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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23권
38. 초품 중 11지(智)의 뜻을 풀이함55)
1. 11지혜
【經】 11지(智), 곧
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타심지(他心智)ㆍ세지(世智)ㆍ
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ㆍ
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ㆍ여실지(如實智)[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1]
【論】 법지(法智)56)란 욕계에 매인[欲界繫] 법(法)에서의 무루의 지혜[無漏智]이고,
욕계에 매인 인(因)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며,
욕계에 매인 법이 사라질[滅] 때의 무루의 지혜이며,
욕계에 매인 법을 끊기 위한 도(道)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며,
그리고 법지품(法智品)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다.
비지(比智)57)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의 무루의 지혜이니, 역시 그와 같다.
타심지(他心智)란 욕계와 색계에 매인 현재 다른 이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법 및 무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의 일부분을 아는 것이다.
세지(世智)58)란 모든 유루의 지혜이다.
고지(苦智)59)란 “5수중(受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고 관할 때에 얻는 무루의 지혜이다.
집지(集智)60)란 유루법의 인(因)에 대해 그것의 원인[因]과 모임[集]과 생겨남[生]과 조건[緣]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멸지(滅智)61)란 멸(滅)에 대해 그것의 그침[止]ㆍ묘함[妙]ㆍ벗어남[出]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도지(道智)62)란 길에 대해 그것이 바르고[正] 실천[行]이고 통달[達]임을 사유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다.
진지(盡智)63)란,
“나는 괴로움[苦]을 보았노라. 원인[集]을 끊었노라. 깨달음[證]을 다하였노라. 길[道]을 닦았노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ㆍ견해[見]ㆍ명(明)ㆍ깨달음[覺]이다.
무생지(無生智)란,
]“나는 괴로움을 보았으니 다시 보지 않고, 원인을 끊었으니 다시는 끊지 않으며,
깨달음을 다하였으니 다시는 깨닫지 않으며,
길을 닦았으니 다시는 닦지 않으리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 일어나는 무루의 지혜이자 견해ㆍ명ㆍ깨달음이다.
여실지(如實智)64)란 온갖 법의 전체의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실답게 바르게 알아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2]
이 법지(法智)는 욕계에 매인 법 및 욕계에 매인 법의 인(因)ㆍ욕계에 매인 법의 사라짐[滅]ㆍ욕계에 매인 법을 끊기 위한 길[道]을 반연한다.
비지(比智)도 역시 그와 같다.
세지(世智)는 온갖 법을 반연한다.
타심지(他心智)는 다른 이의 마음의 유루와 무루의 마음 및 마음에 속하는 법을 반연한다.
고지(苦智)와 집지(集智)는 5수중을 반연하고, 멸지(滅智)는 다함[盡]을 반연하며, 도지(道智)는 무루의 5중(衆)을 반연한다.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다 같이 4제(諦)를 반연한다.
10지(智) 가운데 한 가지는 유루이고, 여덟 가지는 무루이며, 나머지 한 가지는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타심지가 유루의 마음을 반연하면 이는 유루이고, 무루의 마음을 반연하면 이는 무루이다.
[3]
법지는 법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비지도 역시 그와 같다.
세지는 세지와 타심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타심지는 타심지와 법지와 비지와 세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고지는 고지와 법지와 비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집지와 멸지도 역시 그와 같다.
도지는 도지와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진지는 진지와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
무생지도 역시 그와 같다.
[4]
아홉 가지의 지혜는 8근(根)과 상응하되 혜근(慧根)65)ㆍ우근(憂根)66)ㆍ고근(苦根)67)은 제외되고 세지는 10근과 상응하되 혜근을 제외한다.
법지와 비지와 고지는 공삼매(空三昧)68)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상삼매(無相三昧)69)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타심지와 고지와 집지와 도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작삼매(無作三昧)70)와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세지와 고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무상상(無常想)과 고상(苦想)과 무아상(無我想)과 상응한다.
세지는 그 가운데 네 가지 생각[四想]과 상응한다.
법지와 비지와 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뒤의 세 가지 생각[三想]과 상응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지(世智)는 혹 이상(離想)과 상응하기도 한다.
법지(法智)는 아홉 가지의 지혜를 반연하되 비지(比智)는 제외되며, 비지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다.
세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열 가지 지혜를 반연하고,
고지와 집지는 세지및 유루의 타심지를 반연하며,
멸지는 지혜를 반연하지 않고 도지는 아홉 가지 지혜를 반연하되 세 가지는 제외된다.
[5]
법지와 비지에는 16상(相)이고,
타심지에는 4상(相)이며,
고ㆍ집ㆍ멸ㆍ도(苦集滅道)에는 각각 4상(相)이고,
진지와 무생지에는 다 같이 14상(相)이되, 공상(空相)71)과 무아상(無我相)72)은 제외된다.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 중의 세지(世智)는 16상(相)이며,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중의 세지는 4상(相)이되 무상(無相)은 제외된다.[모양을 굴리고 모양을 관하는(轉相觀相) 것으로 예전에는 16성행(聖行)이라 했다.]
[6]
처음에 무루의 마음[無漏心]에 들어가서 하나의 세지(世智)를 성취하고,
제2의 마음에서는 고지(苦智)와 법지(法智)를 더하며,
제4의 마음에서는 비지(比智)를 더하고,
제6의 마음에서는 집지(集智)를 더하며,
제10의 마음에서는 멸지(滅智)를 더하며,
第14의 마음에서는 도지(道智)를 더한다.
만일 욕망을 여읜 이면 타심지(他心智)를 더하고,
무학의 도[無學道]는 진지(盡智)를 더하여 파괴하지 않는 해탈[不壞解脫]을 얻으면서 무생지(無生智)를 더하게 된다.
처음의 무루의 마음 가운데서는 지혜를 닦지 않고,
제2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4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고,
제6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8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는다.
제10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고,
제12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세 가지 지혜를 닦으며,
제14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지혜를 닦고,
제16의 마음 가운데서는 현재의 두 가지 지혜를 닦으면서 미래의 여섯 가지 지혜를 닦으며, 만일 욕망을 여읜 이면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는다.
수다원(修陀洹)은 욕계의 번뇌[結使]를 여의려고 하여,
제17의 마음 가운데서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고,
제9의 해탈의 마음 가운데서는 여덟 가지의 지혜를 닦되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신해탈(信解脫)73)의 사람은 한층 더 견득(見得)74)을 지으면서,
쌍도(雙道) 중에서 여섯 가지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가 제외된다.
7지(地)의 욕망을 여윌 때에는,
무애도(無礙道)75)에서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며,
해탈도(解脫道)76) 중에서는 여덟 가지 지혜를 닦되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유정(有頂)의 욕망을 여읠 때에는,
무애도 안에서 여섯 가지의 지혜를 닦되 타심지와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되고,
8해탈(解脫)의 도에서는 일곱 가지의 지혜를 닦되 세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제외된다.
무학(無學)으로서 초심자와 제9해탈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의 사람77)은 열 가지의 지혜와 온갖 유루와 무루의 선근(善根)을 닦고,
만일 시해탈(時解脫)78)의 사람이면 아홉 가지의 지혜와 온갖 유루와 무루의 선근을 닦는다.
이와 같은 갖가지는 아비담문(阿毘曇門)79)에서 자세히 분별하는 것과 같다.
여실지(如實智)80)를 분별하는 모양에 대해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의 후품(後品)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7]
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법지(法智)라 함은, 욕계의 5중(衆)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알고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김을 아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名)의 인연으로 모든 지어감[行]이 있고 나아가 나는[生] 인연으로 늙어 죽음[老死]이 있다”고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수시마(須尸摩)81) 범지(梵志)82)를 위하여,
“먼저 법지로써 모든 법을 분별하고 그 뒤에 열반의 지혜로써 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비지(比智)라 함은, 현재의 5수중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아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5수중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에 대해서도 역시 그와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현재의 불이 뜨겁고 잘 타는 것을 보고 이로써 과거와 미래 및 다른 나라의 불이 이와 같음을 견주어 아는 것이다.
타심지(他心智)83)라 함은 다른 중생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아는 지혜이다.
【문】 만일 남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他心]을 안다고만 하는가?
【답】 마음[心]이 곧 주인[主]이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안다고만 한다.
만일 마음을 말하면 이미 마음에 속한 법까지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지(世智)는 임시적 지혜[假智]84)라고도 하는데,
성인은 진실한 법 가운데서 알고, 범부는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 가운데에서만 안다.
이 때문에 임시적 지혜라 한다.
마치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와 벽이 있는 것을 집이라 하는 것처럼,
다만 이 일만을 알고 진실한 이치는 모르므로 이것을 세지라 한다.
고지(苦智)란 괴로움의 지혜[苦慧]로써 5수중(受衆)을 꾸짖는 지혜이다.
【문】 5수중은 역시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고지만을 설명하고 무상하고 공하고 나 없음의 지혜는 설명하지 않는가?
【답】 고제(苦諦)이기 때문에 고지를 말하고, 집제(集諦)이기 때문에 집지를 말하며, 멸제(滅諦)이기 때문에 멸지를 말하며, 도제(道諦)이기 때문에 도지를 말하는 것이다.
【문】 5수중에는 갖가지 악(惡)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괴로움의 진리만을 말하고 무상함의 진리[無常諦]와 공의 진리[空諦]와 나 없음의 진리[無我諦]는 말하지 않는가?
【답】 설령 무상ㆍ공ㆍ나 없음의 진리를 설명하여도 역시 법의 모양[法相]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중생은 거의 모두가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있는 일체가 괴롭다”고 꾸짖으면서 버리고 여의게 하려는 것이다.
무상하거나 공하거나 나 없는 것에서는 중생이 크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시기를,
“5수중에는 다른 이름이 있나니, 그것은 괴로움[苦]이라 한다”고 하셨다.
이 때문에 다만 고지(苦智)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고지는 혹 유루이기도 하고 혹 무루이기도 하다.
만일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에 있으면 이것은 유루이고,
만일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것은 무루이다.
왜냐하면 난법으로부터 세간제일법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로 괴로움을 관하기 때문이다.
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도 역시 그와 같다.
또 고지로는 괴로운 모양이 진실로 생기지 않는다 함을 안다고 한다.
집지로는 온갖 법이 여의어서 화합이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멸지로는 모든 법은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 마치 열반과 같다 함을 안다고 한다.
도지로는 온갖 법은 항상 청정하여 바른 것도 없고 삿된 것도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진지(盡智)는 온갖 법은 아무것도 없다 함을 안다고 한다.
무생지(無生智)는 온갖 생기는 법은 진실하지도 않고 일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생(不生)을 안다고 한다.
여실지(如實智)라고 함은, 열 가지의 지혜에서 알 수 없는 바를 이 여실지로써 열 가지 지혜의 각각의 모양과 각각의 인연과 각각의 구별과 각각의 관(觀)이 있는 법을 능히 아나니,
이 여실지 안에서는 모양도 없고 인연도 없고 구별도 없으며 모든 관법(觀法)이 소멸되고 또한 관이 있지도 않다.
[8]
열 가지의 지혜 속에는 법안(法眼)85)과 혜안(慧眼)86)이 있지만, 여실지 속에는 오직 불안(佛眼)87)이 있을 뿐이다.
열 가지의 지혜는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에게 다 같이 있지만, 여실지는 유독 부처님께만 있다.
왜냐하면 유독 부처님만은 잘못되지 않는 특성[不誑法]88)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실지는 유독 부처님께만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열 가지의 지혜가 여실지 안에 들어가면 본래 가졌던 이름을 잃고 오직 하나의 여실지만이 있을 뿐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시방의 모든 냇물이 모두 큰 바다로 들어가면 그 본래의 이름은 버리고 다만 큰 바닷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갖가지 분별하면서 11지(智)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마친다.[단주(丹註):11지(智)의 설명이 끝나다.]
2. 3삼매, 각과 관
【經】 3삼매(三昧), 곧 유각유관삼매(有覺有觀三昧)ㆍ무각유관삼매(無覺有觀三昧)ㆍ무각무관삼매(無覺無觀三昧)[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온갖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을 모두 삼마제(三摩提)89)라 하는데, 중국말[秦言]로는 정심행처(正心行處)라 한다.
이 마음은 비롯함이 없는 세계로부터 오면서 항상 굽고 바르지 못했으나 이 정심행처를 얻으면 마음이 곧 바르고 곧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뱀이 다닐 때에는 항상 굽었다가도 대통 속으로 들어가면 곧 곧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삼매는 세 가지이니,
욕계(欲界)와 미도지(未到地)와 초선(初禪)에서는 각(覺)90)ㆍ관(觀)91)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각무각(有覺無覺)92)이라 하고,
2선(禪)의 중간에서는 다만 관과 상응할 뿐이기 때문에 무각유관(無覺有觀)93)이라 하며,
제2선으로부터 유정지(有頂地)에 이르기까지는 각ㆍ관과는 상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각무관(無覺無觀)이라 한다.
【문】 삼매와 상응하는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은 스무 가지에 이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각ㆍ관만을 말하는가?
【답】 이 각ㆍ관은 삼매를 흔드나니, 이 때문에 이 두 가지만을 말한다.
비록 그것이 선하다 하더라도 이는 삼매의 도적이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에 각ㆍ관이 있으면 삼매는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유각유관의 삼매는 다만 견고하지 못하다. 각ㆍ관의 힘이 아주 미약하다면 이때에는 삼매를 얻을 수 있다”고 하셨나니,
이 각ㆍ관은 삼매를 낼 수도 있고 또 삼매를 파괴할 수도 있다.
비유하건대 마치 바람은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또한 비를 그치게 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착한 각ㆍ관으로는 능히 초선(初禪)을 내나,
초선을 얻었을 때에 큰 기쁨의 각ㆍ관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흩어져서 도리어 상실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만 각ㆍ관만을 말할 뿐이다.
【문】 각ㆍ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거친[麤] 마음94)의 모양을 각(覺)이라 하고, 세밀한[細] 마음95)의 모양을 관(觀)이라 한다.
처음 대상 가운데서 마음이 일어나는 모양을 각이라 하고 뒤에 호추(好醜)를 분별하고 헤아리는 것을 관이라 한다.
세 가지 거친 각이 있으니, 욕각(欲覺)96)과 진각(瞋覺)97)과 뇌각(惱覺)98)이다.
세 가지 선각(善覺)이 있으니, 출요각(出要覺)99)과 무진각(無瞋覺)100)과 무뇌각(無惱覺)101)이다.
세 가지 세밀한 각[細覺]이 있으니, 친리각(親利覺)102)과 국토각(國土覺)103)과 불사각(不死覺)104)이다.
여섯 가지의 각은 삼매를 방해하거니와 세 가지의 선한 각은 삼매의 문을 연다.
만일 각ㆍ관이 지나치게 많으면 도리어 삼매를 잃게 되나니,
마치 바람이 배를 잘 가게도 하지만 바람이 거세면 곧 배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갖가지로 각ㆍ관를 분별한다.
【문】 경에서는 세 가지 법에 대하여 유각유관(有覺有觀)의 법과 무각유관(無覺有觀)의 법과 무각무관(無覺無觀)의 법이라 하고 유각유관의 경지[地]와 무각유관의 경지와 무각무관의 경지라 말씀하셨거늘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삼매만을 설명하는가?
【답】 묘하면서 수용할 만한 것을 취한 것이다.
유각유관의 법이라 함은 욕계와 미도지(未到地)와 초선 가운데에서 각ㆍ관과 상응하는 법으로, 선(善)이기도 하고 불선(不善)이기도 하며 무기(無記)105)이기도 하다.
무각유관의 법이란 선(禪) 중간에서 관과 상응하는 법이어서 선과 무기의 성질이 있다.
무각무관의 법이란 각ㆍ관의 법을 여의고 일체의 색심[色心]과는 상응하지 않는 행[不相應行]이요 또한 무위의 법[無爲法]이다.
유각유관의 경지란 욕계와 미도지와 범천 세계[梵世]106)이다.
무각유관의 경지라 함은 선정의 중간에 이 자리를 잘 닦으면 대범천왕(大梵天王)107)이 된다.
무각무관의 자리라는 것은 온갖 광음천(光音天)과 온갖 변정천(遍淨天)과 온갖 광과천(廣果天)과 무색계의 경지[無色地]이다.
이 안에서 으뜸가고 묘한 것이 바로 삼매이다.
그렇다면, 삼매란 무엇인가?
곧 공 등의 세 가지 삼매(三昧)로부터 금강(金剛)과 아라한ㆍ벽지불의 모든 삼매까지이고,
관시방불삼매(觀十方佛三昧)108)로부터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109)까지이며, 단일체의삼매(斷一切疑三昧)110)로부터 삼매왕(三昧王)111) 등 모든 부처님의 삼매까지이다.
이렇게 갖가지로 분별하여 간략하게 세 가지 삼매의 뜻을 설명하여 마친다.
3. 3근
【經】 3근(根), 곧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ㆍ지근(知根)ㆍ지이근(知已根)[을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 미지욕지근(未知欲知根)112)이라 함은, 무루(無漏)의 9근(根)과 화합한 신행(信行)과 법행(法行)의 사람이 견제도(見諦道) 가운데 있는 것을 미지욕지근이라 한다.
이른바 신근(信根)113) 등 5근(根)114)과 희근(喜根)115)ㆍ낙근(樂根)116)ㆍ사근(捨根)117)ㆍ의근(意根)118)이 그것이다.
신해견득(信解見得)119)의 사람은 사유도(思惟道)에서 이 9근이 한층 더하므로 지근(知根)이라 한다.
무학도(無學道) 중에서의 이 9근을 지이근(知已根)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22근(根) 가운데 이 세 근만을 취하는가?
【답】 날카롭게 이해하여 분명하고 자재한 모양이므로 이것을 근(根)이라 하는데, 그 나머지 19근은 근의 모양을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다.
이 3근은 날카로워서 곧장 들어가 열반에 이를 수 있고 모든 유위의 법 중에서 주인이기 때문에 자유자재하여 모든 근보다 수승하다.
또 10근(根)은 다만 유루(有漏)이고 저절로 얻어져 이익됨이 없기 때문이고, 9근(根)은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 때문에 “보살은 구족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 10상(想)120)도 역시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거늘 무엇 때문에 “구족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10상은 모두가 도를 돕고[助道] 열반을 구하는 법이다.
신근 등의 5근은 비록 그것이 착한 법이기는 하나 모두가 열반을 구하지는 않는다.
마치 아비담(阿毘曇)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그 누가 신근 등의 5근을 성취하고 선근(善根)을 끊는 이라 하겠는가?
또 만일 5근이 청정하면 변하여 무루가 되어서 3근 안에 이미 속하게 되며,
이 3근 중에는 반드시 의근(意根)이 있고 3수(受) 중에는 반드시 하나의 느낌이 있나니,
이 때문에 다만 3근만을 설명한 것이다.
또 22근(根)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고 무기(無記)도 있어서 뒤섞여 있나니, 이 때문에 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3근은 느낌[受衆]과 지어감[行衆]과 의식[識衆]에 속한다.
미지욕지근은 6지(地)에 속하고, 지근과 지이근은 9지(地)에 속한다.
3근은 4제(諦)를 반연하고 여섯 가지 생각[六想]과도 상응한다.
미지욕지근은 3근(根)의 인(因)이고, 지근은 2근의 인이며, 지이근은 다만 지이근의 인이다.
미지욕지근은 차례로 2근을 내며, 지근은 차례로 혹은 유루근(有漏根)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근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이근을 내기도 한다.
지이근은 혹은 유루근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지이근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것 등은 아비담문(阿毘曇門)에서 자세히 분별해서 설명되어 있다.
또 미지욕지근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나니, 아직 모르는 것을 알려고[未知欲知] 하기 때문에 신근 등의 5근을 낸다.
이 5근의 힘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을 얻나니, 마치 사람이 처음 태(胎) 속에 들어가서 2근, 즉 신근(身根)과 명근(命根)을 얻는 것과 같다.
그때에 살[肉] 조직은 아직 갖추어지지 못하여 모든 감관은 따로따로 아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섯의 감관이 성취되어야 5진(塵)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여도 아직 이 5근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비록 서원을 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알고 싶어 하더라도 알 수 없다.
보살은 이 신근 등의 5근을 내어야 곧 모든 법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눈은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 화합한 것을 일컬어 눈이라 하는 것처럼,
먼저 비록 4대는 있더라도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 아직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안근(眼根)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선근을 끊지 않은 사람이 비록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청정하지 못한 까닭에 근(根)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보살이 이 신근(信根) 등의 5근을 얻게 되면 이때에야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이 나지도 않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어서 항상 고요히 사라져서 진실하고 청정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보일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어서 온갖 말의 길을 초월해 온갖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 행할 바를 벗어나서 마치 열반과 같음이 바로 부처님의 법임을 믿게 된다.
보살은 신근(信根)의 힘으로써 능히 정진근(精進根)의 힘을 받기 때문에 부지런해 행하면서 물러나거나 변하지 않으며,
염근(念根)의 힘 때문에 착하지 못한 법에 들지 않게 하면서 모든 착한 법을 거두어 들이며,
정근(定根)의 힘 때문에 마음이 5욕 가운데에 흩어지더라도 실상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혜근(慧根)의 힘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 가운데서 적건 많건 의미를 얻어 무너뜨릴 수 없게 된다.
5근이 의지하는 의근(意根)은 반드시 느낌[受]과 함께하면서 기쁘거나[喜] 즐겁거나[樂] 기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게[捨] 되며,
이 근에 의거하여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무생법인(無生法忍)121)의 과위를 아직 얻기 전까지를 바로 미지욕지근이라 한다.
이 안에서 모든 법의 실상을 똑똑히 알기 때문에 지근이라 하며,
이로부터 무생법인의 과위를 얻어 아비발치(阿鞞跋致)122)의 지위에 머무르고 수기(受記)를 얻으며,
나아가 10지(地)를 완성하고 도량(道場)에 가 앉아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는 그 동안을 지근이라 한다.
그리고는 온갖 번뇌의 습기를 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일체를 아는 법[一切可知法]123)에 지혜가 두루 완성되었기 때문에 지이근이라 한다.[丹註:3근(根)의 설명이 끝나다.]
55)
丹註: 3삼매의 뜻과 3근의 뜻을 합하다.
56)
범어로는 dharmajñāna.
57)
범어로는 anvayajñāna.
58)
범어로는 saṁvṛtijñāna.
59)
범어로는 duḥkhajñāna.
60)
범어로는 samudayajñāna.
61)
범어로는 nirodhajñāna.
62)
범어로는 mārgajñāna.
63)
범어로는 kṣayajñāna.
64)
범어로는 yathābhūtajñāna.
65)
범어로는 prajñendriya.
66)
범어로는 daurmanasyendriya.
67)
범어로는 duḥkhendriya.
68)
범어로는 śūnyatāsamādhi.
69)
범어로는 ānimittasamādhi.
70)
범어로는 apraṇihitasamādhi.
71)
범어로는 śūnyatākāra.
72)
범어로는 anātmakākāra.
73)
범어로는 śraddhādhimukta.
74)
범어로는 dṛṣṭiprāpta.
75)
범어로는 ānantaryamārga.
76)
범어로는 vimuktimārga.
77)
범어로는 asamayavimukta.
78)
범어로는 samayavimukta.
79)
범어로는 abhidharmamukha.
80)
범어로는 yathābhūtajñāna.
81)
범어로는 Susīma.
82)
범어로는 brahmacārin. 범행을 행하는 바라문 승려를 말한다.
83)
범어로는 paracittajñāna.
84)
범어로는 prajñaptijñāna. ‘약정된 지혜’를 말한다.
85)
범어로는 dharma-cakṣus.
86)
범어로는 prajñā-cakṣus.
87)
범어로는 buddha-cakṣus.
88)
범어로는 aśāṭhyadharma.
89)
범어 samāpatti의 음역어.
90)
범어로는 vitarka. 거친 생각을 말한다.
91)
범어로는 vicāra. 세밀한 생각을 말한다.
92)
범어로는 savitarkaḥ savicāraḥ.
93)
범어로는 avitarko vicāramātraḥ.
94)
범어로는 cittaudārikatā.
95)
범어로는 cittasūkṣmatā.
96)
범어로는 kāmavitarka.
97)
범어로는 vyāpādavitarka.
98)
범어로는 vihiṁsāvitarka.
99)
범어로는 naiṣkramyavitarka.
100)
범어로는 avyāpādavitarka.
101)
범어로는 avihiṁsāvitarka.
102)
범어로는 jñātivitarka.
103)
범어로는 janapadavitarka.
104)
범어로는 amaraṇavitarka.
105)
범어로는 avyākṛta. 선도 악도 아닌 상태이다.
106)
범어로는 Brahmaloka.
107)
범어로는 Mahābrahmarāja.
108)
범어로는 daśadigbuddhasamādhi.
109)
범어로는 śūraṁgamasamādhi.
110)
범어로는 sarvasaṁśayasamucchedasamādhi.
111)
범어로는 samādhirājasamādhi.
112)
범어로는 anājñātamājñāsyāminddriya.
113)
범어로는 śraddhenriya.
114)
곧 śradhhendirya, vīryendriya, smṛtīndriya, samādhīndriya, prajñen- driya의 다섯 근.
115)
범어로는 saumanasyenriya.
116)
범어로는 sukhendriya.
117)
범어로는 upekṣendriya.
118)
범어로는 manaindriya.
119)
범어로는 śraddhādhimukta-dṛṣṭiprāpta.
120)
범어로는 daśasaṁjñā.
121)
범어로는 anutpattika dharma-kṣānti. 일체법의 생함이 없는 이치를 인정하고 안주함. 곧 일체법이 불생불멸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122)
범어로는 Avaivarti. ‘불퇴전(不退轉)’을 의미한다. 아유월치라고 음역하기도 한다.
123)
범어로는 sarvajñeyadharma. 곧 ‘일체를 아는 특성’을 말한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