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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9)
글 | 김형근(발행인)
저서로 불교와 선을 알린 일본 불교학자 스즈키 다이세츠
카루스는 자신의 책 '붓다의 복음서(The Gospel of Buddha)' 초고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을 소옌에게 보냈다. 카루스는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일본어, 중국어를 읽을 줄 몰랐으나 그의 장서에는 영어, 불어, 독일어로 된 책 중 불교에 관한 책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실론에서 1년을 보낸 적이 있는 소옌은 카루스가 '복음서'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을 참고한 방식에 대해 승인하였다. '붓다의 복음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주로 올덴버그라는 학자에 의해서), 이는 카루스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올콧 대령의 '교리 문답'처럼 아시아 불자들도 이 책을 사용했다. D. T. 스즈키는 이 책에 대해 “'붓다의 복음서'가 나오기 전에는 불교가 너무 현학적이거나 너무 세속적으로 취급되었다. 카루스 박사는 철학과 과학의 정신을 결합하여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의 성과를 냈다. 그는 도취된 광신자의 입장을 떠나서 불교를 공평하고 정당하게 선보였다”라고 썼다.
스즈키는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했고 소옌 사쿠가 서문을 썼다. 그는 서구가 새롭게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일이 “현대과학의 진보된 상태, 서구의 끊임없는 산스크리트어 연구, 그리고 비교종교에 대한 강한 호기심”에 기인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독자들을 위한 주의사항도 덧붙였다. 즉 일본인들이 읽고 있는 모든 서구의 불교서적들(막스 뮐러의 '열반(Nirvana', 스베덴보리의 '불교(Buddhism)', 올콧의 '교리 문답'과 아널드의 '아시아의 빛'을 예로 들었다)은 작가들이 지닌 천재성의 ‘탁월한 재능’이 보이는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 저자들이 “불교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소옌 사쿠의 번역자로 활약한 D. T. 스즈키는 동경에서 북쪽으로 320킬로미터쯤 떨어진 카나자와라는 마을에서 1870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고전을 좋아하는 내과의사였다. 사무라이 계급이었던 가문의 특권은 메이지 유신에 의해 무너져버리고, 그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상류사회에서 자라났다. 1876년 스즈키가 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의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의 형들 중 하나는 교사가 되고, 어머니는 하숙을 쳤다. 18세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친 타이타로 스즈키는 작은 어촌에서 산수, 읽기, 쓰기, 그리고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직을 구했다. (스즈키는 책을 보고 영어를 독학했다. 몇 년 후 그가 미국에 왔을 때 자신의 어휘력은 괜찮았으나, 독학한 문법은 거의 완전히 일본식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자, 그는 도쿄로 가서 제국대학에서 학위취득 등록 절차 없이 과목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업(karma)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자신은 아직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死別해야 했으며, 자기 인생은 왜 이리 많은 역경으로 점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가족들은 대개의 사무라이가 그렇듯이 임제종에 속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선禪에 눈길을 돌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는 선 공부를 세츠몬 로시와 시작했으나 최초의 중요한 스승은 당시 81세였던 현대선의 아버지 코센이었다. 코센은 스즈키에게 ‘한 손(one hand)’이라는 화두를 주었고, 코센이 1892년 세상을 떠나자 스즈키는 코센의 법통을 이은, 그때 막 실론에서 돌아온 소옌 사쿠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스즈키는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출가자나 마찬가지로 생활했는데, 4년 동안 재가제자로 엔가쿠지에서 엄격한 신참자 승려처럼 지냈다. 소옌은 이 젊은 학자에게 ‘무無’자 화두를 주었다. 스즈키는 거의 70년 후에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그 4년간 여러 글을 쓰느라 바빴죠. 그중에는 카루스 박사의 '붓다의 복음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러나 내내 제 머릿속에는 화두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는 제게 주된 과업이었으며, 텅 빈 벌판에 앉아 벼를 베어 낸 그루터기에 기대서서 “ ‘무’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고 되뇌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제가 정말 그랬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니시다 기랴로는 자기 일기에 그 당시 제가 자주 자살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썼다 합니다. 저는 ‘무’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식사를 하거나 집중수련 기간 동안의 의무적인 면담 이외에는 소옌 사쿠와의 면담도 그만두었죠. 그러자 로시는 거의 항상 저를 매로 다스렸습니다.
계속해서 스즈키는“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넓고 스스로에게 꾸며대는 핑계도 많아요.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직면하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가능성도 선택도 없는 극단에 서야 하죠. 화두를 든 자가 해야 할 단 하나의 일은 바로 화두의 해결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스즈키는 라살에 가서 카루스 박사와 '도덕경(Tao Te Ching)'을 함께 연구하기로 결정했을 무렵 중대한 고비에 다다랐다. “저는 그해 겨울 성도절 집중수련 기간이 화두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임을 알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모든 영혼의 힘을 이 정진에 쏟아 부어 5일째 되던 날 수련이 끝나갈 무렵 “그가 ‘무’를 의식해도 더 이상 분리가 없는 합일이 되어 있을 때” 종이 울렸고, 그는 삼매에서 깨어나 소옌 사쿠의 질문 중 하나만 빼고 모두 답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나머지 한 문제마저 대답했다. 그는 절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걸어 돌아오던 그날 밤을 기억했다. “달빛을 받은 나무들이 눈에 비쳤습니다. 나무들은 투명해 보였고 저도 투명했습니다.”
소옌은 스즈키의 깨달음을 인준하여 속인에게 주는 불명 ‘다이세츠’를 내렸다. 이것은 ‘큰 단순함(Great Simplicity)’이란 뜻이었다(나중에 스즈키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큰 우매함[Great Stupidity]’이란 뜻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이어 얼마 안 있어 스즈키는 라살에 있는 카루스의 오픈코트 출판사를 도우러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1897년 2월 2일, 소옌은 카마쿠라에서 카루스에게 편지를 썼다. “스즈키는 증기선 ‘차이나’ 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항하여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이달 말에 라살로 귀하를 찾아 뵐 것입니다.…… 그가 불교 문헌을 통달한 것은 아니지만 정직하고 근면한 불자입니다. 부디 그가 귀하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즈키는 과연 1897년 2월 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이민국은 스즈키에게서 결핵의 병력病歷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그를 잠시 억류하였다. 그러자 당시 캘리포니아에 와 있던 카루스와 달마팔라는 관리들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그리하여 진단을 받은 후에 스즈키는 일리노이주 라살로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스즈키는 카루스의 큰 집에 살게 되었는데, 집안일까지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놀랬다. “우물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불 때기에 알맞도록 자르고, 수레를 끌고, 장을 보고, 필요하면 요리도 해야 했죠.” 날씨가 좋으면 그는 시골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독서를 즐겼다. (그가 공부한 여러 가지 것들 중에는 휘트니의 '산스크리트어 문법' 공부도 들어 있었다.)
그의 첫 과제는 '도덕경'을 번역하는 카루스를 돕는 일이었다. 카루스는 중국말을 전혀 몰랐으나 학자풍의 번역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즈키가 가능한 한 한자漢字 하나하나의 해설을 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스즈키로서는 카루스가 게르만어의 추상적 표현들을 내용을 잘 이해하며 사용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스즈키는 카루스와의 이 첫 번째 협동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인들은 가장 깊은 내면의 아주 미묘한 감정변화를 재현해 내는 데 귀재들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글귀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카루스 박사에게 한자 하나하나의 뜻과 함께 그 이면의 느낌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카루스 자신이 영어를 제2 외국어로 하는 독일인으로서, 이 중국의 사상을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용어로 번역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그 당시 좀더 지식이 많았더라면, 그가 본래 뜻을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식자植字가 없었기 때문에 스즈키는 중국책과 일본책에서 한자를 오려 원고에서 알맞은 위치에다 풀로 붙인 후 사진을 찍어 원판을 만들었다.
스즈키는 보수로 숙식을 제공받고 주급 3달러를 받았다. 집안 일 외에도 작은 가정집 출판사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이 그의 몫이었다. 그는 타자와 교정(소옌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이 일은 미국이 아주 조금은 덜하긴 해도, 일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조잡한 일이었다) 일을 배웠고, 편집과 사진작업도 했다. 물론 그의 주된 임무는 번역이었다. '도덕경'이 탈고되자마자 마명대사(馬鳴大師; Ashva-ghosha)의 '대승기신론(The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을 번역하느라 아침나절 내내 보내야 했다.
또한 그는 라살에서 자신이 영어로 출판한 최초의 책인 '대승불교 개론(Outlines of Mahayana Buddhism)'의 집필을 시작했다. 소옌 사쿠와 폴 카루스가 서양에 불교를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하나의 체계로서 소개하려고 한 반면, 스즈키는 초점을 불교의 유기적이고 진화적인 성격에 두었다. '개론'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생동하는 활력을 보이면서도 모든 측면에서 원래 모습이 수정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를 유지한 종교가 과연 있는가? 변화 가능성이야말로 어떤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거슬리는 일이겠지만, 그 종교가 살아 있다는 활력을 보여 주는 가장 본질적인 표시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스즈키 논점의 핵심은 아니었다. “대승大乘은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대승이 갖는 활력과 활동성은 우리 일상생활에 관련되어 있다. 이는 위대한 영성의 유기체이며, 그 도덕적 종교적 힘은 오늘날도 수백만의 영혼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승을 발전시키는 일은 종교적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진보하는 데 귀중한 공헌이 되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구의 학자들은 대승의 수많은 교리와 신성神性 및 수행방법 등에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매혹되기도 했으며, 잘못 인도되기도 했다. 이런 넘치는 풍부함과 다양성은 오히려 원래는 청정한 붓다의 가르침이 얼마나 퇴보하여 변질되었는가를 드러내는 적절한 사례에 불과하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스즈키는 대승의 교리들을 한 필의 천(피륙, 직물)으로 다시 잘 짜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이는 그 자신이 대승의 이 모든 실(thread)들의 연계성을 몸소 경험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이것을 “종교가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는 단계를 거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요소”라고 표현했다.
노자‘도덕경’과 ‘대승기신론’의 영역, 그리고 영어 저술인‘대숭불교개론’을 통해 그의 이름을 서양에 알리게 된 것이다.
이곳 라살에서 그는 자신이 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알게 되었다. 그는 60년 이상을 스승 소옌에게 편지했는데, 그 첫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연(業; karma)은 실로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처음 떠올렸을 때는 당장 영향을 주지 않았던 어떤 생각이 훗날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 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마음을 뚫고 지나가는 빛처럼. ‘붓다의 가르침을 한 번만이라도 듣는 공덕은 비록 그가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한하다’라는 오래된 붓다의 가르침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는 논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가르침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있으므로, 때로 마음을 내어 이렇게 표현한답니다. 만일 저의 생각이 인류의 발전에 이익이 된다면, 미래에 반드시 이로부터 좋은 열매를 맺기 바라는 것이 저의 비밀스러운 소원입니다.……
똑같은 세기의 전환점에서 마리 E. 포스터Mary E. Foster는 호놀룰루에서 새로운 정토진종 사원 개원식에 참석했고, 라살의 폴 카루스는 D. T. 스즈키의 최초 번역서인 '마명대사의 대승기신론(Ashvagosha's Discouse on Awakening of Faith in the Mahayana)'을 출판했다. 이 해는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을 출판한 해이기도 했다. 1899년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러셀 부인은 소옌사쿠에게 때로 그녀의 친구를 위해 법문을 해주도록 부탁했다. 때마침 라살에서 돌아온 다이세츠 T. 스즈키가 통역을 했다. 소옌의 법문은 '사십이장경'에 기초를 두었다. 이 경은 A. D. 67년에 인도의 스님들이 중국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 붓다 말씀의 개요다. 러셀 가에서의 비공식적 법문 이외에 소옌은 샌프란시스코의 불교회관과 일본영사관에서, 그리고 프레스노, 새크라멘토, 산호세와 오클랜드 등에서 일본인 이민자를 위한 법문을 했다. 1905년 9월, 그와 D. T. 스즈키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900명의 일본인과 100명의 미국인이 터너 홀에 모여 들었다. 1906년 3월, 소옌 사쿠와 다이세츠 스즈키는 미국 횡단여행을 떠났다.
스즈키는 1909년 일본으로 돌아가서 학습원(學習院) 대학 교수가 되었다. 다이세츠 테이타로 스즈키는 레드클리프 졸업생이자 신지학자인 베아트리체 어스킨 레인Beatrice Erskine Lane과 1911년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부부는 1919년 소옌 사쿠가 세상을 뜰 때까지 엔가쿠지 구내의 작은 집에서 살았다. 이 부부는 스즈키가 오타니 대학 종교철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던 교토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스즈키 부부는 종파를 초월한, 대승불교에 관한 영어잡지 '동양의 불교도(The Eastern Buddhist)'를 발간했다. 1927년 영국 출판인인 라이더Rider가 스즈키의 '선불교에 관한 에세이(Essays in Zen Buddhism)'를 냈다. 이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은 '동양의 불교도'에 처음으로 실린 글들이었다. 1938년에는 비어트리스 레인 스즈키의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가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선불교에 관한 에세이'(2판과 3판이 연이어 나왔다)로 영국에서 스즈키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1936년 일흔이 다 된 고령으로 그는‘세계 신앙대회(The World Congress of Faiths)’에서 연설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D. T. 스즈키가 보인 장난스러움과 높은 학식을 겸비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조화로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1. 콜롬비아 대학교의 D. T. 스즈키
1947년 3월 동경의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일하던 두 명의 젊은 미국인들이 일본인 친구와 함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엔가쿠지 사원 경내에 있는 한 작은 집을 방문했다. 그들이 만나게 되었던 사람, D. T. 스즈키는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스즈키가 이 손님들을 맞으러 나오기 전에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와 리처드 드마르티노Richard DeMartino는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통해 서재에 앉아 있는 스즈키를 엿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리처드 드마르티노는 이렇게 묘사했다. “스즈키는 서양식 타이프라이터를 앞에 두고 일본식으로 꿇어앉아서 양손 검지로 열심히 무언가를 타자로 치고 있었다. 일본식 검은 기모노를 입고 깨끗이 면도한, 체구가 작은 이 사람은 서양의 회계사들이 쓰는 녹색의 얼굴 가리개[面甲]를 착용하고 있었다.”
D. T. 스즈키는 전쟁 중에 학자적인 은거생활을 하고 지냈다. 아내이자 함께 일한 동료 비어트리스 레인Beatrice Lane은 1939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당시 그는 미국을 한 번 더 방문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그리고 1949년, 드마르티노와 함께 제2차 동서양 철학자회의(East-West Philosopher’s Conference)에 참석하러 호놀룰루로 갔으며, 그곳 하와이 대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듬해 대학원생 리처드 가드Richard Gard는 스즈키가 미국 대륙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파사데나의 클레어몬트 대학원에 임시 직위를 주선해 주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클레어몬트 측은 스즈키의 생활비를 댈 수가 없게 되었다. 가드는 필사적으로 로스앤젤레스 진언종 사원의 타카하시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고,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거주하는 몇 명의 불교 지도자가 모여 회의를 한 끝에 미국 내 일인日人 사회에서 모금을 하기로 하였다.
클레어몬트에서 1년간 가르친 후 스즈키는 뉴욕으로 갔다. 그는 교회 평화봉사단(Church Peace Union)과 개인 가정에서 법문을 했으나 정규적인 학술활동은 없었다. 그러던 중‘크레인 욕실설비사[Crane Bathroom Fixtures]’의 코르넬리우스 크레인Cornelius Crane이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열리는 일련의 세미나에 재정지원을 해 주었다. 다이토쿠지에서 좌선을 한 적이 있는 크레인은 청강생들도 스즈키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즈키는 광범위한 분야의 제자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 중에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과 캐런 호니Karen Horney 같은 심리분석학자나 정신치료사를 비롯해서 예술가, 작곡가,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중에는 메리 파르카스나 당시에 사업가이던 필립 카플로와 같이 그저 스즈키가 불교에 관해 꼭 말하고 싶은 내용에만 관심이 있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이런 세미나에서 1950년대 후반의 소위 선(Zen)의 ‘붐’으로 개화되는 씨앗이 뿌려진다. 이때 참석한 예술가나 지성인 중에 스즈키 선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은 당시 38세였던 작곡가이자 작가인 존 케이지John Cage였다. 그의 전위음악은 널리 칭송을 받고 있던 중이었지만, 당시 대담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의 인생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그 자신은 의혹과 혼돈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은 심리분석을 받아 보도록 권유했으나, 케이지는 2년간 참석했던 스즈키의 세미나와 불교공부 역시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스즈키는 케이지에게 자신이 음악이나 미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말했지만, 케이지는 스즈키가 음악을 “예술가가 청중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아닌, 소리가 그 자체일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소리의 활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느꼈다. 케이지에 따르면, 여기서 나아가 스즈키의 가르침은 “음악을 만들거나 음악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이전과 다른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으며…… 경험을 넓혀 주고, 무엇보다도 가치판단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케이지는 “결가부좌 명상과 같이 엄밀한 수단인 우연적 작용을 활용해서” 작곡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소명을 “선택하는 일에서 질문하는 일”로 전환시켰다. 청중은 케이지의 새로운 작법('4분 33초'와 같은 작품에서는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에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하기는 했으나, 그의 작품이 궁극적으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스즈키는 '화엄경'의 화엄사상을 컬럼비아 세미나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화엄은 모든 것의 상호의존성을 가르쳤고, 다른 불교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즈키 박사도 그런 개념을 불교사상의 정점으로 간주했다. 스즈키는 자신의 강좌에서 말했다. “화엄華嚴은 깨달은 붓다의 표현이다. 모든 여타의 가르침은 붓다가 깨달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제자들에게 베푼 것이지만, 화엄의 경우엔 청중에게 어떤 편의도 제공하지 않는다.”
D. T. 스즈키 역시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 스즈키에게 교단에 서는 일은 생활의 방편이었던 외에, 자신이 어쩌다 집필 중인 책이나 번역물에 관해 소리 내어 생각해 보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종횡으로 움직이며 교실의 칠판에 영문 모를 미로와 같은 도표를 그려 놓고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티베트어 등의 주석을 달아 놓다가 학생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의 강의를 이따금 들었던 메리 파르카스Mary Farkas는 어느 날 오후 10여 명의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 졸던 장면을 회상한다. 물론 스즈키는 이런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존 케이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회상한다. 언젠가 스즈키가 강의하던 도중에 저공비행하는 비행기 소리로 인해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스즈키는 목소리를 높이기는커녕 좀전과 똑같이 그대로 계속 이야기할 뿐이었다.
4. D. T. 스즈키와 심리분석
1953년경 스즈키 박사가 뉴욕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을 무렵, 콜럼비아 대학의 그의 반에서 공부하던 2세 학생인 미호코 오카무라 양은 스즈키 박사에게 기거하던 버틀러홀에서 나와 W. 94번가에 있는 자기 양친의 안락한 아파트로 주거를 옮기도록 설득했다. 오카무라 양의 아버지인 프랭크 오카무라는 브루클린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어머니 오카무라 부인은 스즈키 박사가 좋아하는 찹쌀모찌와 유두부두부, 채소, 해조류로 만든 일본식 국 요리를 즐겨 만들었다. 오카무라 양은 스즈키 박사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다. 그녀는 스즈키 박사의 비서 겸 타자수와 편집인으로 일하는 등,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스즈키 박사가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진한 분말가루 녹차를 준비했던 사람도 다름 아닌 그녀였다. 스즈키 박사는 방대한 책과 논문에 둘러싸인 채 일했지만, 오카무라 양은 스즈키 박사가 필요한 자료를 금새 찾아낼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박사의 전화를 받고 일정을 조정했다. 이런 업무처리는 특히나 일에 방해가 될 정도로 부쩍 늘어나는 도움, 충고, 격려 등을 부탁하는 사람의 요구를 체질적으로 거절할 줄 모르는 스즈키 박사에게는 꼭 필요한 사무였다.
일부러 노력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스즈키 박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TV 방송은 그와 인터뷰를 했고, '뉴요커New Yorker'지와 심지어는 '보그Vogue'지에까지 그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의 나이, 재치, 온화하고 생각에 잠긴 학자적인 분위기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을 감동시킨 점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격이었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이 스즈키 박사에 관해 언급한 내용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대변한다. “그를 만나면 장자莊子와 선사들이 이야기한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록에 나오는,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절대경지에 있는 깨달은 자을 대하는 듯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당연히 우리가 진정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이다. 그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나는 스즈키 박사와 만나서 차 한 잔을 나누어보고 바로 이 사람이라고 느꼈다. 드디어 마음의 고향에 도달한 듯했다.”
스즈키는 당시 보급판으로 더욱 구입하기 용이해졌던 그의 책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책도 다수 저술했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자유롭고, 재미있고, 직설적인 문체로 지성적인 세계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쓴 수필들이었다. 그 글들을 읽노라면 그가 고대의 중국선에 대한 이야기를 번역하면서 밤늦게 책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서재에서 마음속으로 혼자 중얼거리거나, 매혹적으로 심원한 세부를 추구하느라 이따금 여담을 하거나, 혼자서 싱글벙글 웃는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매우 독특한 목소리였다. 다른 그 누구도 영적인 삶에 대해 그처럼 권위가 있으면서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실감나게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스즈키는 누구보다 선불교를 개념화하는 일이 곡해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는 기꺼이 표현이 안 되는 달을 단어와 개념이라는 손가락으로 결연히 가리켜보고자 시도했다. 이런 작업에서 그는 초년에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방법을 따랐다. 제임스는 신비적 경험의 다양한 요소를 분류해 놓았다. 마찬가지로 스즈키는 ‘깨달음[悟]’을 비합리성, 직관력, 권위, 긍정, 흥분과 순간성으로 구분했다.
스즈키는 선이 선‘불교’라는 점을 조심스레 강조했으나, 동시에 그는 선을 어떤 시대와 장소나 원칙에 제한을 두는 일은 거부했다. “제가 볼 때 선은 모든 철학의 궁극적 사실입니다. 종교적 의식이 극도로 고양되었을 때 발생하는 최종적인 심리적 사실이 선입니다. 선이 불교도에 의해 행해지느냐, 기독교도나 여타의 철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느냐는 최종적 분석에서 부수적인 사항일 뿐입니다.” 이렇게 선을 보편화함으로써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선에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사실 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선사상이 매우 인기를 끌고 유행하게 되었다. 1959년 교토에서 사사키 부인은 다소 반어적으로 이렇게 언급하였다. “선은 극동지역의 예술에 항상 영향을 주었다고 간주되었죠. 하지만 이제는 선이 모든 영문학과도 더불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어요. 초현대미술, 음악, 무용, 시는 선의 표현으로서 갈채를 받습니다. 선은 심리학, 심리치료, 철학, 의미론, 신비주의, 자유사상 등의 최신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배경으로서 인용되죠. 선은 지성인의 칵테일파티에서나 방랑객들의 모임에서나 한결같이 통하는 마법의 암호예요.”
선을 공부하는 좀더 진지한 시도의 하나로 1957년에 ‘선불교와 심리분석 회의’가 열렸을 때, 스즈키 박사가 연사였다. 50명 이상의 심리분석가들이 1주일간의 연수를 위해 쿠에르나바카에 모여 들었다. 칼 융은 1934년에 선과 심리치료에는 “영적 치유나 전체의 조화”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고, 선사와 심리분석가는 개인이 전체성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서로 역할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바 있었다. 심리학에서처럼 선불교도 마음과 의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스즈키 박사 자신도 선불교를 설명하기 위해 서양심리학 용어를 활용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 분석방법에 내재한 제한성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선불교의 안내(An Introduction to Zen Buddhism)'에서 그는 이렇게 서술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실상 우리 의식에는 초월적인 것도 없고, 아래에 숨어 있는 것도 없으며, 표면에 드러난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하나의 나뉠 수 없는 전체로서 조각조각 분리될 수가 없다. 공안이 모든 장애를 부수고 궁극적 진리로 이끌 때, 우리는 숨겨진 마음의 깊숙한 자리나 항상 너무도 신비롭게 보이는 선이란 진리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심리학과는 달리 선은 영적 수양이었다. 선과 심리학이 공유하는 용어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쿠에르나바카에 모인 심리분석가들에게 말했다.
심리학자들은 자발성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어린아이와 같은 단계의 자발성이지 결코 성인의 자발성이나 자유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아적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한, 그는 심리학자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수년간 혹은 수십 년간 자기훈련을 거쳐서야만 그는 완전히 성숙한 어른의 인격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쿠에르나바카의 강연이 선과 심리분석 간에 진행되는 토론을 정당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여느 때처럼 그의 강연내용보다는 스즈키 박사의 존재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의미가 컸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회의 첫 이틀간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확실히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전보다 더 집중하고 조용해졌어요. 모임이 끝나갈 무렵에는 참가자들 다수에게서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죠. 이들은 독특한 경험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느꼈어요. 전보다는 정신이 좀더 각성되어 있다고 느꼈고, 배운 것을 결코 잊지 않으려는 결의에 차 있는 자신을 느꼈죠.”
프롬 자신도 매우 강렬한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스즈키 박사가 보통 때보다 더 오래 딱딱한 의자와 연설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게 되자, 프롬 부인과 오카무라 양이 그를 찾으러 나섰다. “그들은 어디서도 박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에 좀 걱정이 되기 시작할 바로 그 무렵, 그가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완전히 긴장이 풀린 상태로 나무와 하나가 되어버렸으므로, 나무와 하나가 되어 버린 ‘그’를 별도로 알아채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즈키와 캠브리지 불교협회
1957년 6월, 콜롬비아 대학에서 은퇴한 스즈키 박사는 그해 9월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철학자이자 선학자인 쉬니치 히사마츠와 합세했다. 히사마츠 박사는 일본 철학자 키타로 니쉬다의 제자로서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선을 강의하고 있었다. 히사마츠 박사는 독일 형이상학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 주제에 꽤 정통하다는 대학원생들조차도 그의 강의를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히사마츠의 강의를 수강하던 학생들 중에는 엘시Elsie와 존 미첼John Mitchell이 있었다. 미첼 부부는 포크웨이 레코드사를 위해 에이헤이지에서 예불과 독경 등을 녹음한 뒤 일본에서 돌아온 상태였다. 미첼 부부는 히사마츠 강연의 이론적인 특성에 다소 좌절감을 느꼈다. 뉴톤 안도버 신학대학원에서 얘기를 좀 나눈 뒤, 이들은 히사마츠 박사에게 선의 이론에 대응하는 실제 수행에 관해 질문했다. 히사마츠 박사는 가르침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그의 지도로 몇몇 사람들이 케임브리지 크레기 가에 있는 미첼의 새 집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처음 참가자들은 대부분 엘시 미첼Elsie Mitchell이 영어를 가르치던 하버드 옌칭연구소의 일본인 대학원생들과 대학원 졸업생들이었다. 한 학생은 조동종曹洞宗에 속했고, 두 명은 서로 다른 진언종眞言宗 지부에 속해 있었으며, 한 명은 하와이 사원의 신도들이 어려운 살림 속에서 돈을 모아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도록 유학을 보냈던 정토종浄土宗의 법사였다. 엘시 미첼은 이 소수의 미국인 모임이 “매우 비조직적이었다”고 기억하였다. 어쨌든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좌선에 대한 관심이었다.
히사마츠 박사는 6개월 후(엘시 미첼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이제 막 서양식 정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무렵”)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진언종 승려인 히리오카 스님 등 회원들이 차례로 선을 지도하였다. 이 모임은 1959년에 ‘케임브리지 불교협회(Cambridge Buddhist Assoication)’라는 법인체를 발족시켰는데, 때때로 이 모임에서 강연을 하던 스즈키 박사는 모임에 참석하거나 그외 어떤 의무도 떠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회장직을 수락했다.
스즈키는 만년에는 정토진종의 조사 신란(親鸞)의 저서인 ‘교행신증(敎行信証)을 영역했다.
그는 프린스톤, 하바드, 예일, 콜롬비아 등 미국과 유럽의 유수의 대학에서 선에 대한 강연을 해왔으며,칼 융, 하이데거 등 서구의 지성인들과 교류하고, 중국의 호적과도 선 연구방법에 대해 토론했다. 인도의 신지학회 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으며, 영성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신비사상을 일본에 소개하였다.
스즈키 사상의 핵심
그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즉비(卽非)의 논리와 영성이라고 한다. 그는 ‘동양적 시각)에서 서양의 지적 세계는 주와 객, 물과 심, 음과 양 등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식이 아니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으며, 과학도 철학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연도 정복의 대상이 되며, 각종 침략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동양적 세계관에는 지성의 발생 이전인 ’현지우현(玄之又玄)’, ‘황홍(恍惚)’,‘혼돈(混沌)’ 등의 노장사상에서 보듯이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성서’에서 신이 말한 “빛이 있어라”라고 하기 전의 세계라고 한다.
금강경 13장의“불타가 설하는 반야바라밀 이라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닐새 이를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하는 것이 선의 논리이며, 일본적 영성이라고 한다. 그는 청원행사 선사의“산산수수(山山水水),산불시산(山不是山), 수불시수(水不是水), 산산수수(山山水水)”를 통해 선에 투영된 반야논리를 설명한다. 이 부사의하고 비합리적인 논리는 부정을 매개로하여 긍정으로 들어간다. 이를 선의 특수성이라고 하며, 생사의 문제에 대입할 경우 “당신들이 그렇게 도망가고 싶은 생사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객미분법의 입장, 순수경험의 무분별의 입장, 무념무상의 경지, 차별즉평등. 평등즉차별. 이사무애의 법계인 즉비 논리의 세계는 화엄의 사사무애의 법계, 평상심이 도, 그리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세계로 진행된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무언가 둘인 것을 포함하여 필경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또한 하나이면서 그대로 둘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지 아니면 안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한다. 스즈키는 진속(眞俗), 범성(凡聖), 체용(體用)을 불이(不二)로 보는 대승불교에 기반한 영성을 주장하고 있다.
스즈끼는 일본 근대 국가주의의 축이었던 국가신도는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고 보고, 전쟁으로 귀결된 인간의 폐쇄된 자아를 해방하는 동시에,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전후에 복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선과 정토를 영성의 측면에서 일치시켰다는 점에서 불교의 또 다른 현대적 해석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한편, 선과 전쟁의 관련 속에서 스즈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 될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그는 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깨끗하게 죽는” 무사도야말로 일본 최고의 정신이라고 한다. 이는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긍정하는 사상으로 변질되었고, 침략전생의 시기에 반전사상을 드러내놓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의 한계를 보게된다. 제국주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수많은 일본 내 불굴의 불교인 및 지성인들과 대비해 볼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참고문헌: ‘불광’잡지 2017년 5월호 원영상 글 ‘스즈키 다이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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