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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14권
41) 중음처(中陰處)
[문] 중음(中陰)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기에 이 논을 지었는가?
[답] 다른 소견을 끊기 위해서 이 논을 지었다.
혹 사람에 따라서 중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혹 중음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비바사(鞞婆沙)의 논사들은 중음은 없다고 주장하고,
육다(育多:韋陀 論師) 외오들은 중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 비바사의 논사들은 왜 중음이 없다고 주장하는가?
[답] 그것은 부처님의 경전의 말씀에 따라 중음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무간죄(五無間罪)를 짓게 되면 무간 지옥이 불어나고 자라나서 반드시 지옥 속에 태어나게 된다.
만약 중간의 사이가 없음으로 해서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면, 이 때문에 중음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도 게송으로 말했다.
외도의 명근(命根) 다하면
염라대왕이 있는 곳에 이르기 전에
중간에 잠깐 머물 곳 없어
반드시 지옥 가는 일 제외될 수 없도다.
만약 중간에 잠깐 동안이라도 멈출 곳이 없다면 그 이유로 중음은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세속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빛과 그림자의 중간에 있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생명도 끝나건 태어나건 끝나고 태어나는 중간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경전에서 증명하고 있는 까닭에 비바사의 논사들은 중음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문] 육다(育多:韋陀) 외도들은 무슨 이치로 중음이 있다고 주장하는가?
[답] 그것도 경전으로부터 제기된 것으로 중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일이 합쳐지는 까닭에 어머니의 태(胎)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부모가 함께 합쳐져 만나게 되고 어머니에게 혹 임신할 시기가 되어 생명체를 잉태할 만한 조건이 되면 향음(香陰:乾闥婆)이 찾아오게 된다’라고 하셨다.
만약 향음이 찾아오게 된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중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른 경전에서는 다섯 종류의 아나함(阿那含:不還)을 설명하고 있다.
즉 열반에 옮겨지는 중간 위치와, 열반의 세계에 태어나는 경우와, 열반의 세계로 가는 일과 열반에 드는 길로 가는 일이 없는 경우와, 상류(上流)로 옮겨 가서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이르게 되는 경우 등, 다섯 가시가 그것이다.
만약 열반으로 옮겨지는 중간 사이를 말하게 된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중음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바차(婆蹉)라는 외도가 부처님 계신 곳을 찾아가 물었다.
“구담씨여, 만약 이 때 이 몸을 버리고 나서 아직 다른 곳에 이르기 전에는 중생들은 생각[意]을 타고 가게 되는데 구담씨여,
그 때를 당하면 중생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생명을 받아 세상에 머물게 됩니까?
사문(沙門)인 구담씨는 그들 중생들을 위하여 무엇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세상에 머물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차(婆蹉)야, 만약 이 때 이 몸을 버리고 나서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에는 중생들은 생각을 타고 가게 된다.
바차야, 그 때가 되면 중생들은 애욕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머물게 된다. 나는 말하노니 그들은 애욕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머물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만약 중생들이 이 세상에서의 몸을 버리고 나서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에 생각 따라 간다고 한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중음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이외에도 중음이 없다는 주장을 힐책한 일도 있다.
만약 중음이 없다고 한다면 염부제주(閻浮提洲)에서 목숨이 끝나 울단월주(鬱單越洲)에 태어날 경우 그는 이곳에서 목숨이 끊어진 뒤 저 쪽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아니하면서 존재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도 법이 없는데도 있다고 하는 것과 같아진다.
이 말에 허물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중음이 없다고 말하고,
이와 같이 두 번째는 중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오직 중음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
[문] 만약 중음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육다 외도들의 주장인데 이것이 어떻게 비바사 논사들이 주장하는, 경전에서 증명한다는 말과 상통되는가?
[답] 이 경전의 증명은 그 뜻을 살펴보면 통할 수 있다.
[문] 어떤 이치가 있어 어떻게 상통되는가?
[답]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오무간죄(五無間罪)를 짓고 나서 무간 지옥이 불어나고 자라나면 반드시 지옥 속에 태어나게 된다”라고 하신 말씀은,
부처님께서 이 경전에서 다른 태어날 곳[趣], 다른 행방은 제외하신 것이다.
다른 태어날 세계[趣]를 제외하였다고 하는 것은, 오무간죄를 짓고 나서 죄가 불어나고 자라나게 되면 반드시 지옥 속에 태어나고 다른 세계에는 태어나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행방 즉 갈 곳이 제외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무간죄는 반드시 생명을 부여받는 보응을 받게 되고 현재의 보응은 받지 아니하며 무의 보응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경전의 내응이 상통된다는 점이다.
[문] 그 말씀대로 이것을 경전에서,
“오무간죄를 짓고 나서 죄가 불어나고 자라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태어난다”고 하였다면,
이것은 반드시 다섯 가지의 무간죄가 갖추어져서 그 죄를 짓고, 그 죄가 불어나고 자라나면 지옥에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다섯 가지 무간죄 가운데 네 가지ㆍ세 가지ㆍ두 가지ㆍ한 가지 죄만 짓고도 지옥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가?
아니면 이 다섯 가지 죄를 제외한 다른 죄를 짓고도 지옥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가?
또 자못 때때로 다섯 가지 무간죄를 짓고 그것이 불어나고 자라나면 지옥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는가?
또 죄를 지은 사람도 백 년 동안 세상에 머무는 경우도 있는가?
[답] 이 문제는 경선에 그 이지가 있는 것도 있고 혹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오직 중음이 없다고 말한 경전은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게송의 내용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외도의 명근(命根) 다하면
염라대왕 있는 곳에 이르기 전에
잠깐 동안도 멈출 곳 없고
반드시 지옥 가는 일 제외될 수 없도다.
[답] 부처님은 이 게송에서 다른 태어날 세계는 제외하셨으며 다른 행방도 제외하셨다.
다른 태어날 곳을 제외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 외도가 악한 행동을 하여 죄가 불어나고 자라나게 되면 반드시 지옥에 태어나며 다른 태어날 세계에 태어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행방을 제외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 외도가 악한 행동을 하여 죄가 불어나고 자라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태어나는 보응을 받게 되고 현재에서 법의 보응을 받는 것이 아니며 후세에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 세간에서 비유하는 “빛과 같고 그림자 같아 중간은 없다”라는 것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이란 목숨이 끝나고 태어남에 중간은 없는 것이라 하였다.
[답] 이 게송과는 아마도 상통되지 아니할 것이다.
이 게송은 경전에 있는 말이 아니며 계율도 아니고 아비담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세간의 비유로 현인ㆍ성인의 법을 허물어서도 안 된다.
세간의 비유가 다르고 현인ㆍ성인의 법이 다르다.
또한 이 비유는 마땅히 허물어야 한다.
만약 그 원인을 허물게 되면 또한 그 이치도 허물어질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목숨의 뿌리[命根]가 아니며 생각이 없고 중생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목숨이란 끝나든 태어나든 목숨의 뿌리가 있고 의식이 있고 이는 중생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 가령 이 비유와 상통되게 하려면 어떤 이치가 있어야 하는가?
[답] 이 비유도 곧 중음이 있음을 말한 것이며 중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빛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중간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사음(死陰:죽은 몸)과 중음(中陰) 사이에 중간은 없고 또 중음과 생음(生陰:새로운 생명) 사이에 중간은 없다.
이와 같이 이 비유도 곧 중음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중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나.
[문] 이것은 비바사 논사들의 주장이니, 이것이 어떻게 육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경전에서 증명하였다는 말과 상통될 수 있는가?
[답] 그것을 말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세 가지 일이 합쳐지는 까닭에 생명의 뿌리가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였다.
즉 부모가 함께 합쳐져 만나게 되고 어머니에게 혹 임신할 시기가 되어 생명체가 잉태할 만한 조건이 되면 향음(香陰)이 이미 그 곳에 찾아오게 되는 세 가지 조건을 말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향음이 이미 그 곳에 찾아오게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문] 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가?
[답] 이것이 손가락 튀기는 사이에 향음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것인가?
[문] 만약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 마땅히 음행(陰行)이라 표현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음행과 연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음행이라 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말할 때 이것은 논리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향음이라 말하든 음행이라 말하든 짐짓 그것으로 중음을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 그렇다면 아나함(阿那含)의 경지에 있던 사람이 죽어서 받는 다섯 가지 과보, 즉 중반열반(中般涅槃)ㆍ생반열반(生般涅槃)ㆍ행반열반(行般涅槃)ㆍ무행반열반(無行般涅槃)ㆍ상류(上流)로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이르게 되는 다섯 가지 과보의 설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그것을 말한 사람은 이르기를,
“중천(中天)이란 이름의 하늘 세계가 있어서 그가 중천에 태어나면 명이 다하지 아니하여도 일생을 마치게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경전에서 중천이라는 이름의 하늘 세계를 말씀하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사천왕(四天王)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셨고, 중천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또한 이것은 경전데서 말한 생반열반ㆍ행반열반ㆍ무행반열반이라는 것인데 거기에 해당하는 하늘 이름을 상정하려고 생반열반ㆍ행반열반ㆍ무행반열반을 말했겠는가?
또한 그대가 말한 “명이 다하지 아니하였는데도 생을 마친다”고 하는 것을 중반열반(中般涅槃)이라 부른다고 하였는데,
보살과 울단월주(鬱單越洲)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중생들이 명이 끝나지 아니한 채 생을 마치게 되니,
그렇다면 모든 중생들이 중반열반에 든다고 주장하려 하는가?
[문] 그렇다면 알에서 말한 외도인 바차(婆蹉)가 부처님께 묻기를,
“구담씨(瞿曇氏)여, 만약 이 때 이 세상에서의 몸을 버린 뒤 아직 다른 곳에 이르기 전에 중생들은 생각을 구름처럼 타고 가게 되는데,
구담씨여, 그 때가 되면 이 중생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목숨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됩니까?
사문(沙門) 구담씨여, 저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이 무엇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되는지 설명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차(婆蹉)야, 만약 이 때 이 세상에서의 몸을 버린 뒤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에 중생들은 생각을 타고 가게 되는데,
바차야, 그 때가 되면 그 중생들은 애욕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되느니라.
나는 말하노니 그들은 애욕에 의지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머물게 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중음이 있다는 주장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그것을 말한 사람은 이 가운데서 무색계의 하늘에서 생각을 타고 가는 일을 말한 것이다.
그 외도에게는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지극히 공경하고 잊지 못하는 사이였으나 그 친구의 목숨이 끝나자 이 외도는 천안(天眼)으로 욕계를 관하여 보았으나 보이지 아니하여 다시 색계를 관하여 보았으나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그 행방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문득 생각하기를,
‘그의 목숨은 단멸한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그가 듣기로는 구담씨라는 사문이 있어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어 모든 세계를 볼 수 있다고 하기에 그는,
‘나는 마땅히 그를 찾아가서 그 근본과 종말을 물어 보아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씨여, 이때가 되어 이 세상에서 몸을 버리고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에 중생들은 생각을 타고 가게 되는데,
구담씨여, 그 때가 되면 이 중생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됩니까?
사문인 구담씨는 중생들을 위하여 무엇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차야, 만약 그 때 이 세상에서의 몸을 버린 뒤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에 중생들은 생각을 타고 가계 되는데,
바차야, 그 때가 되면 그 중생은 애욕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고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되느니라.
나는 말하노니 단연코 애욕에 근거하여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세계에 머물게 되느니라.”
이것으로 무색계천(無色界天)을 생각 타고 간 것임을 알게 된다.
[문] 부처님은 경전에서 ‘생각 타고 간다[乘意行]’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으니, 혹 화현[化]의 세계를, 혹 중음의 세계를, 혹 색계천ㆍ무색계천을, 혹 처음 인간 세계를, 혹 지옥의 세계를 생각 타고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이 무색계천을 생각 타고 간 것을 알 수 있는가?
또한 묻건대 이것이 어떻게 중음의 세계를 생각 타고 간 것을 알 수 있는가?
[답] 그것은 곧 이 경전에서 알게 된다. 이 가운데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의 몸을 버린 뒤 아직 다른 곳에 태어나기 전”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 때문에 이것은 중음(中陰)의 세계를 생각 타고 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 가령 중음이 없는 경우 즉 염부제주(閻浮提洲)에서 목숨이 끝난 뒤에 울단월에 태어날 경우 그는 이곳에서 끊어진 것이 그 곳에서는 존재가 없으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존재가 없으면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법이 없으면서 법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답] 그것을 설명한다면 그는 목숨이 끝나도 죽을 때의 음을 버리지 못하고 반드시 생명을 부여받을 때의 음이 필요하며 태어날 때의 음을 얻고 난 다음에야 죽을 때의 음을 버리게 된다.
비유하면 자벌레라는 벌레가 있는데 끝내 뒷발을 떼지 아니한다. 반드시 앞발이 땅에 닿게 할 필요가 있으면 앞발이 땅에 닿은 다음에야 뒷발을 들어 올린다. 이와 같이 그도 끝까지 죽을 때의 음을 버리지 아니하는데 생명을 부여받을 때의 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부여받을 때의 음을 얻은 다음에야 죽을 때의 음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문] 말씀에 따른다면 인간 세계에서 목숨이 끝나서 지옥 속에 태어날 경우 그는 마땅히 인간 세계의 오음을 버리지 아니한 채 지옥의 음을 얻어야 말 것이다.
만약 인간 세계의 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지옥의 음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그는 아마도 사람이면서 지옥에 사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사람이면서 지옥에 산다고 한다면 이는 논리가 지극히 허물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날 세계를 지옥ㆍ아귀ㆍ축생ㆍ하늘ㆍ인간 세계의 다섯 곳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과 서로 어긋나는 논리가 된다.
[답]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은 오직 무지(無智)의 과보며 어둠의 과보며 어리석음의 과보며 부지런하지 아니한 과보로 중음이 없다고 말한다.
오직 중음이란 존재하는 것이며 진실로 중음의 종류와 모습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끊고 자기 생각을 나타내는 일이라 한다.
여여하게 평등한 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짐짓 이 논을 지었으며,
다른 사람의 생각도 끊어지게 하지 말고 자기의 생각도 나타내지 말고, 오직 여여하게 평등한 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짐짓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문] 만약 중음이 있다면 그 형상은 큰가, 작은가?
[답] 마치 넉 달ㆍ다섯 달 된 어린아이와 같다. 이것이 중음의 형제의 크기다.
[문] 만약 형상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아마도 뒤바뀐 생각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어미가 갖고 있는 음탕한 마음을 아비가 갖고 있는 해치려는 마음이라 생각하거나,
아비가 갖고 있는 음탕한 마음을 어미가 갖고 있는 해치려는 마음이라고 거꾸로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답] 비록 그 형체는 작아도 그것은 민첩하고 재빠르며 모든 뿌리가 날카롭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은 벽에 노인의 그림을 그렸을 때 노인의 형상은 작아도 늙은 사람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음이라는 것도 형상은 비록 작아도 그것은 민첩하고 빠르며 모든 뿌리는 날카롭다.
[문] 보살의 경우 그 중음의 형체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
[답] 본래의 몸과 같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가 있어 그의 몸을 장엄하고 자마금색(紫磨金色)의 둥근 광명이 한 길 가량 뻗어 가며 청정한 음성은 묘한 소리가 마치 가릉빈가조(迦陵頻伽鳥)와 같아 바라보아도 길지 아니하다.
그런 까닭에 중음에 머물고 있을 때는 백억의 하늘 아래 묘한 광채가 두루 빛난다.
해와 달이 가장 묘하고 많은 힘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두루두루 온 세계를 비출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묘한 광명으로 온 천하를 두루 비추어 이 광명을 보고 나면 중생들은 각각 다른 중생임을 알게 되고 다른 중생으로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문]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보살이 중음에 태어났을 때의 모습은 존자 법실(法實)의 게송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보살은 묘하고 청정하여
크고 흰 용과 코끼리 타고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어머니 태속에 들어가셨네.
[답] 이 게송과는 꼭 상통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이 게송은 경전의 말씀도 아니고 율장의 말씀도 아니고 아비담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오직 게송을 지은 사람이 구절의 내용을 사실과 합치시키고자 하였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꼭 상통되어야 말 필요는 없다.
[문] 만약 반드시 이 게송과 상통되게 하려면 어떤 내응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답] 이는 한 지방의 풍속에 길한 것을 표현한 까닭에 보살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본 일을 그 모습대로 글로 쓴 것이다.
오직 보살은 구십일겁(九十一劫) 동안 축생의 세계를 제거하였는데 그 분이 어찌 축생을 타고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갔겠는가?
[문] 중음의 세계로 달려갈 때는 어떤 모습이 되는가?
[답]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발이 위로 향하고 머리는 아래로 향한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발이 위에 머리는 아래로 향하며
선인(仙人)과 계율과 공덕과
고행에 대해 악한 생각 품는다.
반면에 하늘 위에 태어날 사람은 머리가 위로 향하고 발은 아래에 있다.
그리하여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듯 하늘로 올라간다.
또한 여러 지방에 태어날 사람은 몸을 기울이고 떠난다.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가듯 또는 신족통(神足通)을 얻어 날아가듯 한다.
[문] 중음에서의 형상은 어떤 형상인가?
[답]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의 모습이 되고 이와 같이 하늘 위에 태어날 사람은 하늘 위의 모습이 된다.
[문] 중음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되는가?
[답] 모습을 본다.
[문] 만약 모습을 본다면 어떤 모습을 보게 되는가?
[답] 지옥에 갈 사람은 문득 지옥의 모습을 보게 되고 천신(天神)이 될 사람은 문득 천신의 모습을 본다.
이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즉 하늘에 태어날 사람은 중음의 세계에서 다섯 곳 태어날 세계[五趣]를 보게 되고,
사람으로 태어날 사람은 네 곳의 태어날 세계[四趣]를 보고,
아귀로 태어날 사람은 세 곳의 태어날 세계를 보고,
축생으로 태어날 사람은 두 곳의 태어날 세계를 보고,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한 곳의 태어날 세계를 본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지옥을 보게 되고,
나아가 하늘에 태어날 사람은 하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문] 육안으로 중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가?
[답] 아니다.
[문] 그러면 어떻게 알게 되는가?
[답] 경전에 나와 있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남자든 여자든 계율을 범하고 악법과 더불어 함께 하면 그의 몸이 허물어졌을 때 악취(惡趣:三惡道)에 이르기 전에 생각 타고 갈 때 마치 검은 양털 모습이 되고 광채는 밤의 어둠과 같이 어둡다.
지극히 청정한 천안(天眼)을 지닌 사람이라야 그것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남자든 여자든 계율을 지키고 선법(善法)과 더불어 함께 하면 그의 몸이 허물어질 때 아직 선취(善趣:人間과 天上)에 태어나기 이전에 생각 타고 갈 때에 마치 하얗고 깨끗한 옷과 같고 그 광채가 밤의 달과 같이 몹시 밝다.
지극히 청정한 천안(天眼)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경전의 말씀으로 천안을 지닌 사람이라도 지극히 청정하지 아니하면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육안으로 당장 볼 수 있겠는가?
[문] 중음에 머무는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답] 하늘에 태어나거나 지옥에 떨어질 사람은 속히 결정이 난다.
아귀ㆍ축생ㆍ사람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남녀가 모여서 합쳐지는 때에 따라 오래지 아니하여 행위가 끝나면 곧 태어나게 된다.
[문] 혹 어떤 중생은 남녀가 만나 합쳐지면 곧 태어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령 남녀가 만나서 합쳐지지 못하였을 경우, 예를 든다면 어미는 인도에 있고 아비는 중국에 있을 경우, 그 사이에 태어날 사람이 목숨이 다했을 때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는가?
[답] 마땅히 그 중생의 연(緣)이 바뀌어졌는가, 바뀌지 아니하였는가를 관해야 한다.
만약 그가 어머니와의 연은 바뀌지 아니하였는데 아버지와의 연은 바뀌어졌다면 그 때는 어머니 될 사람이 바른 정조를 지키다가도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려 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를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또한 만약 아버지와의 연은 바뀌어지지 아니하였고 어머니와의 연은 바뀐 경우에는 그 때는 아비 된 사람이 지극히 바른 정조를 지키다가도 나른 여자에게 달려가려 하게 되어 그로 하여금 생령을 얻게 한다.
[문] 만약 어미ㆍ아비 두 사람과의 연이 모두 바뀌어지지 아니하였는데도 두 사람이 함께 합쳐지지 아니할 경우, 이 사람의 목숨이 끝나면 당장 어떻게 태어나게 되는가?
[답] 그 중생에게는 연이 행해지고 있는 까닭에 아비가 경영하던 일이 아직 끝나지 아니하였거나 저자의 장사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어도 문득 돌아갈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길을 물어 집으로 돌아갈 때도 전쟁이나 화독(火毒) 때문에 해를 입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과도 연을 맺지 아니하며 끝내는 꼭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함께 부부가 연하여 만나 합쳐져서 그는 곧 생명을 얻게 된다.
[문] 중생들이 늘 음욕을 행할 경우에는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중생에 따라 시절에 맞추어 음욕을 행하는 경우가 있으니,
예를 들면 말은 봄에 음욕을 행하고 들소는 여름에 음욕을 행하고,
사냥개는 가을에 음욕을 행하고 표범은 겨울에 음욕을 행한다.
그러한 중생들은 목숨이 끝났을 때 어떻게 태어나게 되는가?
[답] 그러한 중생도 연 때문에 시절이 아닌 때와 장소에서 음욕을 행하여 그가 곧 생명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태어나더라도 비슷한 처소에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소가 되는 경우에 그 이름이 비슷한 들소로도 태어난다. 들소는 시절에 맞추어 음욕을 행하지만 소는 항상 음욕을 행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들소로 태어날 사람은 시절이 아닐 경우 소 가운데 태어나게 된다.
만약 개로 태어나는 경우, 그 이름이 비슷한 여우로도 태어난다. 여우는 늘 음욕을 행하지만 사냥개는 시절에 맞추어 음욕을 행한다. 그리하여 마땅히 개 속에 태어나야 할 사람이 시절이 아니면 문득 여우 속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곰이 되는 경우에, 그 이름이 비슷한 큰 곰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큰 곰이라 하는 것은 늘 음욕을 행하지만, 곰은 시절에 맞추어 음욕을 행한다. 그리하여 마땅히 곰으로 태어날 사람이 시절이 아니면 문득 큰 곰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설명하기를,
“‘중음이라 하는 것은 마땅히 7일 동안 머문다고 말해야 하는가?
7일을 초과한다고 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중음이란 7일 동안 머문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대답하게 된다.
왜냐 하면 바탕이 약하기 때문이니, 7일 동안 머물러 7일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문] 7일이 다하도록 부모 될 사람들이 교합하지 아니한다면, 그 때는 명근(命根)이 끊어지는가?
[답] 끊어지지 아니한다. 다만 다시 도로 중음으로 태어날 따름이다.
거듭 설명하자면,
“중음이란 49일 동안의 생명이라 말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존자 담마다라는 설명하기를,
“중음이란 부모 될 사람이 교합하지 아니하여도 역시 오래도록 머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문] 중음의 존재에 옷이 있는가, 없는가?
[답] 색계의 모든 하늘 세계에는 옷이 있다. 왜냐 하면 법신(法身)의 경우도 벌거벗은 몸은 아니며 생신(生身)도 역시 그렇다.
욕계 안에서 보살은 옷이 있고 또한 희고 깨끗한 옷이며 비구니의 중음에도 옷이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중생들에게는 옷이 없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르기를,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의 중음에는 옷이 있고 보살의 중음에는 옷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문] 무엇 때문에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의 중음에는 옷이 있고 보살의 중음에는 옷이 없는가?
[답]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는 옷으로 성인 대중들에게 보시하기 때문이다.
[문] 보살이 보시하는 옷의 많음은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가 보시하는 옷의 털 수효와 비교가 안 되는데, 왜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의 중음에는 옷이 있고 보살의 중음에는 옷이 없는가?
[답]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는 옷으로 성인 대중들에게 보시하면서,
‘중음의 세계에서도 나에게 옷이 있게 하소서’라고 서원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중음의 세계에서도 옷이 있게 된 것이며, 곧 이 옷에 몸담아 어미의 태 안에 들어가고 이 옷으로 어미의 태 밖으로 나온다.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는 나이가 먹어 자라나게 되면 옷도 역시 몸에 따라 치수가 불어나고 자라나 어른이 되어 출가해서 도를 배우게 되면 입고 있던 옷을 취하여 옷감을 자르고 마름하여 스님들이 입는 다섯 종류의 옷을 만든다.
그리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가 이룩되면 유여열반(有餘涅槃)을 버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에 들게 되며 열반의 세계로 옮겨지면 곧 옷으로 몸을 감아서 이를 다비(茶毘)하게 된다.
그러나 보살은 지은 공덕이 다하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구하기를 원한다. 그런 까닭에 최후의 몸이 모든 중생 가운데서 가장 묘한 과보를 이루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백하고 청정한 비구니에게는 옷이 있고 보살의 중음에는 옷이 없는 것이다.
[문] 중음은 밥은 어떻게 먹는가?
[답] 여러 창고와 주방 안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취해서 이를 먹는다.
[문] 매우 많은 이와 같은 중생들이 비가 내리듯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니 중음도 그 수효가 이와 같이 많을 것이다.
하물며 다른 태어날 곳에 태어나게 되는 중음의 수효에 있어서이겠는가?
만약 이 중음들이 모두 와서 밥을 먹게 되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중생들은 당장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하겠는가?
또한 이 음식은 극히 무겁고 화신(化身)은 매우 미세한데 어떻게 이 무거운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겠는가?
[답]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문]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당장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 향기 즉 냄새로 음식을 삼는다.
모든 공덕 있는 중생은 꽃과 과일의 향기를 먹는데 그것의 묘한 향기를 먹는 것이다.
모든 공덕 없는 중생들은 뒷간의 더러운 냄새와 더러운 진흙의 기운을 밥으로 삼는다.
[문] 중음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디인가?
[답] 욕계와 색계이며 무색계는 아니다.
[문] 무슨 이유로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하고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가?
[답] 색이 있다고 하는 것에는 곧 중음이 있으나 무색계 안에는 색이 없다. 그런 까닭에 중음이 없는 것이다.
[문] 왜 색이 있으면 곧 중음이 있는 것인가?
[답] 마치 도장으로 진흙에 도장을 찍으면 문채가 나타나는 것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본유신(本有身:이승에 살아 있을 때의 몸)과 중유신(中有身:中陰)도 색이 있는 것은 그것이 나타나게 되면 곧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이 중음이다.
그런 까닭에 색이 있는 것에는 곧 중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태어나고 죽는 것이 있는 곳에는 곧 중음이 있다.
그러나 무색계 가운데서는 오고 가는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중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문] 이 몸이 끝나면 곧 이 몸으로 태어나는데 거기에 어떻게 오고 가는 것이 있는가?
[답] 이 중생들은 혹 그 식(識)이 발가락에서부터 없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 정수리에서부터 없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 배꼽에서부터 없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 심장에서부터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발가락에서부터 없어지는 경우에는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정수리에서부터 없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 위에 태어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배꼽에서부터 없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여러 지방에 태어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심장에서부터 없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열반의 세계로 옮겨질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이 중생들에게는 흔히 사랑하고 집착하는 얼굴이 있다.
식이 발가락에서부터 없어지는 사람은 다음 태어날 세계의 얼굴에 해당하는 처소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그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다.
또한 발가락부터 식(識)이 없어지는 사람은 그가 태어나는 세계[趣]도 여러 세계 가운데 발가락에 해당하는 가장 낮은 세계다.
그러나 무색계 가운데는 역시 이런 세계가 없다. 그런 까닭에 무색계에 중음은 없는 것이다.
[문] 중음은 취(趣)에 속하는가? 만약 중음이 취에 속한다고 한다면 경에서 건립한 다음과 같은 말씀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경에 이르기를,
“어느 사람이 묻기를,
‘사생(四生)이 오취(五趣)에 속하는가, 오취가 사생에 속하는가?’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사생이 오취에 속하는 것이지 오취가 사생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오취에 속하지 아니하는 생명체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하였더니,
‘중음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만약 중음이 취에서 벗어난 존재라면 이는 존자 담마난타(曇摩難陀)가 설명한 다음과 같은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담마난타는 말하기를,
“중음이라 하는 것은 취 즉 다음 태어날 세계를 따라 거기에 소속된다.
비유하면 마치 씨앗에서 싹이 돋아 아직 열매로 이루어지기 전에도 그것을 벼[稻]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옥에 떨어질 사람의 중음은 비록 지옥에 이르기 전이라 하더라도 역시 지옥이라 부른다.
같은 이치로 하늘에 태어날 중음도 역시 하늘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답] 중음은 취(趣)에 소속된다.
[문] 만약 중음이 취에 속한다면 그 말은 존자 담마난타의 말과는 잘 상통되는 말이다.
그러나 경에서 건립한 논리 즉,
“사생(四生)이 오취에 소속되는가, 오취가 사생에 속하는가?”라는 물음에,
“사생이 오취에 소속되는 것이지 오취가 사생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다시 묻기를,
“오취에 속하지 아니하는 생명체는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중음이다”라고 대답한 이 내용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이 말은 마땅히 그렇게 말했어야 한다.
“사생이 오취에 소속되는가, 오취가 사생에 소속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종류와 모습에 따라 소속된다”라고 하여 이는 응당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
이 밖에도 또 다르게 설명한다면 중음은 취를 벗어난 생명체다.
[문] 만약 중음이 취를 떠난 생명체라 한다면 그 말은 경에서 내세운 이론과는 잘 상통되는 말이다.
그러나 존자 담마난타가 말한,
“중음은 다음 태어날 세계에 따라 지기에 포함되는 생명체다.
마치 볍씨에서 싹이 돋아 아직 열매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을 때도 벼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옥에 태어날 중음은 비록 지옥에 이르기 전이라 하더라도 지옥이라고 부르고 같은 이치로 하늘 세계에 이르기까지도 그렇게 부른다”라고 한 것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그 존자가 말한 것은 중음이 다른 취(趣)로 향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그 원래 가야 하는 취에 포함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즉 지옥에 태어날 중음은 다른 다음 태어날 세계로 향해 가지 아니하고 꼭 지옥에 태어나게 되며, 이와 같이 하늘 세계까지도 그 곳에 태어날 사람의 중음은 반드시 그 곳을 향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존자 담마난타가 말한 것은 다른 세계로 향해 가지 아니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그 세계에 포함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또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으니,
“중음은 취를 떠난 존재다. 왜냐 하면 중음은 어지러운 존재이나 다음 태어날 세계는 어지러운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지럽지 아니한 세계가 어지러운 것을 포용하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어지러운 것이 어지럽지 아니한 세계에 소속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음은 취와 분리된 생명체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중음이라 하는 것은 안정되지 아니한 존재고 다음 태어날 세계는 안정된 세계다.
안정되지 아니한 것이 안정된 세계에 포함되지 아니할 것이고 또한 안정된 세계가 안정되지 아니한 것을 포용하지도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취라 하는 것은 이미 도달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고 바야흐로 중음이라 하는 것으로 곧 달려가려 하는 세계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취와 분리된 세계다”라고 하였다.
[문] 중음이라 하는 것은 모든 근(根)을 갖춘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모든 근을 갖추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모든 근을 갖추지 아니하였다고 하고 있다.
[문] 만약 중음이 모든 근을 갖추지 아니하였다고 할 경우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곧 중음인가?
[답] 근을 하나밖에 갖추지 못한 경우는 중음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즉 이같이 말하는 사람은,
“중음은 모든 근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왜냐 하면 중음이란 처음 행동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생들의 육근(六根)의 문은 항상 존재하기를 구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중음은 모든 근을 갖추고 있다”고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문] 중음이 가는 것이 빠른가? 신족통을 얻은 사람의 걸음이 빠른가?
[답] 어떤 사람은,
“신족통(神足通)을 얻은 사람의 걸음이 빠르지 중음의 걸음이 빠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중음이 빨리 떠나지 신족통을 얻은 사람이 빨리 가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가는 힘이 강한 것이 신족통의 힘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족통을 얻은 사람이 빠르지 중음이 빠른 것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설명될 수도 있다.
[문] 신족통을 얻은 사람의 걸음이 빠르고 중음의 걸음이 빠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 걸어가는 힘이 강한데도 그것은 신족통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잘 들어야 한다. 걸어가는 힘이 강한데도 그것은 신족통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신족통을 얻은 사람은 그 신족통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을 멈추게 할 수 있으나,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또 벽지불(辟支佛)은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중생들을 멈추게 할 수 있으나, 모든 중생들은 벽지불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존자 사리불은 부처님과 벽지불을 제외한 모든 중생들을 멈추게 할 수 있으나, 모든 중생들은 사리불 존자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는 근기(根機)가 날카로운 사람은 근기가 둔한 사람을 멈추게 할 수 있으나, 근기가 둔한 사람은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음이라 하는 것은 중생들이 멈추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법으로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주술(呪術)로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으로 멈추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와 벽지불과 성문승(聲聞僧)이 열반에 들어 멈추는 것이 아니며, 꼭 갈 곳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가는 힘이 강한데도 이것은 신족통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다만 바른 측면에서 말한다면 신족통으로 가는 것이 빠르고 중음의 가는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경전에서 하신 말씀에 따른다면,
“세 가지 일이 모여 합쳐지고 나면 어미의 태 안에 들어가게 된다. 부모가 교합하는 것은 음욕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미에게 혹 때가 찼을 때 교합이 이루어진다.
때가 찬다는 것은 그 여인이 욕망으로 몸이 가득해져서 마치 강물이 가득히 차서 넘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그 여인이 음욕이 몸에 가득해지면 교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미가 혹 때가 찬다’라고 하는 것은 이는 여자의 생리를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혹 때가 차면[或時滿]’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감당할 만한 조건이 있게 되면’이라고 한 것은, 그 여인에게 극히 힘이 있어서 임신을 하여 아홉 달, 열 달을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감당하고 마칠 만한 조건이 있으면’이라고 말한 것이다.
‘향음(香陰)이 이미 이르렀고’라고 하였는데 향음이라 한 것은 중음(中陰)을 말한 것이다.
그 시기에는 향음에 두 가지 내용이 있게 된다. 즉 사랑하는 마음과 해치려는 마음이 그것이다.
만약 태어날 아기가 여자일 경우, 그는 아비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어미에게는 해치려는 마음이 있게 되어 생각하기를,
‘그 어미되는 여자가 없으면 내가 이 남자와 함께 직접 교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어미를 보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아비와 함께 교합했다고 여기고 부모의 부정한 일에 대해 스스로 자신이 한 것이라 여기며 번민한다.
그리하여 이 음(陰)이 더욱 두터워지고 음이 더욱 두터워지고 나면 문득 중음의 몸을 버리고 생음(生陰)을 얻게 된다.
만약 태어날 아기가 남자일 경우에는, 그는 어미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아비에게는 해치려는 마음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이 아비되는 남자가 없으면 여자와 함께 직접 교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여자와 만나 교합했다고 여기고 부모의 부정한 일에 대해 스스로 자신이 한 짓이라 여기며 번민한다.
그리하여 음(陰)이 더욱 두터워지고, 음이 더욱 두터워지게 되면 곧 중음의 몸을 버리고 생음을 얻게 된다.
모든 범부(凡夫)들은 이와 같이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오직 한 사람의 보살만이 거꾸로 된 마음이 없이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셨다.
즉 부처님이 그 분이시다.
이 경전에서 말하기를,
“부모에게는 공덕이 있으나 향음(香陰)에게 공덕이 없으면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갈 수가 없고,
향음에게는 공덕이 있으나 부모에게 공덕이 없으면 역시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부모에게도 공덕이 있고 향음에게도 공덕이 있어서 세 가지 일이 평등하게 화합되어야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문] 이 세상의 경우 호족(豪族)ㆍ귀족의 남자도 역시 천민(賤民)의 여자와 만나서 함께 교합하게 되고, 또 혹 천민의 남자가 귀족의 여자와 함께 만나 교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경우 어떻게 세 가지 일이 평등하게 화합이 되는가?
[답] 호족ㆍ귀족의 남자가 천민의 여자와 함께 만날 경우 그 천민의 여자는 그 귀족을 따라 귀족이 될 수 있고,
만약 천민의 남자가 귀족의 여자와 함께 만날 경우 그 귀족의 여자는 천민의 남자에 따라 천한 처지를 얻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서 세 가지 일이 평등하게 화합되는 것이다.
[문] 중음은 어느 곳을 경유하여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가게 되는가?
[답] 중음은 아무 곳이나 들어가고자 하는 장소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
왜냐 하면, 중음이라 하는 것은 담장ㆍ나무ㆍ산과 강물ㆍ석벽 등에 모두 가로막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중음은 산문(産門)을 따라 어미의 태 안에 들어간다. 이 같은 일 때문에 쌍둥이는 먼저 태어나는 아기가 작고 나중에 태어나는 아기가 크다. 왜냐 하면 작은 것이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다.”
[문] 가령 한 태속에 오취(五趣)가 있을 경우 중음에서 돼지ㆍ개ㆍ물고기ㆍ개구리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는가?
또한 태속에서 지옥에 떨어질 중음을 얻을 수 있다면 어찌하여 그 태를 불태우지 않는가?
[답] 그 불은 행으로 만들어지는 불이다.
즉 악한 행을 지은 사람은 곧 불에 타게 되지만, 악한 행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곧 불에 타지 아니한다.
또한 저 근본 대지옥(根本大地獄)조차도 항상 불에 태워지지는 아니하는 것인데 하물며 중음이 항상 불에 타게 되겠는가?
저 목건련(目犍連) 존자가 한 설명에 따르면 혹 때로는 활대지옥(活大地獄)이 있어서 찬바람이 일어나 전전하면서 소리 높이 외치며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을 살리겠다. 모든 중생들을 살리겠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 때 중생들은 도로 피부와 살과 혈맥이 되살아나서 다시 환생(還生)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와 같이 근본 대지옥에서조차 항상 불에 태워 지지는 아니하는 것인데 하물며 중음이 항상 불에 태워지겠는가?
여기서 중음을 설명하려면 네 종류로 설명해야 한다.
첫째는 중음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고,
두 번째는 생각을 타고 가는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세 번째는 향음(香陰)을 설명해야 하고,
네 번째는 존재를 구하는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중음이라 하는가?
[답] 두 음의 중간에 위치한 음이기 때문에 중음이라 부른다.
두 음이라 함은 사음(死陰)과 생음(生陰)이다.
이 두 음의 중간에 태어나는 까닭에 중음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생각 타고 간다’라고 하는가?
[답] 생각이 낳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 타고 간다’고 하는 것이다.
중생이란 혹 행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혹 결(結)로서 생기는 경우도 있고, 혹 생각에서 생기는 경우도 있다.
행 때문에 태어나게 되는 것은 지옥에 태어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반드시 그 행을 마쳐야 하며 끝내 중도에서 죽지 아니한다.
결로 태어나는 경우는 난생(卵生)과 태생(胎生)과 욕계천의 화생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의생(意生)이라 하는 것은 중음으로 화한 생명체 및 색계와 무색계의 하늘에 태어나는 생명체와 맨 처음 태어난 인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중음은 생각으로 태어나는 까닭에 중음을 의승행(意乘行)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향음(香陰)이라 하는가?
[답] 향기로 목숨을 보존하기 때문에 중음을 향음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구유(求有), 즉 존재를 구한다고 하는가?
[답] 여섯 가지 들어가는 문[入門]에서 항상 존재하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음을 구유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조달(調達)은 살아 있는 몸으로 곧바로 지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문] 조달에게는 중음의 시기가 있었는가, 없었는가?
[답] 조달에게도 중음이 있었다. 다만 사음(死陰)이 곧 멸하자 곧 이어서 중음이 생겼고 중음이 곧 멸하자 생음(生陰)이 이어서 생겼을 따름이다.
설명에 따르면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이 게송을 지어 부처님께 말했다.
이곳에 알아서 목숨이 끝나면
부처님이시며 나의 하늘의 몸
그 명을 다시 되돌리게 된 것을
청정한 눈으로 내 스스로 아네.
[문] 제석천왕은 목숨이 끝난 후에 다시 태어났는가?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한 것인가?
만약 목숨이 끝난 후에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의 중음은 어떤 것인가?
또 만약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앞에서 제석천왕이 말한 게송과 어떻게 의미가 상통될 수 있는가?
[답] 제석천왕은 목숨이 끝난 뒤에 다시 태어났다.
[문] 만약 목숨이 끝난 후에 다시 태어났다면 그의 중음은 어떤 것인가?
[답] 모든 천신(天神)들의 중음은 생음(生陰)이 화해서 생긴다.
화한다고 하는 것은 시체가 없어 이를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 그 말대로라면 가령 이 천신에게 열여섯 사람의 남녀의 형상을 한 천신들이 이 천신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때에도 모든 천신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는가?
[답] 본다. 다만 모든 천신들은 생각하기를,
‘이 제석천왕은 지극히 큰 힘과 지극히 큰 공덕과 지극히 큰 신통력으로 인하여 부처님 앞에서도 그 신통력을 나타내 보였을 뿐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와는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큰 위력과 공덕을 갖춘 천신(天神), 예를 들면 인다라[帝釋天王]나, 피루나(披樓那)나, 이사나(伊沙那)나 이와 같은 모든 큰 천신(天神)들은 다 같이 본유신(本有身:현재의 몸)과 중유신(中有身:中陰)의 크기가 한 종류로 같다. 이와 같이 제석천왕도 생을 마치고 다시 태어나도 몸이 큰데 다만 모든 이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천왕은 생명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한다”라고 이렇게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문] 만약 제석천왕은 생명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한다면 앞에서 말한 제석천왕의 게송의 내용과는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답] 천신들에게 있는 다섯 가지 쇠약해지는 모습[五衰]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제석천왕은 게송을 읊은 것이다.
모든 천신들에게는 다섯 가지의 몸이 쇠약해지는 모습과 다섯 가지의 죽는 모습이 있다.
이 가운데 다섯 가지의 몸이 쇠약해지는 모습이라 하는 것은,
모든 천신들의 몸은 결백하고 청정하고 부드러워 향기 높은 못에서 목욕하고 나서 다시 못 밖으로 나와도 물이 몸에 붙지 아니한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질 때는 곧 물이 몸에 붙게 된다.
또한 모든 천신들은 몸의 힘이 강해서 조금도 눈을 깜박거리지 아니한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졌을 때는 곧 눈을 깜박거리게 된다.
또 모든 천신들은 오욕의 경계가 지극히 묘하고 지극히 좋아 단정하기가 비교할 곳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한 곳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생각이 그릇을 만드는 회전하는 바퀴와 같이 돌고 도는데, 몸이 쇠약해졌을 때는 한 곳을 지키게 된다.
또 모든 천신들은 옷에 달린 패물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가 묘하기가 마치 다섯 가지 음악 소리와 같은데, 몸이 쇠약해졌을 때는 그 소리가 없어진다.
또 모든 천신들은 두루 깔리는 광명이 있어 마치 마니보주(摩尼寶珠)와 같아서 그림자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졌을 때는 그림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또 이와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이르기를,
“그림자는 볼 수 없고 다만 광명이 지극히 묘하지는 아니하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천신들의 다섯 가지의 쇠약해지는 모습이다.
다음 다섯 가지 죽는 모습이라 하는 것은,
모든 천신들의 화관[冠]의 꽃은 한 번도 시드는 일이 없지만 이것은 시들게 된다.
또 천신들의 옷은 일찍이 때 묻는 일이 없는데도 죽을 때는 때가 묻으며 또 겨드랑이 밑에 땀이 흐르게 되고 형체의 빛깔이 변하고 바뀌며 본래의 자리에 앉기를 달가워하지 아니하게 된다.
이것을 천신들의 다섯 가지의 죽을 때의 모습이라 한다.
쇠약해지는 모습은 그러할지라도 이를 제어할 수 있지만, 죽음의 모습은 제어할 수 없다.
제석천왕은 다섯 가지 쇠약해지는 모습이 생겼기에 곧 오래지 아니하여 다섯 가지 죽음의 모습이 생기게 되자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무엇을 믿고 기대야 이 다섯 가지 죽음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계를 관하여 보니 오직 그렇게 될 수 있는 곳은 부처님만 계실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이 묘한 법문을 듣고 마음이 크게 기뻐 진리를 밝히게 되니 곧 다섯 가지 쇠약해지는 모습이 제거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부처님께 아뢰어 이 게송을 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악도(惡道)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게송을 읊었다.
부처님은 악도에서 제석천왕을 건져 내어 구제하시고 하늘 세계의 사람들 가운데 편안히 있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부처님께 아뢰기를,
‘나는 아마도 악도에서 목숨이 멸하여 몸이 끊어지고 허물어졌을 것인데 부처님을 만나서 악도에서 건져 올려져 구제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감옥 속에 갇혀 있다가 나와서 안온한 곳에 몸을 붙이게 되자,
그 죄수는 술수를 부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다가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로 그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답례하기를,
‘나는 아마도 감옥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고 허물어졌을 것인데 어진 분들의 은혜를 입어 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석천왕도 부처님께서 악도에서 건져 내어 구제하시고 하늘 세계의 사람들 가운데 편안히 있게 하시니,
그는 곧 악도에서 구제되었기 때문에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부처님께 아뢰기를,
‘나는 아마도 악도에서 곧 목숨이 멸하여 명이 끊어지고 허물어졌을 것인데, 부처님을 만난 덕분에 악도에서 건져 올려 구제받아 위없는 지혜로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악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게송을 읊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악견(惡見)의 결(結)의 병을 끊었기 때문에 게송을 읊은 것이다.
즉 부처님의 설법으로 제석천왕은 악견의 결의 병이 끊어지고 최고의 진리에 편안히 거처하게 되었다.
마치 의사가 병자를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여 주면 그 사람은 자주 의사가 있는 곳을 찾아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씨로 감사의 회답을 하기를,
‘나는 아마도 병으로 목숨이 끊어지고 허물어졌을 것인데, 어지신 은혜를 입어 이 병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치로 부처님의 설법으로 제석천왕은 악견(惡見)의 결을 끊고 최고의 진리가 있는 곳에 편안히 거처하게 되었다.
그는 곧 악견을 없애고 결이라는 이름의 병이 모두 끊어진 까닭에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말씨로 부처님께 아뢰기를,
‘나는 아마도 악견에서 맺힌 결의 병으로 목숨이 끊어지고 허물어졌을 것인데, 부처님을 만난 덕분에 악견의 결을 뽑아 내고 구제받아 위없는 지혜로 이 목숨이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아뢰는 것이다.
이런 사연을 두고 악견의 결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게송을 읊었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법의 과보로 행이 더욱 더하여져서 오래 살게 하려한 까닭에 게송을 읊었다.
제석천왕은 부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법문을 들었고 현법의 과보를 받아 더욱더 오래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현법의 과보를 받은 까닭에 이 게송을 읊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중음은 바뀌는가, 바뀌지 않는가?
[답] 바뀌지 아니한다. 경계와 태어날 곳, 처하고 있는 장소 때문에 바뀌지 아니한다.
[문] 만약 중음의 경계가 바뀌지 아니한다면 이는《부다문비구생경(不多聞比丘生經)》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그 경의 내용을 설명한다면,
“어떤 비구가 많은 법문을 듣지 아니하고 좌선(坐禪)만 하였는데, 그는 숙세(宿世)의 인연 때문에 세속에서 초선(初禪)의 경지를 얻었다.
그는 이 때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과(須陀洹果:聲聞 初果)를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그 후 그가 세속에서 이선(二禪)의 경지를 얻게 되자 다시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가 세속에서 삼선(三禪)의 경지를 얻게 되자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가 세속에서 사선(四禪)의 경지를 얻게 되자 다시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가운데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였고, 방편을 버리고 더욱 도를 구하지 아니하였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자 하지 아니하였고, 잡지 못한 것을 잡으려 하지 아니하였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곧 목숨이 다하게 되어 제사선의 경지에서 중음(中陰)으로 태어났다.
그 때 그는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결을 없애 생사를 여의었기에 마땅히 열반에 들어야 하며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될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이 중음으로 존재하재 되었는가?
반드시 해탈이란 없는 것일 것이다.
만약 해탈이 있다면 나에게 지금 마땅히 해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사견(邪見)이 생기게 뇌었고 열반을 비방하다가 곧 사선(四禪)의 경지의 중음에서 자리를 바꾸어 아비 대지옥(阿鼻大地獄) 속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답] 그것은 그가 본유신(本有身) 때 바뀐 것이지 중음에 들어가서 태어날 곳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가운데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였고, 방편을 버리고 도를 더 구하지를 아니하고,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지 아니하였고, 잡지 못한 것을 잡으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목숨이 끝나려 하는 지점에 즈음하여 제사선의 경지에 태어날 상서로운 조짐을 아마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결을 없애 생사를 여의었으니 마땅히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며 다시 태어나지는 아니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 상서로운 조짐이 있는가?
이는 반드시 해탈이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해탈이 있다면 나 지금 마땅히 해탈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여,
이렇게 그에게는 사견(邪見)이 생겨서 열반을 비방하다가 곧 사선(四禪)의 경지의 상서로운 보응에서 자리를 바꾸어 아비지옥 속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그는 본유신 때에 태어날 곳이 바뀐 것이지 중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바뀐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문] 만약 중음에서는 다음 태어날 곳이 바뀌지 않는다면 저《선행악행생경(善行惡行生經)》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그 경에 말씀하시기를,
“사위성(舍衛城)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선(善)을 행하고 한 사람은 악을 행하였다.
그 선을 행한 사람은 목숨이 끝나자 후생 과보의 행 때문에 지옥으로 가는 중음에 태어나서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당시 지극히 착한 일을 닦았고 악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하늘 위에 태어나야 할 것이며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아니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음에 태어났을까?’라고 하였다.
그가 선행(善行)을 닦은 기억을 하게 되자 지옥에 태어날 중음이 바뀌어 하늘에 태어날 중음을 얻게 되어 곧 하늘 위에 태어나게 되었다.
한편 악을 행한 사람은 목숨이 끝나자 그의 후생(後生)의 과보의 행으로 인하여 하늘에 태어날 중음의 세계에 태어났다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늘 극히 악한 행동을 하고 선행을 닦지 아니하였으니 응당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하늘에 태어나지는 아니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하늘에 태어날 중음으로 나타나게 되었을까?’라고 하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반드시 선악의 응보는 없는 것이다.
만약 있다면 나에게 마땅히 지금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그에게는 사견(邪見)이 생겨서 인과(因果)를 비방하다가 하늘에 태어날 중음이 바뀌어 지옥에 태어날 중음을 얻어 곧 지옥에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만약 중음에서 태어날 곳이 바뀌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어찌하여 바뀌어졌는가?
[답] 그것은 이미 본유신 때에 태어날 곳이 바뀐 것이지 중음에 들어가서 바뀐 것이 아니다.
무릇 모든 중생들은 목숨이 끝나려 할 때 반드시 선악의 상서로운 조짐이 있게 마련이다.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선한 조짐이 있게 되고, 악행을 한 사람에게는 악한 조짐이 있게 된다.
선한 조짐이라 하는 것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선행이 나타난 사람은
목숨이 끝날 때 이같이 말한다.
나는 보인다. 장원(莊園)의 경과
흐르는 강물과 꽃핀 못의 경관이.
한편 악한 조짐이 나타난다는 것은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악행이 나타난 사람은
목숨이 끝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인다. 불과 도검(刀劍)
솔개[鵄]와 개[犬]ㆍ여우와 이리가.
선행을 한 사람이 후생의 과보가 행해짐으로 인하여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지옥에 태어날 조짐이 보이게 되면 생각하기를,
‘나는 항상 지극히 착한 일을 닦았고 악행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하늘 위에 태어나고 지옥에 떨어지지는 아니할 것인데, 무슨 이유로 지옥에 태어날 조짐이 나타나는가?’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그가 착한 일을 닦는 것을 기억하게 되면, 지옥에 태어날 조짐이 바뀌어져서 목숨이 끝나고 나면 하늘 위에 태어나게 된다.
한편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그의 다음 후생의 과보의 행으로 인하여 목숨이 끝나려 할 때 하늘에 태어날 조짐이 나타난다.
이것이 나타나게 되면 그는 생각하기를,
‘나는 항상 지극히 악한 행위를 하여 선행을 닦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하며 하늘에 태어나지는 아니할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하늘에 태어날 조짐이 나타나는가?
반드시 선악의 과보란 없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있게 하려 한다면 나에게 지금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한다.
이렇게 그에게는 사견(邪見)이 생겨 인과(因果)를 비방하게 됨으로써 하늘에 태어날 조짐이 바뀌어져서 목숨이 끝나면 아비 대지옥에 태어나게 된다.
이것을 두고 본유신(本有身) 때에 태어날 곳이 바뀌어지는 것이지 중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문] 만약 중음이 그 처한 장소가 바뀌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병사왕경(甁沙王經)》의 내용과 어떻게 상통될 수 있는가?
《병사왕경》의 설명에 따르면,
“병사왕은 도솔천(兜率天)의 중음에 따라 도솔천에 이르렀다.
그때 사천왕(四天王)과 비사문(毘沙門:北方 守護神)과 대천왕이 반찬과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향기가 지극히 묘하였다. 병사왕(甁沙王)은 그 향기를 맡고 나서 도솔천의 중음을 바꾸어 사천왕으로 태어났다”라고 하였다.
만약 중음의 처하는 장소가 바뀌지 아니한다면 병사왕은 어찌하여 중음의 처소가 바뀌어졌는가?
[답] 병사왕도 역시 본유신 때 태어날 장소가 바뀐 것이지 중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바뀐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아사세왕(阿闍世王)은 아버지인 병사왕(甁沙王)이 법왕이라 허물도 없고 악행도 없었으나 구금하여 감옥에 가두고 칼로 다리를 잘라서 음식을 금지하고 외부와 통할 수 없게 하였다.
병사왕은 오랫동안 고뇌를 품고 참고 감내할 수가 없어 문득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나의 고통을 보지 못하시는가? 부처님은 나의 고통을 생각하시지 아니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 때 부처님과 오백 비구들은 마갈국(摩竭國)의 기사굴산(耆闍崛山)을 유행하고 있었다.
그 때 부처님은 병사왕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아시고 존자 목건련(目犍連)에게 말씀하셨다.
“목건련아, 그대는 병사왕이 있는 곳에 나의 말을 간직하고 찾아가서 잘 위로 하여라.
‘대왕이시여, 부처님께서,
≺나는 그대와 더불어 지을 일을 이미 지어서 악취(惡趣)를 면하게 하였소.
그대의 아들이 지은 악행은 결정코 마땅히 보응을 받게 될 것이오.
악행의 보응이란 부처조차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대왕의 아들이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고 하여라.”
그 때 존자 대목건련(大目犍連)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곧 삼매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모습이 사라지고 그 감옥에 이르게 되었다.
그 때 존자 목건련은 삼매에서 일어나 병사왕에게 알렸다.
“대왕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왕이여, 내가 그대와 더불어 지을 일은 이미 지어서 악취에 태어나는 일은 면하게 되었소.
그대의 아들이 지금 짓고 있는 악행은 결정코 그 보응을 받을 것이오.
악행에 대한 보응은 부처조차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대왕의 아들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존자 목건련은 자세하게 설법하자 병사왕이 목건련 존자에게 물었다.
“목건련 존자시여, 어느 곳 하늘 세계에 지극히 묘한 음식이 있어서 내가 그 곳에 태어나게 되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존자 목건련이 사천왕이 있는 하늘 세계에서부티 타화자재전(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의 하늘 세계를 찬탄하면서 그 곳에 극히 묘한 음식이 있다고 하였다.
병사왕은 마땅히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야 할 사람이었으나, 그 음식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기를,
‘나는 먼저 이 가까운 곳이 음식을 먹은 다음에 곧 도솔천에 태어나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목숨이 끝나자 그는 사천왕이 있는 세계에 태어나 비사문(毘沙門)의 태자(太子)가 되었고 이름을 최승자(最勝子)라 하였다.
이런 사실로 해서 병사왕은 본유신 때 태어날 곳이 바뀐 것이지 중음의 세계에 들어가서 바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일로 때서 중음의 세계에서도 경계도 바뀌지 아니하고 태어날 곳도 바뀌지 아니하고 처하는 곳도 바뀌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존사 목건련이 건립한 설명 가운데 시인(始人) 측 최초의 인류라 하는 것은 가슴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며, 이름을 마후륵(摩睺勒)이라 하고 손이 세 개가 생겨나며 당시의 중생의 이름을 상(象)이라 하였다.
[문] 그 중생이 목숨이 끝나서 마후륵이나 상인 된 것인가?
그 중생은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한 것인가?
만약 목숨이 끝나서 다시 태어났다면 그의 중음(中陰)은 어떤 것이며 만약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였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하였다면, 왜 그것을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 마후륵이라 하기도 하고 혹 상이라 하기도 하는가?
[답] 그 때의 중생은 목숨이 끝난 뒤 다시 태어났다.
[문] 만약 목숨이 끝난 뒤에 다시 태어났다면 그 중음은 어떤 것인가?
[답] 그의 본음(本陰)이나 중음(中陰)은 모두 조화[化]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화로 이루어진 몸은 볼 수가 없다.
이와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는 이르기를,
“그 때의 중생은 목숨이 끝나지고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였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하였다면, 왜 사람이라고도 말하고 마후라(摩睺羅)라고 마기도 하고 상이라고도 하는가?
[답] 그 중생은 광음천(光音天)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축생(畜生) 속에 태어났다. 다만 형체가 사람과 같았을 뿐이다.
그 후 음식을 바꾸어 음식이 나쁠 때는 악한 중생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생각도 악하고 교활하고 남을 속이는 일이 잦고 많기 때문에 사람의 형제가 바뀌어 얻어지고 마침내 축생의 형상을 이루어 두꺼비와 같은 모습이 되었고 빛깔은 검고 몸은 둥글었다. 그 뚜에 빛깔이 파란 빛으로 변하였고 형태는 모난 형태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 중생은 광음천에서 와서 축생 속에 태어난 것이며 다만 사람 모습만 하고 있었는데, 네 가지 악한 일 때문에 사람 모습에서 바뀌어져 사람 모습이 없어지고 드디어 축생의 형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 중생을 혹 마후라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 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다만 그 중생은 목숨이 끝나지도 아니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중음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