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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시편 27편 1-6절
여호와는 나의 구원, 내 생명의 능력이시라
시편 27편은 “다윗의 시”로 원수들의 공격과 비방이 여전하지만, 그래서 환난 가운데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를 기도하며, 기도에 대한 확신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다릴 것을 권면합니다. 특별히 다윗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를 말하는데, 원수들로 인한 환난 가운데 있지만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환난으로 인한 어려움보다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 일로 있는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집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정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원수들로 인한 공격과 비방, 그로 인한 환난으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가? 그들을 통해 죽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27절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기면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일단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빛으로, 나의 구원으로, 내 생명의 능력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빛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어두움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둡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윗의 상황은 2절에서도 밝히는 것처럼 악인들로 인하여,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로 인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고, 어두움으로 인하여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빛으로 계셔서 어두움을 밝히시고 두려움을 몰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능력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요새 혹은 도피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요새 혹은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상황 자체는 악인들로 인하여,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들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이 살아 있는 요새요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에게로 피하는 자들의 생명을 지탱하고 보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또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하실 때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을 빛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구원으로 고백하고, 또한 하나님만이 생명의 능력이요, 살아 있는 요새요 피난처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수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나타나고 있는가? 달리 말하면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상의 삶 가운데서도 넉넉하게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원리로 말하자면 하나님 지식과 그런 지식이 우리의 믿음으로 자리한다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은 과연 살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은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 하나님인데, 몸을 죽인다고 위협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때문에 두려움 없이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역사적 개혁주의의 내용을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미 개혁된 내용까지 뒤집는 것은 결코 개혁주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의 의미는 이미 개혁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용을 따르지 않을 때 다시금 개혁된 내용을 돌아봐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교리와 실천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개혁교회라 하면 역사 가운데 있었던 진리의 결과물들에 대한 존중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고백서들 혹은 문답들을 살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잘 압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사역의 결과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내용들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잘 압니다. 혹 이런 부분에 있어서 미흡하다면 우리는 이런 내용들을 계속해서 살피면서 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야 할 바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들에 대한 순종 혹은 열매로서 얼마나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학에 있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그에 합당한 열매 또한 분명하게 나타나야 하지만, 개혁주의라고 해서 그런 부분이 잘 나타나고 있느냐?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덜 부패하고, 점과 흠도 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합신 교단이 가지고 있는 이념처럼 바른 신학에서 바른 교회가 세워지고, 바른 교회에서 바른 생활이 나타난다면 좀 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빛이라고 하면 빛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이라고 하면 구원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생명의 능력, 살아 있는 요새요 피난처라고 하면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몰아내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기 때문에 원수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거기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인하여 원수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르 대적한다 할지라도 두렵지 않다, 무섭지 않다는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는 정말 우리의 빛인가? 우리의 구원이신가?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가? 이런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원수조차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 성도로서 세상 앞에 서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 8장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의 아들까지 내놓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주지 않을 것이 없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해서 말씀이 가르치지도 않는 세상적인 것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여기에 넉넉히 이기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아들을 주셨다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할 때 그 핵심은 생명의 보존인 것입니다. 환난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망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우리의 영혼을 멸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1절의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경험했던 사실을 고백합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자신을 향한 하나님 인자하심을 통해 현재,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환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겠다, 무서워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1절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다윗은 여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작은 위협에도 얼마나 흔들리기가 쉬운지 모릅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우리의 믿음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만큼 연약하다는 것을 늘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과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사실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하심이 여전하다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역사하셨던 사실에 대하여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악인들이 과거에서 있었고 현재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자가 현재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지상의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이고, 지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늘 악인들 가운데서 삽니다. 그들은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의 살을 먹으려고 다가옵니다. 살을 먹는다는 것은 사나운 짐승이 연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전투하는 교회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늘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 다시 말해 살아있는 요새요 피난처라고 했는데,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지 않으면 원수들로 인하여 생명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분으로 계시는가?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살을 먹기 위해 다가 오지만, 하나님은 그런 대적들과 원수들을 실족케 하여 넘어지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사나운 짐승이 연약한 짐승을 잡아 먹기 위해 힘차게 도약하지만, 사나운 짐승도 알지 못한 장애물을 만나게 하시든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비틀거리게 하셔서 결국 그들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베푸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능력을 나타내셨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7). 때문에 진리의 말씀 가운데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하고,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사실에 근거하여 다윗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2절에서는 악인들, 대적들, 원수들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군대로 표현합니다. 물론 과거 자신의 살을 먹기 위해 다가온 악인들도 군대로 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할 때는 악인들, 대적들, 원수들이라는 표현했다면, 지금은 군대로 표현합니다. 수적으로는 더 많다는 것이고, 힘 혹은 세력으로는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심적으로 과거는 지났고, 현재는 겪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현재 일에 비하면 무겁기보다는 가벼울 수 있습니다. 혹은 실제로도 과거에 경험했던 것보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든, 현재든 상황 자체는 더 어려울 수 있고, 심적으로도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군대, 진이라는 표현을 통해 원수들의 수가 많고 그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래서 자신을 위협하고 죽이려고까지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은 두렵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조금의 힘도 들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을 치고 있는데, 어떻게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평안을 주시면 두렵지도 않고 태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그런 감정까지 사라져서 무감각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군대보다 크다는 것,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군대가 진을 칠지라도 두려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6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할 때 그 보배의 질그릇을 우리가 가졌다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좀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아야 하고, 그렇게 행하신 일이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이때 믿음을 강화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수준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라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 우리의 능력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 믿는 자에게 능력이 있다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이 있기 때문이요, 그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조차 생명으로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의 죽음조차 생명으로 나타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군대가 진을 친다고 해서, 우리 눈에 그런 군대가 보인다고 해서 보이는 것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 악인들이 넘쳐나고,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게 만드는 대적들과 원수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두려움을 느낀다 할지라도 그들보다 능력이 많으신, 아니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굳건함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다윗은 4절에서 평생의 소원 한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자 하는 다윗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어쩌면 이 시편을 기록하고 있을 때의 다윗의 상황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평생의 소원, 변하지 않는 소원 한 가지가 하나님의 집에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소원은 더더욱 간절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다윗의 이런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악인들, 대적들, 원수들 때문이라고 할 때 그들을 이기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이기고 자신의 왕좌를 다시금 차지하여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소위 왕으로 있다고 할 때 부국강병한 나라를 이루는 것도 다윗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루어지면 감사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 상황은 악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고, 대적들과 원수들로부터 쫓기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고백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다윗 편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있어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에만 계신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이 시편으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집이 아닌 곳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치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말하는 것은, 구약 시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겠다고 하신 곳이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공적으로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고 말하는데,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여호와의 집이라는 외적 건물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건물의 화려함, 건물의 웅장함이 아닙니다. 성전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지만, 성전이 완성되기 전 성막으로 있다고 할 때 성전, 성막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것을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웅장함이 아니라, 그것이 모세에게 보여진 하늘의 모형이라는 사실’이라고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하나님의 집에서 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대적자들, 원수들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사람처럼 몸만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멸하시는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것은 영혼의 죽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인들로 인하여 위험 가운데 놓일 수 있습니다. 대적들, 원수들로 인하여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수 있고, 답답해질 수도 있습니다. 전투하는 교회라면 이런 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의 어려움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할 것이 영적 어려움입니다. 외적으로 힘들 수 있고, 그런 힘듦이 내적으로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외적으로, 내적으로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지, 그렇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향하여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지 말씀을 통해 보고 또 보아야 합니다(출34:6 참고). 여기에 우리의 이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은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어떤 확신을 가지게 하는가?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미 3절에서 군대가 자신을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한다면 더더욱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말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믿음 가운데 세우는 일이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에서 선포되는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공적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좀 더 분별해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본주의 가르침,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에게 초점이 되는 가르침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가르치고, 행하는 일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5절을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신다,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긴다고 말씀하는데, 초막, 장막은 성막 혹은 성전으로 하나님의 집을 가리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집에 살고자 소망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 그것도 은밀한 곳에 비밀히 숨기시는데, 군대가 와서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윗 자신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혹은 높은 바위 위에 두신다고 하는데, 사람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군대라는 많은 수가 그곳으로 올라가려고 시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윗 자신을 두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다윗은 6절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 것임을 말합니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지금 다윗의 상황은 원수들로 구성된 군대에 쫓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보호하실 것임을 확신하는데,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를 자신을 둘러싼 원수들 위에 두신다고까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로 하여금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리는 다윗의 생애로 하자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서두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보자면 마지막 때, 다시 말해 개인적인 종말이든 우주적인 종말이든 마지막 때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내용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전투하는 교회로 있는 이상 우리는 천상의 교회처럼 승리를 맛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은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의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은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지켜 보호하신다는 사실도 믿어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투하는 교회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이란 구원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구원하시고, 장차 구원을 완성하실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확신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소위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면 장담하건대 거기에는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는데,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의 완성까지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