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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일)
가톨릭 목포 성지 |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어제 저녁에 사다 놓은 빵조각으로 아침을 때운 후 출발을 서둘렀다. 오늘 일정은 일단 8시경 목포 성지에 가서 성지외부를 순례하고, 10시 30분 미사에 참례한 후, 목포 해상케이블 카를 타고 유달산을 관람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다.
8시에 성지에 도착. 숙소에서 성지까지는 6-7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최소한 9시는 되어야 문을 열겠거니 하는 성전 내부나 역사박물관 등은 뒤로 미루고 성지 외부를다 둘러봤는데도 미사시간은 많이 남았다. 더욱이 미사시간은 10시 30분이 아니라 11시였다. 그리고 역사박물관 개관도 9시가 아니라 미사시간과 겹치는 11시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바로 인근에 있는 삼학도 공원을 둘러보고 돌아와 11시 미사 참례를 하였다.
●가톨릭 목포성지의 역사
목포 산정동 성당은 1897년 5월 8일에 설립된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이다. 주소는 전남 목포시 노송길 35.(전남 목포시 산정2동 74). 1937년 광주지목구 설정으로 교구청을 두게 되어 1956년 광주로 옮겨 가기까지 전남 지역의 신앙의 거점이 되었다. 주보는 처음에는 대천사 성 미카엘이었으나, 이후 성 십자가 현양으로 바뀌었다.
▲복음의 전파와 본당 설립
전라남도 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를 피해 온 다른 지역의 교우들이 노령산맥 줄기를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이들은 1872년의 ‘나주 무학당(武學堂) 사건’으로 새로운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도 꾸준히 복음 전파에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새로 이주해 오는 신자들로 인해 전라남도 지역의 교우촌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2년 이후에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에 의해 장성 · 순창 · 담양의 20여 개 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1896년까지도 전라도 지역은 전주 본당 · 되재[升峙] 본당 · 수류 본당 등 북부 지역에만 본당 소재지가 있었으며, 남부 지역의 공소들은 라크루(Lacrouts, 具馬瑟) 신부가 사목하는 수류 본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그 해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羅岩]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하였다. 목포 본당 설립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남부 지역의 공소들이 수류 본당과 너무 멀어 사목에 어려움이 있었던 데다가 1898년에 개항 예정인 목포 지역의 발전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897년 5월 8일 데예(Deshayes, 曹有道) 신부가 목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는 나바위 본당 초대 주임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당시 목포 지역에는 100호도 안되는 마을이 있었을 뿐 신자는 한 명도 없었으므로 데예 신부는 우선 전남 순창군 쌍치면 아천리(阿川里, 현 五龍村)아천리 공소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목포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기로 하고, 라크루 신부로부터 순창 · 정읍 · 장성 지역의 공소들을 인수받아 공소 순방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봄 판공을 끝낼 때까지 데예 신부가 순방한 공소는 순창 · 정읍 · 장성 · 담양 · 함평 · 태인 · 무안 등지의 26개소였다.
한편 1897년 9월부터 아천리 신자들을 목포로 보내 쌍교(雙橋, 현 남교동과 북교동 사이)의 토지와 가옥을 매입하기 시작한 데예 신부는, 이듬해 목포항에서 무안으로 가는 길목(현 목포 산정동)에 있는 산을 매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있는 가옥을 수리하여 1898년 7월 2일 목포로 거처를 옮겼다.
▲초기 현황과 성당 건립
목포로 진출한 데예 신부는 즉시 제물포(현 답동) 성당을 모방하여 성당을 설계했는데, 이를 전후하여 제물포나 경상도 등지에서 목포로 이주해 오는 교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같은 해 8월부터 비로소 ‘현재’의 산정동 성당 부지 위(여기서 ‘현재’란 지금의 순교자기념 대성당이 완공하기 전인 2018년 기준이며, 당시 성당 부지는 현재의 순교자기념대성당 아래에 있는 1966년에 건립된 옛 산정동 성당 터를 말함. 필자 주)에서 성당 건축을 시작한 그는, 비록 처음의 설계대로는 아니었을지라도 1899년 초에는 아담한 연와제 성당을 완공할 수 있었다. 당시 목포 신자수는 22개 공소에 1,238명이었다.
데예 신부는 1898년부터 이미 본당 신자들로 매괴회 · 성의회 · 성모회 · 성모 통고회 · 예수 성심회 등을 조직하여 신심 함양과 봉사 활동에 노력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을 건립한 이듬해부터는 도서 지방 전교를 시작하여 지도군(智島郡) 지역의 안창도 · 도초도 · 비금도 · 자은도 · 압해도 등지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목포 본당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던 데예 신부가 1909년 5월 1일 뮈텔 주교를 돕기 위해 서울 주교관으로 전임되면서 나주 계량 본당에 재임하던 투르뇌 신부가 목포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계량 본당 주임으로는 카다스(Cadars, 姜達淳) 신부가 임명되었다.
1911년에 대구교구가 조선교구에서 분리 ·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이듬해 5월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목포 본당의 투르뇌 신부를 경북 칠곡의 가실 본당으로 전임시키는 대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내정되어 있던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를 임시로 목포 본당에 임명하였다. 당시 샤르즈뵈프 신부는 신학교 교사가 완공되자마자 교수로 부임할 예정이었으나 건축이 늦어지면서 3대 주임으로 눌러앉게 되었다. 그러자 데예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산정동 97번지(현 성 골롬반 병원 구역)에 새 성당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으며, 1913년 8월 4일에는 드망즈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갖는 동시에 언덕 위에 세운 높이 5.5m의 대형 십자가와 성 파트리치오를 주보로 한 종의 축성식도 거행하였다. 이후 성당은 그 해 말에 완공되어 12월 25일 ‘성가광영(聖架光榮)’(성 십자가 현양)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는데, 이렇게 주보를 정한 이유는 그 해가 ‘밀라노 관용령’ 반포 1,6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시련과 변모
1914년 5월 3일 샤르즈뵈프 신부가 예정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장으로 전임되면서 마산포에 있던 카넬(Canelle, 間弘模) 신부가 4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는 그 해 10월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동원되어 귀국하였다. 이후 본당은 제주 한논 본당(서귀포 본당의 전신)에 재임하던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겸하여 사목하다가 1915년 6월 7일자로 그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 신자수는 2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타케 신부의 전교 노력에 힘입어 1920년대 초에는 약 400명으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1916년 이래로 타케 신부는 제주의 홍로 본당 주임을 겸하였다.
타케 신부의 뒤를 이어 1922년 9월 24일에는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제주 본당 주임을 겸하여 6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26년 5월부터 산정동 본당만을 맡았는데, 이해에 85평 규모의 교실 2개를 신축하여 성심 소학교(聖心小學校)를 설립하였고, 초대 교장으로 새 보좌인 이성만(李性萬, 이냐시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주재용 신부는 1931년까지 본당에 재임하면서 교리 교사회와 복사회 등 평신도 단체를 활성화하고 전교에 노력하여 1926년경에는 신자수가 700여명에 이르렀다.
1931년 5월 10일에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 지역을 ‘감목 대리구’(초대 감목 대리 : 김양홍 신부)로 설정하였고, 1933년 7월 6일에는 교황청 포교성성에서 전라남북도 감목 대리구 분리를 승인하면서 전라남도와 제주 지역의 사목을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하였다. 이때 초대 전라남도 감목 대리로는 맥폴린(Owen McPolin, 林) 신부가 임명되었으며, 1937년 4월 13일 광주 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지목으로 임명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1931년 5월 10일 본당에 부임하여 사목하던 7대 주임 송남호(宋南浩, 요셉) 신부는 대구 주교관으로 전임되었다가 1935년 2월에 서울 소신학교로 전임되었으며, 1934년 3월 8일자로 모나간(Monaghan, 牟)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 본당 신자수는 921명이었다.
모나간 신부는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과 동시에 총독부에 의해 체포 · 감금되기까지 7년여 동안 재임하면서 무엇보다도 전교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자수는 1,800여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성체회 · 청년회 · 학생회 등의 활동도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5년에는 산정동 97번지에 400평의 강당 겸 교리실을 신축하였고 가톨릭 문고도 설치하였다. 모나간 신부가 체포된 후 김재석(金在石, 요셉) 신부, 박문규(朴文奎, 미카엘) 신부,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 등이 차례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1945년 5월 28일에는 성당이 일본군 사령부로 징발되면서 남교동에 있는 건물을 임시로 빌려 미사를 봉헌해야만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총독부에 징발 당했던 성당을 되찾고 이듬해 8월 24일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처음으로 본당에 파견되었으나 이후 6·25 한국 전쟁으로 인해 본당은 다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당은 인민군 막사로 징발되었고, 본당 주임 쿠삭(Cusak, 高) 신부와 보좌 오브라이언(J. O'Brien, 吳) 신부는 패트릭 브레넌(Patrick Brennan) 몬시뇰과 함께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가다가 그해 8월경 대전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당의 성장과 분할
목포 수복 후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모란(Moran, 安) 신부는 1951년 4월 9일 ‘경동(京洞) 본당’을 분할함과 동시에 목포 남쪽 지역 및 자은도 공소와 하의도 공소를 이관하고, 목포시로부터 577평을 새 본당 부지로 매입하였다. 이로써 목포 본당은 비로소 2개로 분리되었는데, 경동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는 김성환(金成煥, 빅토리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또 모란 신부는 1952년 12월 15일에 ‘성심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이듬해인 1953년 3월 31일에는 한국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여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였다.
경동 본당을 분할하기 이전의 본당 신자수는 4,262명이었지만 본당 분할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58년 초에는 6,264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17대 주임 둔(Dunne, 도) 신부는 또다시 본당 분할을 계획하여 북교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그 해 5월 성당을 완공한 뒤 9월 3일자로 ‘북교동(北橋洞) 본당’을 두 번째 자 본당으로 분할하였다. 한편 1957년에는 흑산도 진리에 새 부지를 매입하여 사제관을 건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그 이웃에 10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11월 11일 봉헌식을 갖는 동시에 세 번째 자 본당으로 ‘흑산동 본당’을 분할하였다. 1959년 7월 5일에는 본당 이웃에 ‘성 골롬반 병원’을 개원하였으며, 1957년 1월 21일에는 광주 지목구가 대목구(초대 교구장 : 하롤드 헨리 주교)로 승격되었다.
그 후 신안군 도서 지역에는 여러 공소들이 설립되었는데, 18대 주임 휴그(Hughes, 유) 신부 때에는 신안군 안좌읍 공소, 19대 주임 모리시(Morrissey, 牟) 신부 때에는 안좌 대리 공소, 20대 주임 브라질(Brazil, 진) 신부 때에는 도초면 도락 공소가 각각 설립되었다. 흑산도 본당 재임 시절에 이미 도초 외남 공소를 설립하기도 한 브라질 신부는, 산정동 본당에 부임한 뒤에도 신축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66년 5월 29일에 구 산정동 성당(166평)과 사제관(45평)을 완공하고, ‘대천사 성 미카엘’을 주보로 하여 하롤드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본당 신자수는 다시 5,000명을 넘어서고 있었으므로 본당에서는 계속 본당 분할을 교구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브라질 신부 재임기인 1968년 3월 14일에 ‘연동 본당’이, 21대 주임 캐롤란(Carolan, 車) 신부 재임기인 1971년 10월 25일에는 ‘대성동 본당’이 분리되면서 동시에 압해도 · 비금도가 본당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24대 주임 이재흥(李載興, 힐라리오) 신부는 1978년 10월 27일에 한국 전쟁 때 희생된 광주 지목 브렌난(Brennan, 安) 몬시뇰과 본당 신부였던 쿠삭 신부, 오브라이언 신부의 순교비를 성모상 옆에 건립하여 이들을 추모하였다. 이어 25대 주임 박영웅(朴英雄, 가브리엘) 신부는 1984년 1월 1일자로 신안군의 안좌 공소를 용당동 본당으로 이관하였고, 26대 주임 김성용(金成鏞, 프란치스코) 신부는 1989년 11월 18일에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1986년 10월 19일에는 본당의 ‘매괴의 모후’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고, 1988년 4월 5일에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기념비 축성식이 본당에서 거행되었다. 또 28대 주임 김양회(金良會, 요한 보스코) 신부가 부임한 뒤인 1994년에는 산정동 본당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11월 15일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으며, 1년 6개월 동안의 공사 기간을 거쳐 전시관이 포함된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31평 규모의 기념관을 완공하고 1998년 5월 23일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상은 ‘가톨릭 굿뉴스’ 재편집 인용)
●가톨릭 목포 성지 조성
가톨릭 목포 성지는 구 신정동 성당 인근에 조성된 성지로 2010년에 시작되어 2021년 11월에 완료되었다. 처음 광주대교구는 대주그룹의 후원과 목포시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세계적인 규모의 가톨릭 성지를 조성하기 위해 2010년 3월 23일 성 미카엘 기념 대성당 건립 기공식을 가졌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고, 2012년 10월 9일 목포가톨릭 성지 조성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반적인 사업 방향 설정하였다.
성지로 태어난 이곳은 옛 성 골롬반 병원 부지였으며 광주ㆍ전남 지역 가톨릭교회의 시발점이자 선교 활동 구심점이 됐던 뜻 깊은 자리이다. 특히 2002년까지 성 골롬반 병원으로 운영되었던 구 교구청 건물은 1937년 광주지목구가 설립되면서 건립되어 광주 ‧ 전남 ‧ 제주 지역 선교를 위한 거점으로 사용됐었다. 1956년 교구청이 광주로 이전한 후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목포 분원, 성 골롬반 병원, 성신간호전문대학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 17일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광주대교구는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일단 가톨릭목포 성지 조성 1단계 로 구 교구청 건물에 대한 원형복원 및 보수공사를 하여 2016년에 옛 모습을 되살렸다. 동시에 한국 레지오 마리애 발상지이인 이곳에 한국 레지오마리애 기념관 건립을 시작되어 2017년 9월 30일에 봉헌했다. 다음 2단계로 원래 계획되었던 순교자기념 대성당 건립(성 미카엘 기념 대성당, 레지오마리에 기념성당)을 추진하여 2020년 6월 대성당 및 부대시설을 완료하고 1921. 11월 20일에 봉헌식을 가져 명실공히 가톨릭 성지위상을 갖추게 됐다. 그동안 약 9,000평의 부지 위에 사업비 343억원(국·지방비 114억 원 포함)을 투입된 결과였다.
현재 가톨릭 목포성지는 크게 3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순교자 기념 성당( 레지오 마리애 기념성당, 성 미카엘 대성당, 준대성전)
2. 목포성지 역사박물관 (구 교구청)
3.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높다란 언덕 위에 마련된 성모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은 대성당, 동쪽은 레지오마리애 기념관, 서쪽은 메모리얼 타워, 남쪽은 역사박물관이 위치하며 주변에 많은 조각상들이 설치되어 있다.
성모광장 오르는 방법은 걷거나 승용차로 정문으로 오르는 방법이 있고 주차장에 내려서 후문으로 오르는 방법이 있다. 성지 순례가 목적이라면 후문으로 통하는 방법이 더 좋다. 여기서는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입구 축대 밑 박해 조각상을 보고 순교 정신을 기억하며 안내표지판에서 성지 구성배치 구조를 이해한 후, 성지 표지석과, 역사박물관 옆 순교자 현양 십자가를 거쳐 시작되는 경사진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예수님의 고행을 묵상하며 성모광장으로 오른다.
△패트릭 브레넌(Patrick Brennan 1901-1950) - 미국 시카고 출신. 성 골롬반 전교회 소속 한국 파견 선교사. 원주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추방되었다. 1949년 광주 지목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몬시뇰 칭호를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6·25전쟁의 발발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가다 대전에서 순교했다.
△토마스 쿠삭(Tomas Cusack 1910-1950) - 아일랜드 출신. 1934년 사제 서품. 광주교구에서 사목하다가 당시 산정동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중 2차대전, 8 15광복을 맞았으며 6 25 때 브레넌 교구장과 함께 대전에서 순교하였다.
△존 오브라이언(J.O. Brien 1918-1950) - 아일랜드 출신 1942년 사제 서품. 군종신부로 사목 하다가 한국에 와서 산정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면서 주로 젊은이들의 선교에 힘썼으며 6 25 때 대전에서 순교하였다.
●성모광장 주변
성모광장 북쪽 대성전 밑에는 성모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야외 제단이 있다. 큼직한 제대 뒤 성모님 좌우로 시녀가 꿇어 앉아 있고 천사가 협시하고 있다.
메모리얼 타워로 가는 서쪽 길에는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천사상이 있다.
성모광장 남쪽에는 순교자 현양 십자가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 후반부 조각상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동쪽 레지오마리애 기념관 쪽에는 성구를 새긴 돌과 성모님 칠고상이 조각되어 있다.
●목포 순교자기념 대성당
목포 순교자 기념 대성당은 다른 이름으로 신정동 성당, 레지오마리애 기념성당, 성 미카엘 대성당, 대성전, 준대성전 등으로 불리운다. 소개하는 자료마다 다양하게 나와서 혼란을 줄 정도다. 그만큼 성전의 의미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건축면적 2591.64㎡, 사제관과 수녀원, 회합실 등으로 사용될 부속 건물 989.94㎡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고, 소성당과 만남의 홀이 포함돼 있다. 1층 소성당은 약 200석이며, 2층 대성당은 약 7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성당을 등급으로 나눌 때 최고는 대성전(Major basilica)이고 그 다음 등급이 준대성전(Minor basilica)이다. 대성전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 라테란 대성당 4개뿐이며 준대성전은 1,700여개나 되지만 대부분 유럽에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각각 1곳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목포 순교자기념 대성당은 2021년 5월10일자로 교황청에 의해 준대성전(Basilica maior)으로 지정되었다. 성당 건물이 축성되기도 전에 미리 지정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톨릭 준대성전이 지정된 것은 역사상 최초로, 이로써 이 성당은 명동대성당도 수여받지 못한 칭호를 수여받아 교황좌를 상징하는 우산(umbraculum)을 성당 내에 설치하게 되며, 명동대성당을 비롯한 모든 주교좌성당들(cathedralis)을 제치고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격이 높은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
이로서 준대성전은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성이 인정되는 성당에 붙여진 명예로운 칭호이며 소정의 특전을 부여받았다. 그 특전이란 정해진 날에 준대성전을 경건하게 방문해 그곳에서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주님의 기도와 신경을 바치는 신자들은 고해성사나, 영성체, 교황의 뜻에 따른 기도 등 전대사의 통상 조건을 갖추게 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준대성전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대성전으로 통한다.)
전대사가 정해진 날들은,준대성전의 봉헌 주년 대축일인 11월 20일, 준대성전의 주보(성 십자가 현양) 대축일인 9월 14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인 6월 29일, 준대성전 칭호 부여 주년 기념일인 5월 10일, 그리고 한 해에 한 번 교구 직권자가 지정한 날이다.
성모광장에서 대성전에 오르는 방법은 계단을 통하는 것과 엘리베이터를 통하는 방법이 있다. 계단으로 오르려면 성전 측면 출입문을 통해야 한다. 출입문 위에는 내려다보는 성가정 가족상이 있고, 출입구 양쪽에는 성당 설립과 관련된 부조가 새겨져 있다. 문을 통과하면 바로 지하1층이다.
소성당이 있는 1층에 올라가니 계단 벽면에 문학진(토마스)교수가 그린 103위 한국 순교성인화와, 김형주(아멜데)화백이 그린 124위 한국순교복자화, 그리고 람브란트가 그린 명화 돌아온 탕자, 바돌로메 에스테반 무릴로가 그린 명화 묵주기도의 어머니를 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는 루카복음 15장의 내용을 옮긴 그림으로 람브란트가 죽기 전 마지막 그림이라고 한다. 람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아들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인자한 부모’를 묘사하는 것에 더 치중했다고 한다. 그림에서 손의 크기가 다른데, 아버지의 왼쪽 큰 손은 아버지의 손으로, 오른쪽 작은 손은 어머니의 손이라는 해석이 있다.
1층 홀 벽면에는 프라하의 아기예수님이 있다. 16세기 후반 한 수도원의 수사에게 아기 예수님이 발현하여 자신의 얼굴 모습을 만들라고 하였다. 요셉 수사는 그 말씀에 따라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밀랍으로 형상을 만들었다. 이 아기예수님상이 나중 프라하의 가르멜 수도원에 갔는데 수도원의 어려운 제정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상은 나중 30년 전쟁 중 없어졌는데 9년 뒤 차릴로 신부에게 발견되어 아기예수님 대관식을 열고 축제를 여는 등 여러 행사를 거쳐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홀에는 피에타 상이 있고 소성당은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조용하다. 코로나 때에는 여기서 미사를 드렸는데 지금은 대성당에 미사를 드린다. 소성당과 함께 성물방이 있는데 다양한 성물이 구경만 해도 볼 만하다. 계단을 통해 대성당에 이른다.
대성전 앞에는 파티마의 성모상과 악마를 무찌르는 대천사상이 서 있다.
대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이름에 걸맞게 높은 천정과 넓은 공간이 지금까지 보아온 성당과 구별된다. 스테인 글라스가 엄청 아름답고 십자가의 길 14처도 높이 걸렸다. 미사 시간이 다 되어가서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차림새로 보아 순례객이 상당 수 있다. 미사는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음향시설이 안 좋아 뒷자리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성가대도 젊은 사람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몇 명 되지 않는다.
미사가 끝난 후에는 보좌 신부인 듯한 사제로부터 성당과 관련된 해설을 들었다. 내용은 준대성전 지정 조건과 혜택 등과 관련된 이야기, 성전 후면 원형 스테인 글라스의 5명의 순교자와 관련된 이야기 등을 아주 코믹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성전 후면 원형 스테인 글라스 안의 순교자 5명은 광주대교구 제4대 교구장 패트릭 브레넌 몬시뇰, 산정동 성당 토머스 쿠삭(Cusak, 高) 주임신부, 존 오브라이언(J. O'Brien, 吳) 보좌 신부 그리고 두 신학생 전기수(그레고리오), 고광규(베드로)라고 한다. 준대성전이 되기 위한 조건도 성인 유해 등을 모시고, 연중 고해성사를 볼 수 있고, 파이프 오르간을 갖추는 등 몇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상설 고해소 안내가 군데군데 있다.
설명을 들은 후 준대성전이 보유하고 있는 3대 보물이라고 하는 십자가 보목과 데레사 성녀와 성녀 부모의 유해를 참배를 하고 나왔다.
‘성 십자가 보목(寶木)’은 2,000년 전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지고 올라가시어 못 박힌 십자가 나무 조각인데 1963년 바티칸 교황청에서 우리나라로 향하는 멕시코 과달루페 선교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달한 것으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증했다고 한다.
소화(小花) 데레사 성녀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혹은 ‘하느님의 작은 꽃’이라는 의미로 ‘소화 데레사’라고 불리는 ‘선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의 유해는 2019년 성녀의 고향인 프랑스 리지외의 가르멜수녀원에서 광주대교구로 유해의 일부가 옮겨져 ‘성 십자가 보목(寶木)’과 함께 가톨릭 목포성지 대성당 완공 전까지 임시로 안치해 왔다고 한다.
밖에 오니 바깥 외벽에는 ‘자비로우신 예수님 성화’과 ‘검은 성모님 상’(블랙 마돈나)’ 이 걸렸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방에 어느 날 흰옷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한 손은 축복하시려는 듯 들고 계셨다. 가슴에는 두 줄기 빛이 나왔는데 하나는 붉은 빛이고 하나는 창백한 빛이었다. 두려움에 떠는 수녀에게 예수님은 “네가 본 대로 성화를 그려라. 그러면 너가 모든 사람에게 공경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를 본 사람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고 말씀하셨다.
파우스티나 수녀는 이 이야기를 영적 지도신부에게 아뢰고 그 두 줄기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지도신부는 붉은 빛은 영혼의 생명인 피를 뜻하고 엷은 빛은 영혼을 이롭게 하는 눈물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예수님 성화’는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검은 성모님(블랙 마돈나)’은 일반적으로 ‘치유와 회복의 어머니’의 성격을 띤 성모님으로 수많은 성화가 존재한다. 이 성화는 폴란드의 쳉스토호바에 있는 성모상으로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에게 오는 시선을 안고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가리키며 구세주임을 알리고 아기 예수님은 왼손에 복음서를 들고 오른손으로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보내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구도를 호데게트리아(인도자이신 성모님)라고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성화가 검은 것은 원래 피부색이 아니라 보관하고 있던 성당에 화재가 일어나 그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5층 전망대에 올랐다. 목포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이고 유달산이 건너 잡힐 듯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순교자 기념 대성당이 건립되기 전의 구 산정동 성당이 보인다. 이 성전은 1966년 20대 브라질(Brazil, 진) 신부가 지은 건물이다.
대성전을 뒤로 돌아드니 교육관, 사제관 수녀원이 있고, 동쪽으로 길다랗게 레지오 마리에 기념관이 있다.
●레지오마리에 기념관
가톨릭 목포성지 레지오마리애 기념관은 성지조성 1단계 사업으로 2016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2017년 9월 30일에는 한국 레지오마리애 기념관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건축면적 8600여㎡ 규모로, 최대 25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숙소 69개와 세미나실, 소성당, 전시실, 목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옥외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단 레지오 마리에와 관련된 유물이나 자료는 모두 역사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고 있기에 본관 건물에는 일반 관람객이나 신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메모리얼 타워
목포성지의 매우 특별한 조형물이다. 원통형 건물인데 꼭대기에는 예수성심상이 서 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맨 아래층에는 검은 피에타 상이 가운데 놓여 있고 위로 올라가는 길은 나선형 비탈길이다. 벽면에는 검은색 조각상 그림과 거기 어울리는 아름다운 말씀들이 있다. 이를 읽으며 오르다보면 금방 꼭대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성모 광장으로 갈 수도 있다.
●목포성지 역사 박물관 - 성지순례5-(3)가톨릭 목포성지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