* * * [신앙으로 회귀: 베르나르(반(反)변증론자)]
신곡(Divine Comédie (en italien Divina Commedia)(1303 et 1321 사이)에서, 성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는 그 시인[단테]를 환상의 정상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버질(Virgil)과 교대한다. ..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는 아벨라르가 지옥을 다시 맞추는 동안 일곱째의 하늘을 강조한다. 각각의 변증론자 속에 악마를 본 다미아니(Damiani, 1007경-1072)에 의해 시작된 반동은 클레르보의 신부[베르나르]와 함께 덜 극단적이나 의미있는 형세를 취한다. (29)
베르나르는 성 바울의 말을 과장하여 지혜는 신의 눈으로 보면 광기라고 한다. (29)
* * * [제2르네상스: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플라톤철학의 부활]
두 자락으로 나누어진 성 마르탱의 법의가 양쪽으로 잡아당겨졌다. 이성[아벨라르]은 구원에 대하여 항의하고, 구원[베르나르]은 철학에 대하여 항의한다. (30)
볼로냐 대학과 경쟁하는 오를레앙 법과 대학은 군주제가 생겨나는 것을 도왔다. 제국과의 관계 의한 주권의 정의, 법학에의 논리 형식의 적용, 법률상의 논증 방식 속에 있는 변증법적인 용법, 로마법의 현실화 등은 원전과 주해서를 비판하고 주권의 골격 속에 있는 관습의 유효성을 새롭게 한다. 투르(Tours)와 엑스(Aix-la-Chapelle, deu. Aachen)를 연결하는 커다란 문화의 축은 오를레앙과 파리를 연결하는 작은 주변 축으로 축소된다. 부빈전투(Bataille de Bouvines, 1214)는 여러 힘들의 지평 위에서 통일 국가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타이유브르 전투(bataille de Taillebourg, 1242)는 800년 동안 소위 “자연적”이라는 경계를 탐구하게 했던 지정학적 실체를 정의하였다. 1215년 파리 대학은 개교 허가장을 받는다. 주교 중심적이고 수도원 방식인 농업구조로부터 도시적이고 교구 중심적이면서 대학 중심적인 사회로 이행한다. (31)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다시 나타난다. 중세 전성기에는 책의 편찬자, 즉 보에티우스(Boethius), 카시오도르(Cassiodore), 카펠라(Capella) 베드(Bède), 이시도르(Isidore) 등을 통하여 고대를 알았다. (31)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의 부활은 두 개의 중요한 효과를 가져왔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철학을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동화하려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더할 나위 없는 노력들 중의 하나를 완수하려는 필연성을 부여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없이 철학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작품에 관하여 일어난 관심이 표명될 것이다. 첫째 길은 토마스주의자의 사유 ... 둘째 길은 종교적 사유에 독립적이며 적대적인 운동을 야기할 것이다. (31-32)
샤르트르(Chartres) 학파는 새로운 원문을 발견하고서 그리스어로 된 작품 티마이오스를 부활시키고, 플라톤주의를 기독교화하고,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신학적 사색에 적용시키면서 12세기의 부흥을 오랫동안 준비했다. 주목할 만한 7명의 저술가들이 프랑스 문화를 확장시키면서 2세기 동안 교육을 계속해 나갔다. 그들은 학파의 창시자인 퓔베르(Fulbert de Chartres, 970경-1028), 이브 드 샤르트르(Yves de Chartres 1040경-1116),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Bernard de Chartres, vers 1130-1160), 질베르 드 포레(Gilbert de la Porrée, 1076-1154), 띠에리 드 샤르트르(Thierry de Chartres, 1155년 사망), 베르나르 실베스트르(Bernard Silvestre(1100경-1165경), 기욤 드 콩쉬(Guillaume de Conches, 1088-1154)이다. (32)
* * * (32) [플라톤의 성향: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파의 길을 가고 있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 de Bagnoregio, 1221-1274)는 파리 사람을 교유감에 있어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항하여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주장하였다. (32)
* * * (34) [아리스토텔레스 성향: 도미니크]
동시에 도미니크파는 지성은 자신이 행해야할 큰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지적 세계, 안셀무스의 본체론, 보나벤투라의 모범주의는 플라톤주의적 그리고 플로티노스적인 현존에 대한 본질의 선행을 공통으로 하고 있다. (34)
그런데 기욤 도베르뉴(Guillaume d'Auvergne, 1180/90-1249),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Albert le Grand 1193-1280)은 현존과 본질을 혼동하는 것을 부정하고, 존재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다시 높이 평가하고, 이해력[오성]을 위한 개념 작용과 실재 속에서 개념 출현 사이에 주요한 구별을 끌어낸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4/7-1274)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의존하는 논증적인 순서에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에게는 합리성의 모델 역할을 하고, 중세 문화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면서 그 교육에도 침투하고 있다. (34)
* * * (39)
[중세의 평가: 로비네 견해]
우리가 중세에서 얻는 “이해”란 말은 우리가 소위 “원시” 사회에서 얻는 “이해”의 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제시한다. (39) [중세의 심성을 이해하는 것이 원시(토속)사회를 이해하는 것과 닮았을까? 로비네는 여러 세기동안 인간성의 광기와 유년 시절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종교에 함몰은 사유의 깊이가 없고, 상층으로 향하는 광기일 것이다. 꼬마애들이 환상(un fantôme)을 실재로 믿고 있듯이, 중세의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신천지가 믿고 있는 환타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교의 의례가 교회 안에서 예배라는 것도 부르쥬 사회, 즉 산업사회에서 생기는 것이다. 토지를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전성기 시대의 “철학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린이와 몰상식한 자로 다루었다. .. [그럼에도] 중세 철학은 근대와 현대 철학에서 발견하는 많은 덧문 만큼이나 부채꼴의 창문을 허용하고 있다. 이 부채꼴 창문의 핵심이 장차 신의 손에 놓여있지 않을 때에도 신의 손에 놓여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러나 데카르트의 부채꼴 창문은, 꽁트의 부채꼴 창문, 벩송의 부채꼴 창문은 어떠한가? 선(先)철학적 정신이 우리에게까지 옮겨지지는 않았는가? 벩송은 브룅슈비끄가 말한 “중세의”의 현대판은 아닌가? (40-41)
* * * (42)
동방교회의 분리가 선언되고, 교황권은 아비뇽에 유폐되고, 100년 전쟁이 서방 세계를 뒤흔드는 동안, 스콜라철학이 서방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창적인 교사들도 적지 않다. (42)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 Duns Scotus, 1265/6-1308)는 토마스주의에 반대하여 프란체스코 학파의 횃불을 다시 든다. 그는 아비센나(Avicenna, Ibn Sina, 980-1037)의 영향 아래 유일한 지혜로부터 나온 신학적 통일성과 관계를 끊고서 지식의 다수성을 배운다. 존재로서 존재에 대한 과학, 즉 인간 오성에 관한 고유한 과목인 형이상학은 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42)
* * * (44) [플라톤주의에서 이탈: 유명론으로]
오컴(William of Ockham, Guillaume d'Ockham, 1270/85경-1349)과 오컴주의들이 파리의 철학사에 나타나서 1350년부터 1500년에 이르기까지 지배한다. ... 1339년부터 사람들은 오캄의 주제에 반박하기 시작한다. 즉 이 비난들은 1346년에 니콜라 도트레꾸르(Nicolas d'Autrécourt, 1300경-1350), 1347년에 쟝 드 미르쿠르(Jean de Mirecourt, alias Monachus Albus, 1300경-1349년 이후),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 알베르 드 삭스(Albert de Saxe, 1316경–1390), 니꼴라 오레슴(Nicole Oresme, 1320경-1382), 삐에르 데이이(Pierre d'Ailly, 1351-1420)에게 가해졌다. (44) - [오캄주의자들이 파리 대학으로부터 공격받다.]
그들의 경험적인 유명론 덕분에 오컴주의자들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불러일으켜 과학적인 탐구를 정열적으로 진행한다. 코이레(A. Koyré)와 뒤앙(Maurice Duhem)의 여러 작업들은 중세 과학을 재정립해 주었다. 로베르 그로스떼뜨(Robert Grossetête. 1175-1254)와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10-1292)은 “경험적 인식”의 기초를 닦았고, 수의 인식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관념을 주장했다. 샤르트르 학파 사람들은 수학적 기호의 진리를 그들의 구체적 감각과 마찬가지로 긍정했다. 피에르 드 마리쿠르(Pierre de Maricourt, 13세기)는 자석의 성질을 1269년부터 다루었다. 장 뷔리당은 충력(impetus)에 관한 저술하고 그것을 중력과의 관계에서 생각해한다. .. 니콜 오레슴(1382년 사망)은 운동 속에 시간을 함수로 하는 현상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후에 대수학을 낳게 한 함수 변화와 분수의 지수들의 표상을 도입한다. 알베르 드 삭스와 프랑스와 드 메이론(François de Meyronnes,1285-1327)은 에리우게나 이후에 헤라클레이토스 학설을 재정립하고 지구의 자전 운동을 주장하고 히파르크(Hipparque, 전190경-전120)의 별의 목록을 완성한다. (45)
오캄주의자들은 메르센(Marin Mersenne, 1588-1648),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 등이 경험적 시각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준다.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토마스주의의 시각은 무너진다. (46) [벩송처럼 1632년 갈릴레이에 의해서 무너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 * (46) [아리스토텔레스 전개: 아베로에스 ]
크리스트교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한편] 플라톤적인 크리스트교인[프란체스코파]의 상대가 되었다. .. 또한 [다른 한편] 이교도의 아리스토텔레스[이슬람]에 대항하여 싸웠다. .. 반(反) 변증론자[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들이 크리스트교 철학 속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여 싸웠던 것은 공연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신의 나라 속에 형이상학을 도입함으로써 사람들이 신없이 사유의 총체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6)
아베로에스(Averroes, Ibn Rushd, 1126-1198) .. [에베로에스주의자들] 브라방(Siger de Brabant, 1240-1284) .. 쟝 드 쟝됭(Jean de Jandun, 1280경-1328) (47) [이들은 신을 창조자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질송의 기념할 만한 노력 덕분에, 사상의 역사는 미뉴(Jacques-Paul Migne, 1800-1875)와 그의 경쟁자들의 신학 저서들 속에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되찾게 되었다. (48)
* * * (49)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탈 : 자유사상가로]
1530년 이래로 파두아 학파가 대학의 틀 속에서 꽃 핀 “새로운”사상을 확산시켰을 때 특별히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아베로에스의 전집(Oeuvres complètes)은 1529-1530년에 출판되었다. (49) [이탈리아 파두아학파는 아베로에스에 영향을 받았다.]
몽테뉴(Michel Montaigne, 1533-1592) ...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 (49)
1542년에서 1567년까지 꼴레쥬 드 프랑스에 재직했던 비코메르카토(Vicomercato, 1512-1571)가 임명권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르네상스에 철학적 독창성에 이른다. (49)
모세, 예수, 마호메트 이 세 사람은 사기꾼이다. 최선이라고 하는 크리스트는 수호신의 완전성에서 빌어온 완전성이다. 종교는 천민을 속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자연신론자와 비그리스트교인들은 “자연적 종교” 속에서 만족을 찾고, 그 자연적 종교는 “이성의 한계 내부에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51) [“이성의 한계 내”는 칸트주의 냄새가 난다. 자연적 종교는, 감화에서, 연민에서, 또는 공감과 공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53NMH) ]
보댕(Jean Bodin, 1529-1596)은 보나벤투라만큼 멀리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보댕이 그의 저작 헵타플로메레스(Heptaplomeres) ...(51)
아베로에스주의는 단절된 세기 동안 나쁜 분위기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13세기의 내재주의적 사유가 다시 성공할 기회를 부여했다. 중세 초기에 “속세 사람”의 사유 형성에 관한 라가르드(André Lagarde 1912-2001)의 저작들, 16세기 “이성주의”에 관한 뷔송(Busson)의 저작들, 17세기에 “학식있는 자유사상(le libertinage érudit)”에 관한 핀타르(René Pintard, 1903–2002)의 저작들, 18세기의 “계몽기 철학”, 19세기의 “실중주의”, 20세기의 “유물론” 등은 초월적인 경향을 띤 크리스트교의 세계에 대한 시각에 반대하여 내재성의 공통 기준을 보존한다. (52) [내재성의 철학은 카톨릭 독단에 대한 반대이다. 박홍규 식으로 보면 허무주의 또는 난제(aporia)의 해결의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이다. 프랑스에서 종교 대혁명 이래로 종교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붕괴되었다. 남은 것이 철학인 셈이다.]
* * * (52) [제3기 르네상스]
[이를 프랑스 철학의 3기라고 부르면(1500년이후), 제1기는 아벨라르(1079-1142)와 베르나르(1090-1153)의 활동에 의한 12세기 시기 / 제2기는 오컴주의자에 경향(1350-1500)에 대한 파리 대학의 반격과 아베로에스주의(아리스토텔레스 경향)의 탈 교회 방향기]
15-16세기의 르네상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르네상스는 시기적으로 제3기일 것이다. (53) [16세기 즉 1500년대 이후일 것이다.]
페브르(Lucien Febvre, 1878-1956)는 인간성으로 하여금 은총이 넘치고 영감을 부여받는 세기를 만든다. 뷔송(Julien Busson, 1717-1781)은 무신론과 감추어진 자유 사상만을 볼 뿐이다. 사람들은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94경-1553경)를 무신앙으로 끌어냈거나 또는 그를 시복하였다. .. 메나르(Pierre Mesnard, 1900-1969)가 “페트라르카에서 데카르트까지” 자기 연구를 확장할 때, 이 확장은 르네상스를 이해하기 위하여 13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1650년에까지 그 결과들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3)
르네상스는 플로렌스-파리 지방의 민속적 표현은 아니다. .. 새소식은 인쇄술의 발명에 의해 시작된 거대한 문화적 확장으로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된다.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많은 개인적 인쇄물들은 지식과 정신의 급진적인 질적 변화를 수도원이나 대학의 도서관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뛰쳐나오게 한다. “박식한 자들”은 국가의 교회 조직에 힘입을 필요가 없다. (53) [옛 주: 1450년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발명] [인쇄술이란: 물질의 변화(탈영토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명제에서 역사적 사건이다. 이 다음으로 벩송이 말한 모터의 발명일 것이다(신체의 탈영토화). 2015년 스마트폰의 인민화가 새로운 탈영토화를 가져왔다. (53OKB)]
..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조한 것처럼 플라톤을 강조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으로 되돌아 왔다. 즉 철학은 인간에 의해 주장이 바뀌게 되는 신적 발명이다. (54)
에라스무스(Erasmus, 1467-1536)는 자기 주변에 그리스적인 것이 많은 만큼이나 그리스트교적인 것이 적은 것을 보고 놀라서 아벨라르를 모방했다. (54)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l della Mirandola, 1463-1494) .. (54)
자연주의 경향의 극단에 있는 포스텔(Guillaume Postel, 1510-1581)은 환상적 계시주의 속에서 자연과 신을 혼동하고 있다. (55)
..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관념의 힘도, 그리고 전통의 가치도 믿지 않는다. 역학은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유용한 과학이다. 역학은 “수학의 천국”이다. 자연은 척도에 따라 일람표로서 응답하는 장치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제작하는 것은 활력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5) -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성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1519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난다.]
인간의 행복은 인간 활동의 완성이다. .. 신 중심주의에서 서서히 인간 중심주의로 바뀐다. 지혜는 샤롱(Pierre Charron, 1541–1603)에 의해 정의되고, 기욤 뒤 베르(Guillaume du Vair, 1556-1621)는 크리스트교인으로 죽기보다는 스토아주의의 정신에 따라서 오히려 잘 살아가는 것을 가르친다. 도덕적 학문은 경제적이고 자연적인 학문에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구원과 학문은 노사분쟁 조정 위원회의 판결권과 대체하기 위하여 물러난다. 몽테뉴(Montaigne, 1533-1592)는 이미 “인간 각자는 인간 조건의 완전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55)
* * * (56) [자아의 태동: 몽테뉴]
수상록(Essais)의 문화적 성공은 종교가 수천 분파로 나누어진 분할과 혼동의 와주에 이루어졌으며, 16세기 프랑스를 두 개 진영으로 나누었다. 비록 인쇄술과 종교개혁이 사상에 대한 교학 분리의 전부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그것들은 필연적인 부분들일 것이다. (56)
아벨라르가 크리스트교적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몽테뉴는 크리스트교 이전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다. 확식히 그의 법적인 문서에서는 소크라테스나 아벨라르의 것처럼 수학이라는 충격적인 도구가 없다. (56)
파스칼이 가증스러워하고 말브랑쉬가 거만하다고 할 자아는 몽테뉴가 근세를 불러일으키게하는 지렛대이다. (57)
“심사 숙고해 보자!” (58)
(9:29, 53OKB)
# 인물들 **
[프랑스 중세 철학]
316 성 마르땅(Saint Martin de Tours, Martin le Miséricordieux, 316-397) 로마 군인, 프랑스 크리스트교 성자. 그는 수비대장 시절에 자신의 망토의 반을 잘라서 거지에게 준 일화로서 알려졌다. 개종하여 주교를 지냈다. 투르의 성마르땅 성당은 프랑스 4대 성지 중의 하나이다.
538, 그레고와르 드 투르(Georges Florent Grégoire (Georgius Florentius Gregorius) de Tours, 538-594) 투르 주교, 교회 역사가, 프랑크족 역사가. Dix livres d’histoire (Decem libros historiarum), 574년경(Histoire des Francs)
735 알퀭/알쿠이누스(Alcuin, 735-804) 영국 요크셔 출신 프랑스 투르에서 졸. 라틴어를 사용한 영국 시인, 학식자, 신학자. 샤룰마뉴의 친구이자 자문관. 카롤링제국의 가장 큰 학파를 이끌었다.
755 테오뒬프(Théodulf d'Orléans, ou Théodulfe, 755-820 (plutôt que 821) 스페인(비지고트족)출생 앙제에서 몰했다. 교회인물이며, 카롤링거 시대 문인, 오를레앙 주교.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 Renaissance carolingienne »의 중심인물.
[768 샤를마뉴(Charlmagne, 742-814) [칼 대제(Karl der Groβe), 샤를 1세], 프랑크왕 재위 768-814, 로마황제 재위 800-814): 메로빙어(Merowinger) 왕조는 일종의 제정일치체제를 가진 카롤링어(Karolinger) 왕조로]
810 에리우게나(Jean Scot Érigène, Johannes Scotus Eriugena, 810경–877) 신부, 철학자, 번역가. / 아일랜드 신학자.(Irish theologian)
[980 아비세나/ 이븐 시나(Avicenna, Ibn Sina, Αβικέννας, 980-1037) 페르샤 철학자, 의사, 회교 종교인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자. 천문학, 연금술, 심리학에 해박하다. Canon de la médecine Livre de la guérison [des âmes],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플라톤을 가미한 철학으로 이슬람 신앙을 해석하였는데,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프란체스코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990 고닐롱(Gaunilon ou Gaunilo, 990경-1083경) 투르의 마르무티에 수도원의 베네딕트 수도사, 그는 안셀무스의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비판으로 알려졌다. / 독일 중세 철학사가 플라쉬(Kurt Flasch, 1930-)가 고닐롱 연구.
998 베랑제(Bérenger de Tours (Beringerius Turonensis), 998-1088) 투르 출신 프랑스 신학자. 1050년 이탈리아 베르세이 공의회에서 랑프랑(Lanfranc, 1010경-1089)의 반박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1006 샤르트르 학파(L'École de Chartres ou École de la cathédrale de Chartres ou académie chartraine, 1006) 퓔베르 주교에 의해 창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에 토대를 둔다. / 퓔베르(Fulbert de Chartres, 970경-1028) 1006-1028 샤르트르 주교. 참여자들로 이브 드 샤르트르(Yves de Chartres 1040경-1116),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Bernard de Chartres, vers 1130-1160), 질베르 드 포레(Gilbert de la Porrée, 1076-1154), 띠에리 드 샤르트르(Thierry de Chartres, 1155년 사망), 기욤 드 콩쉬(Guillaume de Conches, 1088-1154), 장 드 살리스버리(Jean de Salisbury(1115-1180, 영국인 배우러 왔다), 베르나르 실베스트르(Bernard Silvestre(1100경-1165경)[베르나르 샤르트르와 오랫동안 혼동되었다],
[1007 다미아니(Pierre Damien (lat. Petrus Damianus, it. Pier Damiani), 1007경-1072) 이탈리아의 [은둔주의] 카말둘 수도원(L'ordre camaldule) 수도사, 대주교, 추기경. De divina omnipotentia, sur la puissance de Dieu, s.d. ]
1050 로스켈레누스(Jean Roscelin, Roscellinus, 1050경-1121경),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유명론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1070 기욤 드 샹포(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 노트르담 대성당 학교의 교장, 파리 생-빅트와르 수도원 창설자. 신학자, 철학자. 보편논쟁에서 온건한 실재론자. 아벨라르의 스승. [로비네는 이 철학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기호론의 창시자 일 것인데.. 그는 아벨라르의 개념론에 반대했다고 한다.]
1079 아벨라르(Pierre Abélard, (Petrus Abaelardus), 1079-1142) 프랑스 철학자, 변증론자, 신학자. 개념주의 발명자(inventeur du conceptualisme). Epistolae duorum amantium (Lettres des deux amants), 1115 La romance d'Héloïse (1113-1115). 긍정과 부정(Sic et non, 1122), 불행한 이야기(Historia calamitatum 1132), L'Histoire de mes Malheurs), 편지 「Historia calamitatum. Epistola I) (« Histoire de mes malheurs. Lettre I », vers 1132)」
1090 베르나르(Bernard de Fontaine, abbé de Clairvaux, 1090-1153) 수도사, 카톨릭 종교적 삶의 개혁자. 시토파 수도원(l'ordre cistercien (ou ordre de Cîteaux) 창시자. 아벨라르와 투쟁했고, 카타르파를 이단으로 몰았다. 십자군 전쟁(la seconde croisade, 1146)을 설교했다.
1096 위그(Hugues de Saint-Victor, 1096-1141) 독일 삭스지방 출생 파리에서 몰. 중세 철학자, 신학자, 신비작가. 저술이 많다. 크리스트교 신앙의 성례(聖禮)(De sacramentis fidei chritianæ 1141 [Des sacrements de la foi chrétienne](미완성작) 교육론(Didascalicon ou Eruditio didascalica (vers 1135)
[1103 안셀무스(Anselme de Cantorbéry, lat. 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 이탈라이아 태생, 베네딕트 수도사. 영국 칸터베리의 대주교. Monologion de Divinitatis (Solilogue sur la Divinité), 1075-1076 Proslogion seu Alloquium de Dei existentia (Supplément ou Allocution sur l'existence de Dieu), 1077-1078]
1114 알랭 드 릴(Allain de Lille, 1114-1202), 프랑스 신학자, 시인. 자연의 한탄(La plainte de la Nature. De planctu naturae)(vers 1167-1173)
1126 아베로에즈(Averroes, Ibn Rushd, 1126-1198) 스페인의 아랍계 철학자, 알가잘리가 철학자의 부조리(تهافت الفلاسفة 타하풋 알팔라시파)를 쓴 데 대해 그 반론으로서 부조리의 부조리Incohérence de l'Incohérence)를 썼다. Grand Commentaire du De anima, Discours décisif. [에베로에스주의자들 / 브라방(Siger de Brabant, 1240-1284) 네델란드 태생으로 이탈리에서 몰하다. 에베로에스 주의자로 단죄 받았다. / 쟝 드 쟝됭(Jean de Jandun, 1280경-1328) 프랑스 아르덴지방 출신 이탈리아에서 몰했다. 아베로에스주의자. 정치 신학자.]
1175 로베르 그로스떼뜨(Robert Grossetete. 1175-1254) 영국 학자. 프란체스코파 재속 성직자, 주교를 지냈다.
1190 기욤 도베르뉴(Guillaume d'Auvergne, 1190-1249) 신학자, 생루이의 자문관, 파리주교. Il a participé en 1241 à Paris au procès du Talmud.
[1193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1193--1280) 독일 신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 일 스콜라 철학자로 도미니크(Dominique) 교단(敎團)의 수도사(修道士)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전파하였다.]
1214 베이컨 (Roger Bacon, 1214-1294), (Doctor mirabilis, « Docteur admirable ») 영국 철학자, 과학자, 연금술사. 샤르트르학파와 연계되어 있다.
1221 보나벤투라(Bonaventure de Bagnoregio / Bonaventura de Bagnoregio, 1221-1274) 이탈리아출신, 리용 공의회(le IIe concile de Lyon) 준비중 사망(독살설), 카톨릭 신부, 프란체스코파, 신학자, 추기경(cardinal, 1221–1274), 플라톤주의자.
1227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7-1274) 이탈리아 중부 아키노 출생, 이탈리아 중부에서 몰. 파리 대학 수학(1245-1248), 강의(1268-1272), 동 로마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도미니크 수도원으로 갔다. 아랍-이슬람 문화에 시달리던 서구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정리를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
1230k 삐에르 드 마리꾸르 (Pierre de Maricourt, surnommé Petrus Peregrinus (« Pierre le Pèlerin »), 13세기 인물) 삐까르디 출생, 중세 과학자. 1269년에 자석의 성질을 다른 저술을 썼다. 다루었다. .
[1265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 Duns Scotus, 1265-1308)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속하였으며, 변증법을 미묘하게 잘 다루었기 때문에 "정밀한(subtile) 박사"라 불린다. 토마스주의에 반대. [들뢰즈가 주목한다.]
[1265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 이탈리아 플로랑스 시인, 작가. 신곡(Divine Comédie (en italien Divina Commedia)(1303 et 1321 사이), - [대흑사병과 직접관련이 없다. 1346년-1353년 사이에 흑사병 전파.]
1285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Guillaume d'Ockham, 1270/85경-1349) 영국 태생 프랑스에서 활동, 유명론자. 프란체스코파,
1285 프랑스와 드 메이론(François de Meyronnes, 1285-1327), 프로방스 지방의 프란체스코파 작은 형제회(Frère mineur) 철학자, 신학자, 둔스 스코투스 제자.
1300 니콜라 도트레꾸르(Nicolas d'Autrécourt, 1300경-1350), 유명론자. 오캄주의자. 유명론 철학자. 1346년과 1347년 사이 이단으로 몰리고 그의 책이 불탔다. 그 후 메츠에서 교회 참사원으로 지냈다.
1300 쟝 드 미르쿠르(Jean de Mirecourt, alias Monachus Albus, 1300경-1349년 이후), 시토파 철학자. 오캄의 제자.
1300 뷔리당(Jean Buridan 1300-1358) (라)Joannes Buridanus. 파리대학에서 공부한 프랑스 철학자, 열렬한 오캄주의자. 광학, 역학 분야의 과학이론가. 1340년경 임페투스 이론(théorie de l'impetus, 충격론)을 재발견.
1316 알베르 드 삭스(Albert de Saxe, lat. Albertus de Saxonia, 1316경–1390) 독일 철학자, 파리에와서 공부, 뷔리당 제자.
1320 니꼴라 오레슴(Nicole Oresme, Nicolas Oresme, 1320/22-1382)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음악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주교를 지냈다.
1351 삐에르 데이이(Pierre d'Ailly, lat. Petrus de Alliarco, 1351-1420) 프랑스 추기경, 신학, 우주학, 점성학을 다루어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1433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는 플라톤을 강조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종합으로 되돌아 왔다.]
[1452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출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성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1519년 4월 23일 세상을 떠난다.]
[1466 에라스무스(Erasme,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1469-1536) 네델란드 인문주의자 신학자.]
1467 뷔데(Guillaume Budé, 1467-1540) 프랑스 인문주의자. Commentarii linquae graecae (Commentaires sur la langue grecque, en latin, Paris, 1529),
1509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 오를레강 출신 파리활동. 프랑스 작가, 인문주의자, 문헌학자. 1526년 이탈리아 파두아에 가서, 스승 겸 친구인 빌라노바(Simon de Villanova, s.d..)에게 배우다.
1510 포스텔(Guillaume Postel, 1510-1581) 프랑스 동방학자, 문헌학자, 신지학자(théosophe), 크리스트교적 카발라의 대표자.
1512 비코메르카토(Francesco Vimercati, ou Vimercato, fr. François Vicomercato, 1512-1571) 밀라노 소요학파 철학자. 한때 파두아에서 아베로에스를 배웠다. 프랑스에서 1542년 왕립 학교(Collège royal, Collège de France의 옛이름)교수 엮임,
1529 보댕(Jean Bodin, 1529-1596) 프랑스의 법학자, 사상가. 인간의 생존권과 생활체계를 신앙문제에서 분리하고, 정치에서의 덕과 신학에서의 덕을 구별, 종교로부터의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국가론(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 6권, 1576)
1533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의 저자이다.
1541 샤롱(Pierre Charron, 1541–1603) 프랑스 신학자, 철학자, 연설가, 주로 옥시타니(Occitanie)지역에서 활동하고, 몽테뉴를 만나 좋은 친구가 되었다.
1556 기욤 뒤 베르(Guillaume du Vair, 1556-1621), 고위 성직자, 정치가, 도덕론 작가. 루이 13세의 법무부 장관(un Garde des sceaux) 1591는 에픽테투스의 지침서(Le Manuel)를 번역했다.
1588 메르센(Marin Mersenne, 1588-1648) 프랑스의 물리학자, 수학자.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널리 서신 왕래를 하여 학문적인 의견을 교환했는데 당시 그를 중개자로 학자간의 의견교류와 연구결과 보고가 이루어졌다. 우주의 조화(Harmonie universelle, 1636-1637)
[프랑스 근대 철학]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방법서설(Le Discours de la méthode (1637)
[1629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 네델란드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1800 미뉴(Jacques-Paul Migne, 1800-1875) 프랑스 신부, 인쇄가, 종교서적 편집자. 교부저작 전집(Patrologia Latina, fr. Patrologie(1841-1855)(교부들 127권, 인덱스3권: 테르툴리아누스부터 이노센트 3세까지 10세기) / 르낭(E. Renan, 1823-1892)의 열전과 달리, 그 당대의 철학을 볼 수 있다. - 에띠엔 질송이 연구했다.]
1812 오레오(Jean-Barthélemy Hauréau, 1812-1896) 프랑스 역사가, 기자, 행정가.
[프랑스 현대 철학]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1861 뒤앙(Pierre Maurice Marie Duhem, 1861-1916) 물리학자, 화학자, 역사가, 과학철학, 세계의 체계: 플라톤에서 코페르니쿠스까지 우주론들의 역사(Le Système du Monde. Histoire des Doctrines cosmologiques de Platon à Copernic.(10 vol., 1913—1959).
1892 꼬이레(Alexandre Koyré 1892-1964)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인식론자이자 철학자이다.
1900 메나르(Pierre Mesnard, 1900-1969) ENS 대학교수, 프랑스 철학사가. L'essor de la philosophie politique au XVIe siècle, 1936. Essai sur la morale de Descartes, Paris, Boivin, 1936.
1922 로비네(André Robinet, 1922-201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벩송 전집과 잡문집 편집책임자.
1932 트로티뇽(Pierre Trotignon, 1932-)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Les philosophes français d’aujourd’hui, 1967), 베르그송에서 생명의 관념(L'idée de vie chez Bergson et la critique de la métaphysique (1968) Les philosophes français de 1945 à 1965 (1994)
(14:08, 53O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