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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좋은 사람 므낫세의 기도(2162.2022.11.6)
대하33:10-13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새 11월이 되었습니다. 금년도 이제는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금년도 이제는 서서히 마무리 준비를 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11월은 추수의 계절이요 또한 감사의 달이기도 합니다. 여름내 땀 흘려 가꾼 것을 거두어 저장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를 하면 수장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교회도 셋째 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 동안 기도로써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금년도도 끝이 좋은 해로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중에 끝이 좋지 않은 왕들이 있습니다. 초대왕 사울을 보면 대단하게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자식도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여러 왕들이 있지만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다 보면 초기에는 아주 나쁜 왕인데 마지막은 아주 좋은 왕으로 끝을 맺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오는 므낫세왕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믿음에 서서 쭉 잘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늦었지만 다시 돌아 와 믿음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므낫세는 후자입니다. 므낫세는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다윗에서 예수님까지의 족보에 듭니다. 55년간 통치하게 되었는데 역대 왕 중에 최장기간을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유다의 14대 왕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통치한 왕입니다. 그러면서 유다 나라에서 가장 악랄한 왕입니다. 유다 모든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을 뽑으라 하면 므낫세를 뽑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같은 악한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악한가를 보십시오. 2절에 악을 행하여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것을 본받았습니다. 바벨론에서 섬기는 신을 섬깁니다. 이방 종교문화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헐어 버린 신당을 다시 짓고 바알 단을 다시 세웠고 아세라 목상과 일월성신을 숭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몰렉에게 번제로 드렸습니다(6). 이 얼마나 잔인한 왕이며 무지 몽매한 왕입니까? 그의 정책을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했습니다.(왕하21:6)
히스기야의 아들인데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이사야가 열심히 기도합니다. 생명을 15년 연장받게 되었고 그 때 므낫세를 낳았습니다. 만약 죽었다면 므낫세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죽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를 가장 악한 왕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왕하21:9). 그런데 이 악한 왕이 오늘 성경에 보면 끝이 너무나 좋습니다. 포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14절 이하에 국방을 든든히 합니다. 종교 개혁을 합니다. 평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20). 끝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면 끝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1.끝이다 생각했는데 좋은 인생을 살게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므낫세를 묵상하면서 므낫세가 그래도 끝이 좋은 사람으로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같이 악한 사람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곱같은 사람이 끝에는 참으로 훌륭한 인격자가 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기꾼 같은 야곱에 어떻게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야곱만 그렇습니까?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이렇게 예수 믿고 살게 된 것 은혜가 아닙니까?
10-11절에 앗스르가 침범하여 나라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는 갈고리에 꿰어 잡혀가는 비참한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종종 갈고리를 입술에 꿰고 두 줄의 쇠사슬로 발을 묶어 끌고 갔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광경이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고 스치스러운 일이겠습니까? 한나라의 왕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보고 있습니다. 처자 있습니다.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앗수르 왕은 과거에 자기가 섬겼던 왕입니다. 그에게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대하33:11) 당시 앗수르 군이 바벨론을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는 징계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참기 힘든 고난과 질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고와 힘겨운 환난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므낫세가 왜 그랬을까요? 어찌하여 부와 영광이 지극했던 아버지의 것을 상속 받으면서 믿음은 이어받지 못했을까요? 그 지극했던 부와 영광을 상속 받을 때 믿음도 상속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다행히도 뒤늦게 철이 듭니다. 늦게나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는 다 털리고 고난당한 뒤에 주께로 옵니다. 그는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그는 여호와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좀 더 일찍 여호와께 돌아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환난을 당하니까 크게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겸손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 지금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님들 중에는 문제 속에서 고통 가운데 계시는 성도님들 계십니까? 가정 문제 때문에, 사업문제 때문에, 고통 받는 성도님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끝이 좋은 사람 만들기 위해 은혜로 주시는 훈련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환난과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환난을 당하고 수모를 당하니까 아주 겸손해져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환난을 당하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끝이 좋으려면 하나님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이시간도 은혜이고, 우리속에 있는 믿음도 은혜이고, 건강도 은혜이고, 직장도 은혜입니다. 우리의 인생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좋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 온 므낫세를 어찌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므낫세를 그 악함을 기억하시고 심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 온 므낫세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므낫세는 악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므낫세는 죄인의 괴수였지만 그가 간구할 때 들어 주셨습니다. 므낫세는 끔찍한 반항아였지만 그가 겸손할 때 하나님은 사랑해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악한 인생이 끝이다하고 회개하고 돌아 올 때 받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13절‘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악한 인생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 받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죄의 원흉이 간구하며 돌아 올 때 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반항아가 겸손하여져서 엎드릴 때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므낫세의 통치는 어떤 통치 였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자였고 망해 가는 왕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쫒아내신 이교이 신들을 끌어 들입니다.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와의 신앙과 반대로 행합니다. 히스기야 29년 통치 다윗의 믿음을 따른 왕입니다. 히스기야는 대하31:20-21절‘하나님과 나라에 만점의 왕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반면 므낫세는 그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악한 길로 행합니다. 아버지가 헐어버렸던 모든 이교도의 신상과 우상을 세웁니다. 바알제단을 쌓고 아세라목상을 제작하며 일월성신을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전 안에도 세웁니다. 하나님의 전의 마당에도 세웁니다. 몰렉신을 섬기고 제사합니다. 사술과 요술, 신접자, 박수를 신입합니다. 자기가 직접 만든 목상을 성전에 세웁니다. 이 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노엽게 하였습니다. 대하33:6절‘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이 일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온 배성을 꾀임에 빠지게 했으며 원주민들보다 더 심했습니다. 대하33:9절‘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므낫세는 잘 되었을까요? 복을 받았을까요? 하나님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므낫세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는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 장관을 보내사 치게 했습니다. 그는 적군에 의해 사로 잡혔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 갔습니다. 적국의 인질이 되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격이 좋지 않은 사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회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잠깐 인정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요즈음은 그래서 회사에서도 얼마나 인격을 강조합니까? 지식적으로 똑똑한 사람보다는 인격자를 원합니다. 인간관계도 끝까지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인격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므낫세를 보십시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므낫세는 포로가 되어 짐승처럼 수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 수난을 겪으면서 므낫세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권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자신이 누리고 있던 부귀 영화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루아침에 짐승처럼 변하는 구나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를 마음대로 죽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로가 되고 보니 겸손해졌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의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 했습니다. 겸손 속에 모든 미덕이 들어 갈 때 가치있고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쓸모 있게 되는 것입니다. 끝이 비참해지고 싶으면 교만해지면 됩니다. 쉽게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끝이 좋은 사람이 될려면 겸손해지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끝을 좋게 만들기 위해 겸손해지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왜 그렇게 어려움과 고통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인데 좋은 일만 계속되지 왜 그렇게 어려움을 줍니까? 신8:16절‘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겸손하게 만들어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끝이 좋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롬8:28절‘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에게 질병이 있습니다. 이 질병을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후12:9절에 은혜라고 말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왜 질병을 주었다고 말씀합니까? 고후12:7절‘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그러므로 어떻게 삽니까? 끝까지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가면 갈수록 더욱 겸손해집니다.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낳은 자와 같고(고전15:8),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며(고전15:9), 교회를 핍박한 자고,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한 자이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딤전1:15). 말년에 가면 더욱 겸손해집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렘1:6절‘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여 끝이 좋게 만들었습니다. 겸손하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일에 있어서도 끝을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3.끝이다 생각할 문제 앞에 자포자기 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므낫세는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이제 비극적인 인생을 마쳐야 할 순간입니다. 이 때 무엇을 합니까?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후 그가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 되었지는지 그 기도와 그 기도를 들으신 것을 사기에 따로 기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전에는 기도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포로가 되자 그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면 문제를 당하면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끝을 좋지 않게 끝맺으려고 작심한 사람들은 어려움 당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할려고 자꾸 고집불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므나셋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도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질병에 걸리니까 불치의 병에 드니까 어떻게 합니까?
왕하20:2-3절에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38:3절‘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38:5절‘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리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다가 기도 응답으로 다시 살았을 때 그때 낳은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다시 살았을 때 아들을 낳았기 때문인지 므낫세를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므낫세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 오십 오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렸습니다. 남유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왕이면서 가장 긴 기간을 통치했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잘 섬겼던 선한 왕이었는데 아들 므낫세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았습니다. 바알 우상을 위하여 제단을 세웠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섬겼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아들들을 이방신에게 산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가까이 두기 보다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보다는 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므낫세는 자기가 직접 만든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습니다.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 악행이 그 어느 나라 어느 왕보다도 심했습니다. 여러분!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하신 일들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동참하도록 힘으로 강제했습니다.
왕하 21:16절‘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낫세는 악을 행한 것 외에도 죄없는 사람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다 죽여 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무죄한 자의 피가 가득했다니 얼마나 피해자가 많았다는 것입니까?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얼마나 므낫세를 증오하고, 저주하며, 그의 비참한 최후를 바랐을까요?
여러분! 므낫세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많은 악행을 일삼았기에 그가 행한 그 악행들로 인하여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하는 것으로 그의 삶이 마감되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나쁜 결말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흉악한 죄인조차 신속하게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항상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경고하심으로 그들에게 피할 기회를 주십니다. 악인의 죽음일지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멸망의 문턱에 놓인 악인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알리시고 죽음과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아쉬워 많은 선지자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듣지도 않을 사람에게 경고하신 것일까요? 악인들을 살리려고 의로운 선지자들을 죽게 하시니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자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전부를 기꺼이 희생하는 분이십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찾지도 부르지도 않는 사람들을 굳이 찾아가 홀로 끝까지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희생시키며 므낫세와 백성들을 찾아가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살리려고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생명까지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희생을 감수하시며, 수없이 경고했지만, 므낫세왕과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막으면 막을수록, 오히려 더 큰 악행을 보란 듯이 행했습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므낫세를 막을 방법이 이제 더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5:4-5절‘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순종하는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약탈자를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을 노리던 약탈자는 원래부터 있었습니다. 그동안 침략당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바로 지금까지 그들을 보호하던 울타리와 담을 걷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보호막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멀리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떠나버린 이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울타리, 하나님의 보호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없이 경고하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국방을 소홀히 한 까닭에, 바벨론의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으니까, 쉽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므낫세 왕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제 므낫세 왕에게는 상황을 돌이킬만한 방법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운이 좋아 살아난다 해도 수치스러운 삶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삶은 수치스러운 삶일 것입니다. 지금껏 그가 행한 악행들을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통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행을 행하였으면 그런 수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여 끌려온 므낫세 왕이 바벨론 왕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바벨론에 끌려간 므낫세는 바벨론 왕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수치스러운 삶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므낫세의 삶이 우리의 생각대로 그렇게 끝나지가 않습니다.
오늘 므낫세를 보십시오. 아무리 악한 왕이지만 회개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들어 주십니다. 12-13절‘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므낫세 왕이 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바벨론 왕에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구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겸손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므낫세 왕은 유다 땅에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 기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어떻게 기도할 생각을 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생각을 했을까요? 사정이 급하다 보니 아버지 히스기야의 기도가 생각났을까요? 죽기 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어쩌다 한번 불러본 것일까요? 죄우지간 므낫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므낫세는 그렇다치고 하나님은 므낫세의 외침을 들어주실까요? 므낫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그에게 응답해 주실까요?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 했던 사람, 돌보라는 백성은 돌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죽였던 사람, 그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시라도 응답하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므낫세는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신세가 되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므낫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실마리가 므낫세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으로는 므낫세가 설령 하나님께 겸손하게 기도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므낫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므낫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므낫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므낫세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므낫세가 어떤 사람인데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까’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 오셨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므낫세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기도에도 반드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므낫세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고, 다시 왕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자격없는 자라도, 기도하기만 하면 받아 주십니다. 소망없는 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격을 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응답여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 여러분!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해 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시고,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비록 자격없는 자의 기도라 할지라도 기도하기만 하면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 응답하여 주십니다.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지금껏 그가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하나도 묻지 않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 옆에 있던 강도가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행위를 묻지 않았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다시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13절에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왕위를 복귀 시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였습니다. 기도하면 이런 일이 잃어 나는 것입니다. 회복됩니다. 일어서게 됩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간증 거리가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한 번 기도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이루어질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므낫세를 포로에서 풀어 주었고 다시 자리를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왕이 되어 통치하며 개혁을 단행하다가 왕이 된지 55년 67세에 죽어 선조들의 묘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유능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3절‘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고 했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 므낫세 왕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가 예전처럼 살았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았을까요? 그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뒤에 행한 일들이 14-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는 성벽을 쌓고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두었던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우상의 제단들을 파괴했습니다.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후 그가 죽고 난 후에는 그가 행한 악행들을 비롯하여 그가 하나님께 한 기도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인생은 전반보다 후반이 더 좋아야 합니다. 어차피 천국가는 인생이 아닙니까? 가면 갈수록 더 좋아지는 인생 끝이 좋아 지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전적으로 바라보며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간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도 끝이 좋아지는 인생 될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의 가정도 가면 갈수록 좋아질 것이고 교회도 가면 갈수록 좋아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사업도, 직장도 가면 갈수록 좋아 질 것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기도하실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기도하면 회복됩니다. 기도하면 다시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하면 끝이 좋아집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는 시작보다 끝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므낫세 처럼 지금은 비록 미약하고, 상황이 좋지 않지만 우리 모두에겐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들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과 명성을 받는 남은 자가 바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