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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목양에 빠져라 김남준
차 례
서론 목양을 거부하라?
1장 담임목사는 고용 사장인가?
2장 목회, 그 영원한 가슴앓이
3장 미완성이기에 아름답습니다
4장 진리의 힘으로 삽니다
5장 거룩한 환희를 아십니까?
6장 목회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7장 아낌없이 주는 목자
8장 바닷가에서 생긴 일
9장 목숨을 버리는 목양
저자 소개 김남준 목사
총신 대(M. Div. Th. M. D. cand)공부하였으며 대신대학교 신학부에서 전임강사와 조교수를 지냈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열린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저자는 특별히 조국 교회의 참된 부흥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각성에 관심을 가지고 설교와 집필 및 강연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십자가를 경험하라(생명의 말씀사),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 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야 한다.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이상 두란노 출판),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규장)등 다수가 있다.
목양을 거부하라 ?
어떤 등록 교인
저는 지난해 가을 어느 노회에서 개최하는 연합 제직 사경회에 초청을 받아 말씀으로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여러 목회자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는 저를 매우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교회가 있는 동네로 새로 이사를 와서 등록을 하는 새 가족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전혀 우울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새신자도 아니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등록을 권유하는 교역자들의 요구에 대하여 이제는 심방 오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등록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는 거기 모인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조금도 새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도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다니는 사교 단체나 헬스클럽처럼 편의주의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짐승 같은 종교 생활
우리가 많은 신앙의 체험을 갖고 다양한 지식들을 교회에서 얻는다할지라도 그것이 곧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기독교인으로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과 거룩한 성도가 되어간다고 하는 것도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이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그릇된 사고의 틀을 버리는 일 없이 단지 지속적인 체험이나 지식의 축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식의 종교를 가르쳐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에서 바로 길어 가지고 온 진리가 아니라 그릇된 사고와 상식의 틀이라는 체에 거른 후 새로 부어만든,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견해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신앙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든지 내 좋은 식대로 종교 생활을 해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짐승 같은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의 판단이 무엇인지를 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섬기도록 가르쳐주는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낸 신상(神像)을 섬기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관계가 귀찮은 성도
물론 자주 심방을 받는다 해서 곧 좋은 목양의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얄팍한 생각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관계가 귀찮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또 다시 인간관계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출석하되 익명의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헌금이나 교회 출석과 같은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교인으로서의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랍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의 지배도 받기 싫어하는 성향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람에게 예속되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든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목양을 거부하라?
언젠가 교계에 널리 알려진 저명하신 분과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존경하던 그분의 한 논지는 저를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신학을 얼마나 오래도록 공부했는지를 알았기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논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타난 대부분의 타락상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다수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심적인 위치를 가지는 데 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는 점점 더 목회자가 필요없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목양 없이 홀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그분의 이러한 논지에 혹하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지가 약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의 쇠퇴한 교회의 영적인 처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특정한 사람을 세우시고 온 교인들이 그를 통하여 신앙의 감화를 받으며 가르쳐주는 바를 배우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같이 신뢰할 수 없는 목회자가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럴듯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목회자와의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배우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스스로 알아서 믿는 방식으로 전수되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하나님이 부르시고 그분의 인격을 더 깊이 경험한 진리의 사람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고 영향을 받으며 전수되어왔습니다.
타락과 방종의 합작품
목양 받기 싫어하는 교인들의 방종한 마음은 진실되게 목양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만한 목자의 직업적인 태도만큼이나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한 심리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는 목양의 관계에서 입은 상처의 경험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저 좋은 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무기력함과 교인들의 제멋대로 믿는 종교 생활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의 무기력과 교인들의 방종이 빚어낸 합작품입니다. 이 모든 상황의 근원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목회자와 그의 목양 아래서 신앙을 배우는 겸손한 교인들과 그러한 목양의 관계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소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권위 있는 답변을 위대한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듣습니다.
더욱이 이 복음서가 우리 주님께로부터 직접 목양을 받았고 자신이 또한 양떼들을 말씀으로 먹이며 선한 목자의 길을 걸었던 사도 요한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이기에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저는 이 말씀들을 통하여 절망적일 정도로 아집과 편견에 굳어 있는 조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과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시는 축복된 은혜의 방편인 목양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실 소망을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가지셨던 관계는 훈련의 관계가 아니라 목양의 관계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훈련시키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목양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거룩한 목양의 결과였습니다.
저는 꿈꿉니다. 조국 교회 안에서도 다시금 거룩한 목회장와 어린이 같이 교인들이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를 회복하여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불꽃과 같은 용사들로 다시 태어나는 날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것입니다. “성경적인 목양의 관계없이 성경적인 신앙도 없다.”
1 담임목사는 고용사장인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요10:1-2)
아름다운 한 장면
우리들이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목양의 관계에 대하여 찬란한 빛을 던져주는 요한복음 10장은 바로 앞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목양에 관한 이 교훈은 주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자를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실로암 사건이 있고 나서 종교지도자들의 안식일 논쟁이 벌어진 다음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소경을 고쳐주신 때가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서 병 고침을 받은 가련한 소경이, 그 일의 경위를 묻는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또박또박 증거하였으나, 그들의 관심은 불쌍한 처지에 있던 그가 주님의 긍휼히 여김으로 다시 보게 된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율법을 어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의 비밀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거짓 목자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1-2).
목양,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 자신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인간을 세우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목양하게 하시고, 당신의 양떼들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을 따르며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을 사랑하고 거룩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목양의 신적 기원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에 의하여 교인들이 목양을 받고 거룩한 신앙을 배워가는 방법은 인간의 경험을 통하여 채택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입니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목양하실 때에 하나님이 직접 양떼인 우리를 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세우셔서 당신의 양떼들을 돌보시기로 작정하신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못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먼저 알고 진리를 깨달은 자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 영광스러운 목양의 섬김을 이루시기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목회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목양하는 이가 허물과 연약함에 둘러싸인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나 자주 실망하고 고통받습니까? 교회의 아픔 중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사실은 목양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됩니까? 어떤 이들은 고의적인 범죄로 목양의 관계에 고통을 주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양떼들에게 누를 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천사들이 와서 목회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는 뛰어난 두뇌로 교회의 행정을 장악하고 시원하게 교회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는 순결할 것입니다. 적어도 고의적인 범죄로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자기의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을 교인들의 부담으로 떠넘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어리석은 탐욕으로 목회 사역을 쉽게 더럽히고 목양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높은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과도한 심방 사역에도 몸이 상치 아니할 것이며, 육신의 질병 때문에 마음은 원하여도 육신이 연약해서 목양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증거해야 할 시간에 어눌한 말로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거나 쓸데없는 말로 교인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성자와 같은 순결함, 천사와 같은 지혜, 수도사와 같은 무욕(無慾)의 마음, 사도와 같은 권위, 선지자와 같은 단호함, 제사장과 같은 긍휼…. 우리들이 교회의 현실 안에서 목말라 하고 있는 목양을 위한 거룩한 덕목들을 모두 갖춘 천사들을 사용치 않으시고 연약과 온갖 허물에 둘러싸인 가냘픈 한 줄기 갈대와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목자로 삼으신 것은 오히려 인간의 약점을 아시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목회자를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시고 목양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살게 하시지만, 우리가 의뢰하여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셔서 생사간에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참목자와 삯꾼
목양의 길은 단지 목회자 자신이 그 길을 가치 있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들어서는 길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그를 정말 목회 사역에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소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과연 삯꾼 목자들은 자기가 삯꾼이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을까요? 여기서 삯꾼이라는 말은 목자의 소명의 기원은 물론 그의 목양의 도덕성과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양의 관계를 정위(定位)하는 도덕성의 한복판에는 목자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이고, 또 한편으로는 목자인 자신과 양떼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된 목자의 섬김을 움직이는 원천은 이처럼 사랑입니다. 그러나 삯꾼들을 움직이는 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대가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삯꾼 목자들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일로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삯꾼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나님의 종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인지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모호한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양떼들을 갈취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목자를 아는 감각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신앙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인격적이기 위해서는 말하고 듣고 판단하고 승복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그들의 마음은 정말 순진하고 순수해집니다. 완고하고 거칠던 마음은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깃들게 됩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에게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태어난 양떼들에게 참된 목자와 그릇된 목자를 구분할 수 있는 감각을 주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같은 내용의 말씀이 7절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양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사료를 먹여 키운 것이 아니라 목자들이 양을 이끌고 목초지로 가서 풀을 먹게 합니다. 때문에 양을 모아 밤을 지내게 하는 간이 양사(洋舍)가 많이 있었습니다. 급한 대로 돌멩이들을 모아서 나지막하게 울타리를 세워놓고 긴 나무 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는 입구를 터놓습니다. 그리고는 터진 입구를 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입구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든 목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누워 자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 고 하신 말씀의 숨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목양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결정적인 가르침을 보여줍니다. 먼저 목회자의 목양에 대한 소명의 문제입니다. 다른 지체들과 똑같이 허물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영혼의 영원한 문제가 달려 있는 이 거룩한 사역에 자신을 바치도록 만들어 주는 소명의 진정한 원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그가 가진 학위입니까?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커다란 능력입니까? 고상한 인격입니까? 화려한 가문이나 문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목양에 바쳐진 목회자로 부르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한 것이 바로 그가 목양에로 부름을 받은 이유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중압감
목회자는 모두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 양 무리들 가운데 나아온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평신도로 하여금 목회에 부름받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별한 만남을 통해서 목양을 위한 소명, 설교의 소명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자신의 책 「설교와 설교자들」(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소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합니다. 즉 어떤 중압감이 자기에게 가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자각하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어떤 혼돈이 일어나는 것 같은 일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로서의 소명의 진수 부분입니다.”
이같은 소명 체험의 한복판에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과 그의 하신 일에 대한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는 단지 예배를 이해서 서리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의 사명은 단지 교인들을 은혜받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향한 그의 피를 토하는 설교도, 눈물로 부르짖는 그의 중보 기도도 단지 교인들을 교회 잘 다니는 사람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수고와 사역의 마지막은 그들이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는 이렇게 살다가 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가리켜서 ‘불꽃 같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꽃 같은 삶이라 불리는 거룩한 삶은 인생;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헬스 클럽 같은 교회
요즘은 헬스 클럽에 다니는 것 같은 태도로 교회 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늘어갑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할 터이니 다른 삶의 부분에 교회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거처하는 집이나 다니는 직장의 연락처까지도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이것은 마치 대입학원에서 단과반을 수강하는 재수생들처럼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교회와 목회자의 예배 서비스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목회자가 교인들이 사업을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에 대하여 비결을 가르쳐줄 수는 없지만, 그 사업이 비신앙적이고, 운영 방식이 의롭지 못하다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책망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사업에 대하여는 잘 모르지만 그가 사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 주일에 한두 번씩 헬스 클럽에 가서 운동하고 돌아오면서 한 주간 내내 운동을 가르쳐준 그 선생이 생각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운동을 지도받고 배우는 그 이상의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 없이도 운동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그 클럽에 나갈 필요가 없으면 그런 관계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양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모든 삶은 목회자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조건
그는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선한 목자일 수 없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사람입니다. 그분을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에 붙잡혀서 피할 수 없는 소명으로 목양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몇 가지 인간적인 결점이나 흠이 있어도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 은혜에 붙잡힌 사람, 양떼들이 없이는 살아도 그리스도 없이는 못살 사람, 끝없이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하는 목자라면 그분은 좋은 목자일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목회자가 자기의 일에 열심 있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은사의 체험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하면 얼마나 돋보입니까? 설교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력도 뛰어나서, 온유해야 할 때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정확하게 알고 교인들을 인도한다면 그야말로 사자에 의하여 인도되는 사슴의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설득하는 화술이 뛰어나면 그의 주변에는 항상 뜻을 같이하여 헌신할 사람들이 진을 치게 마련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고독하게 결단하면서도 우울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생기발랄하며 유머 감각이 넘치는 목회자라면 공동체가 모이는 것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말씀 드립니다. 목회자가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양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선한 목자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양의 소명에 대하여 진지한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화와 고통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정리되지 못한 탐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를 위하여 이욕(利慾)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히지 못한 신앙생활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노예’ (a slave of christ)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인식한 결과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생각할 때에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부르셨고 자신들은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예’(servant)라는 말을 그 당시의 문맥에서 이해해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몸도, 자신들의 자녀는 물론 아내도 자신들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일해서 얻은 결과도 주인의 소득이었고, 그들의 생사 여탈권은 오직 주인에게 속하였습니다.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인의 은혜에서 비롯될 뿐인 인생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러한 노예 관계에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목양을 위하여 자신을 모두 불태워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목양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노예처럼 살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잡힌 사람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는 이것입니다. 목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는 교인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그리스도와의 장엄한 만남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양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소명에 붙잡힌 사람, 피하려고 애를 써도 그리스도 때문에 목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숙명적으로 붙들린 사람, 그래서 목회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인생의 보람과 기쁨을 찾을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형제들과 같이 연약한 지체 중 한 사람이면서도 그들을 목양하도록 부름받는 목회자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양떼들의 목자가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고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것이 소명의 심장부에 있는 자기 인식입니다.
2 목회, 그 영원한 가슴앓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3).
별 사람 다 부르셔서
저는 종종 목회의 길에 들어선 동역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일에 종사하였는지를 알게 될 때 너무나 흥미롭고 신비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회사원이었으며, 또 어떤 이는 고리대금업자이기도 했고, 화류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만납니다.
한 교회가 서는 원리를 보십시오. 교회를 세우기 전 하나님께서는 먼저 목회자를 세우십니다. 그들은 모두 다양하고 평범한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입니다. 할 일이 없이 지내다가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에 열심히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복음 전도자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유명한 야구 선수였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는 제화 수선공이었습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는 술집의 웨이터였으며 찰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 Finney)는 부르심을 받기 전 법률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서울 근교의 한적한 마을의 우체국장이었습니다.
특별한 부르심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이것은 목자의 직무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의 양떼들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술과 기교 혹은 경험 습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떼들을 돌보는 목자의 직분은 소명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 문을 들어갑니다. 그 문을 들어갈 때에 문지기는 그 문을 열어줍니다. 문지기가 그 문을 열어주고서야 비로서 목자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서 그는 양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만 그 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양들도 그 문을 통과하여 우리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성도도 목회자도 모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에 붙들려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평범한 진리는 우리의 고통스러운 목양의 현장에 한 줄기 밝은 빛을 던져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목회 현장에서의 목자와 양떼들의 관계입니다.
가장 나쁜 목회 철학
어느 교회에서 부교역자들을 향하여 진지하게 충고하던 연로한 목회자의 다음과 같은 훈계는 조국 교회가 얼마나 잘못된 토대 위에 목양의 사역을 세우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목회는 인간 관계입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는 목회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인간관계를 잘 해야만 목회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의 표현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신학적인 결함을 가진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목회에 있어서 가장 나쁜 것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기초로 맺어진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거룩한 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가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맺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목양의 형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교회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그런 끈끈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교회의 형태가 왜 나쁠까요?
청교도로서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인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은 그의 대표적인 고전「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 속에서 참된 신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앞에서 상한 마음, 깨어진 심령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필요로 하고 자신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아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대상28:9). 그릇된 자기 만족이 있는 곳에는 거룩도 없고 경건도 없으며 애끓는 기도도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끈끈한 인간관계는 바로 교회가 그릇된 자기 만족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대하여 목마르기보다는 인간관계에 만족하는 교회가 되게 합니다.
우정 충만(?)한 교회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목마름이 없고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없는 신자들이 자신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진지한 목양을 기뻐할 리가 없습니다. 인척 관계나 목회자의 인간적인 친분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교회가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목회자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목양을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신령한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대한 갈망이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대치된다면, 그로 인해 즐거운 교회 생활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교인들을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값진 고뇌와 신령한 결단으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주일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공허함을 맛본 적은 없습니까? 오랜만에 교회에서 보고 싶던 얼굴들과 만나 함께한 즐거운 시간들이 감사하면서도 무엇인가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허(虛)함을 느껴 보신 적은 없습니까? 함께 어울려 있을 때는 무엇이 되어가는 것 같은 데 혼자 있을 때는 자신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껴 본 적은 없습니까?
이 모두가 인간의 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정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로써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령한 은혜 없이 단지 충만한 우정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교 단체를 설립하는 정신이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정신은 아닙니다. 이러한 목양지에서는 목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는 우정을 토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목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이러한 세속적인 풍조에 의해서 유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양을 받지 않으려는 교인들의 태도나, 목양은 없이 교인 관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목회 현실은 이러한 풍조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교인들에게 성처받은 목회자와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양떼들 사이에서 목양의 관계가 사라져갈 때, 박수칠 자는 마귀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 중 하나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너른 강의실에서 학습을 통하여 습득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신앙과 거룩한 영성은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전수됩니다.
무엇을 믿어야 될지를 보여주는 목회자의 진리에 대한 불타는 확신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삶의 분투하는 모본을 통하여 신앙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회자와 그를 신뢰하는 영적인 가족 관계, 혹은 도제 관계와 같은 인격적인 연합을 통하여 진리대로 사는 거룩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제자훈련이나 멘토링(mentoring)에 대한 향수도 이같은 목양의 관계가 사라져가는 교회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음성을 듣나니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말하기를 “문지기가 그를 위해서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도 그리스도께로 말미암고 목자도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한 목양의 관계 속에서 엿보게 되는 광경은 목자는 말하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쳐주시는 ‘듣는다’라는 말씀은 단지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양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들을 다소 손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본문은 우리의 문화가 아니라, 약 삼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문맥(Palestinian context)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란과 이라크 같은 중동 지방에서 통용되는 가장 상스러운 욕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뜻밖에도 “양 같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천박하고 치욕적인 욕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으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양이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선입견일 따름입니다. 덩치가 큰 양은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앞발을 뻗고 있으면 좀처럼 끌고 가기 어려운 고집스러운 짐승 중의 하나닙니다.
혼자 살 수 없는 짐승
더욱이 양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력이 매우 나쁘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분명하게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은 2미터에서 약 3미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짐승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짐승 중에 가장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로 양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약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양이라는 짐승은 이빨도 튼튼하지 못합니다. 표범이나 사자처럼 자기의 적을 물어뜯을 수 있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염소처럼 적수를 받아 넘어뜨릴 날카로운 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치타처럼 빠른 다리나, 곰같이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숲 속의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입니다.
결국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그 돌봄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야 할 존재가 바로 양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양떼들이 보호받는 길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과한 양과 목자 사이에는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자기들만의 교감이 있습니다. 목양의 관계는 먼저 이처럼 ‘말씀을 전하고 듣는 관계’를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아쉬운 간증
어느 지방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내려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 주 전에 발행된 그 교회의 신문에 실린 어느 교인의 간증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스스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교회의 지체였습니다.
그의 간증 속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기쁘고 기도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설교는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지만 그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그때에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회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다고 주장하는 간증자의 말을 굳이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화가 그의 신앙생활을 견고히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아니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 없이 흘린 눈물이 그의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위에 격렬한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혔다가 곧 식어버리고 구태의연한 옛 생활로 돌아가버리는 교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는 감정적인 체험이나 느낌만을 가지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이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으로 충만한 빌립보 교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9-11).
보십시오. 참된 신앙은 열정이나 체험 이상의 무엇입니다. 그것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거룩하고 분투하는 삶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고함을 위해서는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께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양의 관계는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통로입니다.
신앙과 인격적 승복
예수님께서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은 군집(群集)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목양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던 우리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찬송하는 자녀가 되도록 여기까지 이끄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몰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앞서 인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무릎꿇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다리를 발로 차거나 경배하기 싫다는 이들의 머리채를 휘감아 땅바닥에 처박으심으로 경배받지는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강요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양의 관계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필수적이지만 누가 그 관계를 강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신앙에 열심 있는 부모들이 패역한 자식들을 인하여 고통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러한 자녀들의 잘못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신앙을 몽둥이로 창조해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들이 먼저 자신과의 사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말대로 움직이지만 장성할수록 강요보다는 인격적인 설복에 의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적인 승복의 과정은 목양의 관계를 세워감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회자의 고뇌
바로 여기에 목회자의 고뇌가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에 교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구타하는 목회자의 기사가 실려서 여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본인의 해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잘못 행하는 자녀들을 보며 매로 가르치는 것처럼, 목사도 어버이의 마음으로 교인들을 때려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권세와 육적인 권세를 혼동하는 것입니다(딤전5:1-2).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군대를 몰고 나타났어야 했고, 신약의 사도들은 칼을 차고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고귀한 소명을 받아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세상으로 나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때릴 것이며 박해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때리면 그는 맞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핍박하면 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진리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무장하지 않은 채 보냄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승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패역한 반응,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난은 모두 목회자의 몫입니다.
야생(?)으로 돌아가는 양들
그러나 오늘날 조국 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너무나 극단적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하나님의 자주라도 받을 것처럼 마치 교주처럼 떠받들며 사람에게 예속된 채로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목양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자기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배우고 이런 책 저런 책 주워 읽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삶은 보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목양의 관계에서 오는 거룩한 감화력과 신령한 은혜는 점점 희박해지고 차가운 교회의 제도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니고 죽어 있다고 해서 모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암세포가 항암 물질을 내고 항암 식품에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선한 목자의 목양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기를 힘쓰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목자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그런 목자가 되도록 변화시켜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를 여러분의 목양지에 보내신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를 부탁하십시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양떼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시고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스런 목양의 질서
또 하나의 교훈을 앞서가는 목자와 양의 그림을 통하여 배웁니다. 그것은 질서입니다. 양들은 목자에 의하여 우리 밖으로 보냄을 받았지만 목자가 앞서서 인도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습니다. 목자가 사랑하는 양떼들 앞으로 가서 음성을 발하여 인도할 때까지 양들은 동요하지 않습니다. 목동이 인도하면 양들은 비로소 고요히 그의 뒤를 따라갑니다. 이 그림이야말로 목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은 결코 두려움과 공포로 뒤범벅된 강요받은 질서가 아닙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는 양떼들과 목자를 경험하고 그에게 인격적으로 승복한 양떼들의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수천 마리의 양떼들이 목자를 따라 넓은 풀밭을 따라가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양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염원하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는 용감한 목자와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양떼들이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운 그림이야말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고 싶어하셨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곳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억압이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질서가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목회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마다 목양의 질서 속에서 고통을 받기보다는 행복을 누립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 질서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추종을 삼가라
좋은 목양의 관계는 교인들이 우맹과 같은 상태에서 맹목적인 복종으로 목회자를 따를 각오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감화를 받는 인격적인 반응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순종의 질서는 그 권위의 기초가 결코 목회자 자신의 인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르침과 순종의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는 철저하게 그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단지 목회자의 말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가르침이라는 성경의 권위 때문에 순종하는 질서이어야 합니다.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를 구별하는 중요한 시금석 가운데 하나는 변화되지 않은 영혼들을 향한 가슴 저미는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참목자와 삯꾼 목자가 결정된다고 말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커다란 교회의 건물이나 주일에 운집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숫자가 아닙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영혼들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영혼의 진정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풍성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무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당연히 목양의 관계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라오지만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된 참된 목자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의 두 가지 어려움
신앙생활의 대부분의 어려움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무지와 불순종 때문입니다. 첫째로 무지는 저질러서는 안 될 악들을 담대히 행하게 하고 그 양심에 면허장을 줍니다. 그래서 무지는 거의 악입니다. 또 하나는 불순종입니다. 이전에 패역한 성품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불신앙의 본성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거스르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선생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단을 불문하고 100명의 신자들을 표본 추출해서 앙케이트를 냈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정문을 나오는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방금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100명 중 95명이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돌멩이와 깡통들의 예배입니다. 본문도 기억 못하는 사람들이 설교 내용을 귀담아 들었을 리 없고 무얼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며 일주일을 살 리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적인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는 요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조용히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목회자에게는 잘 가르치는 것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이고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잘 듣는 것이 가장 지키기 어려운 의무입니다. 어린아이같이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이야기 떠드는 것에만 관심이 많고 조용히 듣는 것은 도무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변화 받을 때가 되면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이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떠벌리고 떠들고 요란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생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매이지 않는 목양
자신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이어가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때 비록 목회자가 구체적으로 자기를 칭찬해주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신앙과 삶이 목회자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니 못할 때에는 자신의 모습이 목회자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런 저런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교인들은 목회자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엇을 통해서 기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목양의 관계에서 맛보는 경험들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은 이처럼 영적 변화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목자의 심정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을까요?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에게 심겨지고 나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할 때에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불타오르는 그 무엇이 전수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해하게 됩니다. 목양의 관계가 단지 차가운 이해관계로 얽힌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기계적인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신자를 관리하는 관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힌 목회자를 통하여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한 영적인 변화가 가능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변화된 양떼들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목양의 관계가 됩니다.
경박한 시대의 거룩한 고민
오늘날에는 모든 부분에서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박하고 가벼운 신앙의 태도들이 진지하고 거룩한 고민을 모두 몰아내고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기 보다는 현실과 타협하고,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복종하며 거룩한 삶을 이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악한 교인들의 본성이, 그리스도를 앎에 있어 천박한 목회자들의 지식과 손잡을 때, 그 목양지는 황폐하게 됩니다. 거룩한 은혜보다는 사사로운 인간의 정이 지배하고,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는 결단보다는 세상에서 환영을 받는 기쁨을 추구하게 됩니다.
용기와 결단, 분투와 희생 대신 타협과 안일, 나태와 무질서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들 안에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뜨거울 수 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쫓아 순종하는 삶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교회의 변화에 거침돌이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거침돌이 교회 자신이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묻은 복음을 통하여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영혼의 변화없이는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로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조국 교회에 언제나 정직한 복음이 능력있게 선포되고 그 진리를 통해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는 교인들이 가득하도록…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4 진리의 힘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7-10).
현대 목양 현장의 위기
오늘날 조국 교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는 진실한 회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새롭게 되어 자라가기 위해서는 영혼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목양의 현장에 이러한 새생명의 감격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커다란 영적 위기입니다. 형식적인 신자들이 늘어나고, 교인이기는 하면서도 목회자에게는 물론 주님으로부터도 목양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세속적인 신자들이 교회에 운집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바입니다.
그의 정신을 잇는 목회자
우리에게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과 사역을 잇는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밑에서 부지런히 가르침을 받고 종교의 도리를 배웠으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과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시대에 가장 생명이 없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 상황은 예수님의 시대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무지가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으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에 와서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죽은 자나 다름없는 영혼을 살리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땅에 생명의 회복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할 십자가의 피에 젖은 외침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아, 누가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영혼을 위하여 주님의 음성과 마음을 전해줄 것입니까
교회의 영광은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데 있습니다. 병들었던 영혼들이 고침을 받는 데에 교회의 영광은 존재합니다. 건강한 목양의 관계 없이는 이런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생명 잃은 사람들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기쁜 복음의 소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를 모르는 가운데 죽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본능이 삶을 지배하고 눈에 보이는 이익에 대한 탐심이 그들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영혼을 내어주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하고 살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배교와 방불한 냉담한 신앙생활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도 없이 생활하고 있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이지 그들의 영혼은 아직까지도 죽음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그렇게 형식적인 교회 생활을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한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은 결코 이런 식의 생명 없는 종교생활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와서 스스로 구원자라고 자처하였던 거짓 목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하셨습니다(마9:36). 이것이 바로 참목자 안에서 볼 수 있는 영혼을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거룩한 슬픔으로 찢어지는 마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한 목자들에게는 언제나 양떼를 바라볼 때마다 거룩한 슬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영혼,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서 죄를 벗삼아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바라볼 때에 아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너무나 강렬하고 실재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다 드려서라도 그 죽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에 무엇인가 기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가 참 그리스도의 목자라면 그에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곤한 삶 무지한 삶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르침의 중요성에 대하여 쓴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글 가운데 「성도냐 짐승이냐」(a Saint or Brute?)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짐승 같은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시73:22). 이처럼 참된 복음 진리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곳에는 언제나 비복음적인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진리를 아는 지식이 심각하게 결핍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십시오. 기독교의 옷은 입었지만 옛 삶의 내용은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외관적인 삶은 복음을 따라 사는 것 같지만, 그 종교적인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바뀌지 않은 그의 사랑의 대상과 가치 체계들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건재합니다. 그런 식의 삶이 그에게 행복을 줄 리가 없습니다. 그 속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좌절이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운즈(E. M. Bounds)의 다음 지적은 조국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모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고언(苦言)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성경을 읽는 일과 은밀히 기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도움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최대의 기쁨을 누리게 하며, 영원한 평강의 길에 견고히 서게 하는 데 있어서도 이 두 가지 의무가 필수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 의무들을 등한시할 때에 우리의 영혼은 굶주리게 되고 기쁨을 잃게 되며 마음의 평안이 사라지고 심령은 메마르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은 말라죽고 맙니다. 이는 배교를 위한 고속도로를 닦는 것이며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지배하는 목양의 관계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사는 동물적인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신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래서 가슴을 찢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이는 우리의 심령을 설득하고 이끌고 교정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의 심령과 결합하도록 다정하고 달콤하게 역사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의 양떼들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과 목양의 관계를 맺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우리의 이러한 사악한 본성을 억제하시고 거룩한 삶을 촉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완고한 불순종과 나태한 교만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목양의 관계를 경륜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없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빛보다는 무지의 어둠 속에 자기를 방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무지한 삶을 버리지 않는 것은 죄악된 삶이 주는 즐거움과 그것을 버릴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관계는 진리가 지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양의 관계에서 경험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풍성한 진리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가 풍성한 진리의 사람이 아니면 신령한 목양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목양이 없는 한 신령한 교회도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목양의 관계에서 진리를 배움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하지 않아도 목양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처럼 진리를 하찮게 여기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마련입니다.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는 교인이 100명 중 3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목회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렇게 진리를 떠나서 혹은 무관심한 가운데 어둠 속에서 사는 삶을 혐오하고 미워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 자신이 진리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섬김을 통해 성도들을 풍성한 삶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먼저 그가 목양의 관계를 통해 양떼들을 생명과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풍성한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의 영혼 안에 넘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사모하는 신령한 기쁨에 잠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불꽃처럼 살아서 자신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 진리를 알지 못해 헛된 생애를 보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와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하였던 태만함과 어둠 가운데 살았던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어둠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 가운데로 건져내려 하지 않았던 목회자들도 그들의 망가진 삶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풍성한 삶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먼저 순수한 진리를 소유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과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 목회자와의 만남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목양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얄팍한 잔재주와 애매모호하도록 현실과 타협한 왜곡된 복음이 아니라 장엄함과 능력이 깃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조국 교회에 불붙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힘의 사람들’(Men of Might)이 필요합니다. 죄인을 향하여 혹은 세상을 대하여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하게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를 따라 외칠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머뭇거림이나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입발린 소리나 겉치레 말로 진리를 대신하는 강단이 있는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게 해야 할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재기발랄한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기능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재편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조국 교회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위기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심각할 정도로 쇠퇴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진리가 그들의 영혼 깊은 곳을 찢고, 가르고, 부수고 도려내며 싸매도록 만들어주어야겠다는 거룩한 결의가 보이지 않는 태만한 목회자와,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았어도 동물처럼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하찮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미숙한 사람들이 강단에 뛰어 올라가고, 그런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바보 같은 교인들이 역사에 남겨줄 것은 짐승 같은 후손들과 돼지우리 같은 교화밖에는 없습니다.
5 거룩한 환희를 아십니까?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하).
하나님을 포기합니까?
조국 교회 안에는 인생의 꿈을 체념해버린 임종 직전에 놓인 노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풍성한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체념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참된 사랑을 모른 채 빛 칧은 등불처럼 맛을 상실한 소금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핏기 없는 얼굴들이 떠올라 제 마음에 눈물 흘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세상은 어두워 섬겨야 할 일은 많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이처럼 목메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자가 없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파리한 삶을 살아갈까요? 우리의 구원은 왜 이리도 초라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목양의 축복을 되찾는 일 없이는 우리가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인도하여 깨닫게 하시고 풍성히 살게 하시려고 목회자를 부르시고 그와 목양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풍성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풍성한 삶이 낯설게 느껴지는 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이 낯익습니다.
희년의 세 가지 환희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되면 그 후에 희년이 옵니다. 이 희년에는 이스라엘 사회를 다른 나라와 구별하게 해주는 커다란 세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두 해의 안식, 노예 해방, 땅의 회복입니다. 49년째도 안식년이기 때문에 이태 동안 안식을 누리게 될 뿐 아니라, 노예로 팔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값없이 풀려납니다. 또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들의 기업인 땅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되찾게 됩니다. 희년에는 돈이 없어도 땅이 옛 주인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이때 불공평한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땅은 50년 만에 원주인에게 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땅은 전 주인이 취득한 지 3년밖에 안 되었는데 희년이 돌아온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는 그 앞의 47년을 돈으로 계산하여주고 자기 토지를 되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해입니다.
신분이 바뀌고 토지를 무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토지를 중심으로 묶였던 상하관계가 세습으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종살이로 팔려갔던 가족이 사랑하는 가정으로 돌아올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리저리 뿔뿔이 찢겨 머슴살이, 더부살이를 떠났던 이산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잃어버렸던 자기의 농토에서 다시 집 짓고 기경하게 될 때 그들의 감격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풍성한 삶은 풍성한 기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감격에 벅찬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므로 이런 식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런 놀라운 은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누리게 하고 싶었던 풍성한 삶입니다. 예수를 좇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견딜 수 없이 즐거운 삶, 그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즐거움 때문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삶이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여러분은 목양의 감격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령한 목회자를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아라고 그 때문에 거룩한 기쁨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충만한 교회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까?
불꽃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그 이상의 예외적인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불꽃처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바로 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역사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은둔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복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생명의 원리를 좇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드러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진리와 은혜 없이는 불꽃 같은 삶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망가진 것은 고치고 왜곡된 것은 바로잡으며 다시 한번 교회가 신령한 목회자들에 의하여 영도되고, 진실로 풍성한 삶을 갈망하는 상하고 깨뜨려진 마음으로 가득한 성도들이 교회당을 메우게 되는 그때를 고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길 갈망해야 합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목양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부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 속에서 맛보는 안일을 미워하고 평탄한 삶을 혐오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이 아니라면 그 모두가 세상에 안주하는 삶일 뿐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모르는 때에, 풍성한 삻이 무엇인지를 모를 때에는 짐승처럼 살아갔습니다. 목양을 거부하고 살았을 때에는 어두움을 벗삼으며 죄악의 동무가 되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둠의 일들을 벗어버리고 진리의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할 때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삶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길을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나 그럴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은혜의 샘물을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은 목회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여러분들을 그곳으로 가장 잘 인도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6 목회자,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10:11-12).
겸손하게 되는 길
깊은 무감각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잘못된 자기 만족입니다. 그릇된 자기 만족은 무기력한 영적인 삶을 낳고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더 이상 신앙의 힘으로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듭된 패배가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실패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삶이 바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곤고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 이상의 어떤 삶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의 비참함에 대하여 설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에 대해 설교하여야 합니다.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운명처럼 생각하고 실패에 익숙한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풍성한 삶에 대한 약속을 보여주어 그의 삶을 갈망하고 사모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우리의 삶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장(場)입니다. 그 장 없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삶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은 연속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이 황폐한 목양의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줍니다. 교회가 영혼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진리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겸손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고 이끌어가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마지막 소망은 좋은 제도와 기발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목양의 관계는 제도와 기능만 존재하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영혼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게 되면 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가능해지고 이러한 인격적인 승복은 주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해줍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영적인 상태와 영향은 늘 점검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결핍되었다고 생각될 때마다 교회는 그 원인을 찾아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을 회개하며 다시금 신령한 진리와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염원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교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 목양의 관계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참된 영성(靈性)의 표징 중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는 상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교인들에게는 목양의 도움을 거절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와의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사모하는 감정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의 감정에 다름이 아닙니다.
실패를 아멘으로?
그러므로 우리의 풍성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를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적응이 된 사람, 실패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풍성한 삶을 향한 어떠한 도전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일단 풍성한 삶이라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삶에 대한 답답함과 가난한 현실로 고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역하사면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풍성한 삶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기도 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풍성한 진리와 풍성한 은혜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려고도 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못 견디게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무엇을 하지 못하는 것은 모험심과 도전과 용기가 부족해서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난 후에 자기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안락한 삶이나 무지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단지 희망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교회의 양떼들을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다스려나가십니다. 그 목자를 통해 풍성한 진리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들에게 공급될 때 그 목양지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양떼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목자는 양을 위해 먹일 꼴을 준비하고 마실 물을 예비하지만 양은 목자를 위해 무엇을 합니까? 양이 목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신뢰하고 뒤따르는 것처럼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그 뒤를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은 목양의 관계에서 양들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맹종이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신앙 속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체험한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주님은 완벽하셨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 이외에는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주위에는 신실한 믿음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자를 도와 성도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은 목회자의 마음을 이어받아 성도를 섬길 수 있는 지혜로운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진리가 아닌 다른 문제 때문에 목양의 관계를 스스로 파괴하는 것입니다. 행정적인 일로 목회자와 충돌을 일으키거나 목양의 인격적 관계를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보냄을 받는 것은 교회를 짓거나 교육관을 짓거나 땅을 사고 버스를 구입하는 것으로 성도 섬기는 일을 삼으라는 목적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행정에 있어 커다란 원칙과 계획을 세워놓고 그 틀 안에서 일꾼들을 세워 자발적으로 일하게 하고 결정적인 일 외에는 세세한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목양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 행정적인 문제로 목양의 관계가 파괴된 교회는 행정적인 문제 이전에 영적인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고, 목회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기 영혼의 목자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행정적인 문제로 목양의 관계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모두 교회의 주님 되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우선순위의 착각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목회자가 교인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깊이 경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취감을 목양의 관계 속에서 누리고 있다면, 본질적이지도 않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목양의 관계를 허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역사할수록 행정은 점점 더 덜 중요하게 되고 이러한 영혼 변화의 역사가 사라질수록 이런 문제들은 더 날카로운 대립을 만들어냅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목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거절하고 풍성한 은혜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보면 이전에 당연한 것처럼 살았던 옛 삶이 얼마나 완고하고 지독하게 고집스러운 죄악된 삶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속에 목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승복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한없이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마음의 정함도 없이 신앙과 세상을 번갈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인생을 가장 완전하게 인도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불신앙을 타파하고 그리스도께 인격적으로 위탁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이 항상 선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었기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다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뢰한 사람들은 결코 그분께로부터 배신당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이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수중에 있는 내 인생을 향한 계획표야말로 완전히 선한 계획이고, 그분의 작정이야말로 가장 선한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행복한 포로
저는 이십 세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은 별로 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내 인생이 이제는 내 계획표대로 진행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계획표에 스스로 빽빽이 예정표를 써넣어도 알 수 없는 손이 나타나서 어느 날 하나씩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인생 가운데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작정해놓은 계획표 가운데 정답은 하나도 없이 전부 틀린 것뿐이고, 그렇게 내 인생의 계획표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마구 줄을 그어버리고 당신이 원하는 스케줄을 써 놓으시는데 그것은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계획 하나가 죽죽 그어질 때마다 제 가슴은 마치 예리한 칼로 그어짐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내 인생의 계획표를 휴지로 만들어버리고 당신의 마음대로 새로 쓰시는 그분과 관계를 끊으면 될텐데, 어린 믿음에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여러 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실수는 예수님께 덜미잡힌 것이다.”
그 후 몇 년의 세월 속에서 신앙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저는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살 수 없도록 나의 삶에 오셔서 나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힌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포로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여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저만이 아는 사랑의 줄에 매여 설교자가 되었고, 신학교 선생이 되었고, 경건 서적을 쓰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저를 보시면서 만족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만족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말씀을 깨닫고 그의 선한 목자 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러한 인격적 승복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없이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라는 말이 주는 또 하나의 도전입니다.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든든히 붙들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목양의 관계 속에서 살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인격적인 위탁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방편입니다.
목회자는 누구인가?
목회자의 최고의 가치는 엄밀히 말해서 양떼들이 아닙니다. 목회 사역의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선교와 목회 사역에 일생을 바쳤던 사도 바울도 자신의 비전(vision)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0-12).
목회 사역은 양떼들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을 불러 양떼들 가운데로 인도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목회자도 사라지고 양떼들과도 헤어질 것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자신의 교인들과 관계를 잘 유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죽음과 함께 나뉘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지고 있던 그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최고의 가치는 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에게로부터 목양의 능력과 양떼들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영적인 원동력을 쉼없이 공급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목숨을 버려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자신의 목회 사역의 원동력이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이름 석자가 그리움이 되었던 것처럼 상처받고 연약한 교인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 목메이는 그리움과 사무치는 소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회지에는 언제나 즐겁고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와 같은 교인들도 있지만 악마의 심부름꾼 같은 사람들도 만납니다.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서는 목양의 길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아니, 박탈당했다기보다는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세상의 영광과 안일한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고 싶은 곳을 아무 때에나 다닐 수 없도록, 자기 맘대로 사는 삶을 포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교인들을 위하여 있고 그의 모든 꿈과 소망도 자신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의 영혼이 잘되고 그의 인생이 풍성한 삶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변화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향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하고 한 연약한 지체가 실족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아파하며, 어찌하든지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목회자의 삶입니다. 그의 꿈은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좋은 대접을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영광은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고, 그의 면류관은 자신의 복음사역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되는 영혼들과 목회의 섬김을 통하여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 유무명의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고 또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교회는 신비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양의 관계도 말할 수 없이 신비합니다. 커다란 시련과 환란 속에서 인생의 갈길을 잃고 고생하고 유리하는 양떼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여 거역할 수 없는 신적인 소명을 느끼는 목회자와 이루는 목양의 관계는 숙명적이고 의미 깊은 것입니다.
7 아낌없이 주는 목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2-15).
양과 목자의 풍성한 관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의 심령이 거룩한 은혜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목자로 다가오셔서 돌보아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잃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마다 우리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찾아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품을 떠나서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기 시작하고 영혼에는 어둔 그늘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지성의 혼돈이 일어나고 모든 사고와 생각이 균형을 잃게 됩니다. 염려와 근심은 자라고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풍성한 삶은 질식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매우 섬세하므로 작은 죄와 불결에도 풍성한 삶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버섯처럼 자란 모든 죄악된 생각과 방종한 행동들은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만나 패역한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는데 사람들은 생명 대신 사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사람들은 궁핍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해도 삶으로는 그리스도와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영적으로 목자 잃은 양의 삶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토록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몸부림 치며 갈망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좀더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주님과 자신의 있는 목양의 영적인 관계가 풍성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신 생명과 풍성한 삶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양 사역에 열매가 없다면
성경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일에 목숨을 버린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목양을 위해 소명받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승복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위해 헌신할 때 말할 수 없이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양떼들의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살아가는 삶이 기쁘지 않다면 그 소명은 거짓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를 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축복, 주위의 여건들에 따라 그 열매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목양의 사역에 열매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부르심이 진실한지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신 일 없이도 얼마든지 목양의 사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는데 스스로 부름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열매가 없거나 현저하게 적다면 이 역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부끄러운 고백
제가 목사가 되기 전,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학업을 계속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돌덩이 같은 학생들은 도무지 변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사역은 점점 힘겨워졌고 아이들은 하나씩 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최악의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제가 부임했을 때 맡았던 숫자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그 주일에 설교하러 찾아오신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이게 웬일이니? 여기 가득하던 너희 친구들은 다 어디 갔니?”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인생을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매주일 찢어지는 것 같은 가슴을 안고 교회당을 찾고 또 떠나지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은 대화를 해도 접촉점이 없었습니다. 탈진 가운데 무기력해져 버린 교사들의 사기 잃은 모습은 더더욱 저를 절망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떠나야지.” 건강도 자신이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섬기는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닌데 도저히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밖에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저는 울면서 이제 이 고통스러운 사역지를 떠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짧고 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거기 남아서 양떼를 지키라.”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깊은 기도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똑같은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 다음날 응답해주셨습니다. “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라.” 분명히 주님께서 나의 고통스러운 형편을 모르실 리가 없는데 거기서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눈만 감으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단순히 나 자신이 받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한없이 무능한 자신을 돌아보며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때에는 분수를 모르고, 글을 쓸 때에는 교만해지지만 일단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진흙 바닥에 구르는 것처럼 겸비해졌습니다.
저는 그 사역을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도 없었고, 변화되 않은 영혼들은 하나씩 교회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수 없이 그런 고통 가운데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한편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공동체를 사랑하는 몇 명의 교사들을 설득해서 사십일 동안 연쇄적으로 금식기도를 하며 매일 저녁 교회에 들러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밤마다 말씀을 준비해 가지고는 교회당으로 가서 강단 앞에서 밤새 기도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때 일입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목양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한없이 겸비해졌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면서 그때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작정한 사십일이 지나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변화받기 시작하는 영혼들도 눈에 띄게 늘어났고 많은 영혼들이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작정한 기도가 끝나던 그날 다시 교회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계단에 앉아 예배드리는 영혼들과 함께 우리 모두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 커다란 위로와 확신이 왔습니다. “나는 부족해도 하나님이 여기에 나를 세우셨구나.” 지금도 어린 청소년들을 훌륭히 목회하는 사역자들을 대할 때 존경스러운 마음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자만하십니까?
저는 목회 사역에 들어선 동역자들 중에 병들어가고 있는 목양지를 섬기면서도 하늘을 찌를 듯한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가 목양하는 교인들 앞에 설교하기 위해 섰을 때, 설교자인 저의 마음에는 그들의 영혼이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할 정도로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느껴지는데 목회자들은 그 작고 병든 목양지에 대해 뻐기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큰 교회의 목회자가 그 목회적인 업적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으스대는 것만큼이나 꼴불견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목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목회도 없고 목양지도 없다는 절박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양은 교만한 우리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고 온몸을 다 바쳐 부스러지듯이 주를 위해 살면서도 자랑할 것이 없게 만들어줍니다.
목회자가 스스로 꽤 잘 난 것 같고, 누구든지 어떻게 목회하여야 하는지 자기에게 와서 한 수씩 배워가기 전에는 성공 못할 것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때마다, 그들은 눈을 열어 교회 안에서 유리하고 있는 상처입은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병들어 있는 목장을 보이시고 메마른 풀밭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때 가슴을 에이는 것같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양의 현장은 일반적으로 목회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피폐해가는 목장의 상황을 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목회자의 영적 황폐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신앙적으로 엉망인 교회에서 목회자 내면의 세계만 홀로 부흥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때마다 진실한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 매달릴 것입니다. 자신을 불러주신 것이 확실한데 열매가 빈약하다면, 거기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려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영적인 변화는 목양의 현장을 변화시킵니다. 목회자의 영혼이 살면 교회는 모두 살고, 반대로 목회자의 심령이 죄와 어두움과 무기력에 빠지면 목회의 현장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를 이루어가기를 원하면 교인들을 향하여 양떼로서 기대하는 삶 이상의 양 된 삶을 목회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목양의 현장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한 교회의 신앙의 수준은 목회자가 꿈꾸는 수준을 밑돌 수는 있어도,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목양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있지만, 이변은 없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시렵니까?
그러므로 그 사람이 교인이든 목회자이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면 목양의 관계에서도 마음이 떠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리던 영적 삶도 당연히 병들게 됩니다.
즉,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얼마나 풍성한 교제를 누리며 그와 연합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교인들이 목회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은혜를 풍성히 맛보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양에 자신을 바치다가 단지 자신의 영적 침체나 어려운 환경 때문에 목양지를 쉽게 떠나는 것은 영적인 간음과 다름없이 악한 것입니다. 그의 심령은 곤고할 것이며, 양떼를 버린 가책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고난의 현장을 외면한 불충한 삶에 대하여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날을 영혼의 어둠 속에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범죄는 주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경험되는 영적인 고갈입니다.
흔히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목회지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러한 영적 고갈이, 헌신을 요구하는 목양의 현장과 무능한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고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갈 현상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풍성한 은혜와 생명의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붙들고 씨름하여야 합니다. 그분께로부터 오는 다함이 없는 은혜와 풍성함을 누릴 수 있도록 갈망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능히 목양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과 목회 사역에서 오는 탈진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는 길은
목양의 관계는 그리스도 때문에 시작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일신상의 이유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또는 인내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목회지를 떠난 많은 동역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목회지를 떠난 다음에 그들이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과 영적인 무기력은 목회 현장에서 당하던 갈등과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목양을 위해 세워주신 자리에서 고난을 받기를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잠시 맛보는 고난과 박해 때문에 목양의 관계를 저버릴 수 없듯이 교인들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들은 끊임없이 말씀의 탐조등을 가지고 이런 오해와 무질서, 편견과 억지로 얼룩진 오늘날의 편의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의 숲속을 헤쳐 참다운 성경적인 목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가야 합니다.
목양의 관계와 열매
당신과의 관계를 방치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교인들과 황폐한 목장을 바라보면서도 가슴을 찢으며 슬퍼할 줄 모르는 교만으로 가득찬 목회자들이 있는 교회를 언제나 그런 식으로 축복해 주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무슨 의무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때문에 좋은 것이 되고, 우리의 방종한 삶과 부패한 마음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뜻밖의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더욱 거룩하고 영력 있는 은혜의 도구로 삼아주시기를 탄원하는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와,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의 돌 같은 마음을 뜨거운 제사장의 눈물과 선지자의 피로 녹일 수 있는 기도하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모두 함께 변화되지 아니하면 목양의 관계에도 변화가 없고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도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변할 리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무기력한 교회가 난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데 거침돌입니다.
바람과 갈망의 차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섬김은 자신도 바꿔놓을 수 없고 양떼들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 속에서 목회자의 덕목은 목숨을 버리기까지 충성하는 것이고, 교인의 덕목은 마음을 다해 그를 위하여, 그와 함께, 그의 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것과 갈망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소원에 대해서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깨달은 것과 삶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심기워져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원천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형식적인 신자들과 허영에 빠진 목회자들은 바로 전자의 사람들입니다. 깨달았지만 그것이 삶과 결탁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목양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목자는 용사다
여기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 찬란한 가르침에 접하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악한 목자는 그 위태한 때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30장에 나오는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목양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그가 양을 치면서 얼마나 험한 고생을 하면서 지내왔는지를, 도망가는 자기를 붙잡은 현장에서 외삼촌에게 마구 털어놓고 있습니다. “또 외삼촌의 양떼로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스스로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38-40).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은 한가로운 목장에서 필요한 물과 꼴을 공급해주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양떼를 넘보고 탈취하는 악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생명을 거는 일도 마다할 수 없었습니다.
목자의 삶은 맹수와의 싸움으로 피 튀는 삶이고 수시로 악한 세력들의 도전을 받는 분투하는 삶에 자신을 바치도록 부름받은 삶입니다. 틀림없이 목회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가 만약 선한 목자라면 자신의 거룩한 목양의 사역을 모두 마친 후에는 피묻은 전투복과 악마와의 투쟁에서 이긴 영광스러운 전과(戰果)로써 자신의 충성스러웠던 목자로서의 삶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들이 지상에서 즐겨 입었던 옷은 존귀한 세마포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나 입을 옷이었고 이 땅에서 즐겨 입었던 옷은 남루한 전투복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모두 바친 목회자들이 흰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주님께 칭찬을 받을 때 말씀한 옷으로 한가한 목양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다 떨어진 내복 차림으로 한 구석에 서 있을 것입니다.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온 목회자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안일하게 섬긴 목회자들의 부끄러움은 뼈아픈 후회로 이어질 것입니다.
삯꾼은 불가능한 삶
삯꾼은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양떼를 해치는 악한 것들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겁하고 용기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목양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싸움은 육신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엡6:10). 따라서 선한 목자는 경건한 삶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떼를 사랑하는 선한 목자는 양들로 하여금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늘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은 양떼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며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능력으로 무장하고 말씀의 지식으로 칼을 갈아 거룩한 충성심에 붙들려 양들을 지킬 때에, 누구도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양들을 늑탈해갈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이길 것이며 자신의 양떼들을 보호하고야 말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이 길을 가리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부르심에 붙잡혀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양이 힘든 것을 인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르신 분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목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리시지 않는 한, 낙망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는 거룩한 능력에 사로잡혀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는 결코 약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목회자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치 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영혼들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나누어주는 진리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책망받아 마땅합니다. 견딜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목회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성실한 교회 생활 때문이고 건조하고 침체된 삶을 살면 목자가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핑계대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교회는 얼마나 커야 되나
한 교회에서 한 목회자가 목회할 수 있는 교인들의 수가 어느 정도일까?
건강한 목양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교인들이 충만한 생명과 풍성하고 거룩한 삶을 승리 가운데 이어가고 있다면 그 교회는 양적인 팽창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성장을 토대로 규모가 커지는 교회를 적당한 교역자를 세워 무조건 이백 명씩 편을 갈라 작은 교회로 기계적으로 나누라는 주장은 목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소인적인 발상입니다. 물론 싫다는 교인까지 끌어안고 교회의 덩치를 키우는 것은 목회자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양의 관계를 단지 숫자라는 잣대 하나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분활할 수 있다는 것은 교회의 영적 특성을 너무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규모가 작은 교회이고 교인들이 모두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교회라면 감사하며 그러한 관계를 즐거워하십시오. 목회자는 아마 여러분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며 여러분의 가족들의 근황까지 알고 있을 것입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는 한번 집회에 나가면 이삼만 명씩 모인 회중들에게 설교할 때도 있었습니다. 장시간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거기에 모인 회중들은 모두 윗필드가 자신만을 쳐다보며 설교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착각이었다기보다는 설교자의 영혼 안에 흐르고 있는 자신들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청중들이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설교 속에 선포되는 진리를 회중 속에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윗필드가 자신들의 신상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어떠한 목회자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자신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토막이 나옵니다. “어머니, 제가 집회를 마치고 나올 때 그 동네 사람들은 좌우에 늘어서서 마차를 타고 떠나는 저를 환송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찬송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 동네에서 저를 환송하기 위해서 늘어선 사람들의 길이가 1마일에 달했습니다.
마음으로 드러나는 소명
목회 사역에 소명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좋은 시금석 중 하나는 사람에 대한 마음입니다. 목회 사역에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는 사람 자체를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사람 그 자체가 신비하게 보이고, 타락한 죄인임에도 그 속에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 영혼을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을 갖게 됩니다.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선한 목자의 가장 중요한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채로 호소하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4). 그러므로 목회자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감격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지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감격적인 경험이 현재적으로 반복되어서 체험되는 신앙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녹는 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 고난은 있을지언정 무엇으로도 그들로 하여금 영혼을 위해 섬기기를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을 모두 드려 그 영혼이 생명과 구원을 누리기를 갈망할 것이며, 한 번의 섬김이 끝나고 나면 그 섬김을 위해 당했던 그 고난을 곧 잊고 다시 한 번 영혼들을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그 위기의 순간에조차도 낙담하시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때가 가까워지신 것을 알았을 때 그분이 하신 일은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13:1). 이러한 사랑으로 영혼을 섬기다가 죽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아낌없이 주련다
목양의 현장은 결코 아름답고 유쾌한 일들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있고 고통스러운 긴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희생이 있는 곳입니다. 목회자가 죽는 것만큼 교인들에게는 생명이 흐르고, 목회자가 낮아지는 것만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목회자들이 겸비해지는 것만큼 돌보는 어린 양떼들이 생명을 누리게 되고, 목회자들이 비참하도록 하나님만 바라며 매달리는 것만큼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한 공동체에서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그 직분은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에 서 있는 것만으로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자리가 비록 커다란 교회의 목회자의 자리이거나 이름 없는 작은 교회의 교사의 자리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삯꾼과 참된 목자를 구별짓는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10:15).
이제 여러분도 영혼을 위해 사십시오. 그리스도 때문에 부요해졌으니 이제는 영혼을 위해 가난해지는 길을 택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으니 여러분도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작은 영혼들을 위해 생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목양의 감격을 누린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8 바닷가에서 생긴 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10:16)
밤바다, 한 등대
실로 주님께 있어 이 양떼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형제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되고 지체의 연약함과 허물을 용납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때로 성도들이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느끼게 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태도를 고쳐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지고 그분을 찬송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변화가 없다면 그곳은 교회라기보다는 소금창고이며 조명기구 상회 같은 곳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소수라는 사실 때문에 쉽게 절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그 소수의 사람들이 어떤 질의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원리를 터득하고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산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언젠가 저는 깜깜한 밤에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다가 작은 섬의 항구에 도착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깜감한 밤바다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등대의 불빛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숲속에 집 몇 채 되지 않는 어촌 마을의 등불이 깜박거리고 있었습니다.
온 천지는 어둠으로 깜깜하며 하늘마저 어두워 별빛조차 사라진 밤 바다였습니다. 빛이라고는 오직 등대의 불빛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척의 배들이 그 불빛 하나를 의지하고 항로를 잡았으며 풍랑을 피해 안전한 포구를 향해 들어와 정박하였습니다.
한 줌의 누룩을 기대한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든지 빛의 자녀들보다는 어둠의 자녀들로 가득찬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외곬으로 오직 신앙 하나를 따라 살던 사람들이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한 소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룩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서 말의 가루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줌의 누룩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D.M. Lloyd Jones)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한 사람, 그가 곧 다수이다.”
이 세상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목양의 관계에서 상기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택하셨으나 아직 전하는 자가 없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죄악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우리의 이산가족입니다. 교회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말씀을 인하여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나 우리 밖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애정에 목메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마음
그들은 잃어버린 바 되었으므로 죽음과 방불한 삶을 살고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먼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그렇게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삶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들의 영혼이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목양 아래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주어, 그리스도 없이 잃어버린 바 된 자신의 처지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누리게 될 그 목양의 감격과 축복 사이에 존재하는 심각한 격차를 인해 마음 아파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양떼임을 알고 그분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전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 양의 울타리에 메이지 않고 그 밖으로까지 번져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에 멈추지 아니하고 미움과 다툼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통과 외로움을 운명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잃어버린 영혼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아직까지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영혼들을 향한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을 향한 마음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다면서…
로버트 맥체인(Robrt M. McCheyne)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결(聖潔)을 배우라. 당신이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도 그것에 달려 있다…. 만일 사탄이 당신을 욕심꾸러기 목사나 칭찬받기 좋아하는 교역자, 쾌락을 사랑하는 자, 좋은 음식을 탐하는 일꾼으로 바꾸었다면 그는 이미 당신의 교역을 망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목회자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떨어지게 됩니까? 목회자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식기 시작할 때에 그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의 사역은 거룩한 긴장을 상실하게 됩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죄인들에게 닥친 위험을 도외시한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왜 불쌍한 죄인들을 돕지 않는가? 당신은 구원받았으면서 구원받지 못한 다른 영혼들은 왜 염려하지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오히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활은 당신이 받은 은총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과 삶의 현장 속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지 않는가? 그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면서도 당신은 그들의 영혼이나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지내지는 않는가? 만약 그들의 집이 불에 타고 있다고 하면 당신은 달려가 그들을 도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혼이 지옥 불에 떨어질 걸 알면서도 그들을 어찌하여 돕지 않는가?“
냉담한 마음들이 모여서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냉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조국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없거나 앞으로도 전할 마음이 별로 없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전체의 80퍼센트나 된다는 보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복음 전파를 위한 관심이 사라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뜨거운 눈물을 생각나게 만들고, 그 마음에 감화를 받아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전도자들로 만드는 것은 목회자에게 달렸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사명은 목양에 관계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목메이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최상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설교는 한낱 앵무새의 흉내내기에 불과합니다.
깨어 있는 교회의 표징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깨어 있는 교회의 가장 뚜렷한 표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거리를 누비며 영혼들을 데려오는 교인들과, 그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깨끗하고 피묻은 복음을 정직하게 선포하는 목회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자녀들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애정을 나누어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우리 밖에 있는 양떼들을 향한 간절한 애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일임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고, 물러가 침륜에 빠진 사람들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굳게 닫힌 이웃집의 대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유리 방황하며 옛 삶으로 돌아가 고통하고 있는 죄에 더럽혀진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청교도인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순수하고 능력이 있는 복음이 선포되는 그곳에 인도받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을 깨닫게 하여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한지를 깨닫게 해줄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이 일에 있어서 너무나 냉담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상실될 때 교회에서 교인들을 돌보는 것은 보험회사 판매대리점이 고객들을 관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고,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사라진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것은 마치 빈민가 한복판에서 높은 담을 두른 집의 호화로운 파티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은혜인가?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령한 의무입니다.
지금은 비록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어두운 죄악 길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진노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들이 우리와 한 무리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무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잃어버린 바 된 채로 이 세상에서 상하고 찢기는 것은 교회의 태만 때문입니다. 우리의 태만 때문에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끊임없이 버림받았던 영혼들이 찾아오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감격에 빠지며 참회의 눈물과 감사의 고백이 그치지 않는 교회, 그래서 고통하던 영혼들이 주님 때문에 변화받는 교회가 되기를 열망하여야 합니다.
브레이너드의 영혼 사랑
18세기 뉴잉글랜드 땅에서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미개한 인디언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였습니다. 스물네 살에 선교에 헌신해서,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다가 29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천국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일찍이 이 땅을 떠난 것은 건강을 돌보지 않은 초인적인 헌신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그 사람처럼 하나님과 잃어버린 영혼만을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적개심에 가득찬 백인들이 닥치는 대로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벗겨 죽이고, 복수심에 가득찬 인디언들은 수시로 백인을 습격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어두운 시설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도 영혼이 있는지에 대하여 의심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불쌍한 토인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을 주셨습니다. 그는 대규모의 대중 집회를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외딴 지역의 인디언 부락을 찾아다니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난 설교가는 아니었으나, 복음의 능력은 늘 그와 함께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폐결핵 3기의 환자였습니다. 눈 덮인 언덕에서 붉은 선혈을 토하며 인디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마치 자신의 육체를 깎아서 하나님께 바치듯이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9 목숨을 버리는 목양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10:17-18).
“내가 목숨을 버리노라”
왜 예수님께서는 목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생명을 버리는 것에 대해 강조하셨습니까?
우선 이 사실은 목양이 언제나 생명을 건 결단 속에서만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그가 그렇게 죽으신 것은 다니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천국으로 이끄실 미래와 과거의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목자로서 다스리시고 이끄시기 위하여 목양의 관계로 부르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강요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면서까지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고로 여기셨던 섬김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그분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양떼들이 구원받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죽음을 향한 가치관을 새롭게 한 사람들어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그렇지 못한 악한 사람들은 왜 양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생명을 지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가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목양의 길로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나중 문제였습니다. 모든 가치관은 사랑하게 되는 대상에 의하여 재편됩니다. 양무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충성스러운 섬김을 위해서는 양떼 자체에 대한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였습니다.
목회자를 바꾸신다
하나님은 양떼들을 목양하는 일에 최상의 가치를 걸고 거기에 매진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를 정결하게 하시고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일이 그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 변함없이 사랑했던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목표에 미친 사람은 겉으로는 거룩해도 그의 내면 세계는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미친 사람은 섬길수록 성결(聖潔)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고정된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고정된 시선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영혼에 축복해주시고 하늘의 거룩하고 신령한 은혜로 부어주셔야 할 필요를 느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늘의 신령한 자원을 필요로 하는 분투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았던 거룩한 성도들의 생애는 무엇을 하든지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생애였습니다. 섬기는 자리는 다양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소망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고 그 영혼들에 의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세상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경의 진리로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시대가 사도시대 말고도 두 번 있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종교개혁 시대이고 두 번째는 청교도 시대입니다. 청교도 목회자들의 사역의 특징 중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담대한 헌신과 결단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적들이 시비를 걸며 반대하고 소심한 친구들이 그러한 난관 앞에 주저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모두 바치고자 하는 담대한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 그 영원한 휴식
그렇게 목양을 하며 생명을 걸고 영혼을 위해 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의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렇게 자신을 모두 바쳐 영혼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사랑의 비밀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아버지께서 특별한 사랑을 그에게 베푸시고 그 사랑이 위로가 되어 고난을 감당하며 목양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다른 위로와 안식을 지나치게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목양에 자신을 드려 영혼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소망을 하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성도의 진정한 안식은 죽음 밖에 없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에 동참하기를 주저하는 존 칼빈(John Calbin)을 어린아이처럼 울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사람 파렐(Farrel)의 다음과 같은 촉구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휴식과 개인적인 집착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당신이 무시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축복이 거기에 없을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죽음 이외에 다른 휴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을 따라 영혼을 돌보는 일에 신명을 바치며 일생을 산 목회자들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하늘의 상급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교회를 위해 흘린 눈물은 면류관에 아로새겨 심겨진 보석이 될 것이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모두 바친 헌신적인 생애는 주님의 칭찬으로 되갚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자신의 영혼의 목자로 알고 눈물과 기도로 섬긴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도 그리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목회자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꿈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자랑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사역을 마치고 고달픈 섬김의 길에서 놓임을 받을 때 만나게 될 천국에 있는 성도들을 그리워하며 목양에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보냄받기전에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비록 목회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인지를 아십니다.
당신이 맡겨주신 양떼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기까지 목양의 길에서 상처받고 고난을 받는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고통이 많은 목회 현장에서 그 고통을 능가하는 특별한 사랑을 그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낀 목회자들만이 영혼들을 향하여 눈물 흘릴 수 있으며, 그들의 영혼이 잘될 때 지난날 그의 모든 고난은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생명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즐거이 하나님 앞에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내려놓노라.” 스스로 붙잡고 계시던 당신의 목숨을 하나님 안에 있는 최고의 소중한 가치인 우리의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해 스스로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를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 강요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기쁨으로 당신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하여 당신은 가난해지셨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목회자도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 사랑의 부르심 때문에 목양의 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주님의 것이고 그분이 홀로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가 이전에 붙들고 있던 모든 것들은 사랑하는 양떼들과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모두 허비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땅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름받은 목회자들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반응은 즐거이 그 목양의 관계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완전하신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목양의 관계가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이러한 교회 생활에서 나옵니다. 연약한 자들과 함께 울고 고통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이러한 아름다운 목양의 관계가 만들어낸 열매입니다. 눈보라 몰아치는 춥고 어두운 밤에 칼바람소리 요란하여도, 함께 몸을 맞대고 따뜻한 체온으로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양무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로 값주어 교회를 사신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목회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인생에 황혼이 깃들고 이 땅에서의 분투하는 삶이 끝날 때,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의 목자였던 이들로서,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 아래 목양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충성스럽게 투쟁하였던 성도들로서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완전한 목자이셨던 어린양 예수를 그 나라에서 찬송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의 날을 꿈꾸며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우리들의 목양의 현장에 끊임없는 지식의 빛과 은혜의 불이, 완전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그침없이 내리기를 갈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불꽃같은 성도들은 이러한 목양의 관계를 통해 목자와 함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교회를 세우고 상한 이 땅을 고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