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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법사 영축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절로절로
대자은사(大慈恩寺)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인 628년 황태자가 모후(母后)인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하여 산시성[陝西省] 창안현성[長安縣城]의 남팔지리(南八支里)에 세운 고찰.
이 절은 천축(天竺)을 다녀온 현장(玄裝:602~664)이 있었던 곳으로, 고종(高宗) 때인 652년 현장의 발원(發願)으로 대안탑(大雁塔)이라는 7층전탑(七層塼塔)이 건립되었다. 이 탑은 기단의 각 변이 42m, 높이가 54m에 이르는 서역식(西域式) 불탑으로, 각 층마다 사리를 봉안(奉安)하였는데, 그 후 삼장법사(현장)의 전기인《자은전(慈恩傳)》과《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명상(瞑詳)의《대당고삼장현장법사행상(大唐故三藏玄裝法師行狀)》등의 서책이 보존되어 있었다.
648년 당 고종이 세운 자은사는『서유기』의 주인공 현장(玄裝 602~664) 법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 손에 육환장을 단단히 움켜진 현장법사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다부진 어깨에 굳게 다문 입술, 앞을 응시하고 있는 깊고 그윽한 눈길은 그 옛날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위대한 고승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현장삼장법사(602~664)
17년간 서역 곳곳 순례
현장법사는 17년간 무려 2만5000km에 이르는 구법여행과 이후 20년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75부 1,335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경전을 번역했다. 이러한 현장법사의 역경불사에 힘입어 불교는 비로소 동아시아에 깊이 뿌리 내리고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가 쓴『대당서역기』는 130여 개국의 지리, 역사, 문화, 종교, 풍속, 정치, 경제 등을 기록한 것으로, 실크로드의 핵심적인 연구 자료이자 오늘날까지 실크로드를 탐사하는데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602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태어난 그는 둘째형 장첩 스님의 영향으로 13세의 나이에 승가고시에 합격해 불문에 귀의했다. 그때 이미 “출가란 무위법(無爲法)이다. 애들 장난만 하고 있다가는 백년을 허송세월하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하듯, 스님은 출가 후 마른 논이 물을 빨아들이듯 수많은 경전을 배워나갔다. 천재적인 두뇌에 침식을 잊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한 스님이 스물 셋 구족계를 받을 무렵에는 중국에서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런 스님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것은 28세 때인 629년, 의역으로 인해 온갖 해석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통해 오류들을 바로 잡겠다는 서원에서 비롯됐다. 스님은 여러 차례 관청에 청원서를 올렸지만 허가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현장 스님은 마침내 국법을 어기고 성문을 빠져 나갔다. 뒤늦게 스님이 빠져 나간 것을 눈치 챈 조정은 그가 중국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스님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뛰듯이 길을 재촉했다.
스님은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 등을 보며 전진해 나가야 했으며, 화살 세례를 받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길을 헤매기도 했다. 당시 당나라의 최전방인 옥문관을 지나자 이미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각국의 왕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젊은 고승 현장은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축을 향해 나아갔다. 그를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각국의 고승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중국의 승려는 섣불리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인도에 가도 저 젊은이 같은 이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논쟁에서 진 승려들은 현장의 탁월함에 놀라 그를 극찬했다.
그는 란저우(蘭州)를 거쳐 둔황, 하미, 투르판, 카라샤르, 쿠처 등 실크로드 북로를 경유해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쳐 카시미르로 향했다. 그 길은 찌는 듯 한 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거친 폭풍우와 잔인한 도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현장은 손오공과 같은 유능한 제자 하나 없이 ‘발길을 돌리느니 차라리 길을 가다 죽겠다’는 각오로 난관을 극복해 갔다. 그가 최종 목적지인 나란다 사원에 도착한 것은 32세 때인 633년. 당시 나란다는 인도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1만명의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으며 삼장법사로 떠받드는 학승만도 10여 명에 이르렀다. 현장 스님은 이중 최고의 법사로 세친의 법손이었던 계현 스님으로부터 유식사상을 배우는 한편 타학파의 철학까지도 폭넓게 익혔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 뚫고 나오듯 오래지 않아 현장의 명성은 인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나란다의 유명한 논사 사마광도 현장 스님과의 논쟁에서 무릎을 꿇었으며, 인도의 대제왕 계일왕이 주관한 18일간의 대·소승 무차대회에서 현장 스님의 논증을 깬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스님은 대승 측에서는 최고의 존칭인 ‘대승천(大乘天)’이라는 영예를, 소승 측에서는 ‘해탈천’이라는 존칭도 얻게 된다. 또 불교를 대표해 종횡무진 활약한다고 해서 ‘석문(釋門)의 천리마’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인도에서 공부와 성지순례를 마친 스님은 641년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인도 왕의 극진한 배려가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645년 2월 우여곡절 끝에 스님은 경전 520묶음을 20필의 말에 나눠 싣고 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황실과 수많은 백성들은 그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처음 스님의 구법을 막았던 당태종도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했으니 경하 드린다.”며 앞으로 경전 번역에 전념해줄 것을 당부한다. 현장 스님은 처음 흥복사에 머물다가 얼마 후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자은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바로 이곳에 정착해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특히 절을 지을 때 현장 스님도 여러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날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장 스님은 664년『반야경』의 번역을 끝으로 입적하고 만다. 오랜 구법여행으로 인해 생긴 지병 때문이다. 스님은 죽기 전 “나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되 거적에 싸서 산간벽지에 안장해 달라” “죽어 미륵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편안히 눈을 감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짐은 나라의 보배를 잃었도다.”라며 통곡하고는 성대한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다. 백만 명의 울부짖음 속에 떠나는 장례행렬은 대단히 화려했다. 그러나 현장 스님의 유언은 황제도 어쩔 수 없어 시신만은 거적으로 만든 상여에 안치된 상태였다.
삼장법사 인도여행 루트
현장법사가 다녀온 루트를 표기해 놓았다. 현장스님이 다녀온 곳을 표시해 놓은 그림도 있는데 인도의 남방까지 갔었던 모양이다. 현장법사는 승려일 뿐 아니라 여행가였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천축을 다녀오며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정리하여 "대당서역기"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태종에게 진상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중국에서 알지 못했던 인도인 천축과 서역이라고 부르는 중앙아시아의 풍습이나 실정을 아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도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은 천여 년이 지난 먼 후일 명나라 때 서유기라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이며 서안시 남부 안탑구 안탑로 남단에 위치한다. 자은사는 원래 수나라 시기의 무루사(無漏寺)였는데 당나라 초기에 폐사가 되었다가 당태종 정관 22년(648)에 태자였던 이치(李治)가 생모인 문덕황후를 추모하여 새로 건축하여 이름을 자은사라고 하였다.
자은사는 번영시기에 1,897칸의 건축물과 300여명의 승려를 거느린 당대 장안의 이름난 사찰이었다.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대안탑은 당고종 영휘 3년(652)에 쌓았는데, 벽돌은 바깥쪽에 쌓고 흙은 안쪽에 쌓는 벽돌식 탑으로 측천무후시기에 훼손이 심해지자 중수하였다.
명나라 시기(14세기-17세기)에 탑이 다시 훼손되자 탑의 바깥부분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탑은 대체적으로 당나라 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안탑은 인도의 양식에서 벗어나 당나라의 색깔을 드러내려고 노력한 탑으로 중국 불교건축의 걸작이다. 탑의 기단부 남쪽 측면에는 당태종이 지은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와 당고종이 쓴 [대당삼장성교서기(大唐三藏聖敎序記)]가 저수량의 글씨로 상감되어 있다. 아울러 4면의 석문에 새겨진 당대 도안과 불상 등의 선각화는 당나라 시기 이름난 화가인 염립본과 위지을승의 손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모두 7층이며, 전체 높이는 64m이다.
종루에 보관된 안탑신종
종루에는 1548년 명(明)나라 때 주조한 쇠종이 걸려 있다. 무게 15톤의 종에는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안탑의 새벽 종소리를 뜻하는 안탑신종은 관중(關中)팔경이다.
종각에 모셔진 현장스님 상
고루에 모셔진 관음보살 상
인도 아유타국의 문양인 쌍어가 이곳 대웅전의 벽면에 양각 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보수중인 자은사 대안탑
대안탑은 당나라 때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봉해놓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652년 창건당시에는 5층이었다가 측천무후에 의해 10층으로 개수되었다. 그 후 전란으로 위의 3층이 무너져 지금은 7층밖에 없다.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귀국 후 이 사원에서 11년간 채 제하면서 경전을 번역했다고 한다. 현장법사도 직접 일을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현장법사전에 다음과 같이 현장 탑에 대해서 적혀져 있다. '652년 3월 법사는 단문 남쪽에 석불탑을 만들어서 서역에서 가져온 경장을 안치하고자 했다. 그 탑의 사면은 각각 140척이고, 구조는 서역의 제도를 본뜨고 중국 고래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이 탑은 5층으로 탑 위에는 상륜, 노반이 있으며, 높이는 약 180척이나 된다. 층마다 그 속에 사리를 모셨으며 혹은 1천, 혹은 2천으로 모두 만립남짓이며, 3층은 내실을 돌로 만들었다. 탑 남쪽에 두개의 비석이 하남공인 저수량의 글씨로 된 것이다. 기공에 임박하여 법사는 친히 삼태기를 들고 벽돌을 운반했다. 이렇게 2년이 걸려 이 탑은 완성되었다. 이때의 장관을 [자은법사전]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악대와 여러 절의 당장과 비단장막으로 치장하고 1천5백여대의 산거를 5백 개의 장개를 동원하여 5백 폭의 수상과 화상, 금실로 수놓은 5백개의 번, 금, 은상1쌍,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경, 상, 사리를 수레의 장좌에 안치하여 대자은사로 향했는데 전방 좌우로 번간을 세운 커다란 수레에 사자, 신왕을 두어 선도케 했다. 뒤에는 50대의 보배로운 수레에 대덕들을 태우고, 이어서 장안 각 사원의 승려들이 향화를 들고 패찬을 외며 따르고, 문무백관도 시위를 이끌고 따르게 했다. 또한 태상구부의 악대를 행렬 양쪽에서 연주하게 하고 두현의 악대는 뒤따르게 했는데 당번은 하늘로 날려 퍼지고 종과 북소리는 그칠줄을 몰랐으니 아무리 보아도 행렬의 전모는 파악할 수 없도록 끝없이 이어졌다. 천자는 황태자와 후궁들을 거느리고 안복문의 누문에 올락 향로를 받쳐 들고 구경하면서 배웅했고, 장안 사람들은 거리 양쪽에 담처럼 늘어서서 구경하는데 그 수는 억만이었다. 대자은사로 입사 하던 의식이 화려했음을 알려준다.
빌려온 사진
경전을 보존하기 위해 축조된 대안탑(大雁塔 : 따이엔타)
서안 남쪽에 위치한 대자은사(大慈恩寺) 내에 있는 중국에서 유명한 불탑 중 하나로, 652년에 당(唐)나라 현장(玄奬)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7층의 누각식으로 지어졌으며, 총 높이가 64m이다. 외부는 벽돌로 지어졌지만, 탑 내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갈 수가 있다. 매 층의 사방에는 각기 하나의 아치형 문이 있어서 먼 곳까지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당대의 두보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와 본 후 많은 문구들을 남겼다. 탑 내부로 올라가는 데에는 따로 30 위안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또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대 중엽에는 진사에 급제하면 먼저 곡장(曲江), 행원(杏圓)에서 잔치를 한 후에 대안탑에 올라와서 탑 벽에 기념 친필을 남기는 것을 대단한 영예를 여겼다. 유명한 당대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역시 진사에 합격하고 난 후, "자은탑에 친필을 새긴 17명 중 가장 어린 사람이다.(慈恩塔下題名處, 十七人中最少年)"라는 유명한 귀절을 남겼다.
물의계곡 구체구
어딘지 훌쩍 떠나고 싶은 가을. 마침 중국 구체구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나무꾼이 벌목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계곡이 사천성의 구체구이다. 티베트 사람 등 소수민족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고 구체구라는 이름도 마을이 9개 있는 산골짜기에서 유래되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와 환상의 계곡이라고들 한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고 총면적 원시림으로 둘러 쌓여있다. 숲속에는 판다와 금사우 등 희귀 동물이 서식하고 구체구 풍경구와 구체구 황룡구로 나눈다.
성도 공항에서 구체구 공항으로 이동하는 비행기 창밖의 풍경이 멋지다. 높은 산을 휘감아 도는 운해와 고봉사이로 보이는 만설산은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곳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흐리고 비올 때가 많아 비행기가 제 시각에 착륙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오체지
이곳 사람들은 걸어서 황룡까지 간다고 하는데 우리일행들은 고소증 때문에 케이블카를 탄다. 고소증 약을 먹고 휴대용 산소통을 준비하고서 케이블카를 탔다. 황룡내까지 올라가 나무계단으로 30분정도 걸으면 갈림길에서 어지럽고 두통이 심한 사람은 그냥 내려가고 좀 더 올라가면 오채지가 보인다. 너무 아름다워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신이 아니고서는 빚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에메랄드빛의 환상적인 석회암 연못으로 총길이는 7.5km, 연못의 수가 3,400여개나 된다고 하며, 설산의 영봉등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섯가지의 영롱한 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물에 취해 떠날 줄 모르는 사람들 틈에 넋을 잃고 서 있는 나를 재촉한다. 발길을 돌리려니 아쉬움이 남는다.
나무로 잘 만들어진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다랑논 같은 오채지가 수없이 펼쳐지고 흐르는 물소리도 아름답게 들린다. 둑이 높고 낮고 물의 색이 다르게 비쳐지는 신비스런 아름다움, 가다가는 폭포도 만든다. 해발 3,280㎡에 자리 잡은 칼슘 침전물이 내려앉은 용 등이 있어 세신동이라 부른다는 이곳은 선인이 도를 닦던 곳이란다. 유네스코 자연 유산으로 지정한 황룡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황룡사도 둘러 보았다.
첫댓글 멀리 다녀오셨네요. 자은사 잘 봅니다. 모두 건강하시네요^^
시안 순례겸 바람소이고 왔습니다.
늘 건강신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