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나무처럼 푸르른 감각으로 절대 세계를 갈망하는 동경
임선기 시인 첫 시집 출간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임선기 시인의 첫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등단 12년 만에 상자되는 이 시집은 오랜 기간 동안 정진해온 시인의 성숙된 문학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은 끊임없이 매혹되어온 자연의 풍경에 대해 높은 친화력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김소월, 파울 클레, 파울 첼란, 말라르메 등의 예술가들이 지향했던 환상적이고 순수한 세계의 창조를 모색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의 외압과 고통에 대한 날 선 적발이나 고발, 혹은 생태학적 차원의 자연 옹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때때로 영혼과 예술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환기시키면서도 이를 투박한 사실로 제시하지 않으며, 주변을 둘러싼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이를 통해 내적 자유와 절대 세계를 갈망한다.
이러한 시인의 지향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이다. 시인은 나무를 통해 세상을 보고 나무와 함께 세월을 난다. 문학평론가 최현식은 이 시집 속의 나무들을 ‘자아의 시와 철학과 언어를 북돋고 확장하며 수렴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이자 매개체’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매개체의 주변에 적절히 배치된 꽃, 숲, 새, 별, 햇빛, 해변 등은 읽는 이의 자아를 도약시키는 고요한 사색 속으로 이끈다.
어머니 오늘 오후 늦게
한 청년이 나무에 와서,
한참을 바라보다 갔습니다
나무는 이제 세상에 없는
청년의 반짝이는 맨발을
바라봅니다
어머니가 누워서 키우신 나무
제가 누워 온종일 보는 나무에는
검고 가벼운 집이 몇 채 겨울과
나무를 적시는 새의 자장가
언제나 떨어질 자세로 빛나는
휘어진 뼈들
어머니 오늘 오후 늦게
한 청년이 나무에 와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지나서」
한편으로 시인은 나무로 표상되는 절대 존재를 갈망하면서도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삶과 죽음의 원리가 관통하는 섬뜩한 현실을 그 배면에 깔면서 구축된 환상성의 세계는 인간 존재와 언어의 한계를 상기시킨다. 시에 드러나는 현실의 여러 모습은 가난하고 외롭고 우울하며 때로는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낡은 옷” “가난한 집” “싸움터” “먼지 많은 가게” 등은 피로와 절망 속에서 조금씩 허물어지는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시는 결코 절망이나 두려움 그 자체를 노래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이들이 오히려 “수많은 어휘”(「언어의 온도」)를 발견하게 하는 힘임을 깨닫고 세계의 부정성을 더욱 선명하게 되비치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확장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이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많은 예술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소월과 릴케, 엘뤼아르, 말라르메, 발레리, 파울 첼란 등의 시인과 파울 클레, 달리, 로댕 등의 화가는 이성과 진보의 이념으로 무장한 근대성에 맞섰으며 비열한 현실을 예술을 통해 뛰어넘으려 했던 이들이다. 그들처럼 시인 역시 “비틀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의 세계를 엿보려 한다.
파리의 한 골목
젊은 릴케가 비틀거리는 생을 본 곳
근처 육군병원에서 넘어오는 바람에
죽음이 섞여 있다
죽음은 길 건너 맨드라미꽃들에도
피어 있다 구름이 제 그늘을 끌고 지나간다
누군가 흐느끼고
골목의 길들이 한순간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깨진 포석, 장난감 가게, 허공의 알전구들
불빛을 뿌리고 있다
다다르기에
별은 너무도 멀다
시간을 공부하던 친구는 끝내
미치고 말았다
그의 주검을 ‘영원’이
거두어갔다
검게 차려입은 사내들과 여인네들이
서편으로 간다
12월이 온 것이다. ─「12월」
그러므로 이 시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의 개성과 자유의 예술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는, 선량한 사색가이자 참된 산책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다. 문학평론가 최현식은 해설에서 시인을 일컬어 “문명이 빚은 화학비료투성이의 아름다운 인공정원이 아니라 낮은 곳, 숨소리 들리는 곳에 ‘시의 나무’를 심음으로써 그 자신은 물론 우리까지 가난한 비탈길에서 숨을 배우는 지혜와 용기를 경험케” 하는 이로 명명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들처럼 내적 자유와 절대 세계를 향한 푸르른 동경과 순수함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만들어줄 아름다운 시집이다.
저녁의 운동장에서
낙엽이 깔린 긴 숲길을 보았다
저공의 그 숲에 놀던 어린 햇빛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고
쌀알 같은 새 한 마리 조용히 지나간다
이렇게 세상의 화면은 어두워지는구나
나는 붉은 얼굴로
내 발에서 자라는 뿌리 없는 우울을 보며
가난의 개념 같은 세월과 그 끝에 오래된 하늘을
지났다
운동장에 첫눈이 왔다
겨울의 수위실 옆 키 큰 나무야
그 송이들을 저지하지 마라
여러 날 쉽지 않은 추위가 만든 송이들
마냥 차가운 날에
나도 수많은 어휘가 되고 싶다
저기 키 작은 아이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나무를 두드리네
눈이 쏟아지네 ─「언어의 온도」
■ 시집 소개글
시집 『호주머니 속의 시』는 수많은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찬 숲이다. 시 한 편 한 편에는 제각기 다른 표정의 나무들이 서 있는데, 어떤 시는 나무가 시이고, 어떤 시는 나무가 시인의 친구이며, 어떤 시에는 가장자리에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서 있기도 하다. 시인은 세계를, 삶을, 시를 나무로 바꾼다. 시인의 꿈은 모든 것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것을 나무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것은 세월과 세상과 시, 모두 나무인 숲 속으로 나무가 되기 위해 들어가는 것과 같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겨울나무가 잎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서 있는 풍경이 보인다. 풍경이 다가와서 생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풍경이 말을 걸면, 나라는 그 누구는 또 실은 저도 풍경의 일부이면서, 對象을 받아들이는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면서 詩를 생각한다.
겨울나무가 겨울나무와 함께 얼기설기 숲길을 가리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거기에는 미결정 상태의 무수한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의미가 이 무의미하다는 세계를 살아 숨쉬게 하는지도 모른다.
萬象에 봄이 오면 시 아닌 것이 없을 터인데, 나는 그 꽃시절에 오늘의 풍광을 기억하고 싶다. 오늘은 내일의 시이고, 내일은 오늘을 제사 지내는 날이니 시의 언저리를 사랑하는 자에게 삶과 죽음이란 진즉 虛言일 뿐이다.
새삼스레 그런 경계 없는 속에서 즐겁게 만나고 싶다.
■ 시인의 말
들판 위 하늘에 걸리는 노을은
어디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이의 얼굴 같다.
그 얼굴에는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엇이 있어서 묵묵히 걷게만 하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며,
낮의 눈으로는 더는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노을이 진다.
언젠가 저 노을을
부끄럼 없이 만나고 싶다.
2006년 가을
임선기
저자 및 역자소개
임선기
시인 임선기(본명 임재호)는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10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오쉬에서
건조기
수련의
먼지
목화의 방
강화도 어느 조용한 보리밭 꽃사과나무
햇살의 마른 자국이 있는 집
연애 편지
우화의 강
깨끗한 해변의 추억
언어의 온도
제2부
나무와 시
그 어부의 바다
나무가 있는 집
나무 아래로
학교와 정원
여름
나무를 지나서
그 나무
이 저녁에
제3부
서시
새
바르비종
창 1
창 2
바람의 시
나무를 우러르며
石片
기억
꽃
祈禱
아침 숲
詩
제4부
이곳에 살기 위하여
새벽에
가을이 가고
들불
공원
선종
눈
돌체 비타
이국에서 1
이국에서 2
파리 시편 1
파리 시편 2
이국에서 3
12월
소묘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고요와 숲이 불러
제5부
부정의 바다
호주머니 속의 시
홍은동
기계 1
기계 2
밤눈
아침 눈을 보며
꿈속의 나비
어떤 연주회
백록담
여름에 온 시가 보여준 것들
꿈
해설|시의 나무와 깊이의 수렴·최현식
첫댓글 集 축하.
축하합니다.
드디어 첫시집이 나왔군요. 축하! 언제 한번 얼굴이라도 봐야 할 텐데...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