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장엄경론 제12권
22. 공덕품[3]
[앎을 구함]
이미 네 가지의 거짓으로 건립하였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네 가지 앎을 구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름과 물건은 서로 객(客)이 되니
두 성품은 모두 거짓[假]이다.
두 가지의 구별을 얻을 수 없으니
이를 네 가지의 구하는 뜻이라 이른다.
[釋] 여러 보살이 네 가지로 여러 법을 구하니,
첫째는 이름을 구함이요, 둘째는 물건을 구함이요, 셋째는 자기 성품을 구함이요, 넷째는 차별을 구함이다.
이름으로 구한다 함은 이름을 물건에 미루어 구하는 것이니, 이는 객이다. 이를 이름으로 구한다고 한다.
물건으로 구한다고 함은 물건을 이름에 미루어서 구하는 것이니, 이는 객이다. 이를 물건으로 구한다고 이른다.
자기의 성품으로 구한다고 함은 이름을 자기의 성품과 물건에 구하는 것이니, 자기의 성품으로 아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이를 자기 성품으로 구한다고 이른다.
차별로 구한다고 함은 이름의 차별과 물건의 차별을 미루어 구하나 이 두 가지가 다 공함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다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를 일러 차별로 구한다고 한다.
[여실하게 앎]
이 네 가지의 구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네 가지 여실하게 앎에 대하여 분별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참 지혜에 네 가지가 있으니
이름들을 가히 얻을 수가 없다.
두 가지의 이익은 대승을 위하는 업이어서
이루는 것이 여러 지(地) 가운데 있다.
[釋] 여러 보살이 모든 법에 있어서 네 가지의 여실하게 앎이 있으니,
첫째는 이름을 반연하여 여실하게 아는 것이요,
둘째는 물건을 반연하여 여실하게 아는 것이요,
셋째는 자기의 성품을 반연하여 여실하게 아는 것이요,
넷째는 차별을 반연하여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여실하게 안다고 함은 일체의 이름들이 다 얻을 수 없음을 앎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이익은 대승을 위하는 업이어서 이루는 것이 여러 지(地) 가운데 있다’고 함은 여러 보살이 여러 지 가운데서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큰 일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이를 여실하게 아는 업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머물러 가짐과 수용함과
종자를 합쳐서 세 가지의 인이라고 하며,
의지와 마음의 법과
또한 종자가 그 얽어맴이 된다.
[釋] ‘세 가지의 인’이라고 함은, 첫째는 머물러 가지는 인이요, 둘째는 수용의 인이요, 셋째는 종자의 인이다.
‘머물러 가지는 인’이라 함은 이른바 기세간(器世間)이다.
‘수용의 인’이라 함은 이른바 다섯 가지 욕락(欲樂)의 경계이다.
‘종자의 인’이라 함은 이른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니, 이 식으로 말미암아 안과 밖의 모든 법의 종자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인은 노끈과 같아서 능히 얽어맨다.
[문] 이 얽어맨다고 함은 어떤 물건 등을 얽어맵니까?
[답] 의지와 마음의 법과 또한 종자가 그 얽어맴이 된다.
얽어매는 데는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지요, 둘째는 마음의 법이요, 셋째는 아뢰야식이다.
[문] 의지라 함은 어떤 것입니까?
[답] 이는 눈 등의 6근이다.
[문] 아뢰야식은 어떤 것입니까?
[답] 이는 삼계의 안과 밖의 모든 법의 종자이다.
종자는 이 가운데서 다만 아뢰야식만이 얽어맬 수 있고, 인아(人我)로는 얽어맬 수가 없으니,
이를 여실하게 아는 얽어맴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편안한 모양은 마음의 앞에 있고
더불어 저절로 머무네.
일체를 함께 관찰하여야
큰 보리를 얻음에 이른다.
[釋] ‘편안한 모양은 마음의 앞에 있다’고 함에서 편안한 모양은 이른바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의 방편이다. 사람들이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편안한 모양이라고 이른다.
‘더불어 저절로 머문다’고 함은 그 모양은 이른바 자기의 성품이 앞에 나타난 것이요, 분별이 아니다.
그러기에 저절로 머문다고 이른다.
‘일체를 함께 관찰한다’고 함은 그 두 가지의 반연하는 것이 반연하는 것의 체가 아니니, 그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방편으로써 모든 모양의 대치가 됐으니 그 둘을 마땅히 순서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른바 먼저 편안한 모양을 본 뒤에 저절로 머무는 모양을 관해야 하니, 이 둘은 다 반연의 체가 아니기에 자신이 일으키는 네 가지의 전도(顚倒)가 곧 따라서 멸한다.
‘큰 보리를 얻음에 이른다’고 함은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다만 인(人) 모양만 관찰하면 오직 성문과 연각의 보리만을 얻을 것이요,
만일 일체의 법의 모양을 관찰하면 곧 위없는 보리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아야 그의 얽어맨 것을 따라 해탈을 얻으리니,
이를 여실하게 해탈을 안다고 이른다.
[문] 이 해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알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다 없어집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지혜가 진여(眞如)를 반연하고
두 가지의 집착을 멀리 여의며
또한 훈습의 모인 인을 알면
의타(依他)의 성품이 곧 다한다.
[釋] 만일 세 가지의 성품을 모두 알면 곧 다 의타의 성품을 다한다.
‘지혜가 진여를 반연한다’고 함은 진실의 성품임을 아는 것이다.
‘두 가지의 집착을 멀리 여읜다’고 함은 분별의 성품임을 아는 것이다.
‘또한 훈습의 모인 인을 안다’고 함은 의타의 성품임을 아는 것이다.
‘의타의 성품이 곧 다한다’고 함은 세 가지의 성품을 알면 곧 훈습의 모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훈습의 모임이란 이른바 아뢰야식이다.
[문] 이것이 다하면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진여를 반연하는 지혜는
다르지 않은 모습을 관찰하고
유(有)와 비유(非有)를 현재에 보니
생각의 자재로움을 이룬다.
[釋] ‘다르지 않은 모습을 관찰한다’고 함은 별상(別相)과 여(如)가 차별의 견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은 2승과 보살의 차별을 설한 것이다.
2승은 모양과 무(無)의 모양을 차별하여 보고 이와 같이 보고서 다 모양을 버리고 무상의 경계에서 작의를 일으켜 무상 삼매(無相三昧)에 들어간다.
그러나 보살은 그러하지 않아 진여의 밖에 따로 여러 모양이 있음을 보지 아니하며 무상의 경계에서 또한 무상을 본다. 보살의 지혜는 가지가지의 모양으로 닦음이 없기 때문이다.
‘유와 비유를 현재에 본다’고 함은 유는 진여의 경계에 이르고 비유는 상의 경계를 이룬다. 다 현재에 보기 때문이다.
‘생각의 자재로움을 이룬다’고 함은 이른바 신통 등의 일을 짓고자 하면 일체가 다 기억하고 생각하는 분별에서 이루어지니 이를 여실하게 이익을 안다고 하겠다.
[문] 범부와 보살의 두 가지의 견은 어떻게 나타내 보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진실을 덮어서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마땅히 이것이 범부인 줄 알며
진실을 보고 진실하지 않은 것을 덮으면
이와 같은 이를 보살이라 이른다.
[釋] 범부들의 공용이 없는 것은 진여를 보지 못하고, 진실하지 않은 모양을 보고,
보살의 공용이 없는 것은 진여를 보고 진실하지 않은 모양을 보지 않는다.
[문] 이미 차별을 알았습니다.
무엇을 전의(轉依)라 하고 해탈을 얻는다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보지 못함과 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뜻이 없음과 뜻이 있는 경계이다.
전의(轉依)와 해탈은
자재함을 얻기 때문이다.
[釋] ‘뜻이 없는 경계’라고 함은 이른바 여러 모양이니, 이는 곧 보지 말아야 한다.
‘뜻이 있는 경계’는 이른바 진여이니, 이는 곧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전의라고 이르며
집착하는 것의 경계는 체가 없고 진여를 보는 것은 체가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을 해탈이라고 이른다.
어찌하여 그런가?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재하다’고 함은 이른바 자기의 뜻을 따라 전하여서 자연히 여러 경계를 행하지 않는다.
경에서 말하기를
“만일 모양이 있으면 얽매임을 받으며 얽매이게 되면 해탈이 없다. 일체의 경계를 행하지 않는 것이 곧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을 일러 여실하게 정토(淨土)를 아는 방편이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은 동일한 종류이고
땅의 경계는 다 널리 나타난다고 하면
이는 곧 정토의 장애이니
또한 마땅히 버려야 함을 알아라.
[釋] ‘중생은 동일한 종류이고 땅의 경계는 다 널리 나타난다’고 함은 기세계(器世界)이다.
이는 큰 경계로서 일체의 중생들이 한가지로 한 종류임을 보고 모두 이를 큰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정토의 장애’라 함은 이러한 소견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곧 정토의 방편과 더불어 장애가 된다.
‘또한 마땅히 버려야 함을 알라’고 함은 보살은 이 생각이 장애가 됨을 알았으면 곧 마땅히 이 생각을 부지런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니, 이를 대치(對治)라고 이른다.
[한량없음]
이미 보살의 네 가지의 여실하게 앎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다섯 가지의 한량없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교화하고 마땅히 청정히 하며
마땅히 얻고 또한 마땅히 이루며
마땅히 말하는 이 다섯 가지의 일을
보살의 다섯 가지 한량없음이라 한다.
[釋] ‘다섯 가지 일의 한량없음’이라 함은,
첫째는 마땅히 교화하는 일이 한량없음이니, 일체의 중생 세계를 섭수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땅히 청정히 할 일이 한량없음이니, 일체의 기세계를 섭수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땅히 얻을 일이 한량없음이니, 일체의 법계를 포섭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마땅히 이룰 일이 한량없음이니, 일체의 교화할 만한 중생들을 포섭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마땅히 말할 일이 한량없음이니, 12부의 경전을 포섭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설법의 과]
이미 보살의 다섯 가지의 한량없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보살의 설법에 여덟 가지의 과가 있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발심(發心)을 하고 참음을 얻고
눈을 청정히 하고 누(漏)가 다하고
법에 머물고 학(學)과 또한 끊음과
수용을 여덟 가지의 과(果)라 한다.
[釋] 보살이 만일 부지런히 법을 설하면 능히 여덟 가지의 과를 얻는다.
첫째는 여러 법을 듣는 자가 혹은 보리의 마음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는 혹은 무생인을 얻는 것이다.
셋째는 혹은 여러 법에서 티끌세상을 멀리하여 때를 여의고 법의 눈이 청정함을 얻는 것이다. 이는 아래 승(乘)에 섭수하는 것이다.
넷째는 혹은 여러 누(漏)가 다함을 얻는 것이다.
다섯째는 바른 법이 오래 머물게 하니 이 바른 말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받아 가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는 뜻을 배우지 못한 자가 뜻 배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의심을 끊지 못한 자가 의심의 끊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덟째는 이미 의심을 끊은 자가 바른 법을 얻어 씀이 장애가 없어서 큰 기쁨의 맛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승의 큰 뜻]
이미 보살의 설법에 여덟 가지의 과가 있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대승의 일곱 가지 큰 뜻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연(緣)과 행(行)과 지혜[智]와 부지런함[勤]과 공교함[巧]과
과(果)와 일[事]을 다 구족하였으니
이 일곱 가지의 큰 뜻을 의지하여
대승(大乘)을 건립한다.
[釋] 만일 일곱 가지의 큰 뜻을 구족하면 이를 대승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연(緣)이 큰 것이니, 한량없는 경[修多羅] 등의 넓고 큰 법을 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行)이 큰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 다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혜[智]가 큰 것이니, 인(人)과 법의 두 무아(無我)로 말미암아 일시에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부지런함이 큰 것이니 세 가지의 큰 아승지겁을 간단없이 닦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공교함[巧]이 큰 것이니, 생사를 버리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과(果)가 큰 것이니, 열 가지의 힘과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의 함께 하지 않는 법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일[事]이 큰 것이니, 자주자주 큰 보리와 큰 열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대승을 포섭하는 여덟 가지 법]
이미 대승의 일곱 가지 큰 뜻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덟 가지의 법으로 대승을 포섭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과 믿음과 발심과 행과 들어옴과
성숙시킴과 정토와 보리의 뛰어남이니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일은
모두 모든 대승을 포섭한다.
[釋] 이는 여덟 가지의 일로써 모두 일체의 대승을 포섭한 것이다.
‘여덟 가지의 일’이라고 함은,
첫째는 종성(種性)이니 성품(性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둘째는 법을 믿음이니 신품(信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셋째는 발심이니 발심품(發心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넷째는 행을 행함이니 도섭품(度攝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도에 들어가는 것이니 교수품(敎授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섯째는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것이니 이른바 초지(初地)에서부터 7지(地)까지이다.
일곱째는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히 하는 것이니 이른바 제8의 물러서지 않는 지위이다.
여덟째는 보리의 뛰어남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지위이다.
보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성문의 보리와 연각의 보리와 부처님의 보리이다. 부처님의 보리가 크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한다. 그것은 이 부처님의 지위에서 큰 보리와 큰 열반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차별]
이미 여덟 가지의 법이 대승을 포섭하였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다섯 가지 사람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믿어 행함과 청정한 행과
상(相)으로 행함과 무상(無相)으로 행함과
무작(無作)으로 행하는
차별이 여러 지(地)를 의지한다.
[釋] 보살은 다섯 가지 사람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믿어 행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초지에 들기 전의 한 아승지겁이다.
둘째는 청정한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초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셋째는 상(相)으로 행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2지로부터 6지에 이르기까지이다.
넷째는 무상(無相)으로 행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제7지이다.
다섯째는 무작(無作)으로 행하는 사람이니 이른바 뒤의 3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