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 문득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도루묵찌개다. 지난주 강릉 교동의 한 골목에서 '모닥불'이라는 식당을 찾았다. 복지리와 복매운탕으로 이름난 집인데, 메뉴판에 적힌 도루묵찌개라는 다섯 글자가 유난히 반가웠다. 어느새 마음은 오래전 유년의 겨울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 우리 집 겨울 밥상에는 도루묵찌개가 자주 올랐다. 석유 곤로 위에 올려놓은 양은냄비에서는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도루묵이 바글바글 끓었다. 매운 김이 안방에 퍼지면 식구들은 저마다 숟가락을 들고 냄비 곁으로 모여들었다. 알이 잔뜩 밴 도루묵은 으레 아버지의 밥상으로 먼저 갔다.
1960년대 후반, 시골에서 생선은 그리 흔한 반찬이 아니었다. 고등어 한 마리도 귀해서 할아버지 생신쯤 되어야 밥상에 오르곤 했다. 그래도 겨울철 도루묵 한 냄비가 있으면 온 가족이 푸짐했다.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얼큰한 국물을 떠먹는 동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어느새 마을은 하얀 세상이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우리가 먹었던 것은 생선찌개만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데워 주던 가족의 온기였을 것이다.
도루묵을 먹을 때면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도 떠오른다. 옛날 어느 임금이 피란길에 도루묵을 먹고 그 맛에 감탄하여 좋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훗날 궁궐로 돌아와 다시 먹어 보니 예전의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전해오는 설화이지만, 어린 내게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음식의 맛은 재료보다 그것을 먹던 시절과 마음에 더 깊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강릉 교동의 '모닥불'은 오랫동안 복요리를 전문으로 해 온 식당이다. 복지리와 복매운탕으로 35년 가까이 지역 주민과 여행객의 입맛을 지켜 왔다고 한다. 맑고 시원한 복지리 국물도 좋지만, 동해에 찬바람이 불고 도루묵이 잡히기 시작하면 계절의 별미인 도루묵찌개가 식탁에 오른다. 오래된 식당이 계절에 맞춰 내어놓는 한 냄비에는 그 지역의 시간과 정취가 함께 담겨 있다.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도루묵찌개가 식탁에 놓였다. 붉은 국물 속에서 도루묵이 부드럽게 익어 가고, 매운 고추와 마늘 향이 코끝을 스쳤다. 한 숟가락 떠먹자 얼큰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식탁 여기저기에서 "아, 시원하다!"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소주도 한 잔 삼켰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갈 무렵 옆자리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화가이자 시인이라는 그분은 살아온 세월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예술과 삶, 지나온 인연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말이 이어졌다.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도루묵찌개의 얼큰한 맛은 사라져 갔지만 낯선 사람과 나눈 따뜻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식당 이름이 왜 '모닥불'인지 문득 알 것도 같았다. 모닥불은 거창한 불꽃이 아니다. 추운 날 사람들이 둘러앉아 손을 녹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불이다. 복지리 한 그릇, 도루묵찌개 한 냄비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곳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지 않은가.
식당을 나서자 강릉의 가을밤은 제법 깊어 있었다. 왠지 바다가 보고 싶어 경포 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검푸른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가 낮게 밀려왔고, 모래사장에는 젊은이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맥주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얼굴들이 붉게 물들고, 간간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파도에 섞여 밤바다로 흩어졌다.
한쪽에는 젊은 날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 시골집 석유 곤로의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모여 앉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곁에 앉은 사람들이 달라지고,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달라졌을 뿐이다.
가을은 대개 쓸쓸한 계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날 강릉의 가을밤은 쓸쓸하기보다 낭만으로 가득했다. 도루묵찌개의 얼큰함은 차라리 곱게 물든 단풍의 맛처럼 다가왔고, 해변의 모닥불은 오래된 추억을 다시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어떤 맛과 풍경은 우리를 잠시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강릉 교동의 작은 식당 '모닥불'에서 시작된 가을 여행은 그렇게 밤바다의 별빛 아래까지 이어졌다. 내일 아침에는 강릉의 어느 작은 커피집에 들러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셔야겠다. 커피의 도시 강릉에서 맞이할 아침은 또 어떤 향기로 기억될까.
가을은 깊어가고, 모닥불은 아직 내 마음속에서 타고 있다.
2026년 10월 14일, 강릉의 가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