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 비와 그대 -
고엽
- 길영수
차곡차곡 숙성되고
부식되어 간다
화려한 시간들과
숯덩이 같은 욕망들
뜨거운 눈물 부스러기들이
헛웃음처럼 날아가고
갈색의 영혼들이
시린 숲에 차분하도록
누워 있다
돌아보면 돌아보면
굽이굽이 황톳길
한참을 걸어왔구나
이제는 바래진 고엽으로
싱싱한 그늘 아래
고이 삭을 뿐이다
*길영수 : 2005년 ‘문학예술’ 등단, 작품집 ‘꽃도 우는가’ 등
비가 몹시 내렸다. 늦가을 비는 젊은 청춘에게도 나 같은 사람에게도 삶의 의미와 퇴색을 생각나게 하는 쓸쓸하고 우울한 편지였다. 나는 우산도 없이 그 편지를 읽고 싶어 무작정 중앙동 거리를 걷고 있었다. 토요일이었지만 나는 사무실에 나와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하려는 중이었다. 승용차는 정비를 위해 아침에 집 근처 정비업체에 맡겨 둔 상태였다. 아침에 나올 때까지 비가 오지 않았음으로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였다. 지하철까지 거리가 있어 무작정 걷고 있던 차였다. 어제 술자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 몹시 출출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간단한 분식집을 발견했다. 직장인들이 없는 토, 일요일은 근처 식당이 문을 열지 않는데, 참으로 행운이었다. 그때였다.
“과장님!”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시간에 사무실 직함을 부르는 이가 누군가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정유희였다.
“유희 씨? 어쩐 일로.”
“과장님이야말로 토요일에 웬일이세요? 비도 오는데 그냥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안 계시구요.”
그녀는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얼른 이리 들어오세요. 비가 많이 오잖아요.”
그녀는 내 손을 끌어 자신 쪽으로 날 당겼다.
“나야 뭐, 할 일이 있으니까 사무실에 나온 거지. 유희 씨는?”
“저도 아직 뭐가 뭔지 몰라 사무실에 있었어요. 창밖으로 보니까 과장님이 우산도 없이 가시길래, 나도 모르게 따라 나왔지 뭐에요. 불쌍해 보여서요.”
그러면서 그녀는 깔깔 웃었다.
“업무는 다 파악했어요?”
“아뇨! 아직요.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해야죠. 그런데 과장님. 지금 이 분식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래요. 어제 많이 마셨더니, 속도 불편하고 출출해서. 어떻게, 같이 갈래요?”
그녀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좋아요. 그런데 장소를 옮겼으면 해요. 저도 바다가 있는 무산에 왔는데 바다가 보고 싶거든요. 여기서 자갈치란 곳이 멀지 않다면서요?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녀는 그 말을 하고선 얼굴이 빨개졌다. 자세히 보니 오늘은 화장도 하지 않아 처음 본 날처럼 수수한 차림이었다. 나로서는 그녀의 제안이 당연히 싫지 않았다.
“그러지 뭐. 그런데 여기서 걸어가려면 조금 먼데 우리 택시 탈까요?”
그러자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아뇨!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걷고 싶어요. 그래야 운치 있잖아요.”
그녀의 기발한 제안에 나는 기꺼이 그녀와 우산 하나로 목적지까지 걷기로 했다. 문 닫은 상점과 텅 빈 빌딩 사이로 우리는 때론 사선으로 내리는 비를 맞기도 하고 몸을 피하기도 하는 등 우산 속에서 즐거워했다.
“어제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창작시를 인터넷으로 봤어요.”
“내가 그런 말도 했어요?”
“시인이란 말은 제가 처음 오는 날, 연희에게 들었어요. 어제 술자리에서 과장님이 제게 창작시 제목을 말씀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유심히 봤죠.”
그녀의 말에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처음 만난 사이에 내가 나의 시에 대해 말한 것은 사실, 처음이었다. 지금은 쓰고 싶어도 잘 써지지도 않은 시였다. 그녀에게 말한 시는 이태 전, 어떤 공모전에 당선된 내 마지막 시였다.
“어땠어요?”
그러자 그녀는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녀의 목젖이 다 보일 것 같은 웃음에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해졌다.
“제가 어떻게 평가하겠어요? 다만, 끝 구절에 ‘인생이란 어디인가 모를 저 너머를 향해 각자의 돛으로 항해하는 외로운 과정이다’라는 부분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어요.”
“시에 대해 좀 아나 봐요.”
“아뇨. 학교 다닐 때 영문학을 전공하여 영미 시는 몇 편 읽어봤지만, 시에 대해 아직은 잘 몰라요. 어쨌든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사실, 내친김에 과장님 블로거에서 통기타 치는 동영상도 봤거든요. 전, 깜짝 놀랐어요. 과장님에겐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돈벌이만 하는 중년 남자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 시에 대해, 나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해주는 이는 신혼 때 아내 외에 그녀가 처음이었다. 비를 타고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이 내게 오는 것 같았다.
“과찬입니다. 나 역시 지금은 먹고살기 위해 여느 사람처럼 직장에 목메 있는 만년과장일 뿐이에요.”
그 말을 하고 나니 나 스스로가 비참했다. 하지만 사실인 것을 그녀의 칭찬으로 기분은 아주 좋았다.
“여기가 자갈치란 곳이에요?”
걷다 보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좌판이나 가게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는 가끔 가던 연탄 장어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아직 술시가 아니어서 그곳에도 한산했다. 좌판 수준이지만 이곳은 천장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바다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훈훈한 연탄이 들어오자 그녀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여기에 자주 오시나 봐요?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할 곳이에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 뭘 먹나요?”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단어, ‘우리’란 말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 지역에서 우리란 우리 집, 우리 아이, 우리 아내 등 그런 의미로 쓰는 말인데, 과연 그녀가 그걸 알고 있는지, 아니면 서울 쪽에서 통상적으로 낯선 사람도 ‘우리’라는 말을 쓰는지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장어와 조개구이 그리고 조개탕을 주문했다. 그녀는 난생처음 먹는 것이라면서도 입을 불어가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삶에 어떤 생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어제처럼 술은 마시지 않았다. 대신 나는 해장도 할 겸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신 후였다.
“유희 씨는 우리 사무실 연희랑 나이가 같죠? 결혼할 때가 되었을 터인데, 왜 아직?”
그녀는 조개 국물을 떠먹다가 내 말에 날 빤히 바라보았다.
“서른도 안 넘겼는걸요. 때가 되면 하겠죠. 과장님이 좋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그럼 할게요.”
이상하게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시간은 금방 흘렀다. 11월 말 때쯤, 미국에서 외자 조달된 군수품을 남도 쪽 어떤 기지로 수송하는 증차한 문제로 군 관계자, 세관 직원, K 관세사 등 여러 관계자가 모여 회의와 수송전략을 세우느라 무척 분주한 날이었다. 통상 이런 경우는 회사에서도 바짝 긴장하는데, 납품 날짜 안에 안전한 운송을 완료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사활이 걸렸다. 국내 최대의 운송업체 D 통운을 따돌리고 우리 같은 중소운송업체가 군수품을 수송한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회사 대표의 로비도 있었지만, 몇 년간 나를 비롯한 여러 직원의 탁월한 업무전략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유희는 빌딩 지하 식당에서 가끔 만나, 인사 정도는 나누었다. 가끔 우리 사무실에 연희를 찾아올 때면 그녀는 내게 들러 커피나 과자 등을 주곤 했다. 어쨌든 한 며칠은 중요한 거래였으니 나나, 그녀는 매일 밤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있었다.
그날도 직원들을 밖에 있는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난 후 사무실에서 막 업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연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과장님. 죄송해요. 유희랑 밥 먹으러 왔는데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부탁하신 기획서 마무리해놓을게요.”
그녀와 통화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벌써 저녁 8시였다. 며칠째 자정까지 젊은 여자를 사무실에 가두어놓았으니 연희 역시 지칠 만도 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인심 쓰듯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 오늘은 유희랑 밥도 먹고 술도 한잔해. 어디야? 그 식당이지? 다 먹은 후에 내 이름으로 달아놔.”
그러자 연희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전화기 너머 그녀, 유희의 목소리도 들렸다.
“과장님도 오세요.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멍하니 컴퓨터만 응시했다. 그녀는 그저 친구로 삼은 연희의 직장 상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해서 오시라, 는 인사를 했을 뿐이었지만, 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한참을 업무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데 사장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그제야 나는 이런 나의 철없음을 꾸짖고 얼른 사장실로 올라갔다.
사장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번 군수품 수송 D-day 날에 날 호송책임자로 지명, K 관세사 직원 한 명과 함께 목적지인 군기지에 다녀올 것을 요구했다. K 관세사 측에서도 이번 사안을 중요히 여겨 통관팀장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호송을 갈 때 담당 대리 혹은 하급직원이 가는 게 원칙이었지만, 사장은 과장인 내가 직접 가는 게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곤, 내 자리로 돌아왔다. D-day는 사흘 후였다.
사무실에 돌아와 내일까지 사장에게 올릴 군수품 수송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그때 휴대전화로 전화가 한 통 왔는데,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얼핏 벽에 걸린 시계는 밤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받을까, 말까 하다, 행여 급한 전화인 것으로 판단하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유희예요.”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사무실로 전화하지 않고 내 휴대전화를 이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유희 씨? 이 시간에 웬일로?”
“과장님. 연희가 술에 많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해요. 나 어떡해요?”
연희라는 말에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희는 솔직히 술을 즐기지도, 잘 마시는 여자가 아니었다. 예전 몇 번의 회식에서도 이런 일이 있어,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유희는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어디에요? 그 식당?”
“아뇨. 식당 맞은편에 있는 카페요. 네, 맞아요. 카페, ‘빨간 우산’”
“알았어요.”
나는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났다. 다 큰 처녀 둘이 술집에 묶여 오도가도 못해서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게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나는 얼른 서류를 정리하고 그녀가 기다리는 카페로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연희는 없고 놀랍게도 그녀, 정유희만 고혹적인 모습으로 혼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