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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상록자원봉사단 제1기 아카데미과정
합동 문화탐방계획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5월입니다.
대경상록자원봉사단에서 제1기 아카데미과정 합동 문화탐방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래 계획을 보시고 많이 참가하여 상록자원봉사단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화합을 다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 래 -
1. 일 시: 2014년 5월 27일(화)
2. 장 소: 보은 일원
3. 대 상: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제1기 아카데미 회원
4. 인 원: 버스 대당 40명 기준, 희망회원 전원
5. 회 비: 자부담, 참가 회원 당 25,000원(중식대 포함)
6. 회원모집: 아카데미회원으로써 참가를 희망하는 회원
7. 신청방법: 각 반별로 반장님이 23일까지 명단 작성 제출
8. 명단 제출처: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사무실
※ 탐방코스
어린이회관 앞(08:00출발)(145.7km, 2시간15분)
→ 삼년산성(10:15도착, 관람2시간, 12:15출발)(11.9km, 23분)
→ 정이품송(12:38도착, 관람20분, 12:58출발)(4.0km, 7분)
→ 점심(1:05도착, 식사1시간, 2:05출발)
→ 법주사(2:05도착, 1시간30분, 3:35출발)(11.1km, 20분)
→ 서원리소나무(3:55도착, 관람30분, 4:25출발)(4.3km, 10분)
→ 선병국가옥(4:35도착, 관람40분, 5:15출발)(20.4km, 17분)
→ 화령장전적기념비(5:32도착, 관람40분, 6:12출발)(115.0km, 1시간30분)
→ 어린회관도착(7:42도착)
2014. 5. 16.
대경상록자원봉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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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사적 제235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어암리))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보은 대야리 고분군(報恩 大也里 古墳群. 충북 기념물 제156호.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산23번지 외 8필지)
고분은 삼년산성이 위치한 오정산을 중심으로 사면 지역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15m~20m의 대형 봉토분과 직경 10m 내외의 중형 석실분, 그리고 소형의 석곽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지표조사 결과 고분군은 중부지역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군으로 지표상에서 출토된 유물을 살펴볼 때 축조 시기가 삼년산성이 활발하게 운영되던 5세기~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은 보은사 석조여래입상(報恩 報恩寺 石造如來立像.충북 유형문화재 제312호. 충북 보은군 어암리 280-1번지)
보은사는 삼년산성 北門址 안쪽에 위치한 사찰로 1970년에 간행된 『報恩郡誌』에 의하면 1902년 朴鏡荷 스님이 창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은사터는성재절터로 불리고 있어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행궁터로 추정되기도 한다.
보은사 석조 여래입상은 일제강점기 보은읍 대야리 미륵댕이 산에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보은 보은사 지장시왕도(報恩 報恩寺 地藏十王圖. 충북 유형문화재 제313호.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280-1번지)
錦湖堂 若效가 金魚를 맡고 萬聰․法任이 제작한 보은사〈지장보살도〉는 본존인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3열의 권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존은 꽃잎형태의 두․신광을 두르고, 왼손에 투명보주를 쥐고 있으며, 유희좌의 모습이다.
보은 속리 정이품송(報恩 俗離 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상판리 241외)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俗離山 法住寺 一圓. 명승 제61호.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번지 등)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법주사는 553년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문화유산으로는 법주사 안의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백송(천연기념물 제104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유형문화재 22점, 문화재자료 2점, 천연기념물 2점)
자연이 물려준 속리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바위들, 그리고 법주사 지역에 있는 역사 깊은 문화유산들이 어우러져 펼쳐져 있는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법주사 창건 :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습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국보 제5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현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報恩 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55호)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1624)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報恩 法住寺 石蓮池. 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입니다. 높이 1.95m, 둘레 6.65m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報恩 法住寺 四天王 石燈. 보물 제15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 제작된 사천왕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8각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높이 3.9m에 이르는 이 석등은 지대석, 하대, 중대(간주), 상받침대, 상대(화사석),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상대의 각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석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전체 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報恩 法住寺 新法 天文圖 屛風. 보물 제848호)
관상감의 안국빈(安國賓) 등 6명이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Kogler, I.)의 성표(星表:기산점 1723년)를 사용, 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쪽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제작한 신법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1곡을 한 폭으로 보면 높이 183. 5㎝, 너비 56㎝로 8폭 전체의 길이가 451㎝나 되는 대형이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報恩 法住寺 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입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입니다. 세 분 부처님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입니다. 이렇듯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입니다.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떼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다시금 복원하였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정방형(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柱心包系)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법주사 괘불탱(法住寺掛佛幀. 보물 제1259호)
조선 영조 42년(1766년)에 제작된 길이 14.24m, 폭 6.79에 이르는 초대형 탱화입니다. 큰 화폭에 오색구름과 더불어 꽃무늬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전체 미륵불의 모습을 장엄하고 있습니다. 미륵불은 원형의 광배(光背)와 몸의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으며, 손에는 용화수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야단법석(야회법회)때 설치합니다. 금어(金魚:탱화를 그리는 스님)주훈스님 등 14명의 스님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報恩 法住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0호)
불상 크기는 비로자나불 509㎝, 아미타불 492㎝, 석가모니불 471㎝이다.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626년(인조 4)에 조성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기다란 귀,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몸체와 무릎 때문에 둔중해 보인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고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으로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리고 있다.
아미타불상은 형태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며, 수인은 왼손과 오른손이 뒤바뀐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큼직한 중앙계주가 있다.
석가모니불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체형, 얼굴모습 등이 거의 같고 양식은 비슷하다. 수인은 석가여래불의 전형적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수인이나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법의 착용법이 같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얼굴은 동안(童顔)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하였다.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
불상의 크기는 높이 235cm, 너비 147cm이다. 1655년(효종 6)에 조성된 이 관음보살좌상은 법주사 원통보전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천의(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보은 법주사 철솥(報恩 法住寺 鐵鑊. 보물 제1413호)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보은 서원리 소나무(報恩 書院里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2호.북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외 1필)
속리 서원리 소나무는 속리산 남쪽의 서원리와 삼가천을 옆에 끼고 뻗은 도로 옆에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5.2m, 뿌리 근처의 둘레 5.0m, 줄기는 84㎝ 높이에서 2개로 갈라졌으며, 전체적으로 우산모양을 하고 있다.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는 부부사이라 하여 ‘정부인송’이라고도 불리운다. 정이품송의 외줄기로 곧게 자란 모습이 남성적이고, 이 나무의 우산모양으로 퍼진 아름다운 모습이 여성적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 소나무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실제로 최근(2002, 2003)에는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가루받이를 하여 후계목을 길러내는 사업을 시도하였다.
속리 서원리 소나무는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보은 선병국가옥(報恩宣炳國家屋.중요민속문화재 제134호.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길 10-2 (개안리))
시냇물이 모이는 넓은 삼각주의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집이다. 자연경관과 집이 어울려 대단히 아름다운 환경을 이루는데, 건축 당시에 훌륭한 목수들을 가려뽑아 지은 집이라고 한다. 사랑채·안채·사당채를 둘러싸고 있는 안담의 바깥으로 널찍하게 외담을 두껍고 높게 둘러쌓았는데, 1980년 대홍수 때 피해를 입어 많이 허물어졌다.
'H'자 평면의 사랑채는 남향하여 자리 잡았는데 보통의 사랑채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이다. 앞·뒤 모두 툇마루를 설치하여 더욱 넓은 공간을 활용하게 하였다. 가운데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큰 사랑방을 비롯한 골방·약방·마루 등을 시설하였다. 역시 'H'자 평면의 안채는 사랑채의 왼쪽에 자리하였는데 가운데의 대청이 중심이 된다. 대청은 앞·뒤 툇마루를 통하여 어떤 방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엌은 아주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위에는 다락이 마련되었다. 대체로 사랑채와 비슷한 구조를 하였으나,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원기둥을 사용한 반면 안채는 앞쪽만 원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안채를 넓게 둘러싸서 안마당 공간을 만들고 있는 'U'자형의 행랑채는 대문간·문간방·구들·광으로 만들었다. 사당채는 행랑채의 북쪽에 사랑채와 축을 나란히 해서 배치되었다. 남쪽에 부엌을 두고 있는 제수채와 사당을 연결하는 복도채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난 시설물로 비바람이 칠 때도 의례를 거행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1919∼1921년 사이에 지은 이 집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개량식 한옥구조를 시험하던 때에 진취적인 기상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것이어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상주화령장전투 전사(戰史)
전투기간 : 1950. 7. 17 ~ 7.21
전투지역 : 경북 상주시 화서면 화령장
참가부대 : 국군 (보병 제 17연대), 적군 (보병 15사단)
경과
- ‘50.6.25일 불법 기습남침 이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국군의 방어선을 와해시키기 위해 적 15사단을 대구방향으로 긴급 투입하였다. 이는 대구⇒부산까지 신속히 진격하여 남한을 조기에 점령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북한의 주력부대 1개사단을 투입한 것이다.
- 북한의 의도를 알아차린 우리 국군은 북한군 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17연대를 상주 북방으로 투입하였다.
- 화령장에 도착한 17연대 1대대는 주민신고를 받고 정찰을 하던 중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고 적 15사단 48연대 이동에 대한 첩보를 획득하여 매복 기습작전을 준비하였다.
- 지금의 송계분교 일대에 도착한 적 48연대가 낮잠을 자거나 목욕을 하는 등 전장군기가 문란한 것을 확인한 대대장은 경계도 없이 식사를 위해 집결한 북한군 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국군의 피해는 없이 적 1개 연대를 전멸시켰다.
- 다음날 2대대가 정찰 하던 중 북한군 전령을 생포하여 적 15사단 45연대가 후속하고 있다는 첩보를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2대대가 동관리 계곡 일대에서 매복을 하였고, 적이 눈앞에 올 때까지 철저하게 사격군기를 유지한 가운데 완벽한 매복작전을 펼쳐 적의 치중대와 45연대를 잇달아 격멸시켰다.(출처:상주시청)
참고물 : 문화재청 자료
첫댓글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아카데미 강좌를 신청하신 모든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상호간의 친목과 화합의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역시 단장님 수고에 감사합니다. 육수선드림
직능별 또는 지역별 봉사단체가 활성화되는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 바랍니다.^^
* 우리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창단 이후 가장 뜻깊고 화합과 친목의 대 행사에 큰 박수로 응원을 보냅니다.
제가 봉사(임원)단 일원으로 금반 아카데미 문화탐방 추진에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참여도 할 수 없어서
송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다가 오는 6월 초부터는 개인사를 접고 단장님과 부단장님의 말씀과 처장님
부장님들과 함께 지역사회를 위한 나눔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금반 충북 보은 '삼년산성'은
충청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사적지'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탐방을 함께하지 못하여
너무도 아쉽군요. 단장님과 참여하신 모든 회원분들께서 즐거운 문화탐방 되시길 바랍니다. 신세호 (드림)
5월말이면 대경상록 아카데미 1기과정을 마치기 시작을 합니다. 같은 뜻으로 만난 분들 끼리 과정만 마치고 헤어지게 하기가 아쉬워 만남을 다지는 시간을 가져보고픈 맘으로 몇분의 반장님과 상의를 하여 추진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회원님들끼리 자치적, 자발적인 행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가급적 뜻있는 나드리가 될 수 있도록 적극 참여를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최상순드림
대경상록자원봉사단의 가장 뜻깊고 화합과 친목의 대 행사에 큰 박수을 보냅니다. 그른데 법주사의 최고 대표인 미륵부처님은 보이지 않아 무척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