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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200년전 조선에… 자동양수기 있었다"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51 14.07.26 10: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년전 조선에… 자동양수기 있었다"

 

 

                                                                                     [동아일보]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대표적인 자동장치는? 자격루(自擊漏)다.

세종대왕의 지시로 장영실 등이 1434년에 만든 자격루는 물을 일정하게 흘려보내 북과 징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 물시계’다.

현재 1만원 권 지폐에 세종대왕과 함께 그려져 있어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과학문화재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또 하나의 뛰어난 자동장치가 설계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810년 호남 실학자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5)이 도면상에 제작한 자승차(自升車)다.

현대 개념으로 ‘자동 양수기’에 해당한다.

설계 목적은 가뭄 때 논과 밭에 물을 대 흉년을 막는 일. 비록 당시에 실물로 만들어지진 못했지만 설계도가 매우 정교해 학계에서는 ‘자격루 다음 가는’ 조선 시대 자동장치로 손꼽히고 있다.

○ 부품 크기 등 꼼꼼히…30% 크기로 재현 성공

23일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장은 “하백원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2년간 연구한 끝에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실물 형태로 양수기를 복원했다”고 밝혔다.

하백원의 후손들이 그동안 보관해오던 ‘자승차도해’(표지 포함 28쪽)를 공개하며 과학관에 복원을 의뢰한 결과였다. 이 연구성과는 국내 학술지 ‘전남사학’ 여름호에 게재됐다.

설계도는 앞면 밑면 등에서 본 100여 개 부품들에 대한 그림이었기 때문에 전체 윤곽은 물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구팀은 설계도에 따라 부품을 하나씩 제조해 나갔다.

길이, 두께, 구멍 크기 등이 당시 쓰이던 척도인 리(0.03cm) 단위까지 상세히 소개됐고 부품별 나무의 재료도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부품끼리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연구여건상 이번에 만든 실물은 실제의 30% 크기로 가로 세로 60cm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처음 봤을 때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 실장은 “조선 시대의 농기구를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당시까지 주로 사용된 양수기는 답차(무자위)였다.

사람이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로 지금도 염전에서 바닷물을 대는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하백원은 자연의 힘(강물)을 동력원으로 이용한 자동 양수기를 떠올렸다. 먼저 강물의 직선운동으로 물레바퀴를 돌려 회전운동으로 변환시킨다. 이 회전력으로 톱니 모양의 ‘기어’가 돌면서 기다란 피스톤 2개를 다시 직선(상하)운동으로 바꾼다.

피스톤이 아래로 떨어지면 물이 별도의 통로로 밀려 올라간다. 설계도에는 물살이 셀 경우 속도를 줄이는 ‘감속기어’도 제시돼 있다.

○ 자동차-수력발전소 원리 적용

정 실장은 “동력이 전달되는 과정을 보면 현대 자동차나 수력발전소의 핵심원리가 발견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과제는 남아 있다. 정 실장은 “실제 크기로 만들어 강물에서 직접 구동을 시켜 봐야 진정한 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강물의 속도나 피스톤의 무게, 그리고 퍼올려지는 물의 양 등에 관한 기계공학적 접근이 추가돼야 ‘실용성’이 증명된다.

그럼에도 사람의 힘이 필요 없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양수기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흥미롭다.

사실 하백원은 자명종, 스스로 헤엄치는 거북인형, 술이 잔의 70%까지 차오르면 저절로 술이 새어 나간다는 계영배 등 독창적인 장치를 많이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신비의’ 인물이다.

하백원의 6대손 하성래(전 안양대 국문학과 교수) 씨는 “어린 시절 문집에서 다양한 설계도를 본 기억이 난다”면서 “자승차를 제외하고 다양한 자동장치 설계도가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됐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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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
 

 
잔의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버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 이라는 속뜻이 있다. 과욕을 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물 이기도 하다.
이 배(잔)은 밑에 구멍이 분명히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를 않지만, 7할 이상 채우게 되면 밑구멍으로 쏟아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는 마치 현대의 “탄타로스의 접시”라는 화학 실험기구와 비슷한 원리인 것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계영배를 만든 분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무등산의 실학자로 불리 우는 하백원(1781-1844) 과 우명옥 이다.
하백원은 전남 화순지방에서 태어나 20세까지 학문을 배우고 23세부터 53세까지 30여년간 실학연구에 몸을 바친 과학자, 성리학자, 실학자였다.
그가 만든 대표작은 양수기 역할을 하는 자승차, 계영배, 펌프같이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기, 시간이 되면 스스로 소리를 내던 자명종, 청기와, 유리, 벽돌 등의 제조 및 대동여지도 보다 51년 앞선 동국지도, 세계지도, 천문도 등이 있으나 현재 하백원의 계영배는 전해 지는 것은 없는듯하다.

우명옥은 강원도 홍천지방의 전설에 의하면 우삼돌(우명옥)이라는 도공이 있었는데 사기그릇을 만드는 것을 동경하여 오다 마침내 조선시대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경기도 광주분원으로 갔다 한다.
그는 그곳에서 그의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마침내 스승도 이루지 못한 雪白磁器를 만들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반상기는 왕실에 진상이 되었고 왕은 雪白磁器의 아름다움에 경탄하여 상금과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 후 명옥의 동료들은 그가 잘되는 것을 질투하여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게 꾀인다. 방탕한 생활은 계속 이어졌고 얼마가지 않아 그 동안 사기그릇을 만들어 모은 재물을 전부 탕진한다.
그제서야 그 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승에게 돌아온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물에 목욕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자 그는 스승에게 조그만 한 잔을 보여주며 이 잔을 계영배 라고 하였다.
잔에 술을 가득 부었으나 술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다시 술을 반쯤 붙자 술이 남아 있었다 한다.
스승은 그제서야 무릎을 치며 명옥이 술로 망했으니 술을 조심해서 마시자라는 뜻으로 과하게 마시지 말자라는 교훈이 담긴 것으로 깨 달았다 한다.
그 후 술잔은 의주의 임 씨라는 사람이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시대 의주 거상 임상옥(1779-1855)이 였다.
임상옥은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면서 큰 돈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상옥이 청부로서 조선 최고의 큰 재물을 만든 바탕은 계영배의 기운을 끊임없이 느끼고 그 교훈을 되새긴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임상옥이 우연히 계영배를 깨뜨렸는데 이상한 일은 그 잔이 깨어지던 날 우명옥도 세상을 떠났다 한다.
 

 

계영배(경계할戒, 찰盈, 잔杯)의 한자성어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 즉,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계영배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 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넘치면 곧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교훈이다. 이는 곧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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