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도래설을 주장하는 에리히 폰 데니켄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석상과 기단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석상과 기단은 폴리네시아, 특히 동폴리네시아에서 그 기원이 찾아진다.
사당이나 보조 사원으로 사용된 '마라에(marae)'라는 돌기단이 폴리네시아 곳곳에 있었다.
예전에 핏케언섬에 마라에가 셋이나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건대
이스터 섬의 정착자들이 핏케언 섬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쟀던 이스터 섬의 아후는 마라에에 비해 더 컸고, 보조 사원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다.
마르키즈 제도와 오스트랄 제도에도 큰 석상이 있었다.
마르키즈, 오스트랄, 핏케언의 석상들은 이스터 섬의 일부 석상에서 사용된 붉은 암재가 주로 사용되엇지만
마르키즈에서는 라노라라쿠 채석장에서 채굴되던 응회암(凝灰巖)과 같은 화산석이 사용되기도 했다.
망가레바 섬과 통가 섬에는 다른 형태의 석조물이 있었다.
특히 통가에서는 삼석탑, 즉 수직으로 세운 한 쌍의 돌기둥 위에 수평의 가로돌판을 얹은 형태의 구조물이 유명했고,
돌기둥 하나의 무게는 40톤에 달햇다.
타히티를 비롯한 다른 섬에서는 목각상이 있었다.
따라서 이스터 섬의 구조물은 폴리네시아 전통에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스터 섬 사람들이 석상을 언제 처음 세웠고,
형식과 규모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돌은 방사성 탄소로 연대 측정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간접적인 방법, 즉 아후에서 발견된 숯의 방사성 탄소측정,
균열된 흑요석 표면의 흑요석 수화층 측정(obsidian hydration layer dating),
초기의 것이기 때문에 버려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석상들의 형식, 일부 아후에서 확인되는 복구 방식,
그리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자료 등을 기초로 추정할 수박에 없다.
하지만 나중에 조각된 석상이 반드시 더 무거우지지는 않았지만 더 커졋고,
아후는시간이 흐르면서 몇 번씩 개축되면서 더 커지고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아후가 세워진 시기는 주로 1000~1600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추한 것이지만
최근들어 워런 베크(J. Warren Beck)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베크의 연구 팀은 줄칼과 석상의 눈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 산호에 함유된 탄소,
그리고 광장을 장식한 조류(藻類)의 하얀 결절에 함유된 탄소에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사용햇다.
이런 직접적인 연대 측정에 따르면 아나케나의 아후나우나우는 세 번의 건축과 재건축이 있었다.
첫 시기는 1100년경이었고, 마지막 시기는 1600년경이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아후들은 폴리네시아의 마라에처럼 석상이 세워지지 않는기단에 불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들은 나중에 아후의 옹벽을 ㅅㅎ거나 다른 구조물을 세우는데 재상용되엇다.
또한 초기의 석상들은 훗날의 석상보다 더 작고 둥근 형태를 띠면서 인간의 모습에 가까웠고,
라노라라쿠의 응회함 이외에 다양한 화산석으로 만들어졌다.
요컨데 이스터 섬 사람들ㅇ느 나중에야 라노라라쿠의 응회암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햇다.
그 이유는 간단햇다. 응회암이 조각하기에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응회암은 표면이 단단하기는 하지만 속은 재처럼 부드러워,
속까지 단단한 현무암에 비해 깎아내기가 훨씬 쉽다.
붉은 암재에 비해도 응회암은 잘 깨지지 않고 윤을 내고 세밀한 부분까지 조각하기가 더 편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라로라라쿠의 석상은 점점 커졋고
직사각형을 띠면서 일정한 양식까지 잦추었다.
또한 각 석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량 생산된 흔적도 뚜렷하다.
예컨대 아후에 세워진 가징 큰 석상인 파로도 후기에 세워진 석상 중 하나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석상의 규모가 커졌다는 사실에서 ,
씨족둘 간에 상대를 압도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푸카오(pukao)'라는 후기의 특징에서 재확인된다.
붉은 암재로 만든 원통형의 머릿돌로 모아이의 납작한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푸카오는
무게만도 12톤(파로의 쿠카오)에 달했다.(사진 8)
그런데 섬사람들은 크레인도 없이 12톤에 달하는 돌덩이를
9.8미터 높이의 석상 머리에 어떻게 똑바로 올려놓을 수 잇었을가?
이것도 에리히 폰 데니켄으로 하여금 외계인 도래설을 주장하게 만든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최근의 실험에 달면 푸카옹하 석상은 거의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푸카오는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확실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폴리네시아 전역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붉은 새의 깃털로 만들어 족장에게만 허락된 머리 장식물이나,
깃털과 타마천(꾸지나무껍질로 만든 종이 같은 천)으로 만든 모자를 상징한 듯하다.
실제로 에스파냐의 탐험대가 태평양의 산타므루스 섬에 상륙했을 때
섬 주민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에스파냐의 선박, 칼, 총, 거울이 아니라 붉은 천이었다.
푸카오는 푸나파우 채석장에서 채석된 붉은 암재러만 만들어졌다.
라노라라쿠 채석장의 모아이 작업장에 모아이들이 흩어져 있었듯이,
푸나파우 채석장에서도 미완성의 푸카오뿐만 아니라
완성되어 운반을 기다리고 있던 푸카오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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