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국호 계림
출처 : http://cafe.daum.net/LKhistory/Epi/19?docid=2YVN|Epi|19|20010703003317&q=%B0%E8%B8%B2%C0%C7%20%BC%AD%B3%B2
.. 중국송대의 학자 孫穆이 지은 계림유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극히 일부가 전해지지만 고려시대의 한국어를 수록하여 국어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부터 의아하게 만든다. 12세기 고려시대에 왜 우리나라를 계림으로 불렀을까? 하는 것이다.
계림은 누구나 알다시피 신라초기의 국호였다.
그것도 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그 이름을 보았을 뿐, 신라인이 얼마나 계림이란 이름을 사용했는지 알지 못한다.
삼국사기-
신라4대 탈해이사금 9년(기원 65년)- 봄3월에 왕이 금성서쪽에 있는 시림의 나무사이에서 닭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오게 하였다.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그 속에 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은 기뻐하여 측근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야 "
이에 거두어 길렀는데 자라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으며 始林을 고쳐서 鷄林이라 하고 그대로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김알지편-
영평3년 경신(기원60)- 8월 4일에 瓠公(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을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속에서 흘러나옴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쳤는데 구름속에 황금궤가 있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빛은 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또 흰닭이 나무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왕께 아뢰자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있어 누웠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의 故事와 같으므로 혁거세가 알지라고 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했다. 알지는 우리말로 아기를 이름이다. 사내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있었다.
왕은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뒤에 파사왕에게 왕위를 사양하고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났으므로 성을 金씨라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굳이 올린 것은 이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고 싶기 때문이다. 신화상의 神異한 이야기를 말하는게 아니라 삼국사기 기록대로 탈해이사금대 시림에서 총명한 아이를 얻었다 해서 국호를 그 때부터 계림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신라국호가 계림으로 바뀐 것은 김씨의 집권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대부분이 짐작할 것이다. 미추왕이나 내물왕이후즉 김씨족의 집권이후 계림이란 국호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국호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초대 박혁거세 거서간 --- 서나벌(徐那伐)
탈해 이사금대 --------- 계림
기림이사금 10년(기원307년)--신라
이렇게 변천해 왔다고 했는데
지증왕 4년의 기록은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이래 나라의 이름을 정하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라고 했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 신하들이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란 기록이 있다.
위의 斯羅는 영일냉수리비에 그대로 나오므로 지증왕대초까지도 사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고 斯盧도 중국의 삼국지에 삼한 78국중의 하나로 나온다. 신라도 지증왕대 공식국호로 삼았다지만 광개토왕비문이나 중원고구려비에 그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불렸음이 확인되고 기림이사금대부터 신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위의 기록도 입증이 된다. 사라 사로 신라 이들은 모두 같은 소리를 한문으로 달리 표현했음을 알수 있다. 지증왕대 德業一新 四方網羅라는 뜻을 부여해 新羅라는 고정된 표기를 했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정작 여기에는 탈해이사금대부터 부르던 계림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으니 어인 일인가?
그럼에도 계림이란 이름은 신라에서 계속 쓰였음이 확인되니
삼국유사 김제상편
신라왕의 동생 미해를 몰래 빼내어 본국으로 돌려보낸 뒤 왜왕은 제상에게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강권하니 박제상은 "계림의 개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한다.
계림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건 당나라때부터이니
구당서의 기록
용삭원년(662년)- 춘추가 사망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뒤를 잇도록하고 그에게 開府義同三司 樂浪郡公 신라왕으로 삼았다. 용삭 3년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칭하고 법민을 계림도독으로 삼았다.
앞에는 신라왕이라 했다가 2년후는 계림도독으로 부르니 계림은 신라를 한단계 낮춰 부르는 말인지?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았다는건 신라까지 자기네 영토로 편입하고 신라왕은 지방관리쯤으로 격하시키려는 음모가 서려있음을 본다. 여기 왜 느닷없이 계림이 등장하는 걸까? 계림은 신라보다는 범위가 축소된 이름으로 볼수 있다.
그 후에도 당나라의 기록은 심심찮게 신라를 계림으로 부르고 있는데 특히 신라와 사이가 좋지 않을 때 계림으로 부른 경우가 많았다.
구당서 기록 또하나
함형4년 유인궤를 파견하여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토벌케 하였다.
당나라 후기에는 신라의 대명사로 계림이란 말을 더욱 널리 썼다고 한다. 신라와 교류가 성해 신라에서 온 사람들을 鷄林賈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시인들은 신라와 관련한 시에는 계림으로 불렀고 후일 최치원도 당에서 신라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으매 계림으로 불렀다 한다. 왕조가 바뀌어 당이 망하고 송대에 들어서고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섰음에도 송의 관료나 선비들은 고려의 대명사로 계림이라 불렀으니..
고려에 파견된 송나라 사신들의 저서중 왕운(王云)의 계림지(鷄林志) 오식(吳軾)의 계림기(鷄林記)가 있으니 12세기 손목의 저서에 계림유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이다.
한마디로 송대의 사람들은 고려보다 계림이란 이름에 익숙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은 신라라는 이름외에 달리 부른 경우가 없는 것 같은데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기록
任那國이 소나갈질지(素那葛叱智)를 파견하여 조공해 왔다. 임나는 축자국(築紫國)과 떨어지기를 2,000리로 북방의 바다를 경계로 하여 <계림>의 서남에 있다.
고 하여 신라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계림을 언급하고 있다.
당나라는 신라말기에 일본은 최초의 기록에 계림을 기록하고 있으니 알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신라인 자신도 말기까지 계림을 사용하고 있으니
927년과 938년에 조성된 진철대사 비문과 진공대사 비문에는 "속성이 김씨이고 그 선조는 계림인이다" 하여 계림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인 것은 중국인은 계림이란 이름을 신라의 비칭 혹은 속칭으로 사용했는데 신라인은 김씨족을 계림인이라 했음이다.
그리고 삼국사를 알수 있는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계림을 신라초기 한때의 국호로 기록하고 있다.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신라인은 신라라는 이름과 함께 계림이란 이름을 같이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계림이 김씨족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김씨족은 신라를 사실상 지배한 씨족이니 신라인은 자신들을 계림이라 불렀음이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 김씨족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신라라는 정식국호대신
계림을 상용했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중국인은 신라의 비칭 혹은 속칭으로 계림을 사용했던 것이다. 옛 우리 조상들이 일본대신 왜라는 이름을 꾸준히 사용한것과 같다.
그런데 이 계림의 어원은 무엇일까? 과연 닭이 우는 숲에서 태어났다고 계림이라 했을까? 어떤 사람들의 얘기대로 닭혹은 새에 대한 토템으로 이런 이름이 생겼을까?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다르니 초기 김씨왕족의 묘에서 나온 유물은 이들이 북방유목민출신임을 입증한다. 북방유목민의 족명은 그들 고유의 이름을 한문음을 빌려쓴 음역이지 뜻을 고려한 이름은 없다. 고로 계림도 그들의 고유한 이름에 대한 음차라고 본다.
닭과 숲이 등장하는 설화는 후대인들이 鷄林이란 한문을 보고 상상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신라 김씨는 바로 계림족이다. 이 계림족의 발자취를 어딘가에서 찾아낸다면 김씨족의 기원과 신라유물에 나타난 서역문화의 수수께끼를 풀수 있는 단서를 잡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金(금)이란 성을 굳이 김이라 발음하는 이유는 계림이란 족명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계림이 한음절로 압축되어 김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림을 한음절로 압축하여 김이라 불렀으나 적당한 글자가 없어 金자를 사용하고 김이라 발음했다는 것이다. 이 김이라는 발음은 수만리 대륙을 거쳐온 계림족의 발자취를 드러내는 단서중의 하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