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는 정체성이 다르다 (약1:1~2)
야고보서를 통해 “나는 진짜인가?”의 주제로 몇 주 동안 은혜를 나누려고 해요.
‘왜 야고보서인가?’ 하면은, 야고보서는 성경의 어떤 책 보다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당시의 상황이 우리와 비슷해요.
1장을 보면 시험이 많았고, 2장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고, 3장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수치심과 비참한 마음을 견뎌야 했고, 4, 5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상실감이 컸고, 그래서 성도들이 현실이라는 상황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믿음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는 자들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야고보서는 이렇게 신앙생활하기 힘든 시대에 진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통해 “나는 진짜인가?” 묵상해 보려고 해요.
◆오늘은 첫 번째, “진짜는 정체성이 다르다”에요.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흩어진 12지파들, 그러니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책인데,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해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 말씀에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는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담겨있어요.
야고보는 혈통적으로 예수님 동생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아는 혈육이에요.
교회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수장이었어요. 행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초로 큰 회의를 개최하는데, 이 회의를 야고보가 주재해요. 지금으로 말하면 총회장이었죠.
이때 이방인의 할례문제를 해결해요. 그래서 바울이 야고보를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갈2:9)라고 소개해요.
그렇다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신력을 얻으려면 어떤 소개가 효과적일까요?
저는 책을 살 때, ‘누가 썼나?’를 꼭 봐요. ‘감독이 누구냐? 작가가 누구냐’에 따라 믿고 보는 영화와 드라마가 있듯이 책도 마찬가지에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죠.
그렇다면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예수님의 친 동생이다. 다윗의 후손인 유다지파에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다.”를 말해야 겠죠. 그랬으면 편지의 권위와 신뢰감이 더 무거워졌을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는 그런 소개는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라고만 했어요.
세상적으로 볼 때 내 세울만한 이력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어요.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의 다짐을 볼 수 있어요. ‘나는 하나님과 예수의 종일 뿐이다.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이 다짐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랬기에 모든 것을 접고 이것만을 단호하게 밝혔을 거예요.
★혈육으로 예수님의 동생인 것보다, 예수님의 종인 것이 더 자부심이 크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공회의 총회장인 것보다, 예수님의 종인 것이 더 명예롭다는 거예요.
★내가 세운 업적들보다, 예수님의 종인 것이 더 자랑스럽다는 거예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이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는 이런 정체성이 있어요.
그래서 설교 후 찬송을 94장,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르고 싶었어요. 그런데 부르기 어려워서 다른 곡을 골랐죠. ★어려운 까닭은 곡이 주는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어요.
이런 가사가 있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참 아름다운 가사이고 부드러운 가락이어서 입에 딱 붙지만, ‘이 가사가 정말 내 신앙고백 맞는가?’ 물을 때 자신이 없어요.
‘진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가? 이 세상 부귀가 얼마나 좋은데, 세상 즐거움이 얼마나 재밌는데, 다 버렸는가? 세상 명예, 세상 행복과 예수님을 바꿀 수 없는가? 세상 자라 다 버렸나?’ 물을 때 대답하기 어려워요. ‘그냥 곡이 좋아서 부르는 건 아닌가?’ 싶어요.
혹 유기성 목사님을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서울 선한목자 교회 목사님이죠. 아주 큰 교회이죠. 목사님이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설교 후에 이 찬송을 불렀대요. 그런데 1절을 부르고는 찬송을 중단시켰대요.
입으로만 찬송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거예요. ‘내가 이 찬송을 부를 자격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들으실 때 마음이 어떠실까?’ 생각되더래요.
가사 내용으로만 따지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시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앵무새처럼 가사만 따라 불러서, 도리어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찬송 같더래요.
그래서 찬송을 중단하고 성도님들에게 제안했대요. “이 찬송 가사가 진심이신 분만, 정말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결단된 분만 부릅시다.”
그리고 다시 불렀는데, 반주 소리만 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대요.
그리고 1절이 지나고 2절로 넘어가는데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울음바다가 되었대요.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하셨죠. 집에 가셔서, 이 찬양을 한 번 부르시면서, ‘내가 진짜인가?’를 시험해 보세요.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주 예수의 종인가?’ 시험해 보세요.
★그런데, 만약 이 찬양을 부를 때, 내가 주의 종이라는 믿음이 확증이 되지 않아도, 낙담하지 마세요.
4복음서를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동안 예수님의 후원자, 지지자가 아니었어요.
예수님을 정신병자나 이상한 사상에 물든 철학자로 여겼을 뿐이었죠.
그래서 때로는 형인 예수님을 원망하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어요. 형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와 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본 이후에 달라졌어요.
바울이 이것을 기록했어요.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후15:7,8)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뭉클해져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에게 찾아가셨어요. 형으로도 대접 안하고, 메시야로도 인정하지 않은 동생 야고보에게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요한 한 사람만 빼고 다 도망쳤던 사도들을 찾아가셨어요.
그리고 당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찾아가셨어요.
★예수님이 야고보도, 제자들도, 바울도 내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종으로 변화되었고, 사도들도 종으로 변화되었어요.
★바울도 종으로 변화되었어요.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1:1)
★이들이 종으로 변화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덕분이었어요. 그렇다면 우리도 희망이 있어요.
★우리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어요.
★자랑된 마음으로 자원해서 예수님의 종이 될 수 있어요.
이걸 사모하고 기도해야 해요.
출 21장에 보면, 자원해서 종이 되기를 희망하는 종에 대한 말씀이 나와요.
구약시대였으니, 종들은 신약시대 보다 더 인간 대접을 못 받았어요.
그런데 이들에게도 소망이 있었어요. 출 21:2에서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기록해요.
7년째가 되면,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도록 하는 법이었어요.
노예들은 여기에 소망을 두고, 고달픈 6년을 참고 견뎌내요.
그런데, 이상한 노예도 있었어요. 6년이 지나서 자유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주인의 노예로 살겠다는 종들이 있었어요. 출21:5,6절이에요.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자유인을 포기하고 영원히 종으로 살겠다는 종이 있었어요.
자유를 반납하고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거였어요.
그러면 주인이 송곳으로 종의 귀를 뚫고 귀걸이를 달아 줘요.
귀를 뚫으려는 주인의 손에 몸을 맡기는 노예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분노와 울분과 억압에 괴로워하는 표정이었을까요?
★아니었다. 귀에 구멍을 뚫는 고통이 있었지만, 양 볼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두 눈에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고였을 거예요.
★왜 이런 종들이 생겼을까요? “내가 내 상전과 처자를 사랑하니.”(출21:5)에 답이 있어요.
★먼저 내 상전, 내 주인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에요.
주인이 나를 책임져 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에요.
주인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 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공격과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에요.
내 힘으로 내 자유로 사는 것 보다 주인에게 묶여서 주인의 힘으로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안심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내 처자,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도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안심이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자유를 반납하고 일생을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할 리가 없어요.
★주인이 이런 종을 어떻게 대우할까요? 당연히 평생을 책임져 주지 않겠어요? 처자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야고보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 이라고 말하고,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롬1:1) 이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인으로 사는 것 보다 주님이 종으로 사는 것이 복이에요.
저는 야고보와 바울의 고백 중에 야고보의 고백이 더 좋아요.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도 한 것이 더 좋아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책임지시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더 좋아요.
욕심 같지만, 그래도 영적인 욕심이니 하나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 말씀에 우리 이름을 넣어 보세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신현식”
★이것이 우리의 진짜 고백이 되고,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축원 드려요.
★이 고백을 들으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처자, 우리들의 아내와 남편과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길 축원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