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원에서의 생활.
2010년 1월 9일 미국에서 돌아와 곧 수원으로 이사할 계획을 하고 추진했다. 딸 가까이 살기로 한 것이다. 진즉부터 광주를 떠나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드디어 모두 동의해서 떠날 계획을 한 것이다. 반대하던 딸이 결혼을 하고 맞벌이가 되면서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았고, 우리도 광주에 가까운 친척도 없고, 떠나는 것이 무방한 상황이 된 것이다. 어머니가 설립교인인 계림교회에서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온 것이 아쉬움을 주었지만, 계림교회에서 오점을 많이 남긴 나는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광주 집에 도착해서 곧 집을 팔려고 내 놓았다. 다행이 곧 집이 팔렸다. 집을 넘겨주면서 써 놓은 일기를 여기에 옮긴다.
★2010년 3월 24일
집을 넘겨주면서
집을 팔려고 했다. 오래전부터 이야기한 C권사가 우리 집을 인수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함께 L집사차로 드라이브도 하고 점심식사를 같이 한 후 우리 집에 와서 집값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C권사는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내가 9천 만 원을 제시했다. L집사가 옆에서 좀 깎으라고 했다. C권사가 8천8백으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집값이 결정되고 빠른 시일에 계약을 하자고 했다. C권사는 자기가 전권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가족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상황이 바뀌었다. 자녀들이 비싸다고 퇴짜를 놓은 것이다. 우리에게 부동산중개소 등에 가서 시세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기들이 알아본 것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시세를 알아보았다는 자녀들을 나에게 보내 주라고 했다.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자녀들을 보내 주지 않았고 집을 사지 않을 의사만 강하게 전달되어 왔다. 자녀들을 보내주면 집을 보여주고 그들의 요구대로 하려고 했다. 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내용도 알아보지 않고 트집을 잡는 것은 전혀 집을 살 의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녀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 C권사 혼자만의 욕심이었다. 우리 집을 잘 아는 C권사는 큰딸과 함께 살려고 하는 그의 사정에도 잘 맞고 욕심이 났지만, 일부 돈을 내 놓아야할 두 사위의 사정은 그것이 아닌 듯했다. C권사는 얼마 있지 않고 미국으로 다시 떠났다.
집을 팔기 위해 아파트 앞에 광고지를 부쳤다. 곧 문의 전화가 오고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매가 와서 집 구경을 하더니 욕심을 내고 자기 부모들과 의논 후에 알려 주겠다고 하고 갔다. 그런데 교회에 어느새 소문이 나서 L장로가 집을 사겠다고 했다. 그 역시 부른 대로 주겠다고 했다. 자기 딸에게 꼭 맞는 집이기에 딸에게 사게 할 것이고, 딸이 사지 않으면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8천8백만 원을 주겠다고 하고, 바쁜 일이 있다면서 곧 갔다. 이야기가 너무 짧았기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다시 만났다. L장로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야기가 달라졌다. 역시나 그의 자녀들이 집이 비싸다고 이의를 단 것이다. C권사와 똑같은 상황이다. 그러면서 값을 적당히 해주면 딸이 사도록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딸과 한께 우리 집에 왔다. 잠간 머물고 바쁘다고 L장로는 가고 딸과 이야기 했다. 딸은 아버지가 사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값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갔다. 시간이 흐른 후, L장로와 다시 통화했다. 얼마나 깎아 주겠냐고 하기에 그 쪽에서 값을 제시하라고 했더니, 딸과 의논해서 딸이 사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적당한 값에 임자가 나면 팔라고 했다. 결국 딸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딸에게 미루고 있으면서 살 것 같지 않았다.
자매가 와서 보고, 또 그 부모도 와서 집을 본 사람들에게 연락했더니, 곧 와서 값을 정했고, 다음날 계약을 했다. 집임자는 분명 따로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두 분의 교인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에, 아내와 의논한 후, 사겠다는 값을 제시한 사람들에게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응해 주었다. 리모델링을 해서 새집이나 다름없고, 아내의 손길을 통해 너무도 깨끗이 관리된 집이기에, 와서 본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했다. 이사 올 사람은 집에 손댈 일이 전혀 없이 그대로 들어와서 살면 되는 집이다. 팔고 나니 너무 싸게 팔아버린 것 같은 생각이지만, 우리 집이 꼭 필요한 사람에 넘겨져서 좋은 마음으로 들어와서 산다면 좋을 일이겠다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려 한다. 어쩌면 그런 기대가 되는 사람이 집을 산 것 같다. 이사 올 가족이 집을 통해서 복된 삶을 이루기를 기원 한다.
★집이 팔리므로 곧 수원에서 우리의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아내와 함께 수원에 와서 해지 집에 있으면서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수원에 오후 늦게 도착하면서 중계업소 몇 곳에 전화를 해보았다. 한 곳에서 적당한 집이 있다고 해서 바로 가보았다. 아내는 쉬기로 하고 나 혼자서 갔다. 26평 아파트 7층으로 방 3, 욕실 2, 남향으로 우리가 생각한 조건에 맞는 집이었다. 해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1억 5천 만 원의 전세 집이었다. 계속적으로 집을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빨리 계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해서 2년 기한으로 바로 계약을 했다. 아내와 딸이 전혀 의논하지 않고 혼자 결정해 버린 것에 대해 원망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지만, 조건에 맞는 집이어서 그대로 결정을 하고, 이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2010년 5월 7일 수원으로 무사히 이사를 했다.
우리가 이사를 하기 위해 집을 팔고, 살 집을 구하고 할 때인 3월에, 마침 해지에게 임신의 소식이 있어서, 딸에게 도움이 되기에 아주 적절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4월초에 다시 유산의 소식을 듣게 되어 안타까움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한 후 곧 다시 임신을 하게 되어 다행이었고, 생각대로 이사로 인해 해지에게 엄마의 사랑을 깊이 체험케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하나님께 감사했다.
수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어 1년도 안되었을 때, 아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2011년 1월 22일 새벽에, 아침 산책을 나간 아내가 빙판에 미끄러져 허리를 다친 것이다. 집 가까이에 원천리천이 있고, 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좋아서 새벽기도에 다녀오면서 산책로에 나가 가벼운 운동을 했는데, 그날 아침에는 눈이 조금 내렸고 땅이 얼어 있었던지, 아내가 넘어지면서 척추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수원 우리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치료를 받은 후, 19일 만에 퇴원을 했다. 또 같은 해 12월 5일부터 12일까지 8일간 성빈센트병원에 입원해서 자궁에 이상이 있는 것을 치료받기도 했다. 원래부터 있었던 병을 치료한 것이었다. 2013년 3월 27일과 4월 3일에는 두 눈의 백내장 수술을 차례로 하기도 했다. 나도 같은 해 5월 28일에 위이를 모두 제거하고 완전 틀니를 했고, 7월 2일에는 우측 눈의 백내장 수술을 했다. 좌측은 광주에서 했었기에 우측만 하면 되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의료비 부담이 상당이 많이 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한 것은 모든 비용을 누구에게 의지 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2011년 2월 25일에는 외손자 민채가 태어났다. 해지가 1년간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 엄마와 함께 손자를 보살피는 일이 생기고, 아이로 인해 많은 즐거움이 있기도 했다. 2013년에는 외손녀 은채가 태어나서 함께 보살피는 새로운 경험들을 하면서 즐거움과 함께 아이를 보살피는데 따르는 어려움도 경험해 가고 있다. 광주에서 우리 부부 두 노인만 생활한 것 보다는 훨씬 좋고, 보람도 있는 일이라고 우리 부부는 이야기하며,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부딪치며 복된 삶을 이루어 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수원에 와서 영통구 매탄동에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 2012년에 2년의 기한이 가까워 질 때, 살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획하던 중, 해지 가족과 같은 아파트에 살 계획을 하고 추진하게 되면서, 팔달구 화서 2동에 있는 화서위브하늘채 아파트를 알게 되었고, 곧 같은 동의 아파트 두 채를 골라 사게 되었다. 해지는 106동 1403호를, 우리는 같은 동 802호를 구입해서 2013년 4월 20일에 해지가 먼저 이사를 했고, 우리는 5월 3일에 이사를 해서 바로 이웃하여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사한 후 한 달쯤 지난 6월 5일에는 미국에서 용만이 가족이 처남 결혼식도 참석 겸해서 귀국하여 이사한 집에서 잠시 같이 지내기도 했다. 영주권이 없어서 용만이의 귀국이 어려워 오지 못했는데, 영주권을 받게 되어, 기회만 주어지면, 이제는 왕래가 자유스러워 진 것도 좋은 일이 되었다. 용만이는 직장 때문에 2주 만에 출국했고 며느리 희정이와 아이들은 3개월 정도 머물다가 출국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수원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큰 활력을 불어 넣는 생활이었다.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교통비 부담 없이 지하철이 다니는 곳은 마음대로 다닐 수 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수도권의 산과 강변, 관광지 등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2, 3회씩 산이나 걷기 좋은 길들을 찾았다. 그런데 해지가 은채를 낳고는 육아휴직을 길게 하지 않고 2014년 3월부터 직장에 복귀해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민채와 은채 두 아이를 보살피는 일이 아내와 나의 몫이 되고 말았다. 아내 혼자서는 두 아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외출을 억제하고 아이들 보살피는 일에 함께해야 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해지 부부가 아이들을 보살피기 때문에 나의 외출은 토요일에만 가능하게 되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기 때문이다. 3월부터는 토요일에만 산이나 걷기 좋은 길에 나가게 되었다. 어쩌면 건강에 무리하지 않고 적당하게 운동해야 되는 계기가 된 것인 것 같기도 한다. 사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오래 걷는 것이 피로를 가져다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나에게 적절하게 되어 진다고 생각하면서 감사한다. 아내와 내가 어떻게든지 건강해서 어느 기간까지는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는 것이 우리에게 보람된 일이라 생각 한다. 토요일이면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은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다. 수도권에는 갈 곳이 많아 좋다. 계속 새로운 곳을 갈 수가 있고, 한 번 갔던 곳도 다시 가면 변화가 있어 다시 새롭기도 한다. 건강이 허락 하는 한 나의 생활을 계속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 될 것이다.
광주에서 생활하면서 부적절한 여자관계로 아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 준 것이, 아내의 사랑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를 극진히 사랑해준 아내를 배신 한 것이 되었고, 원망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늙어가면서 더욱 필요한 아내의 보살핌을 기대하기에는 미안한 처지가 되었다. 고운 마음씨의 소유자인 아내는, 그런 것 저런 것 상관하지 않고, 지금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지만, 불쑥 불쑥 배신에 대한 분노를 온화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내를 피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밖으로 많이 나가 주는 것이 아내에게 도움이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연과 벗하기가 너무 좋아서 밖으로 나가면서, 아내에 대한 배려가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광주가 싫어서 떠나고 싶었던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변화의 시도와 함께, 교회를 떠나고 싶은 것과, 나의 부적절한 여자관계를 정리하고, 잊을 수 있는 방법이 되리라는 것들이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은 참 좋다. 우선 여자관계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늙어짐의 좋은 점인 것 같다. 다만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지 못한 것이 큰 부담이 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기도하면서 응답이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