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1. 탁실라 죠우리안·모란모라두 사원지
2천년 세월 이긴 모란모라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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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모라두 사원지 탑> |
사진설명: 직사각형 기단부 위에 복발형의 탑이 있으며, 탑 둘레에는 난숙한 기교로 조각된 불상들이 안치돼 있다. |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폐샤와르(간다라 중심지) 동쪽에 위치한 탁실라를 거쳐 갔다. 거의 1세기 마다 지배자가 바뀌었다. 역사의 변동과 이동이 그만큼 심했던 곳이 바로 탁실라라 할 수 있다. 일찌기 페르시아의 속주로 편입돼 이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적 있었지만, 알렉산더 침입 이후엔 마우리아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마우리아 왕조 몰락 후엔 그리스 식민국가인 박트리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기원전 1세기경 사카족(스키타이)이 탁실라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했다. 그것도 잠깐. 1세기 후반 쿠샨왕조가 등장하자 탁실라는 다시 쿠샨 왕조 지배에 들어갔다.
그리스 세력·파르티아 세력·스키타이 세력·월지족(쿠샨왕조) 등 탁실라 일대에 명멸해 갔던 무수한 민족들이 불교를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불교사가 ‘나라 야스아키’ 교수는〈불타의 세계〉(김영사 출간)에서 이렇게 분석한다.〈밀린다왕문경〉의 주인공 메난드로스왕을 위시한 그리스 세력들이 기원전 80년경 내부 투쟁으로 세력이 약화되자, 사카족과 파르티아 세력이 그리스 세력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서북인도 일대에 뿌려졌던 그리스인의 정치적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됐다.
인도 서북부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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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실라에 있는 기원전 도시유적 시르캅. |
물론 어디까지 정치적 지배의 종말을 의미하며,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대로 인도 땅에 머물러 살며 토착화 돼갔다. ‘인도 문헌’엔 그리스인들이 ‘야바나’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은 서서히 인도 문화의 대맥(大脈)인 힌두세계에 동화됐다. 남인도 데칸고원 일대에 조성된 불교석굴사원, 북인도의 비하라(사찰)와 스투파에도 그리스계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힌두세계에만 접화(接化)된 것이 아니고, 불교 속으로도 흘러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힌두사회에 정착된 그들은 크샤트리아나 브라만 계급엔 들어갈 수 없었다. 철저하게 하층민으로만 동화돼 갔다. 힌두세계는 그들에게 결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반면 불교는 계급제도에 아주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회 속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힌두세계에 동화될 수 없었던 인도 이외의 민족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불교 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했을까.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본격적인 동진(東進)이 시작되고, 이슬람이 서북인도와 인도 내륙에 깊숙이 들어오자, 불교도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로 탈바꿈한다. 힌두교도가 여전히 힌두교도인 반면, 불교도들은 추풍낙엽처럼 이슬람교도로 개종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슬람의 ‘잔인한 개종강요’ 때문이었을까. 확실히 ‘생명은 귀한 것’이므로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이슬람 개종에 대한 설명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종교적 이유도 있었으리라.
힌두교와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외부에 ‘신’과 같은 존재를 상정하고 믿음을 심화시키는 반면, 불교는 ‘깨달음’이 믿음의 근본적인 토대다. 깨달음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고선 ‘진정한 불교도’로 오래 남아 있기 힘들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힘들 때마다 ‘외부에 존재하는 신’에게 기도하며 견딘다면, 불교는 어려움은 연기적 세계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결과라며, 괴로움의 인과 연을 소멸시키기 위해 수행한다. ‘아트만’같은 항상 실재하는 그 무엇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불교의 가르침이 정확하고 옳은 것이지만, 당장 현실에 벌어지는 괴로움이나 살벌함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신심 약한’ 개인에게 연기론은 공허한 측면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사실은 불교사에서도 확인된다. 7세기 이후 인도대륙에서 힌두교 세력이 커지자 한 때 최고의 교세(敎勢)를 자랑하던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대신 ‘정량부’가 득세(得勢)하기 시작했다. 정량부가 점차 강대해진 것은 “아트만(Pudgala. 푸드갈라. 人我)을 인정하며, 아트만을 인정하는 인도의 전통설과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본의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 彰) 교수는 분석했다.
탁실라 등 인도 서북부 지역이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집단 개종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슬람이 들어오고 ‘살벌한 개종’이 강요되자, 불교도들은 ‘불교에 대한 정체성 회복’을 통해 ‘살벌함’을 극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하고 믿어야 되는 ‘어려운 불교’보다는, 신(神)이 있어 ‘믿기 쉬운’ 이슬람교로 믿음을 바꾸었다고 개인적으론 분석한다. 결국 “출가자든 재가자든 그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과 수행이 뒷받침 안 된 ‘불교적 믿음’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인도대륙의 ‘쇠망한 불교’가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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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탁실라에 있는 죠우리안 사원지의 탑. 사방에 불상이 뺵빽하게 조성돼, 참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탁실라에서 이틀째인 2002년 4월21일. 몸은 ‘죠우리안 사원지’로 가면서도 머리 속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내내 혼란스러웠다. 탁실라박물관에서 출발한 지 30분. 저 멀리 산 중턱에 죠우리안 사원지가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관개(灌漑)수로를 건너 사원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후2시. 따가운 햇볕이 사정없이 머리에 내려 꽂혔다. 입구를 들어서니 거대한 탑원(塔院)이 우리를 반겼다. 기원후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쿠샨왕조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원의 대탑은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을 것으로 짐작됐다. 파괴되고 잔해만 있는 지금 보아도 황홀한데, 모든 것이 온전했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
탑원의 대탑이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조성됐다면, 감실 속에 안치된 불상들은 대탑을 보수 할 당시인 4~5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대탑을 돌아가며 석회질의 소불(塑佛. 흙으로 만든 불상)들이 무수하게 안치돼 있다. 보고 있노라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불상과 탑이 아직 남아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불교는 사라지고 불상·탑 유적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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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죠우리안 사원지에 있는 불상. |
따가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산 구석에 위치한 ‘모란모라두 사원지’로 갔다. 모란모라두 사원지는 탑원과 승원을 갖춘 전형적인 간다라 사원. 탑은 입구인 서쪽에, 승원은 동쪽에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탑은 돌로 만든 거대한 사각 기단 위에 복발부(覆鉢部)를 얹은 형태인데, 복발부 벽엔 소조불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 번이나 몸을 꼰 삼곡(三曲)자세의 난숙한 불상들이 보였다. 사실주의 조각을 이야기 할 때마다 등장하는 바로 그 불상들이었다. 옷 주름의 유연한 흐름, 굴곡이 완연한 신체, 부드러운 조소성(彫塑性) 등은 조각의 격이 대단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2천년 세월의 비바람에 씻긴 지금도 옛 영화를 잃지 않고 서있다는 그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승원에 남아있는 거대한 불상들과 탑에 일일이 참배하고 사원지를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니 마을 아이들이 따라오며 ‘골동품’(?)을 내놓고, 우리를 유혹했다. 손바닥 위에 물건들을 내놓고 사라고 했다. 불두도 있고, 불상도 있고, 동전도 있었다. 안내인이 “모두들 모조품”이라고 설명했다. 직접 만져보니 대번에 모조품임을 알 수 있었다. 사원은 파괴돼 관광지로 전락했고, 사원 유적 밖에는 모조 불상들이 매물(賣物)로 나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리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불교는 사라지고 상품만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무엇 때문에 불교가 이 땅에서 사라졌나”가 다시금 자연스레 떠올랐다.
파키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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