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의 대은인(大恩人) 한국
제 16회 재경 고등부원회에서(1966년1월6일 )
1919년 3월1일 당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한국에 일찍이 없었던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그 운동에 선구자로 활약했던 사람중에 유관순이라는 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혹독한 탄압과 고문을 받고 숨졌습니다. 불과 16,17세정도의 소녀가 '어본존(御本尊)'도 믿을만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오로지 조국을 구하겠다는 결의 하나로 싸웠던 것입니다. 지금 그는 순국의 누나로 존경받고 있고 그를 기리는 노래가 젊은이들 사이에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참으로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교원대 권이혁 총장과의 회담중에서(1987년1월 31일)
한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문화의 은인입니다. 불교는 한국을 통해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은 이미 AD 372년에 대학(大學)을 세워 교육에 공헌했습니다.
일본에 대학이 설립된 것은 8세기로 한국보다 3백년 이상이나 늦었습니다. 이런점을 보더라도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많은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잘 알수 있습니다.
....전쟁전 아버님과 형님이 군대에 징병되어 한국땅 경성 (서울) 과 중국에 각각 머물렀는데 귀국후 아버님과 형님으로부터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군이 한 행동은 너무 잔인했다. 이러한 일이 다시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저 자신에 평화 운동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깊은 사색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형님의 유언이었던 '중.일(中,日)우호'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저는 양국의 우정과 우의를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공헌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절실한 희망은 지금도 아버님의 추억과 더불어 저의 뇌리속에 남아있으며 저역시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양국의 우호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입니다. (중략)
과거에 구애받기만 한다면 진보는 없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운 것입니다. 양국이 과거의 체험을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 끝없는 번영의 길을 향해 나아갔으면 합니다. 머지 않아 양국의 교류는 정치와 경제 차원에서도 더욱 촉진될 것입니다. 또한 문화와 스포츠 분야에 교류는 보다 빈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것에는 '인간'과 '인간', '혼'과'혼'의 교류가 근본에 자리잡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그 깊은 우호의 수맥이 이제겨우 한방울의 물을 뿜어낸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면서 그것은 점점 불어나 조그마한 하천이되고 대하처럼 넓어질 것입니다. 그 세찬 물 흐름소리를 들으며 저의 생애를 장식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교우너대학교 권이혁 총장께 드리는 시 (1987년 8월 3일)
무궁화의 나라에서
열므 햇빛에
청초한 꽃이 빛났도다
늠름하고 고상하게
유구한 역사의 신하르 장식하노라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드니
꽃의 생명은 짧아도
차례로 피고 또 치어
그 이름도 무궁화라 하였노라
아시아의 북동
반마년 역사의 나라가 있도다
신라왕의 금관에 비취의 곡옥(曲玉 옛 장신구의 하나)
그 이름과 같이 아름다운 나라니라
거듭된 침략에도 굴하지 않고
현란한 문화를 구축한 그 나라의 백성
민족의 혼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국화로 하여 사랑했노라
무궁화 삼천리
태백산맥의 산기슭에
백마강의 강가에
마을마다 동네마다 다투어 피었노라
먼옛날 험한 파도를 넘어
무궁화의 나라에서
문화의 꽃을 전해준 사람들이 있었노라
불교전래의 은의(恩義) 영원히 향기로우리
세월은 흘러 무궁화의 나라로 부터
서울의 학도는 창가대학에 유학했노라
조국의학생을 위하여
진심어린 선물을 보냈노라
선물은 5백그루의 무궁화
이십여 종의 묘목이었노라
머나먼 땅으로부터 바다르 건너
창가의 마당에 뿌리를 내렸노라
슬픈 대립의 역사를 넘어
한강의 기적의 나라로 부터
크나큰 희망과 웅지(雄志)를 안고
유학생은 두 사람 세 사람 이어졌노라
1987년1월
권총장이 창가대학을 방문했도다
학장 젊은 학구(學究)와 대화를 하고
다시 반년 후 무궁호의
계절에 만났느니라
교육을 이야기하고
한.일의 역사를 논하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여
우호의 강한 공명(共鳴)이 있었노라
총장의 젊은날
조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노라
오만한 권력은 민중을 박해하고
민족의 자랑을 분쇄하려 했노라
모국의 언어는 금지되고
오랜 역사의 성(姓)은 개명을 강요당했으며
조국에는 자유와 자립의 빛이 없어
혹한의 시대를 보냈노라
광복의 날을 맞이했어도
조국은 분단되고 전화(戰火)에 쫓기어
분단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노라
파란의 시대를 살아온
얼굴에는 지성과 인간성의 빛이 있고
말에는 강한 신념의 울림이 있도다
불행한 대립의 역사는 있었지만
일의대수문화의 유대가 있고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공동의 책무가 있노라
창가대학을 방문했을때
한글을 배우는 일본의 학도
한국노래를 부르며 환영헀다고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젊은 세대 희망의 미래를 위하여
교육의 중요한 사명을 이야기 헀노라
무궁화의 나라로 부터
교육과 평화의 사람을 맞이하여
새로운 우호의 역사는 개막했노라
첫만남이었지만
신뢰와 신의의 마음은 상통했도다
우정의 다리와 우호의 길의
초석이 되고 토대가 되어 구축해 나아가리라
인간과 인간이 혼과 혼이 깊은 교류로 서로가 함께
민중이 마음의 뜰에 아름다운 무궁화를
만대까지 파워 나아가리라
호암미술관 설립자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의 회담중에서(1990년9월 14일)
존경하는 귀국, 한국의 속담 중에는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라는 것이 있ㅅ브니다. 이번 서양회화 명품전이 앞으로 펼쳐질 훌륭한 문화 교류 민중교류의 의의있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느 전 세계의 문화의 길을 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문화의 대은인인 한국에 대해서는 작으나마 이번행사가 그 보은의 일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대은이 있문화 국가 한국에 대해 일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낟. 2차대전 전에 저의 아버님은 군대에 징집되어 서울에 갔습니다. 아버님은 돌아온뒤 일본의 만행에 격분을 했습니다. 중국땅 전쟁터로 끌려가 전사한 큰 형 역시 "일본은 너무 잔혹하다."는 이야기를 하곤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들었던 아버님의 분노는 지금까지 제 뇌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과의 우호에 대해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로지 평화만이 제 사상의 근본이자 출발점입니다. 또한 우호는 저의 신념입니다. 그리고 문화는 그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무기입니다.
다가올 세대를 위해 작으나마 한일간의 진실한 우정과 존경, 공존 공영을 위한 기초를 다져 나가겠습니다.
간사이 창가학원 제 9회 건강제에서 (1990년10얼20일)
한국의 소년 소녀들에게 이야기와 노래로 전해 내려오는 자랑스런 소녀가 있습니다 . 그의 이름은 유관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17세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숨진 신념의 소녀입니다.
이소녀가 살았던 시대는 일본의 무자비한 식민지 지배의 시대였습니다. 문화 대은인인 한국에 일본은 은혜를 갚기는 켜녕 약탈과 압제로 보답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부친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새싹인 아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하여 몇 명의 동지와 함께 학교를 세웠습니다. 소녀의 부친은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재산을 털어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인 일본인에게 견디지 못하고 교육사업은 앞이 막혀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인에게 폭행 당해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진지한 자세를 어린 눈동자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괴롭힌 일본의 횡포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 것입니다.
제 58회 본부 간부회 스피치 중에서(1992년 9월 25일)
지금으로부터 꼭 4백년 전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의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ㅅ브니다. 이후 7년에 걸친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야만스러운 약탈. 폭행, 파괴...죄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도시도 시골도 몹시 황폐해졌ㅅ브니다. 또한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말씀드려 왔지만, 한국은 일본에 문화 대은의 나라입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로부터 여러가지 문화가 일본에 전래되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일본은 더없이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 대은을 짓밟고 이웃나라 사람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ㅅ브니다. 일본은 너무나도 비도덕적으로 인간의 길을 벗어난 만행을 일삼았습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일ㅈ본인의 참략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악업의 역사를 새겼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문화교류, 교육교류를 통하여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 사이에 만대에 걸친 평화와 우호의 길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청년들과의 대화 중에서(1992년 9월25일)
실은 고려 사람들의 몽고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지금까지 무사할 수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몽고(1271년에 元으로 개명)는 고려의 저항을 겨우 진압하고 그 이듬해 일본에 침략군을 보냈습니다. 그때까지 고려사람들은 몽고가 일본 침략을 위한 병선을 만들고 있던 기지를 습격, 파괴하여 침략 계획을 크게 지연시키고 있었습니다. 똫나 일본 침략의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을 요구받자 반도 남단의 거제도까지만 안내하고 현해탄을 가리키면서 "파도가 거칠어 건너가는 것은무리"라고 속였다 합니다. 더욱이 문여의 싸움으로 규슈에 쳐들어 왔던 거대한 함대는 하룻밤의 폭풍으로 괴멸되었는데 그 그늘에는 고려의 조선공들이 일본 침략용 몽고선을 허술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리하게 끌려나왔던 병사들에게도 싸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일본과 한국, 일본과 중국이라는 국가 대 국의 견해가 아니라 세계의 민중과 국가의 권력이라는 관점을 갖는것 또한 중요합니다.
국가주의와 인간주의 민중주의가 양립하기란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특히 진정한 불법자는 어디까지나 민중의 편에 섭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도 그 때문에 국가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았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계승하여 세계의 민중 연대를계속 구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사람들은 강인한 민족입니다. 대륙과 이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ㅅ브니다. 그러나 항상 외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지배 받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수처년ㄴ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일제 식민지 시대(1910~1945년)만이 예외였고, 그것은 굴욕의 시기였습니다. 이 정도로 강한 저항의 역사는 유럽과 아시아 대류 어디를 봐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때 그때의 대화<제9회, 1994년11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에게 강한 일본인 약한조선인이라는 이미지를 강요했던 것도 모두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심으려 애쓴것은 그러니까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도 유지할 수 있고 생활도 좋아지는 것이라고 선전하여 자신들의 참략 행위르 ㄹ정당화 시키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한반도이 자랑스런 역사와 문화를 숨기고 거짓사실을 안팎으로 계속 퍼뜨렸습니다. 일본 문화가 한반도이 은혜에 힘입어 성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벼농사. 청동기, 철기, 토목, 관개기술, 한자 그리고 불교와 더불어 뛰어난 회화, 조각, 음악, 무용, 건축 기술 등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내셔널리즘이 강해지자 한국(조선)숨기기를 자행했습니다. 정사인 일본서기의 서술방식도 그러했고 정확해야할 학교 교과서도 국책에 의해 왜곡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의 상은 여러가지 색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백색을 가장 선호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황국신민화를 한반도에서 추진하면서 한국적인 것은 모두 말살시켜 버렸습니다. 그 중에는 여성의 하얀 치마저고리에 경찰이 먹물을 들여 다니게 한 비도덕적인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밖의 만행은 이루 다 헤이릴수 없습니다. 짐승 같은 행위는 도저히 필설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저의 부친은 군에 끌려가 서울에 체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주 "일본은 정말 심하다. 저 야만스러움, 오만한... 그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21세기를위한 청년과의 대화 중에서<1994년11월>
한국은 일본에 문화대은의 나라입니다. 특히 불교 전래의 대은인입니다. 그 대은을 짓밟은 일본의 만행, 그 죄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미래의 청년들을 위해 문화와 평화 교류고써 양국의 참된 우정과 존경의 길을 조금이라도 열어 가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서양회화 명품전을 개최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 입니다.
경희대 조영식 박사 창가대 방문 축사 중에서 <1997년 10월30일>
조박사와 저는 전 세계에 공통의 친구들을 갖고 있습니다. 토인비 박사도 그 중 소중한 한병의 석학입니다. 4반세기 전 런던에서 토인비 박사와 대화했던 적이 있ㅅ브니다. 대담이 한창 무르익어 가던중 TV에서 어느 나라 총리의 영국 방문이 화려하게 보도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토인비 박사는 초연하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화려하지 않ㅇ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세의 인류를 위한 대화입니다. 미래를 위해 많은것을 이야기합시다!"
지금 우리 인류에게 요구되는 것은 조박사가 외치고 있듯 교육을 근간으로한 'ㅇ니간혁명'이며 '제2의 르네상스'입니다. 성실한 인간교육과 교류는 덧셉이라기보다 곱셈입니다. 그 만남과 교류속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 위해한 창조력을 서로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청년부 간부회 스피치 중에서 <1998년1월 17일>
역사를되돌아보면 7세기 한반도에서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성취한 크나큰 원동력은 한 청년의 용기있는 궐기였습니다.
그 용자는 바로 진천군에서 태어난 명장 김유신 장군입니다.
김유신 장군의 용맹함을 전하는 이야긴 참으로 많습니다. 629년 그의 조국은 고구려 , 백제 , 신라 이 세나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습니다. 엄청난 수의 병사가 쓰러지고 아군의 사기는 약해졌습니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씩씩하게 일어선 이가 바로 젊은 장수 김유신이었습니다.
"전쟁에서는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적진의 급소를 찌르겠다.!" 그는 호자서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돌격했습니다. 그 용맹스럼 모습에 전군이 분기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습니다. 한 사람만으로도 좋습니다. 한 사람의 지휘만으로도 아랫사람들은 큰용기를 내는 법입니다. 수많은 장애를 타고 넘어 승리한 그의 승리의 장군학은 무엇이었을까. 그 하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결사적인 인간이 승리한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병사들에게 호소했습니다.
"한 사람이 결사의 각오로 백 명을 맞서고, 백명이 결사의 각오로 천명을 맞서고, 천명이 결사의 각오로 만 명을 맞선다면 어떠한 싸움도 반드시 일수 있다."고...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필사의 각오를 한 사람은 만군을 이긴다. "는 말과도 통합니다. 김유신 장군은 마음을 합치면 반드시 이긴다.는 진리를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출전하는 그를 보고 왕이 걱정한 나머지 “이렇게 적은 군사만으로 적의 대군과 맞선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지만 김유신 장군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승패는 수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로 결정됩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하여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것도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라고….
오키나와 협의회에서<1998년 2월 27일>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불리는 유관순은 15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잔혹한 고문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너희 일본인들이 우리를 재판할 권리는 없다. 재판 받아야하는 것은 오히려 너희들이다!”라고 외치며 숨져 갔던 것입니다. 약 80년 전의 일입니다. ‘한국의 청년은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는것을 전 세계에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가 투쟁했던 3.1독립운동은 훌륭한 비폭력 투쟁이었습니다. 이른바 ‘혼의 투쟁’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했습니다.
“일본인을 모욕해서는 안된다.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때려서도 안된다. 그러한 것은 야만인이나 하는 행동이다.
이처럼 맹렬한 일본 비판이 또 있겠습니까. 일본인은 언제나 사람들을 모욕하고, 돌을 던지고, 폭력을 사용한 야만인이었습니다. 역사의 사실은 정확히 전달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실을 숨기면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반복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말했습니다.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3.1운동’이 일어나기 20일 전쯤 도쿄에서는 이미 6백여 명의 한국 유학생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더 이상 죽은 듯이 살아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간디 경찰서로 끌려갔지만 이 부르짖음이 조국에 있는 청년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3월1일, 독립선언이 발표됩니다. 당시에 뿌려진 호소문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들 일본인은 어찌하여 이 같은 악의와 배신을 우리에게 보이는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침묵한 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설사 죽는다 해도 우리 자손들이 자유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들은 타국의 인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일본의 국가주의를 절대 용서할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국가주의는 억압당하는 인간은 물론, 억압을 가하는 인간까지 못쓰게 만듭니다.
독립선언문은 또 이렇게 호소합니다.
‘이미 그릇된 길로 접어든 일본을 그곳에서 구출해 내지 않겠는가!’라고. 이것을 아시아의 인권선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곳 오키나와 역시 국가주의의 폭력과 끝까지 싸워 온 역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독립 운동이 한창일 무렵 어떤 공무원이 인력거를 탔습니다. 그러자 인력거꾼은 이 공무원을 꾸짖었습니다. “어째서 당신 혼자만 만세를 외치지 않습니까? 민중이 싸우고 있는데 높은 지위에 있는 당신이 싸우지 않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나는 신분은 낮지만 그래도 한사람의 인간입니다. 어쩌다 개나 돼지를 태울 수는 있을지언정 당신과 같은 사람을 태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민중의 기상입니다. 청년의 불꽃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청년들의 외침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의 청년들에게도 퍼져 나갔습니다.
젊은 날의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 중국의 애국 청년들이 봉기했던 저 유명한 ‘5.4운동’-오늘날 중국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된 획기적인 이 운동은 3.1독립운동에서 나타난 조선 젊은이들의 용기와 기상에 영향받은 중국 젊은이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저 청년들을 보라! 우리도 일어서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중국의 청년들은 한국 청년들의 독립 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무력이 아닌 민중의 외침으로 싸웠다. 비폭력 운동이다. 이것은 ‘세계 혁명사의 개로운 세기’를 여는 외침이다.”
중국의 청년들은 이렇게 외치며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쪽은 일본이었습니다. 한국을 차별하고 계속 지배함으로써 스스로 비 인간화 되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군국주의의 길은 멸망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갔습니다.
여하튼 청년의 외침은 세계를 뒤흔듭니다. 불꽃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빠르게 번졌습니다. 요컨대 일본의 민중은 일본의 권력자라는 진짜 적에게서 눈을 돌리고 본래 자기 편인 이웃나라 민중을 적대하도록 조종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과 민중의 교류야말로 국가주의를 물리치는 근본적인 힘이 됩니다.
특히 이해 관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교육교류, 문화교류,청년교류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은 보배의 나라입니다. 한일간에 보배의 다리를 놓아야만 합니다.
경희대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답사 중에서<1998년 5월15일>
일본인의 편협한 섬나라 근성을 증장시켜 온 큰 요인은 확고한 철학이 부재한 데 있으며 또 국가주의라는 왜곡된 교육에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주의의 철학과 교육의 연대를 세계에 펼쳐 왔습니다. 학원장님의 우인이며 저의 우인이기도 한 로마클럽의 창립자 페체이 박사와도 대담집에서 서로 논했습니다. 긴박한 시대 상황을 정시하면서 “새로운 생명의 철학을 구축하고 흔들리지 않는 인류의 지혜의 기둥을 확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교육의 교류에 의해 낡은 국가의 틀을 벗어나 상호 협력하는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더불어 살아가고 더불어 번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경희대 조영식 학원장과의 대담 중에서 <1998년 5월 17일>
한 일 신시대를 위해 먼저 일본은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귀국은 문화의 대은인 입니다. 불교도 한국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불교는 백제의 성왕시대에 일본에 전래되었습니다. 13세기 몽고 침략 때 고려인들의 저항 운동으로 몽고군의 일본 침략이 저지된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42년이나 계속된 고려인의 저항운동이 결국 몽고군의 일본 침략을 늦춘것입니다. 또한 일본 침략을 위한 병선을 만들던 기지르 ㄹ고려인이 파괴했고 침략선을 건조한 고려의 조선 기술자들이 일부러 허술하게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태풍에 간단히 침몰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교과서에는 쓰여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대은이 있는 한국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번씩이나 침략했습니다.
약 30만명의 병사를 보내 한반도 국토와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경제에도 결정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조차 아직 충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평화야말로 일체의 근본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문을 배워 기술을 깨우치더라도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리면 제로를 곱하는 것 이나 다름없습니다.무의미합니다.
부여군수와의 대담 현창 사사에서<1998년 9월28일>
부여군은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곳입니다. 일본은 부여군과 한국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전세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만 일본인으로서는 한국으로부터 신뢰받는 것이 가장 소중하며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는 동양의 그리스로 비유됩니다. 백제와 그리스는 모두 반도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위대한 문화를 번영시켰습니다. 그리고 백제도, 그리스도 모두 그 민중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르르 띠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항해술이 뛰어나 해외교류를 응대하게 전개했습니다.
섬나라 일본이 이 동양의 그리스인 백제로부터 받은 문화의 은혜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불교는 물론이고 천문학 지리학 의학 그리고 재봉 금속가공 정원예술 약학 음악 회와 등 백제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바다를 건너 그 지혜의 정수를 아낌없이 전해 주었습니다. 한자를 전해 준 것도 백제 사람들이었습니다.또한 일본의 “만엽집”이나 “회풍조”에도 백제인의 시심이 맥동치고 있습니다.
백제의 선인들은 간사이. 규슈. 간토. 호쿠리쿠 등지에 늠름하게 뿌리를 내리고 고도의 문명을 전해 주었으며 아울러 국가의 요직에도 앉는 등 여러방면에 걸쳐 활약의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본의 교육부 장관에 해당하는 높은 지위에서 활약했던 백제의 현자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양국일체의 모습을 일본서기에서도 당시 항간에 흘러다니던 노래를 인용 기록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여성 불교인이 최초의 유학지로 선택하여 공부한 곳도 백제의 수도 부여였습니다. 지금도 오사카르 ㄹ비롯 전국 각지에는 백제 들녘 백제역 백제강 등 백제와 인연이 깊은 지명이나 유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오만한 나라는 이렇게도 큰 역사상의 은의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무서울 정도 입니다. 이전에 여운형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역사를 둘춰 보면 일본은 한국에 문화상의 부채자이다. 일본의 문학. 미술. 공예 그밖의 모든 문명은 모두 한국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일본은 이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언제나 전쟁으로 되갚았다. 사기와 폭력으로 한국을 병합했다. 세계 각국도 또한 신의 없는 일본ㅇ르 꾸짖고 흘겨 보았다.”
그렇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국제 관계에서나 인간 사회에서나 배은망덕이야말고 가장 큰 좌악입니다. 모든 잘못은 은혜를 모르는 오만함과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니치렌의 불법에서는 은혜를 아는 자를 인간이라 일름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를 축생이라 했습니다. 또한 부지은의 무리는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자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은을 최고로 삼고 보은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년이여, 사악한 망은의 무리와 싸워라
저도 반세기 동안 스승에 대한 보은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지은과 보은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고 싶습니다. 청년에게는 정의의 혼이 있습니다. 사악한 망은의 무리와 단호히 싸우는 용기가 불길처럼 타오를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주대학 교수 일행과의 대담 중에서 <1999년1월>
귀국의 민중은 강합니다. 정의를 위해 철저하게 끝까지 싸우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일본인은 그것도 모르고 오만하게도 귀국을 업신여겨 왔습니다.
13세기의 몽고 침략.이에 대항하여 귀국의 국민들은 맹렬하게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침략을 당하고 42년동안이나 삼별초라 불리는 군대를 중심으로 용감한 민중은 최후까지 저항하며 투쟁했ㅅ븐디ㅏ. 고려 왕조가 몽고와 강화를 맺어도 풀뿌리 민중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용자들이 정의의 사람들이 최후의 요새로 삼아 끝까지 싸운 땅이 바로 제주도입니다.
1271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는 제주도를 최후의 전장으로 하여 강대한 적군과 사투를 벌이며 장렬하게 목숨을 던졌습ㄴ디ㅏ.
제주도에는 존귀한 선인들의 불굴의 용기를 현창하는 항몽순의의 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일본인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귀국의 민중이 제주도에서 계속투쟁해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본은 그동안 몽고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일본인은 알아야만 합니다. 절대로 그 은의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의용군의 투쟁이 없었다면 일본에 대한 최초의 몽고 내습은 적어도 3년은 빨라졌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귀국의 민중들은 몽고의 일본원정용 군선을 감연히 부태워 없애 버리고 또 조선소를 습격했습니다. 그만큼 몽고의 일본 내습은 지연되었고 몽고의 세력도 약해졌습니다.
그후 규슐ㄹ 공격해온 몽고의 배가 폭풍우로 인해 맥없이 파멸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몽고에 저항하느 ㄴ조선공들이 일부러 날림공사를하여 배가 파손되기 쉽게 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에 서 추측하건대 귀국의 의용군이 일본에 함께 손잡고 몽고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권력자에게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이 거의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웃나라 민중의 호소에 성실하게 응해가려는 외교력이 없는 데다가 신념도 철학도 없었습니다. 이 같은 체질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때마침 그 당시 우리가 신봉하는 니치렌 대성인은 세계의 정세를 적확하게 파악하시고 당시의 권력자들의 오만함을 정면에서 간하시고 바로잡아 갔ㅂ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귀국을 스승의 나라라고 경애하는 것도 니치렌 대성인이 그렇게 말씀사셨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귀국의 민중에 대해 깊이 가슴아파하시며 고심하고 계셨습니다. 아무튼 귀국의 대은은 너무나도 깊습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역사적 사실 입니다.
7백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는 제주도를 비롯한 귀국의 선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불교인으로서 추선을 기원해 드리고 싶습니다.
일본인은 나약합니다. 나약하기 때문에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국 민중들의 진정한 강인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향해 인간주의의 평화와 정의의 연대를 대학이라는 교육의 차원을 통해 심화시켜 가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일본인이기 이전에 세계 시민입니다. 따라서 저의 몸 속에는 여러분과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은을 입은 귀국을 얼마나 유린하고 지독하게 괴롭혀 왔는지 몳니다.
지도자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이 마음깊은 곳에서부터 귀국에 대해 사죄하고 존경해 가지 않으면 일본인의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최하이며 축생도의 마음이 되고 맙니다. 마음이 멸망해 ㅂ린 나라에 미래는 없습니다.
귀국을 위해 진력해 갈 수 있는가 어떤가 여기에 일본 존망의 시금석이 있습니다. 이점을 저는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명확하게 단언하고 있습니다.
수필 신인간혁명(24)에서
우의의 첫걸음은 진실을 정확이 아는것입니다. 일본인은 이웃나라인 한국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전부터 이래서는 신뢰도 우정도 싹틀수 없다고 우려했습니다. 장래를 위해 젊은 세대에게 한일간 진실한 역사를 전해야만 한다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66년 1월 고등부 부원회에서 수천 명의 고등학생들에게 저는 말했습니다.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일컬어지는 여학생 유관순의 이야기 입니다.
1919년 일본의 혹독한 지배에 저항하여 한국민중이 일어선 3.1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체포되어 옥중에서 산화했습니다.
최후까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독립만세를 계속외치면서 죽어간 숭고한 그의 인생에서 저는 정의와 인도의 길을 걸으며 살았던 청정하고 용감한 한국의 혼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유관순 이야기는 일본의 젊은 청년들의 가슴에 선명하고 강렬하게 새겨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