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탄생
1939년 8월 19일 프랑스 학가원에서 열린 과학 아카데미와 미술 아카데미의 합동회의에서 파리의 천문대장이자 국회의원인 루이 프랑수아 아라고는 “모든 상을 간직하는 영원한 거울을 발명했다”라고 대중에게 발표했다. ‘다게레오타입’이라 불린 이것은 사진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날부터 파란만장한 사진의 역사가 시작됐다.
화가 루이 다게르가 발명한 이 기술은 얇은 은막으로 코팅된 구리판에 매우 사실적인 이미지는 만드는 것으로, 인간의 눈으로도 관찰하기 힘든 세부묘사까지 가능하다.
‘다게레오타입’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최신식 살롱에서 화젯거리가 된 동시에 프랑스 엘리트집단의 흥미를 자극했다. 프랑스의 한 신문은 “다르게의 업적은 너무도 대단하다. 그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명암의 배합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굉장히 섬세하다. 원근감에 의한 축소도 훌륭하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 그 자체가 아닌가!”라고 찬사했다.
영국의 어느 과학자는 “다게레오타입 사진은 와녑ㄱ하다. 본래의 물체와 거의 똑같은 모습은 마치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고, 육안으로는 알아보기 힘든 세부묘사까지 보여준다. 석회벽의 갈자진 틈, 삐죽이 튀어나온 처마 밑의 장식에 붙어 있는 시든 나뭇잎, 멀리 떨어진 건물에 장식된 조각품 위에 쌓인 먼지들이 경탄할 만한 사진 위에 정확하게 복사되어있다”라며 위대한 발견을 찬양했다.
사진의 탄생이 몰고 온 흥분은 130년이 지난 1969년 인류가 최초로 달 위에 발자국을 남겼을 때의 열광과 견줄 만했다. 한동안 파리의 안경점은 사진용 렌즈와 기자재를 주문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일종의 패닉현상을 몰고 왔다. 사진의 열기가 유럽을 휩쓸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것은 그림이었다. 특히 중산층의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연명하던 화가들에게 사진이 발명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역사 화가 폴 들라로시는 사진의 발견을 두고 “이로써 오늘부터 그림은 죽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들이 몇 개월씩 걸려 제작하던 초상화가 짧은 시간 동안의 화학작용만 거치면 완성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튜디오 사진의 보급과 함께 세밀 초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들은 직업을 잃어버리거나 사진가로 전향했다. 1849년 파리에서 촬영된 초상 사진은 약 10만 장에 달했으며 런던의 사진 스튜디오는 150여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사진이 화가들이 기회를 뺏어간 것만은 아니다. 사진의 역사는 화가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가들은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인물이나 풍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덕분에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나 인물의 모습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사진은 19세기 산업화의 기반 위에 발명된 과학의 산물이다. 사진의 영문명인 Photography를 보면 photo는 빛을, graph는 그림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다.
하지만 사진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사진은 ‘현실을 복사한다’는 뜻으로 의미가 바뀌어 버렸다. 우리나라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진관에서 저렴한 비용을 많은 인물사진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프랑스의 초창기 인물사진가들을 보면 진보적이고 모험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1858년에 기구를 타고 세계 최초로 공중촬영에 도전하거나, 처음으로 전기 조명을 사용해 파리의 야경과 공동묘지를 찍기도 했던 펠릭스 나다르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지운영이나 김규진 등 진보적 성향을 지닌 서화가 출신의 사진가들이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사진술을 전파했다. 특히 유명한 서양화가 출신인 김규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하진관인 천연당 사진과을 1895년부터 운영했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사진의 탄생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빠르게 박전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사진은 더 이상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혁신적인 기술은 아니지만, 모두가 알고 있으며 모두를 추억에 잠기게 해주고, 누구든 자신이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이자 예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