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역에 정착하다
김권곤
우주 항공로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우주휴게소
지구의 물을 마시며 잠시 쉬는 동안
우주선을 점검하고 연료를 가득 채워준다
‘우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가로수가 플래카드를 흔든다
상점마다 우주라 쓰여 있는 간판들
우주의 별들을 사고파는 우주중개소
우주식당 우주횟집 우주곰탕 우주짬봉
유자향이 우주찻집에서 노래처럼 흘러나와
여기는 아픔도 슬픔도 없는 세상 같은데
우주병원, 우주약국, 우주장례식장이 영업 중이다
우주의 땅 기운을 잔뜩 머금은
우주쌀 우주유자 우주봉 우주마늘
청정 바다에서 나온 김 갯장어 돌문어가
우주 특산물 머리띠를 두르고 손짓해
카드를 내밀자 덥석 받아 든 우주시장
여기는 지구의 카드가 통하는 우주다
나로우주센터 우주과학관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우주인들
갯내 묻은 투박한 말투로
“어느 별에서 온 외계인들이랑가?”
“그랑께, 지구별에서 왔다고 안 그라요”
이곳은 고흥, 지구의 말이 통하는 우주다
성벽을 보수하다
한때 철옹성이라 불리던 성벽
수많은 적의 침입에 잘 버티어 왔는데
비바람 치는 시간 앞에
성벽 모서리가 뭉개지고
흔들리는 주춧돌 몇 개가 주저앉았다
더 무너지기 전에
주변 성주들에게 의견을 구하던 중
한 석공이 신공법을 제안했다
땅에 쇠말뚝 박는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조립식 석벽을 주문하여 조립하는 동안
이끼 낀 바윗돌을 청소하고
투석전에 깨지고 파인 곳
시멘트로 메우고 철판으로 덧씌워 보강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던 발음
깨진 성벽 사이로 기어 나오는
이것들 때문에 발언권이 약했는데
이제는 내 생각을 오타 하나 없이
잘근잘근 씹어가며 말할 수 있다
임플란트, 대단한 공법이다
5월의 근로자들
5월은
초록 페인트 공장이 성수기다
납품 기일 맞추려
밤낮 가리지 않는 근로자들
배달하는 바람의 오토바이 소리 분주하다
페인트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칠하는 달인의 솜씨에
산과 들은 아침마다 모습이 바뀌어 간다
생산량이 부족할까
약속이나 한 듯
일거리 조금씩 꺼내놓은 나무와 풀
서로 양보하며 서두르지 않는다
냄새도 없고 손에 묻지 않는
무공해 페인트로 초벌 도색 마치면
날마다 그 위에 더 푸르게 덧칠한다
햇볕은 종일 갖가지 꽃 그림을 그린다
봄나들이 옷으로 갈아입은 들판에서
유독 황금색을 고집하는 누런 보리밭
작년 가을 쓰고 남은 페인트 통을 건네준다
이렇게 햇볕이 짱짱한 날
칡과 등나무 같던 노사 갈등에 새싹이 트고
웃음이 초록초록 피어나는
색칠하기 좋은 날이다
김권곤 약력
전남고흥 출생
홍익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 졸업
서울대 고급금융과정 수료
한국거래소 근무
한국국보문학 신인상 수상(2016.5)
디카시 전국백일장 대회 동상 수상(2024.10)
한국문인협회 회원
중구문인협회 회원
시집 「우주역에 정착하다」(2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