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뿌리,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 이야기(4)
신흥무관학교,독립군부터 광복군까지
아들아, 계속 이어지는 대한제국군 이야기..
이번에는 경술국치 이후 무장항일 독립투쟁을 주도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밑거름이 된 대한제국군 출신의 전설들을 만나볼까 한다.
가장 먼저 소개할 인물은 항일독립군의 전설..여천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장군은 1883년 평양진위대에 나팔수로 입대하여
1887년까지 복무했었다.
그런데 홍범도 장군은 당시 부대의 군교의 부정부패와 횡포를 견디다 못해
한 놈을 구타한 후 탈영한 전력이 있었지.
이후 종이공장 노동자, 승려 생활을 거치며 함경도와 평안도 북부 일대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산포수 생활을 하게되는데 동료들의 인정으로 산포수 대장까지 올랐단다.
여천 홍범도 장군(汝千 洪範圖, 1868~1943)
1907년 일제가 군대해산 후 총포령을 발표하여 산포수들의 생계가 위협받게 되면서
의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
그의 부대는 산포수 70여 명으로 시작해서 후에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등이
합류하며 1천 여명 규모까지 성장했고 홍범도 장군의 부대는 패배를 몰랐다.
이는 홍범도 장군이 군생활을 해서 전략을 터득하고 군을 지휘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고
그의 부대 편제가 대한제국군의 그것과 유사했던 것을 보면 분명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지.
봉오동 전투(1920. 6. 7)
1910년을 전후해서 홍범도 장군은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어려워 지면서, 만주로..
그리고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에서 독립군 활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연해주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그의 부대는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며 끊임없이 일본군을
괴롭혔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 정규군 대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지.
청산리 대첩 (1920.10.)
청산리대첩으로 충격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으로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각지의 독립군이 러시아령 자유시에 집결했는데..여기에서 러시아 적군과 공산주의계열
독립군과의 노선갈등 으로 우리 독립군이 무장해제 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죽고 다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고, 이때 홍범도 장군의 부대도 큰 타격을 입었단다.
홍범도 장군은 이미 나이가 들어 이때를 기점으로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후진양성에
힘썼고, 1943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의 한 집단농장에서 영면했단다.
우리 무장독립운동의 수많은 별 중에서도 홍범도 장군하면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이라
칭할 수 있는 분이시다. 네가 오래도록 기억할 이름이지.
성재 이동휘 선생
다음 소개할 인물은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 1873~1935)선생이다.
이동휘 선생은 대한제국군 무관학교 졸업 후 육군 참령, 강화 진위대장 출신이시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군을 사직하고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에 전념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하면서 강화 진위대가 봉기할 때 관련인물로 지목되어 투옥되었었지.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선생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했으며 1915년 러시아로
망명하였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엔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과의 대립과 다른 독립운동가 계열과 노선투쟁이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사임 후에는 러시아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는 주역이 되었단다.
이동휘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노선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분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모르는 사람..
오직 독립운동을 위해 소련과의 제휴를 주장했었지.
1935년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이동휘 선생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에 기반을 두고 공산주의 계열이라 하여 폄훼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는 공산주의자 이전에 독립운동가였고, 우리 민족의 독립..
그것을 가장 우선시 했던 분이었다.
남만주 삼천(三天)장군
아들아, 남만주 3천(天)이라는 말 들어보았느냐?
남만주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하던 독립군 최고 지휘관 3천(天)은
경천 김광서(擎天 金光瑞, 1888~1942), 동천 신팔균(東天 申八均, 1882~1924)
청천 지대형(靑天 池大亨,1888~1957)장군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백우 이장녕(白于 李章寧, 1881~1932)장군도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
이분들이 남만주 삼원포(三源堡)에서 모였다.
바로 3천5백여의 독립군, 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요람..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그들은 교관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공헌했고, 그렇게 길러낸 독립군들은
1920년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되고 각지의 독립군과 광복군의 중심이 되었단다.
김경천, 지청천 장군은 일본육사를 졸업했지만,
동천 신팔균과 백우 이장녕 장군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해 육군 정위(현재의 대위)와
육군 부위(현재의 중위)를 역임한 엘리트 장교출신이었지.
동천 신팔균 장군
동천 신팔균 장군은 후에 대한통의부 의용군사령관이 되어 남만주 일대에서 용맹을
떨친 용장이었으나..부대원 훈련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들의 기습으로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부하들을 피신시키고 전투 중 안타깝게 순국하셨으며
백우 이장녕 장군
백우 이장녕 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우리 독립군 최대의 승리였던
1920년 청산리 대첩때 참전하여 공을 세웠는데 후일 1932년, 역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의 습격으로 가족과 함께 피살되며 안타깝게 순국하셨다.
몽호 황학수 선생
또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가 한분 계신데..황학수(黃學秀, 1879~1953)선생이시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졸업후 임관하여 육군 부위(현재의 중위)에 이르렀고,
연성학교 교관출신이시지.
그는 대한제국군 장교 때도 의병탄압 명령을 거부하고, 체포된 의병을 석방하는 등
민족의식이 남달랐고, 군대해산 후 낙향했다가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비서국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서로군정서 참모장과 군무부장, 통의부 군사부장을 거쳐
1930년 한국독립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1941년 광복군 특별당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셨지.
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군에서 시작해서 독립군을 거쳐..광복군까지 그분 자체가
살아있는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역사였다.
계원 노백린 장군
아빠가 마지막으로 소개할 사람은... 계원 노백린 장군이란다.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1875~1926)장군은 대한제국군 정령(현재의 대령)출신,
지금까지 소개한 대한제국군 출신 중 최고위급 인물이고 최고의 엘리트이며..
한국 공군의 아버지라 할 인물이다. 그만큼 대단한 분이시지.
대한제국군에서의 경력은 육군무관학교 보병과 교관,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그리고 연성학교장까지 최고의 엘리트,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할 만하고..
특이점은 러일전쟁 기간중 관전단으로 전쟁 중이던 중국 뤼순 등지를 돌아보며
국제감각도 갖추었다는 것이지.
대한제국군 최고의 명장이 될 재목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한 연회에서 이완용과 송병준 등 역신을 만나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보는 앞에서 그들 역신들을 개취급 하며 워리, 워리하고
불렀지.
이 말을 알아들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격분해서 칼을 빼어들자 노백린 장군도
맞서서 칼을 빼어 들어 결투 직전까지 갔지만, 주위의 만류로 파회하게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그만큼 군인으로서 강직하고 기백넘치는 분이었단다.
경술국치 후 노백린 장군은 갖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넘어가지 않고
망명하여 미국, 블라디보스톡, 중국 상하이까지 떠돌며 독립운동,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했다.
노백린 장군의 비행학교 생도들
특히 미국땅에서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항일독립군을 양성하고, 항일투쟁을 위한
비행사 양성학교를 세웠는데 향후 전쟁은 육군이 아니라 공군력이 좌우한다는 것을
내려다 본 노백린 장군의 탁월한 안목이 돋보인다 할 것이다.
한성과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참모총장으로
평생을 군인으로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며..항일무장독립투쟁에 매진했지.
노백린 장군은 안타깝게도 그 뜻을 미처 다 펴보지도 못하고 1926년 지병으로
상해에서 순국하셨는데..
말년까지 대한제국군 육군 정령 정복을 즐겨입었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정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남대문으로 입성 했으면 좋겠다 하셨지.
노백린 장군은 그 자신도 그랬지만, 가족도 대단해서 아드님이신 노태준 선생도
광복군 제2지대의 핵심 간부를 맡아 활약한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키워내셨다.
아들아, 어떠하냐.
대한제국군이 대한독립군과 광복군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에 이르는
그 흐름이 눈에 보이느냐.
이 자랑스런 역사의 밑거름이 된 대한제국군.
그 의미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하였다.
우리 국군의 뿌리 그리고 그 샘은 무엇이더냐?
아빠가 보건대..그것은 대한제국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잊혀져 가는 이들의 존재를 되살려 기억하고 알리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