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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5권
12. 정론[9]
12.34. 수정품(修定品)
[문] 그대는 선정을 닦아 익혀야 한다고 말하나 이 선정의 마음은 생각 생각에 생멸하거니 어떻게 닦을 수가 있는가?
[답] 현재에 보건대 몸의 작업은 비록 생각 생각에 사라진다손 쳐도 닦고 익히기 때문에 다른 기능이 있게 되며, 오랫동안 닦고 익힘에 따라서 차츰차츰 쉬어진다.
입의 업도 그러하며 익히고 배움에 따라서 차츰차츰 더 순조로워지고 견고하여져서 기억하기가 쉬어짐이 마치 읽고 외는 일들과 같다.
그러므로 뜻의 업도 비록 생각 생각에 사라진다 하더라도 또한 닦고 익혀야 되는 줄 알아야 한다.
마치 불이 날 것을 변화시키고 물이 돌을 짜개고 바람은 물건을 날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 생각에 사라지는 법도 모두가 모이는 힘이 있다.
오랫동안 번뇌를 익힘에 따라 그만큼 치성해짐이 마치 사람이 세세생생에 음욕을 익히면 마음에 음욕이 많아짐과 같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러하다.
경전 중에서
“어떤 일을 생각함에 따라 마음은 그쪽을 따라 향하는 것이 마치 항상 욕심을 따르면 그 마음은 욕심을 향하여 쏠리는 것과 같다. 두 가지의 생각도 그러하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이 마음은 비록 생각 생각에 사라지기는 하나 역시 닦고 익힐 수 있다.
또 닦는 것을 더욱 자람[增長]이라고 하는데 현재에 보아도 모든 법은 모두가 더욱 자라고 있다.
경전 중에서
“수행하는 이는 삿된 생각 때문에 욕심 등의 모든 번뇌가 아직 생기지 않는 것은 생기고 생긴 것은 더욱 자란다”고 함과 같다.
이른바 하로부터 중을 내고 중으로부터 상을 내는 것이 마치 종자로부터 싹과 줄기와 마디와 꽃과 잎과 열매가 있게 되듯이 현재에 보이는 것은 다 원인으로부터 점차로 더 자라게 된다.
선정과 지혜의 법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또 현실에서 보아도 깨를 볶으면 그 내음이 더욱 더 하는데 이 내음과 깨는 생각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풍기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생각 생각에 사라지는 법도 닦아 익힐 수가 있다.
[문] 깨 그것은 머물러 있는 법인데, 꽃향기가 와서 쪼여지는 것이다.
머무르는 마음이 없이 생각 생각에 사라지는 지혜로써 와서 닦아 익힌다는 것이 어떻게 비유가 되겠는가?
[답] 머물러 있는 법은 없다. 온갖 법은 다 생각 생각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일은 먼저 성립되었기 때문에 논란할 것이 없다.
또 만일 법이 생각생각에 사라지지 아니하다면 닦아 익힐 것도 없다. 곧 자체가 항상 존속한다면 닦은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만일 법이 생각 생각에 사라진다면 하와 중과 상의 법 때문에 닦아 익힐 것이 있게 된다.
[문] 모든 꽃은 깨에 붙어서 향기를 쪼일 수 있으나 지혜는 마음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닦아 익힘이 없다.
[답] 먼저 업의 비유 가운데서 그 일은 밝혔었다. 이른바 뒤의 업은 먼저의 업에 이르지 못하고 먼저의 말은 뒤의 말을 기다리지 않으나 몸과 입의 업 또한 닦는 모습이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르지 못한다거나 닦지 못한다”는 말은 질문이 되지 않는다.
또 현재에 보건대 원인과 결과는 비록 동일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역시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있게 된다. 그와 같아서 마음의 법은 비록 생각 생각에 사라지기는 하나 역시 닦아 익힘이 있다.
또 종자가 물을 만나면 물이 비록 싹에까지 닿지 아니하여도 또한 싹들을 잘 자라게 하는 것처럼 지혜도 먼저의 마음을 닦아 익히면 뒤의 마음이 더욱 자라난다.
[문] 만일 깨가 생각 생각에 사라지면 다른 깨가 생겨난다.
그 깨는 쪼여서 생기는 것인가? 쪼이지 않아도 생기는 것인가?
만일 쪼이지 않아도 생긴다면 결국은 쪼일 것이 없고
만일 쪼여서 생긴다면 어찌하여 오래도록 쪼일 필요가 있는가?
[답] 원인에 쪼이기 때문이다.
씨앗이 물을 만나면 싹이 불며 무성하듯이 그와 같아서 먼저 핀 꽃이 오므라들면서 다른 개가 생기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쪼여서 생기는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오래도록 쪼일 필요가 있느냐”고 하나
그대의 경서 중에서는
“불과 합치는 법으로 인하여 미진(微塵)의 검은 모습이 없어지고 붉은 모습이 생긴다”고 함과 같다.
만일 처음부터 불과 합하는 법이 검정 모습을 없앤다면 다시는 검정 모습을 내지 않아야 하며
만일 처음부터 불과 합하는 법으로 붉은 모습을 낸다면 어찌하여 뒤에 불과 합하는 법이 필요하겠는가?
만일 처음 불과 합할 때에 검정 모습이 생겼으면 붉은 모습은 끝내 생기지 않아야 한다.
만일 두 번째 때에 붉은 모습이 생긴다면 어찌하여 오래도록 불과 합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대의 뜻에 붉은 모습이 점차로 생긴다 하면 마음도그와 같거늘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무너짐 또한 그렇다.
또 모든 법은 비록 인연이 있다손 쳐도 역시 차례로 생기는 것이니,
마치 태 안에 든 것이 차츰차츰 몸을 이루는 것과 같고 종자의 뿌리들이 역시 점차로 생기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선정과 지혜 등의 법이 비록 생각 생각에 사라진다 할지라도 또한 하와 중과 상의 법으로써 차례로 생긴다.
또 닦는 법은 미세하여서 마음의 상속과는 다르다.
마치 깃과 털의 따뜻함이 적어지면 알이 차차 변해지고 손바닥 살결이 부드럽기 때문에 도끼자루가 조금씩 닳아짐과 같이
마음도 그와 같아서 선정과 지혜는 미묘하기 때문에 점차로 닦아 익혀진다.
또 법을 닦아 익히는 것은 시절이 당도하면 바로 알게 된다.
게송 중에서 말함과 같다.
1. 부분은 스승으로부터 받고
1. 부분은 벗으로 인하여 얻으며
1. 부분은 자신이 생각하고
1. 부분은 시절을 기다려 성숙된다.
만일 사람이 하루 내내 읽고 외워도 환히 알 수 없다가 때가되면 성숙되는것과 같다.
많은 꽃으로 한꺼번에 깨에 쪼이는 것은 적은 꽃으로 차츰차츰 오래 쪼임만 같지 못하다 기름에 불리고 물에 담가두고 담이나 벽에 깔아 놓는 일도 다 그와 같다.
현재에 보건대 종자와 뿌리와 움 들의 자라나는 것은 미세하여서 볼 수는 없되 나날이 터럭 끝만큼이라도 자라나며 어린아이들의 몸이거나 연유 등의 익어가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법을 닦는 것도 미묘하여도 깨닫기가 어렵다.
[문] 혹은 법이 일시에 단박에 모아지는 일이 있는 것을 본다. 사람이 먼저는 물질을 보지 아니하다가도 보고는 이내 염착하는 수도 있으며, 또한 잠간 동안에도 많이 통달하는 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점차로 닦아 익힌다고만 말하는가?
[답] 모두가 과거에 일찍이 닦아 익혔기 때문이요, 쌓아 익히는 일은 점차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일은 이미 밝혔다.
또 발심만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만일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아 익히지도 않으면서 다만 모든 법을 받지 않고 모든 번뇌 가운데서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만 한다면 그 사람의 생각하는 일은 끝내 원대로 되지 않으리니 착한 법을 부지런히 닦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함과 같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부지런히 착한 법을 닦으면 비록 발원을 하지 아니하여도 역시 모든 번뇌에서 마음의 해탈을 얻으리니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내는 데는 발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참새가 알을 품어야 하는 것이요, 원만으로는 새끼가 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과 같다.
또 원 때문에 등불이 청명해지지 않으며 반드시 맑은 기름과 깨끗한 심지를 갖추어야 되고 물건에 닿아 움직임이 없어야 그의 빛이 깨끗하다.
또 소원만으로 좋은 곡식을 얻어지는 것은 아니니, 반드시 좋은 밭과 좋은 종자와 시절의 윤택과 알맞음과 농사의 공력이 구족하여야 비로소 소득이 있다.
또 소원만으로 몸의 좋은 얼굴과 굳센 힘을 얻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좋은 약과 음식을 먹는 등의 인연이 있어야 충만해질 수 있다.
그와 같아서 소원만으로 샘이 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참된 지혜를 기다려서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
어느 지혜 있는 이가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원인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부터 결과를 구하려 하겠는가?
또 법을 닦아 익히면 현재에 과보를 보게 된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잠시 7일 동안만이라도 놓아 두어라. 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노니 잠깐 동안이라도 착한 법을 닦아 익히면 한량없는 세월 동안에 항상 안락함을 얻게 되리라”고 하심과 같다.
또 여러 비구니가 대덕 아난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염처(念處)를 잘 닦았더니 깨달은 것이 처음보다 다르나이다”고 하였다.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이 첨곡(諂曲)한 마음이 없이 나 있는 데로 오면 나는 아침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저녁에 이익을 얻게 하고 저녁에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새벽에 이익을 얻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또 사람이 아라한의 도를 얻되 다른 사람이 준 것도 아니요, 사람 아닌 것이 주지도 않는다.
다만 정인(正因)을 닦았기 때문에 이러한 이익을 얻었을 뿐이다.
또 위없는 부처님의 도조차 오히려 착한 법을 쌓음으로써 얻어지거든 더군다나 그 밖의 일이겠는가?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가지 법에 의지하여 더 없는 도를 얻었다.
첫째는 선(善)을 좋아하여 싫어할 줄 모르고 둘째는 도를 닦되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착한 법에서 마침내 한정이 없으셨고, 또 모든 보살이 비록 선정을 얻지 못하다 하더라도 역시 게으르지는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착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얻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하면서도 또한 자랑하지 않거니와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끝내 안온하지 못하다.
이런 일을 헤아려 본 뒤에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착한 법을 닦아 익힌다.
만일 정진을 할 때는 혹시 얻은 일도 있고, 잃는 일도 있겠지만
정진하지 아니하면 영영 희망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힘써 닦아 익히고 게으름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또 슬기로운 이는 필경에는 반드시 해탈해야 되는데 만일 닦아 익히지 않으면 다시는 다른 방편이 없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이는 힘써 닦아 익힐 것이요, 게으름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바른 행만 행하면 반드시 과보가 있다. 비록 아직은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일찍이 닦아 익혔던 과보를 얻었다. 중생은 예로부터 모두가 온갖 선정을 얻었기 때문에 나도 바르게 닦으면 반드시 얻게 될 것이므로 게으르지 않아야겠다”고 하라.
바르게 수행하는 이는 부처님이 증명을 하시리니,
“나는 지금 바른 행을 닦고 있으므로 반드시 얻게 될 것을 안다.
또 나는 도를 얻을 인연이 구족하다. 이른바 사람의 몸을 받아서 모든 감관이 구족하고 죄 되고 복될 것을 환히 알며 또한 해탈을 믿고 있고 선지식을 만나는 등의 이런 인연을 다 갖추었거늘 어찌하여 닦아 익힌 과보를 얻지 못하겠는가?
또 바르게 정진하면 끝내 헛되이 버려지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아야겠다.
또 번뇌가 끊어지는 것은 미세하여서 깨닫기 어려우니 마치 도끼 자루가 차츰차츰 닳아 없어지는 것과 같이 나의 번뇌도 장차 끊어질 때가 있으리라.
다만 미세하기 때문에 다 깨닫지 못할 뿐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착한 행을 닦는 데는 정진이 으뜸이다.
또 적은 지혜조차도 오히려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것은 마치 적은 광명으로도 역시 어둠을 없애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적은 슬기만 얻더라도 일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또 오래하여도 성취하기 어려운 것은 선정을 얻는 그 일이다. 만일 선정을 얻고 나면 그 밖의 공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빨리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내 싫증내거나 게으르지 않는다.
또 수행하는 이는 선정 얻기가 매우 어려운 줄 생각해야 한다.
“옛적에 보살은 복과 지혜가 그렇게 깊고 두터우면서도 정근하기 금년만에야 비로소 체득하였고 그 밖의 비구도 선정 얻기가 또한 어려웠거늘 하물며 나는 범부로서 박복하고 둔근하거늘 빨리 얻을 수 있겠는가”고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면 피곤하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
또 모든 수행하는 이로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이른바 선정을 닦는 일이요, 다시는 다른 업무가 없다. 그러므로 얻거나 못 얻거나 간에 반드시 닦고 익혀야 한다.
또 닦아 익히면 비록 선정을 얻지 못하다손 쳐도 역시 몸을 멀리 여의게 되었다고는 말하리니 몸을 멀리 여의고 나면 선정은 얻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선정을 부지런히 닦으면 부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하며 또한 멀리 여읨을 행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또 착한 법을 오랫동안 닦아 익히면 착한 성품을 조성하며 몸을 바꾸기에 이르더라도 신행은 항상 붙따르기 때문에 늘 착한 사람과 서로 만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큰 이익이다.
또 항상 착한 행을 닦는 이는 혹 이 몸으로 샘이 다함을 얻기도 하고 혹 죽을 때에 얻기도 하며 혹 목숨이 끝난 뒤에 좋은 곳에 화생하여 그 곳에서 얻게 되는 것은 법을 듣는 이익 가운데 설명한 바와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속마음에서 용맹스러운 모습을 일으키며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번뇌의 진지(陣地)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끝내 헛되이 돌아가지는 않으리라”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는 교만한 마음에 의지하여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은 믿음 등의 착한 뿌리가 있기 때문에 선정을 얻을 수 있었고 나도 지금 그만한 믿음이 있다. 어째서 얻지 못하겠느냐”고 한다.
마치 옛날 보살이 아라라(阿羅邏) 등의 신선으로부터 법을 듣고 생각하시되
“그 사람은 믿음 등의 선근이 있기 때문에 능히 법을 얻었다. 나에게도 지금 있거니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하랴”고 하심과 같다.
또 수행하는 이가 번뇌는 미약하고 지혜의 힘은 강한 것인 줄 알면 그것을 끊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비구가 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입 바람[口風]으로 설산(雪山)을 불어서 흩어 버릴 수 있거늘 항차 죽은 무명쯤이랴”고 말함과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전생에 선정을 닦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얻지 못하였다.
지금부터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뒤에는 다시는 얻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부지런히 익혀야겠다”고 한다.
또 항상 선정을 닦기 때문에 마음은 머무는 곳을 얻는 것이 마치 병이 굴러가다가 반드시 멈추는 곳이 있게 됨과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면 얻거나 못 얻거나 간에 뒤에는 반드시 뉘우치지 않으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심으로 모든 선정을 힘써 닦게 한다.
12.35. 지상품(智相品)
참된 슬기[慧]를 지(智)라 한다.
참되다 함은 공하여 내가 없다[空無我]는 것이다.
이 안의 지혜를 참된 지혜[眞智]라 하고,
붙인 이름 안의 슬기는 생각[想]이라 할지언정 지혜는 아니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칼이 벨수는 있는 것처럼 거룩한 제자는 지혜의 칼로 맺음[結]과 묶음[縛]과 부림[使]과 얽음[纏]인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의 법을 말하지 않은 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니 지혜만이 진실하다 함은 알 것이다.
[문] 그대는 “지혜만이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생각[想]으로서도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무상하다는 생각을 잘 닦기 때문에 욕심 세계의 탐착과 형상세계의 탐착이며 온갖 실없음과 교만과 무명을 깨뜨린다”고 함과 같다.
[답] 그렇지 않다.
지혜도 번뇌 끊는 것을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지에 따라서 하시는 말씀이요,
둘째는 이름에 따라서 하시는 말씀이다.
경전 중에서
“인자함은 성냄을 끊는다”고 설명함과 같이
이 인자함은 사실상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요, 지혜만으로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마치
“지혜의 칼이 모든 번뇌를 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인자함이 번뇌를 끊는다고 함은 그것이 이름에 따라 하는 말이다.
또 혜의경(慧義經)에서
“이해하고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한다”
어떤 일을 이해하고 아는가?
물질이 무상하면 사실대로 무상한 줄을 알며,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의식이 무상하면 사실대로 무상한 줄을 안다. 이것을 지혜라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거룩한 제자가 선정으로 마음을 껴잡으면 사실대로 알고 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의 반연을 지혜라 하는 줄 알 것이다.
또 지혜의 비유 중에서 지혜의 칼이라거나 지혜의 화살이라는 따위로 말한다.
이런 비유는 다 번뇌를 끊어 없애는 일을 보인 것이니, 참다운 지혜만이 번뇌를 끊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지혜가 진실이다.
또 게송 중에서 말하였다.
수행하는 이는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참된 지혜를 잃었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에 탐착함을 본다.
세간에서는 거의가 허망한 항상함과 즐거움과 깨끗함[常樂淨]을 보는지라 참된 지혜를 잃었다 하고 만일 진실한 공과 나 없음 등을 본다면 참된 지혜를 얻었다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지혜를 진실로 삼는다.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이 재물을 잃으면 적은 이익을 잃었다 하겠거니와 만일 지혜를 잃으면 큰 이익을 잃었다고 하리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모든 이익 중에서 재물 그것은 적은 이익이로되 지혜는 으뜸가는 이익이니라”고 하셨다.
“모든 광명 중에 일월의 광명은 적고, 지혜의 광명이 제일이니라”고 하셨다.
만일 지혜가 진실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가?
또 경전 중에서
“지혜의 뿌리는 거룩한 진리[聖諦]에 속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괴로움과 쌓임의 지혜 등은 진실인 줄 알아야 한다. 으뜸가는 진리를 반연하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모든 법 가운데는 지혜가 으뜸이니라”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더없는 정변지[正遍知]를 또한 혜안(慧眼)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실인 줄 알 것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힘[十力]은 모두 지혜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진실로 삼는 줄 알 것이다. 으뜸가는 진리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문] 만일 그렇다면 세간의 지혜는 없겠다.
[답] 실로 세간의 지혜는 없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세간의 마음은 붙인 이름을 반연하고 출세간의 마음은 공과 나 없음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간은 바로 붙인 이름이어서 붙인 이름으로부터 벗어남을 출세간이라 하기 때문이다.
[문]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식(識)은 무엇을 아는가? 물질과 소리와 내음과 맛과 닿임과 법을 안다.
이와 같이 음ㆍ계ㆍ입(陰界入) 등도 모두 식으로써 안다.
지금 이 식은 다 출세간이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에 “세간의 마음은 붙인 이름만을 반연하고 진실을 반연하지 못한다”고 하나 그 일이 옳지 못하다.
또 의식(意識)도 진실을 반연하는 것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 등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두 가지의 바른 소견을 말씀하셨으니 세간과 출세간이다.
복과 죄 등이 있다고 보는 것을 세간이라 하고
만일 거룩한 제자가 괴로움과 쌓임과 사라짐과 도를 반연하며 샘 없는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라면 출세간이라 한다.
또 게송 중에서 말하였다.
세상의 바른 소견을 얻으면
생사 중에 가고 오는 일이
백생ㆍ천생이라 한다 하더라도
항상 악도에 빠지지 않는다.
또 경전 중에서
“삿된 행을 하던 이가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됨은 그 사람의 죄업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거나 선업의 인연이 먼저 성숙하였거나 혹은 임종할 때에 바른 소견과 상응하여 착한 마음이 눈앞에 나타났거나 하였기 때문에 좋은 곳에 와서 났다”고 하였다.
또 열 가지 착한 길 중에서도 바른 소견을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세간의 지혜가 없다 하는가?
또 부처님은 세 가지의 지혜가 있다고 하셨으니 듣고 얻은 지혜와 생각하여 얻은 지혜와 닦아서 얻은 지혜이다. 듣고 얻은 지혜와 생각하여 얻은 지혜는 모두 이는 세간이지만 닦아서 얻는 지혜는 두 가지에 다 통한다.
또 부처님은 생각하시기를
“라후라 비구는 아직 해탈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해탈의 마음을 성숙하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것은 다 세간의 지혜이다.
또 경전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벗어났으면서도 관찰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관찰하면서도 건너지 못한다”고 하였다.
세간의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있다하고 네 가지 진리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찰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만일 네 가지 진리를 보고도 샘이 다하지 못하면 그 때문에 건너지 못한다고 한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법지(法智)와 비지(比智)와 타심지(他心智)는 세간의 지혜[世智]이다”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셨다.
“숙명지(宿命智)와 생사지(生死智)는 모두 샘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또 “법주지(法住智)와 열반의 지혜”를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것들은 경전 중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샘 있는 지혜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답] 만일 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지금에 샘 잇는 지혜와 샘 없는 지혜의 차별된 모습을 설명하여야 한다.
[문] 만일 법이 있다는 데 떨어지면 그것을 샘 있는 것이라 하고 그와 다르면 샘없는 것이라 한다.
[답] 어떤 법을 있다는 데 떨어진다 하고 어떤 법을 있다는 데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가?
이 일을 대답해야겠다.
만일 대답하지 못하면 샘이 있는 모습도 샘이 없는 모습도 아니다.
그대는 “세간의 마음은 붙인 이름이 아닌 것을 반연하는 것이니 모든 티끌을 분별하는 따위이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범부는 항상 붙인 이름에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뜻은 모든 범부의 마음은 붙인 이름을 부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나라를 모습에 따라서 끝내 여의지를 못한다.
비록 물질을 본다 하더라도 역시 병 따위의 모습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범부의 마음은 진실의 이치를 반연하지 못하며 느낌과 생각 등의 법을 반연한다 하더라도 역시 나와 내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알아라. 온 세간 사람의 마음은 다 붙인 이름을 반연한다.
그대는 “모든 세간의 지혜가 있으며 두 가지의 바른 소견이 있다”고 하나 지금 대답해야겠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어리석은 마음과 슬기로운 마음이다.
붙인 이름의 법을 반연하면 그것을 어리석은 마음이라 하고
만일 법의 “공과 나 없음”을 반연하면 그것을 슬기로운 마음이라 한다.
해무명경(解無明經) 중에서
“무명이라 함은 먼저를 알지 못하고 나중을 알지 못하고 먼저와 나중을 다 모르며, 업도 알지 못하고 과보도 알지 못하고 먼저와 나중의 업과 과보를 다 모른다.
이러한 따위의 가지가지를 사실대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리석고 허망하고 캄캄하기 때문에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다.
사실대로 알지 못한다 함은 공과 나 없음을 모르는 것이다.
이 범부의 마음은 항상 붙인 이름에 있으면서 붙인 이름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명이라 하고,
공을 반연하면 지혜라 한다.
지금에 만일 온갖 세간의 마음이 다 붙인 이름을 반연하고 붙인 이름을 반연하는 마음을 무명이라 한다면 어떻게 세간의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 그대가 지혜의 모습을 말함과 같이 붙인 이름을 반연하는 것을 무명이라 하면 지금 아라한에게도 무명이 있어야 되리니, 역시 병(甁) 따위를 반연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답] 아라한에게는 병 따위를 반연하는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 도를 얻을 때에 이미 온갖 붙인 이름의 모습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에 당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병 따위를 말할 뿐이요, 소견이거나 아만에 집착해서가 아니다.
세 가지의 말이 있다.
첫째는 소견으로부터 내고,
둘째는 교만[慢]으로부터 내며,
셋째는 사용하는 일에 따라 내는 것이다.
범부가 만일 병이라 말하고 사람이라 말하면 이 말은 다 소견으로부터 내는 것이다.
또 배우는 이는 비록 나라는 소견은 없다하더라도 바른 생각을 잃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쌓임 중에서 아만의 생각으로 이것은 사람이요, 이것은 병이다 라고 말하는 것인데 차마가경(차差摩伽經) 중의 설명과 같다.
사용하는 일에 따라 낸다 함은 아라한을 말한다.
대가섭(大迦葉)이 승가리(僧伽梨)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 물건이다”라고 함과 같다.
천신(天神)이 의심하는지라 부처님은 해석하시기를
“이 사람은 영원히 아만의 뿌리를 뽑았고 인연이 다 없어져 버렸거늘 무슨 아만이 있겠느냐?
다만 세간의 이름으로써 말했을 뿐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아라한에게는 병 따위라는 마음이 없다.
[문] 만일 세간의 지혜가 없다면 두 가지 바른 소견이 있다고 말한 경전이 어떻게 통하겠는가?
[답] 이것은 다 생각[想]을 지혜라는 이름으로 설명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통달하시어 제도할 만한 중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셨다.
마치 지혜를 느낌[受] 등의 이름으로써
“느끼는 이는 모든 법에서 해탈을 얻는다”고 말씀한 것과 같으며,
또한 “무상 등의 생각[想]을 잘 닦으면 온갖 번뇌를 부순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제4의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업은 모든 업을 다 하나니, 이른바 배우는 생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뜻으로써 모든 탐착을 끊는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믿음은 강을 건너고 전일한 마음은 바다를 건너며, 정진은 고통을 없애고 지혜는 청정하게 한다”고 하셨음과 같다.
또 “눈이 물질을 보려 한다”고 말하지만 눈은 실로 욕심이 없으며 다만 마음이 보고자함을 눈이라는 이름으로 말할 뿐이다.
[문] 만일 세간의 지혜가 실로 생각이라면 무엇 때문에 지혜라고 말하는가?
만일 이유도 없이 지혜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온갖 생각은 다 지혜라고 불러야 된다.
또한 두 종류의 생각이 있으니,
첫째는 세속의 진리를 반연하고
둘째는 으뜸가는 진리를 반연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답] 그렇지 않다. 생각에는 갖가지의 차별이 있다.
생각은 극히 어리석어서 세간의 선과 악조차 분별하지 못한 것이 있고
생각 다음의 어리석음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수도 있고
생각이 작고 어리석어서 골상(骨相) 따위를 반연하는 수도 있다.
만일 붙인 이름을 여의지 아니하면 모든 쌓임의 모습을 무너뜨릴 수 없으며,
이 생각은 쌓임의 모습을 부수는 지혜에 수순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지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이 생각은 진실한 지혜의 원인이 되어주기 때문에 지혜라고도 한다.
세간에서는 원인 중에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도 있으니,
마치 “금(金)을 먹는다” “남에게 다섯 가지 일을 보시한다” “여자는 계행을 닦는데 때가 된다” “좋은 언덕은 시내의 즐거움이다” “법복(法服)은 사람의 즐거움이다”고 말함과 같다.
또 7루경(漏經) 중에서 말씀하셨다.
“작용의 끊어지는 등의 샘의 인(因)을 샘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음식으로 목숨을 삼으며 풀은 소와 염소가 된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옷과 음식 등의 물질은 모두가 이는 바깥 목숨[外命]이다. 만일 사람의 재물을 빼앗으면 곧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다 원인을 설명하여 결과를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혜의 원인을 지혜라고 말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
[문] 모든 염처(念處)와 난(煖) 등의 안에서는 마음은 진실의 법을 반연한다. 그것은 샘이 없는 것인가?
[답] 샘 없는 마음은 붙인 이름을 부순다. 그러므로 마음이 붙인 이름을 부숨에 따라서 그 이후부터는 샘이 없다고 한다.
[문] 어느 경지에 도달한 마음이면 붙인 이름을 부술 수 있는가?
[답] 두루 갖추어서 다섯 쌓임의 생멸하는 모습을 보게 됨에 따라서 그 때에는 무상하다는 생각을 얻는다.
무상한 생각은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마치 “거룩한 제자가 무상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닦으면 나 없음의 생각에 머무른다”고 말함과 같다.
나가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닦으면 탐심과 진심과 치심 등에서 빨리 해탈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나 없음의 생각으로 마음을 닦으면 괴로움의 생각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비록 괴로워 한다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법이 무상하고 나 없으며 또한 괴로운 것이라면 슬기로운 이는 깊이 미워하고 싫증을 내리니, 그러므로 나 없다는 생각은 괴로움의 생각을 갖추고 있다.
[문]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차례를 무너뜨리면서 말을 하는가?
경전 중에서
“만일 무상이면 이는 곧 고통이요, 고통이면 이는 곧 나 없음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상함의 생각이 괴로움의 생각을 갖추었고 괴로움의 생각이 나 없음의 생각을 갖추었다.
[답] 경전 중에서
“무상하다는 생각을 닦았으면 거룩한 제자의 마음은 나 없음의 생각에 머무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상함의 생각은 나 없음의 생각을 구비하였다.
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도리에 맞다. 왜냐하면 나라 함은 “후세를 성립시키고 짐짓 나는 항상하다”고 설명하기 위하여 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다섯 가지 쌓임이 무상하다고 보면, 바로 나가 없는 줄 안다.
경전 중에서
“만일 사람이 눈[眼]이 바로 나라고 하면 그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눈에는 나고 죽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눈이 곧 나라면 나는 곧 나고 죽는다는 이런 허물이 있다”고 함과 같다.
[문]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회통할 것인가?
[답] 괴로움의 생각은 두 종류이다.
첫째는 무상함의 생각으로부터 생기는지라 괴고(壞苦)의 생각이라 하며
둘째는 나 없음의 생각으로부터 생기는지라 행고(行苦)의 생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전이 역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문] 만일 그렇다면 염처(念處)와 난(煖) 등의 법 가운데서 무상함의 생각이 있는 이 법은 모두가 샘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답] 염처 등 안에서 설령 샘 없는 생각[想]이라 한들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문] 범부의 마음이 샘이 없다 함은 안 된다. 또한 범부의 마음에는 허망한 생각 등이 있거늘 어떻게 그것을 샘이 없다 할 것인가?
[답] 이 사람은 바로 범부는 아니며, 이런 사람을 수다원의 과를 닦는 사람[行須陀洹果]이라 한다.
[문] 수다원의 과를 닦는 행은 견도(見道)의 갈래 안에 있으며, 염처(念處) 등의 법은 견도라고는 하지 않는다.
[답] 수다원의 과를 닦는 데는 가까운 데가 있고 먼 데가 있다.
염처 안에 머무르면 이를 원행자(遠行者)라 하고 견도중에 있는 이를 근행자(近行者)라고 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부처님은 부가유경(斧柯喩經) 중에서 말씀하시되,
“알고 또는 보기 때문에 샘이 다함을 얻는다”고 하셨다.
어떠한 법을 알고 보는가?
이 물질 등과 이 물질 등의 생김과 이 물질 등의 사라짐이다.
만일 도를 닦지 아니하면 샘이 다함을 얻지 못하거니와,
닦게 되면 얻는 것이 마치 알을 품는다는 비유와 같다.
또 수행하는 이는 항상 도품(道品)을 닦으면 번뇌의 작은 티끌을 자주는 깨닫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끊어진 뒤에는 비로소 알게 됨이 마치 도끼 자루의 비유에서와 같다.
또 수행하는 이가 항상 37품을 닦으면 욕심의 속박과 맺음의 속박이 쉽게 흩어져 무너짐이 마치 바다의 배의 비유와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염처로부터 도품을 닦아 익히는 것까지를 초과(初果)를 행한 이라 한다.
또 한 번의 생각이거나 열여섯 번의 생각이거나 간에 그 가운데서 닦아 익히게 되지 못하면 그는 바로 원행(遠行) 수다원인 줄 알아야 한다.
[문] 처음에 “이 물질 등과 이 물질 등의 생김과 이 물질 등의 사라짐을 안다”고 설명하면
그것은 초과의 도로서 뒤의 세 가지 비유도 바로 세 가지 과위[果]의 도다.
그러므로 초과를 행하는 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답] 만일 알을 품고 있지 않으면 이내 실패하거니와 품게 되면 성취한다.
그와 같아서 염처로부터 처음 닦아 익히되 만일 성취하지 못하면 수행했다고 하지 못하겠거니와
성취하게 되면 그는 학인(學人)으로서 실패하지 않고 잘 감당해 낼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각은 염처 등에서 실패하면 범부라 할 것이요,
만일 닦아 익혀 성취하면 초과를 행한 이라 하리니, 아직 껍질 속에 있으나 만일 껍질 속에서 나오면 수다원이라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염처 등에 있는 이를 원행자라 한다.
또 욱가 장자(郁伽長者)가 여러 스님에게 공양을 하는데
천신(天神)이 지적하며 말하기를
“이는 아라한이다. 내지 이 분은 초과를 행하는 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견도 중에 있으면 어떻게 지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원행자인 줄 알아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믿음 등의 다섯 가지 뿌리가 없으면 이 사람은 외범부(外凡夫) 중에서 머무른 이라 한다”고 하셨다.
이 뜻은 내범부와 외범부가 있다는 말씀이다.
만일 통달 갈래의 선근을 얻지 못하면 외범부라 하고, 얻으면 내범부라 한다.
이 내범부를 또한 성인(聖人)이라고도 하고, 또한 범부라고도 한다.
외범부를 상대하여 성인이라 하고, 견도한 이를 상대하여 범부라 한다.
아난이 차익(車匿)에게 말하기를
“범부는 물질의 공하고 나 없음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공하고 나 없음과 온갖 모든 행의 무상함과 온갖 법의 나 없음과 적멸의 열반 등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자,
그 때에 차익은 아직 법위(法位)에 들지 못하였으나 역시
“범부는 이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문]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다 같이 수행하는 이라고 한다면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만일 사라짐의 진리를 보았으면 참된 수행자라 하고
만일 먼 갈래의 선근에 있어 다섯 가지 쌓임의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음을 보았으면서도 아직 사라짐을 보지 못하였으면 이는 이름 뿐의 행자[名字行者]라 한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비구가 부처님에게
“무엇으로 법을 보았다고 하나이까”라고 물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눈으로 물질을 반연함으로 인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면 바로 느낌과 생각[想思] 등의 함께 생기거니와 이 온갖 법은 다 무상하고 허무하여서 보존되거나 믿을 수가 없다.
만일 법이 무상하다면 이는 곧 고통이다. 이 고통은 생기는 것도 고통이요, 머무는 것도 고통이요, 자주자주 일어나는 모습 또한 고통이다.
뜻[意]과 법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만일 이 고통이 사라지면 그 밖의 고통은 생기지 아니하여 다시는 상속함이 없다.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이 곳은 고요히 사라져서 미묘한지라 온갖 허망함을 버리고 탐애는 다 사라지고 고요한 열반이다’고 하라.
만일 이 법 안에서 마음이 믿고 이해함에 들면 움직이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리니,
이로부터의 것을 법을 본다고 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수행하는 이가 무상함 등의 행으로 다섯 가지 쌓임을 보면 원행자라 하고 만일 사라짐의 진리를 보면 근행자라 한다.
차익이 여러 상좌(上座)에게 대답하기를
“나도 물질 등의 무상함을 생각하고 그리고 온갖 행의 사라짐에서 애착은 다하였으나, 열반의 마음으로 통달하고 믿고 이해하는 데는 들지 못하였습니다”고 함과 같다.
만일 그와 같이 알면 법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또 말하였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이 법에 대하여 부드러운 슬기로 믿고 알면 신행자(信行者)라 하며,
범부의 지위를 지나서 바른 법의 위치에 들었으되 초과를 얻지 못하면 끝내 일찍 죽지는 아니한다.
만일 날카로운 슬기로 믿고 알면 그것을 법행(法行)이라 하며,
이 법을 본 뒤에 세 가지 번뇌[結]를 끊으면 수다원이라 하며,
남음없이 환히 알면 아라한이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사라짐의 진리를 보면 근행자라 한다.
[문] 수행하는 이는 무엇 때문에 모두 사라짐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가?
[답] 경전 중에서
“모든 법은 자성이 없다. 뭇 인연으로부터 생긴 이 법은 매우 깊어서 온갖 애착이 끊어지고 적멸한 열반이다.
이런 곳은 보기가 어렵다. 부처님은 열두 가지 인연의 사라짐을 관찰하셨기 때문에 위없는 도[無上道]를 성취하셨다”고 하였다.
또 법인경(法印經) 중에서
“수행하는 이가 만일 다섯 가지 쌓임은 무상하고 허무하며 허망하면서 견고하지 못하다고 관찰하면서 또한 공이라고 하면서도 지견이 아직 깨끗하지 못하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 경의 뒤에서 말하기를
“수행하는 이는 생각하기를
‘나의 보는 바와 듣는 바와 맡는 바와 맛보는 바와 닿는 바와 생각하는 바 등의 이 인연으로써 식(識)이 생기면 이 식의 인연은 항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고 한다.
그러면 바로 무상함을 알게 된다. 만일 무상한 인연으로부터 식이 생겼다면 식은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다섯 쌓임은 무상하다.
뭇 인연으로부터 생긴지라 다하는 모습이요, 무너지는 모습이요, 여의는 모습이요, 사라지는 모습이라고 보면, 그때에는 수행하는 이의 지견이 청정하여진다”고 하였다.
사라져 없어짐을 설명함으로써 지견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라짐을 보는 것을 거룩한 진리를 본다고 하는 줄 알 것이다.
또 먼저는 법주지(法住智)요, 뒤에는 열반지(洹槃智)이다.
그러므로 사라짐의 진리를 보는 것을 거룩한 도[聖道]를 얻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