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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혁명2022사회주의
사회주의(Socialisme) : 사회학(sociologie)에서
J. Lagneau,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2398-2399(P.3299)
- 라뇨(Janina Lagneau, ?-? ), 약력을 알 수 없는 필자, 처음이다.
[개요]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다양한 정치적 이론들만큼이나 여러 학자들의 작품 속에서 진술된 이론들에게 자격을 부여한다. 즉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Platon, 전428-전348)의 폴리테이아(Politeia), 영국에서 토마스 모어(More, 1478–1535)의 유토피아(L'Utopie, 1516),이탈리아에서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의 태양의 도시(Civitas solis, 1623)(La Cité du Soleil), 프랑스에서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의 「조화급수(Séries harmoniques, 1807)」에서뿐만 아니라, 꽁도르세같은 이(un Condorcet, 1743-1794), 생시몽같은 이(un Saint-Simon, 1760-1825) 오웬같은 이(un Owen, 1771-1858)의 관념들에도 사상들 속에서도 있었다. 게다가 아나코-생디칼리즘, 혁명적 인민주의(le populisme), 맑스(Marx, 1818-1883), 엥겔스(Engels, 1820–1895), 레닌(Lénine, 1870-1924)에서도, 그리고 끝내기 위하여, 사람들이 현 시기에 [유럽의] 동부 또는 서부 다양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활동 중인 것을 보고 있는 대로 (다소 실재적인) 사회주의에서도 있었다. - [이외에도 호찌민(Hồ Chí Minh, 1890-1969), 마오쩌둥(毛泽东, 모택동, 1893-1976),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 등등이 있다.]
현대 사회주의 이론들의 공통분모는 – 사적 소유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을 넘어서는 집단성의 우선성 이외에도 – 의심할 바 없이 진보주의적전망(une vision progressiste)이며, 즉 제도들의 합리적 조직화로 이루어진 사회 경제적 조건들에서 정의와 조화가 지배하는 방식으로, 생산조건들과 모든 인간관계들 일반의 조화에 대해 현대사회들에게 열려진 가능성(une possibilité) 이다. 사회주의적 관념들은, 마치 관용없는 정치적, 물질적,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반작용처럼, 산업혁명의 토론과 더불어 절정을 이룬다.
19세기에서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심지어는 다른 근원들에서 이름을 끌어왔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정당들이 풍성하게 태어남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체계화하면서 세 가지 범주의 다른 경향성들을 재분류할 수 있다. 공상적(utopique) 사회주의, 개량적(réformiste, 改良主義的)사회주의, 혁명적(révolutionniste) 사회주의 이다. 이 세가지 모두는 동일한 목적성을 선언한다. 즉 [그 목적성 속에는] (풍요 속에서) 평등성, 정당한 분배, 그러나 특히 자유 속에서 인간의 성숙(l’épanouissement, 개화), 앞선 체계들이 유지해 왔던 소외[광기]의 완전한 반대 등이 있다.
[본문]
공상적 사회주의는 고려하기를, 하나의 새로운 질서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민 대중들의 관념들, 품성들, 인습들의 변화를 통과해야만 하며, 그러한 것이 권력의 혁명적 장악 또는 국가의 폐기를 요청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다.
개량적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적 운동들에 의해 대표되는데, 두 형식들로 소개되었다. 경제적 형식과 정치적 형식이다. 전자는 경제적 질성의 조합적[노조의] 요구들의 점진적인 만족을 강조한다. 후자는 국가 업무들에 대한 절대적 통제를 쟁취할 때까지 제도의 계속적인 변형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사회주의는 틀림없이 다양한 경향성들을 제시하고 또한 가장 논쟁적인 것을 불러일으켰던 사회주의이다. 프랑스에서 바뵈프(Babeuf, 1760-1797), 카베(Cabet, 1788-1856), 블랑키(Blanqui, 1805-1881),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 이탈리아의 아나코-생디칼리즘(무권위 조합주의)와 더불어, 맑스주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실질적 사회주의(socialisme réel)의 건설자들이 지지하는 학설을 태어나게 했다. 사람들은 그런 사회주의를 소비에트를 전범으로 삼는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작업 중임을 보았다.
사회주의적 혁명은 경제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연관들의 변형에 접근할 수 있는데, 노동자 계급의 주도권(l’hégemonie) 하에서 인민 대중에 의해서 경제적 권력의 장악을 중요한 목표로서 삼는데 있다. 우리가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다양한 학설들은 목적성들의 도식에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이리하여 맑스주의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들의 사적 소유의 제거[폐지]를, 활동성들(les activites, 노동활동?)의 교대를, 수작업(직접노동)의 일반화(수공업은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소외의 특성을 상실한다)를, 노동 일수의 축소를, 화폐 교환의 사라짐[소멸]을, 풍요로움을, “필요에 따라” 재분배의 원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미 토마스 모어(More, 1478–1535)의 유토피아(L'Utopie, 1516)에서 소개되었다. 이런 요소들은 모렐리(Étienne-Gabriel Morelly 1717-1778/1782)의 자연의 규약(Code de la Nature, 1755) 속에서 또한 마블리(Mably, 1709-1785)에게서도 보다 정교하게 설명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맑스에게서(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속에서) 미래 사회의 긍정적 요소들의 소개를 발견하는데, 말하자면 마치 푸리에, 생시몽, 오웬에게서 이런 요소를 발견할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 요소들이란, 도시과 시골 사이의 이항대립 관계의 소멸, 가족과 사적 산업과 임급 노동의 폐기, 마지막으로 사물들(les choses, [국가업무])에 대한 간소한 행정화로 국가 역할의 축소 등이다. 요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맑스에게서 사회주의의 이론이 없었다면, 그 이론은 세 가지 주장에서 소개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첫째로] 생산수단들에 대해 그리고 생산수단의 조직화에 대해 노동자들의 일체에 의해 수중에 장악과 더불어, 상품 교환도, 가격도, 잉여가치도, 이익도, 이자도, 지대도 더 이상 없다.
둘째로사회화된 생산은 화폐-자본의 생산을 소멸하게 하는데, 산업의 여러 다른 분야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들을 분배하는 것이 사회이다. 이런 분배는 다양한 재화의 생산에, 또 다양한 재화의 사회적 유용성에, 필수적인 노동 시간의 기능[함수]으로 실행된다. 이것이 행해지기 위해서, 계획경제는 다양한 필요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와 축적 사이에서도 생산에 참여해야 하는 정도에 따라서 필수적이다. 즉 예비비(豫備費, fonds de réserve 적금), 집단적 공제(prévoyance collectives)의 기금, 행정기구의 용량과 발전, 노동자들과 노동할 수 없는 자들의 필요의 만족 등이 필수적이다.
셋째로 자본이 더 이상 없는 그곳에서 임금 노동도 더 이상 없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더 이상 팔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음을 주목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초기 국면에서 겉보기 또는 형식적 평등 뒤에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재능”의 사실로부터 또한 그들의 “생산 능력의 불평등”의 사실로부터 실질적 불평등이 감추어져 있다. 분담(le partage)의 규칙은 “각자에게 각자의 노동에 따라”라는 명제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 작업의 궁극적 국면에서 인데, 말하자면 노동이 생명의 제일[기초] 필요가 될 때이며, 사회가 “각자는 자기의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 자기의 필요에 따라(chacun selon ses capacités, à chacun selon ses besoins)”라는 원칙에 따라 살아갈 수 있을 때 이다.
이 주제들은 19세기 말에 동유럽과 서유럽의 경제학자들, 이데올로그들, 사회학자들 사이에 매우 생생한 토론들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 토론에서 맑스주의의 영향은 틀림없이 다른 어떤 부분에서보다 강했을 것이고 또한 이런 토론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일어났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 혁명 학설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의 제거에 한정될 것이고, 현재까지 너무나 중앙집권화 되어있는데”, 그러나 임금제도 유지될 것이고 발전할 것이며, 또는 심지어는 국가 제도를 강화할 것이다. 국가 제도는 “사물들(les choses, [국가업무])”의 관리(la gestion)에 제한되기는커녕, 다수의 머리를 지닌 일종의 리바이어던(Léviathan)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국가의 기능들에 관한 토론이 여러 이론가들에게서도 특히 자치 관리를 설교하는 자들에서도 상당히 현재하고[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협동조합적 운동에 대해 특히 사회주의적 운동에 대해, 잘 못 알려진 그러나 매우 예언적인 몇몇 관념들을 재빨리 상기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회인 것 같다. 이 관념들 가운데 (프랑스에서)폴란드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자인 아브라모프스키(Edward Józef Abramowski, 1868-1918)의 관념들도 있다. 아브라모프스키는 이 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그에게서 사회적 변화는 인간들과 인간들의 제도들 사이에서 점진적이고 전체적 분리[총체의 세분화]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다. 그 사회적 계급은 국가적 제도 속에서 정점을 이루는 이런 소외(l’aliénation)의 계기를 대변한다.
사실상, 국가는 항상 대중의 억압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자격부여는 자기 운명의 변화에 만족하지 못한다. 국가는 사회주의에게도 항상 관료제 속에서 구현해야 할 것이다. 그 관료제는 인구[주민]을 희생하면서도 권력의 중심으로 확장되도록 숙명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관료제 기구[장치]는 자연적으로 착취의 새로운 형태들을 정의할 것이고, 또한 사회의 새로운 계급들의 출현을 자극할 것이고, 불평등의 새로운 기준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유, 평등, 동포애의 혁명적 이상들은, 이 이상들이 사회주의의 구호들 뒤에 감추어져 있다하더라도, 힘에 의해서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사회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혁명을, 그리고 삶의 조건들의 개관적 변형을 동시적으로 동반하는 존재자들의 영속적 긴장을, 대가로 실현될 것이다. (J. Lagneau)
# [아마도 라뇨(Janina Lagneau-Markiewicz 1938-1987.[마흔여덟])가 이 항목을 편집 초기에 썼을(참여) 것 같다, 아마도 퇴고하지 못한 것을 편집진이 첨삭하면서 무엇인가 잘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일찍 사망하여 퇴고하지 못한 것을 편집진이 수정한 글이 아닌가 한다.(55SNA)]
(4:22, 55TKA)
# 인물들 ***
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8-전348)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서양철학사의 토대를 세우다. 폴리테이아(Politeia)편과 법률편에서 유토피아 사상의 전형을 세웠다.
O
1478 모어(Thomas More, 1478–1535), 영국 인문주의자. 카톨릭성자, 법률가,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 영국 헨리 8세 시대 정치가. 유토피아(L'Utopie, 1516).
1568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 1568-1639) 이탈리아 스틸로 태생 프랑스 파리에서 몰. 이탈리아 도미니크 수도사, 철학자. 태양의 도시(Civitas solis, 1623(La Cité du Soleil).
1709 마블리(L'abbé Gabriel Bonnot de Mably, 1709-1785) 프랑스 철학자, 신부. 꽁디약의 둘째 형. 그리스 역사에 관한 고찰들(Observations sur l’histoire de la Grèce, ou Des causes de la Prospérité et des malheurs des Grecs (1766), 법제화에 대하여(De la législation, ou Principes des lois (1776)
1717 모렐리(Étienne-Gabriel Morelly 1717-1778/1782) 프랑스 철학자. 그의 현존과 사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연의 규약(Code de la Nature, 1755)(이 작품을 20세기 초까지 디드로의 것으로 생각했다.)
1743 콩도르세(Marie Jean Antoine Nicolas de Caritat, 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프랑스의 수학자, 정치가. 처음에는 수학을 연구하여 과학 아카데미의 상임서기,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다. 튀르고의 친구가 되어 사회와 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1760 생시몽(Claude-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1825) 프랑스 철학자, 경제학자.
1760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 1760-1797) 별명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 프랑스의 혁명 시대의 정치 선동가, 필진이었다. 그는 “평등 결사”(Societé des égaux 번: 민중의 사건)로 1796년 5월 10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797년 2월 20일과 5월 26일에 재판을 받았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 붉은 깃발은 이때부터라 한다. 독일철학이 프랑스를 잘 모르는 부분이다.]
1771 오웬(Robert Owen, 1771-1858) 영국 개혁가 사회주의자
1768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열의 분석이론(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 1822) / 수학에서 푸리에 급수(Fourier 級數, Fourier series)는 주기 함수를 삼각함수의 가중치로 분해한 급수다. 대부분의 경우, 급수의 계수는 본래 함수와 일대일로 대응한다.
1772 푸리에(Charles Fourier, 1772-1837) 프랑스 사회주의자. 그는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간주되었다. 새로운 산업 사회(Le Nouveau monde industriel, ou invention du procédé d'industrie attrayante et combinée, distribuée en séries passionnées. Livret d'annonces, 1830 산업적이고 과학적인 무권위 체제(De l'anarchie industrielle et scientifique, Paris, Librairie Phalanstérienne, 1847)
1788 까베(Étienne Cabet, 1788-1856) 프랑스 디종 태생, 미국 세인트 루이스(미주리) 몰. 프랑스 정치 사상가. 1840년 처음으로 공산주의자(« communiste »)로 정의되었다.
1805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운동가, 생애 1/3, 33년을 감옥에 살았다. 그의 사상은 청년 카를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아셰키나제 유태계 출신으로 독일인.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일명) 경철 수고(Manuscrits de 1844 (1844), 포이에르바흐 테제(Thèses sur Feuerbach, 1845),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1848), 자본론 1권(Le Capital, tome I (1867)
1875년 고타 강령에서 “Jeder nach seinen Fähigkeiten, jedem nach seinen Bedürfnissen”(« De chacun selon ses capacités, à chacun selon ses besoins. »)
1820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 철학자. 사업가. 사회주의(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 1880)
1868 아브라모프스키(Edward Józef Abramowski, 1868-1918) 폴란드 인성자유주의 사회주의 철학자(제네바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도, 프랑스에서 공부했다는 말은 없는데). 협동조합주의(des coopératives)에 참여자. 직관의 심리학 연구. 사적 유물론과 사회 현상의 원리(Le Matérialisme historique et le principe du phénomène social, 1898), 정상적 잠재의식: 새로운 실험적 탐구(Le Subconscient normal : nouvelles recherches expérimentales, 1914).
1874 레닌(Vladimir Ilitch Oulianov, dit Lénine (Ленин), 1870-1924) 러시아 혁명가 이론가, 정치가, 국가수반. 무엇을 할 것인가?(Que faire?, 1902)(1901완성), 유물론과 경험론 비판(Matérialisme et empiriocriticisme, 1909)(1908완성)여,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L'Impérialisme, stade suprême du capitalisme, 1917), 국가와 혁명(L'État et la Révolution), 공산주의의 유아병(La Maladie infantile du communisme (le « gauchisme »), 1920)
[호찌민(Hồ Chí Minh, 1890-1969)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 독립운동가, 정치인, 초대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泽东, 모택동, 1893-1976)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가, 정치인이다. 초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 Rouhollah Moussavi Khomeini, 1900–1989),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혁명가. 1979년의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정치 지도자 겸 종교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 쿠바의 혁명가, 정치인]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2022)가 어제 세상을 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1991년에 해체하였다. 31년이 지난 러시아는 푸틴(Vladimir Putin, 1952-)에 의해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제국의 탈영토화의 변방에 있으면서 자본의 재영토화에 저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섭근평, 1953-)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제국에 강하게 대항하고 있다. 중국이 자본에 포섭되는지, 미국이 체제를 개편하는지는 다음 10년(2030)의 드라마 과정이 될 것이다. - 세월은 동일한 인간을 남겨 놓지 않는다. (55SNA)
-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전대)가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폐막했다. 이번 전대에서 시진핑 주석은 20기 중앙위원 명단에 오름으로써 3연임을 보장받았다. 시진핑의 3연임은 단일체제로 장기집권을 길을 열었다고 하는데, 미국과의 극한 대립으로 성립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후진타오(胡锦涛, 호금도, 1942-)에 이어 세대교체로 또는그의 나이로 보아 그의 체제가 오래 계속될 것 같다. (55u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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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뇨(Janina Lagneau-Markiewicz 1938-1987)[마흔여덟] 보르도 2대학 사회학 교수, 폴란드 출신, 1962년 바르사바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1967 파리 대학박사, 1987 국가박사. - 세상을 뜬 후에 이 사전이 나와서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라뇨(Janina Lagneau, ?-? ) “La classe dirigeante”, Pouvoirsn°06 - L’Union soviétique - septembre 1978 – p.31-42
(6:29, 55TKA) (6:35, 55UMH)
*참조1
푸리에 시리즈(Série de Fourier, 푸리에 급수)
푸리에는 도지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열의 전달 방식을 연구했고 열이 퍼져 나가는 상태도 파동으로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푸리에가 관찰한 파동은 매우 복잡했지만 주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즉 , 같은 형태의 파동이 거듭하여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 푸리에는 1807년 12월 21일에 열 방정식과 푸리에 해석법을 최초로 소개한 논문을 과학 학술원에 제출합니다. 지도교수 라그랑쥐와 라플라스는 푸리에 논문의 약점을 정확히 지적합니다. 1811년 수학상은 결국 푸리에에게 돌아가지만 논란이 계속되어 과학 학술원은 푸리에의 논문을 공식적으로 출판하지 않습니다. 라그랑쥐가 원하는 수준의 세밀한 수학적 증명은 푸리에의 제자인 디리클레(Dirichlet, 1805-1859)의 몫이었습니다. / 푸리에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열 문제를 풀기 위한 푸리에 급수는 50년 후 전자파 방정식을 풀기 위한 표준 방법론이 되었고 약 100년후에는 무선통신을 위한 기본도구가 됩니다.
스마트 폰의 시대
2007년 1월 9일, Apple은 부드럽고 유연성 있는 UI 및 OS, 각종 센서를 장착하고 다양한 앱을 제작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인적 서비스적 환경이 구축된 iPhone을 출시하여 스마트폰의 정의를 재정립했다.
2010년대 초반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진행되면서,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이 파생시킨 모바일 문화의 영향을 받고 이러한 문화에 익숙한 세대를 스마트폰 세대로 부르게 되었으며 다른 말로 이들을 Z세대라고도 칭한다. / 2011년 이후로 스마트폰 네이티브 세대
## 참조2: 프랑스 변역(變易)의 세기 인물들
1743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쉰]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1757 카바니스(Pierre-Jean-Georges Cabanis 1757-1808) 프랑스의 철학자, 생리학자.
1757 에베르(Jacques-René Hébert 1757-1794) 필명은 Père Duchesne.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 언론가. 극좌 혁명파(untra révoluionaires)의 지도자
1758 로베스피에르(Maximilien-François-Marie-Isadore de Robespierre 1758-1794)[서른여섯]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로 프랑스 혁명의 주요인물.
1759 당통(Georges-Jacques Danton 1759-1794) 프랑스의 혁명가․웅변가.
1760 바뵈프(François Noël, dit Gracchus, 1760-1797)[서른일곱] 프랑스 혁명가이자 이론가이다. 1760년 프랑스 생깡땅(Saint-Quentin) [프랑스 북동부 삐까르디 지방(Picardie)의 에슨(Aisne, 02)의 부도시, 즉 제2도시]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이 사그러지는 1797년에 방돔(Vendôme) [프랑스 중서부 오를레앙지방(Orléanais)의 르와르 에 셰르(Loire et Cher, 41) 도의 부수도]에서 사형 당했다. [소작농층의 해방을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물의 국가 관리에 의한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1760 생시몽(Saint Simon, 1760-1825) 프랑스 철학자, 경제학자, 군인. 1817년 꽁트(Comte 1798-1857)가 생시몽의 비서였다. 제자들: O. 로드리게, P. 앙팡탱, SA. 바자르
1767 생쥐스트(Louis Antoine Léon de Saint-Just, 1767-1794)[스물일곱] 프랑스 혁명의 정치가. 쟈꼬방의 산악파(Montagnards). 별명: “혁명의 대천사(L'Archange de la Révolution)”. 프랑스 혁명과 헌법의 정신(L'Esprit de la Révolution et de la Constitution de France, 1790) 공화국 제도의 단상들(Les Fragments d'institutions républicaines, 1793)(미완성)
1771 브리오(Pierre-Joseph Briot, 1771-1827) 프랑스 혁명가, 정치인물. 브장송 프랑마송 회원, 카르보나리 회원(des Bons cousins charbonniers du rite du Grand Alexandre de la Confiance)
1772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자유로운 생산자의 협동조합인 팔랑지(phalanxes)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1788 카베(Etienne Cabet 1788-1856) 프랑스 사회주의자, 1788년에 프랑스 디종(Dijon)에서 태어나 1856년(68살) 미국의 미주리(Missouri)주의 세인트 루이스(Saint Louis)에서 세상을 떴다. 카르본느리 당(Charbonnerie)의 신봉자로서 그는 1830년(52살)에 군주제에 반대하여 봉기운동에 가담하였다. 이카리 여행(Voyage en Icarie, 1842), 난 공산주의자(Comment je suis communiste, 1840)
1789 프랑스 대혁명
1789년 베르사이유에서 랑쥐네(Jean Denis, comte Lanjuinais, 1753-1832)와 르 샤플리에(Isaac René Guy Le Chapelier 1754-1794) [둘 다 브르타뉴 지방의 렌느(Rennes) 출신이다]에 의하여 브르똥 클럽(Club breton)이란 이름으로 창설된 혁명 조직(Société révolutionnaire)이 생겼다. 이 클럽이 쟈꼬방당이 된다.
1789년 9월 마라는 인민의 벗(Ami du Peuple)지(紙)를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참여를 고취하였다.
1789년 10월. 제헌의회(Assemblée constituante)와 동시에 파리에서 세워진, 이 혁명조직(Société révolutionnaire)은 헌법동지회(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이란 이름을 취했으며, 생-또노레 거리의 도미니크 수도원의 구내식당에서 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쟈꼬방(jacobin)이란 이름이 유래한다.)
1796 평등 선언(« Manifeste des Égaux » 1796)과 더불어 바뵈프는 이탈리아출신 부나로띠(Philippe Buonarroti, 1761-1837), 다르떼(Augustin Darthé 1750-1803), 마레샬(Sylvain Maréchal, 1750-1803 등과 결합하여, 평등당(Conjuration des Égaux) 또는 평등결사(Societé des égaux)를 결성하였다. 1796년 5월 10일 반동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1797년 2월 20일과 5월 26일에 재판을 받았고 단두대에서 바뵈프 처형되었고, 다르떼와 마레샬도 나중에 처형당했으며, 다른 다섯명은 유배당했고, 고발당한 60여명은 무죄 방면되었다. 엥겔스와 맑스는 ‘평등당’을 “실재적으로 활동한 공산당의 첫 출현”이라고 인정하였다(맑스, “프랑스혁명에 관하여”, p.91)
1797 르루(Pierre Leroux 1797-1871) 프랑스 철학자 정치가, 한때 생시몽주의자.
1805 블랑끼(Louis Auguste Blanqui 1805-1881) 법학과 의학을 공부. 19살에 카르보나리.
1809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 프랑스 사회주의자이다.
1811 블랑(Louis Blanc 1811-1882), 역사가, 정치가, 사회주의 프랑스 이론가이다. 1851년에 « De chacun selon ses facultés, à chacun selon ses besoins »
1814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 러시아의 혁명가,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 사회민주동맹을 설립,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인이다. 인간의 자의식이 자유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보다, 사회라는 공시태가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역사적으로 자유를 점점 더 실현한다고 보았다.
1819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1871년 파리꼬뮨에 참여했다.
1821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Mikhail Petrashevsky, Mikhaïl Petrachevski 1821-1866) 러시아 공상주의 활동가. 1844년부터 자신의 아파트에서 매주 금요일 서클(Le cercle de Petrachevski)을 조직하였다. 1849년 체포되었다.
1824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용담유사(龍潭遺詞)』『동경대전(東經大全)』
1825 라살레(Ferdinand Lassalle 1825-1864) [유태인] 독일정치 인물.
1832 발레스(Jules Vallès, 1832-1885) 기자, 작가, 극좌 정치가. Le Cri du peuple 창간. 파리꼬뮨 참가, 사형언도 후 런던으로 추방(1871 à 1880).
1837 계절사(La Société des saisons, SDS). 쟈꼬방 경향의 공화연합, 블랑끼(Auguste Blanqui 1805-1881), 바르베스(Armand Barbès, 1809-1870), 베르나르(Martin Bernard, 1808-1883)에 의해 1837년 창립 1839년 봉기 좌초 후 해체. 회원 1500명.
1839 샤를 롱게(Charles Longuet, 1839-1903) + 제니 맑스(Jenny Marx, 1844-1883)와 결혼, 국제노동자사회당(SFIO)
1842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 프랑스 사회주의자. 파리꼬뮨 참가. 맑스(Marx, 1818-1883)의 사위. 프랑스 존엄사 클럽은 그를 존경한다.
[1848년 2월 제2공화정 성립 후, 18485월 26일 블랑끼는 중앙공화파결사(la Société républicaine centrale)를 조직하여 폭력을 행사했다고 체포되었다. 벵센 감옥에 갇혔다.
1858 발레뜨(Alfred Vallette, 1858-1935) 프랑스 문필가, 편집인 Mercure de France지 창간. 그의 팔랑스테르 (son « phalanstère » situé à Corbeil)에 쟈리가 자주 갔다.
1860 최제우 동학 공동체 제창.
1871 파리꼬뮌: 3월에서 5월까지 파리꼬뮨, 이 전대미문의 파리 독립공화국은 71일간의 짧은 기간을 지속하며 정부군의 공격에 처절히 저항하다 붕괴된다.
1871 제3공화국 (Troisième République, 1870-1940) 성립
1876 장 롱게(Jean Longuet, 1876-1938)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가. 맑스의 외손자(제니 맑스의 아들: Charles Longuet (1839-1903)+Jenny Marx(1844-1883).
1946 제4공화국(Quatrième République française, 1946-1958)
1958 제5공화국(Cinquième République, ou Ve République, 1958-) 1958년 10월 5일부터 상당히 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하원과 상원으로 이루어진 의회와 정책을 도입하는 이원집정부제다.
(9:29, 55U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