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해양연구소(소장 성낙준)는 지난 7월 2일 충남 태안군청 중회의실에서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 대한 수중발굴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2009년 4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 진행됐던 수중발굴조사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도자기 380여점을 인양하고, 2척의 선체가 매장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조사에서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종류의 도자기가 발견됐고, 송, 원, 청대의 중국도자기도 발견돼, 이 지역일대가 무역항로의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입증됐다. 특히 송 대의 묵서가 쓰인 도자기가 발견되어 ‘고려와 송이 교역했다’는 <고려사>의 내용을 최초로 증명하게 되었고, 석탄 덩어리가 발견되어 <삼국사기>의 진평왕 31년(609년)에 “땅이 탔다”고 처음 기록된 것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물적 증거를 제시하게 됐다.
이 지역의 수중조사는 Ⅰ구역과 Ⅱ구역으로 나뉘어져 이루어졌으며, Ⅰ구역과 Ⅱ구역은 사이의900미터에 이르는 공간에서도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광역조사 중에 있고, 장기계획을 마련할 전망이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다도해역 위성사진- 국립해양연구소 제공>
1. 고려, 조선 중국 도자기 360여점 인양 및 선체 발견
Ⅰ구역에서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선체 1척과 청자 360여점이 발견됐다. 선체는 길이10m, 폭 2m 정도로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저판(배밑) 5단과 좌우 외판이 2단씩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노출부분은 제한되어 있으나, 한선(우리나라의배)으로 추정되며, 1984년에 발굴된 완도선과 비슷한 크기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있다.
청자 60여점은 11세기~12세기에 발생된 양식으로 추정되며, 중상품에 속한다. 또한 발굴된 도자기 가운데는 그릇 밑면에 묵서가 쓰여진 것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와 중국 간의 국제교류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 보다 실제로는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양 국간의 무역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묵서가 쓰여진 도자기- 고려시대 활발한 무역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도자기 사용 계층을 나타낸다>
앞서서 주지했듯이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한반도에서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부터 석탄을 사용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육상발굴과 해상발굴의 경우를 모두 포함하여 처음으로Ⅰ 구역에서 석탄이 발견됨으로써, 석탄 사용 시기추정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발견된 석탄덩어리- 삼국사기의 진평왕 31년(609년)에 “땅이 탔다”고 처음 기록된 것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물적 증거를 제시하게 됐다>
식량으로 보이는 볍씨도 발견되었는데, 선사시대의 볍씨모양과 오늘날의 볍씨모양과 다른 것이 발견된 것으로 선사시대와 오늘날의 벼의 발전과정의 중간 연결고리를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Ⅰ구역은 향후 정밀 발굴에 착수할 계획이다.
Ⅱ 구역에서는 고려와 조선, 중국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 300여점이 인양되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의 경우 10세기 말의 중상품정도 수준의 청자부터 14세기 후반 상감청자의 최고 수준에 이른 최고급품 도자기 까지 발견되었으며 이후 퇴락한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도자기까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만으로도 도자기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가치를 지닌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문화재 지도위원인 김영은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고려와 송이 교역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물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고 밝히고 “이 구역에서 발견된 청자는 무늬와 구도의 차별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신안지역에서 발견된 청자와는 다른 층위의 명품청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4세기 상감청자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이른바 "명품청자"들이다 >
Ⅱ 구역에는 다량다종의 도자기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것은 나무 닻에 매달에 사용했던 닻돌 11개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큰 배의 경우 앞뒤에 닻돌을 2개 쓴다고 보면 적어도 5척 이상의 배가 이 곳에서 침몰돼 있는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며, 앞으로의 발굴 작업을 통해서 그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닻돌- 총 11개의 닻돌이 발견 되었고,
최소 5척 이상의 배가 이곳에서 침몰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 그 시절, 마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기에
태안 앞바다는 1981년 해군과 함께 수중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한 이래,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손꼽혀 왔다. 지난 2007년 쭈꾸미 조업을 하던 어민이 우연히 쭈꾸미를 잡기 위한 소라 껍떼기에 주꾸미와 함께 고려청자가 딸려 온 것을 신고한 것을 시작으로 이번 조사를 포함하여 2007년 이후로 943점의 유물이 인양 되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태안 앞바다 마도 일대에서 마치 노다지 탄광처럼 이다지도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했다고 보여진다. 먼저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안흥정이라는 국제적 객관(외국 사신들의 숙소)이 위치해 있으면서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요인은 이곳이 통행이 어려운 여물목이라는 뜻인 난행량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저지형이 복잡하고 조류가 빨라 해난사고가 잦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곳인 동시에 많은 배들이 침몰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900년 동안이나 수면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던 보물 창고는 최근에 서해안 간척사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세상에 문을 열게 된다. 기반공사로 대규모 매립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조류자체가 바뀌면서 유물 위로 퇴적되어 있던 뻘들이 씻겨 내려가면서 유물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특히 현재 조사중인Ⅰ구역과 Ⅱ구역 사이 900미터에 이르는 구간 곳곳에서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그 공간에 몇 척의 배가 침몰해 있을지, 어느 정도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케일을 구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도 일대에 대한 수중발굴조사가 진행되면 유물 발견의 일차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국제교류사, 도자사, 수중 고고학 전반에 획기적인 연구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국립해양연구소는 발굴조사를 오는 10월말까지 연장하기로 했고, 문화재청은 마도 인근 해역의 중요성을 고려해 10~20년 장기계획을 마련하여 체계적이고 치밀한 조사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3. 바다가 육지라면? 수중발굴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육상의 매장 문화재를 발굴하는 것은 소위 삽질, 호미질에서부터 시작한다. 지표면 위로 드러난 유물을 근거로 그 일대를 시굴하면서 발굴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태안 마도의 경우처럼 문화재가 땅속이 아닌 바다 속에 매장되어 있는 경우에는 발굴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그 수중발굴과정은 발표회장에서 보았던 유물들에 자체에 관한 호기심만큼이나 궁금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날 발표행사에서 수중발굴 현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어떤 과정을 통하여 발굴하게 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입수 준비중인 발굴사>
Ⅰ구역의 경우 수심 17미터 아래로 내려가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작업을 하고, 2구역의 경우 수심 5미터에서 7미터 아래로 내려가 1시간정도 작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2인이 1개조로 움직이면서 수중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바지선 위에 설치된 CCTV를 통해 모니터링을 하면서 수면 위에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날은 닻돌을 수면아래에서 바지선 위까지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먼저 장비를 모두 갖춘 발굴사(다이버) 두명이 바다 아래로 내려갔다.
<장비 점검 후 입수 직전의 모습>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장엄하게 입수하고 있는 발굴사>
두 명의 다이버들의 웅장한 모습이 바다 아래로 사라지면서 10여부 정도 지나자, 바지선위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크레인이 육중한 기계음을 내면서 작동을 했고, 고요했던 바다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두명의 발굴사가 유물을 해수면까지 인양한 후에, 크레인에 의해서 바지선 위로 옮겨지게 된다.>
<발굴사가 잠수한지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물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발굴사들이 닻돌을 가지고 올라온 것이었다. 발굴사들의 민첩한 몸놀림으로 바지선 가까이까지 닻돌을 끌고 오자, 크레인의 고리에 닻돌을 연결시켰다. 더욱 거센 기계음이 들리면서 닻돌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들은 일제히 닻돌을 보면서 감탄했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입이 쫙 벌어지는 현상을 면할 수 없는 나름의 환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닻돌>
<900여년의 세월을 바닷속에서 인고한 닻돌의 모습>
약 7미터의 바다아래에서 길이 172센티 무게는 약 300킬로에 달하는 닻돌을 어렵지 않게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인양된 닻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인양된 닻돌에 대해서 성낙준 국립해양연구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성낙준 소장은 "마도 Ⅰ구역과 Ⅱ구역 900미터 사이에 유물이 산재해 몇척의 배가 있을지 가늠조차 못한다"고 밝혔다
<인양된 닻돌에 대해서 설명중인 성낙준 국립해양연구소장>
2009년 4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 두달여간의 조사만으로도 상상을 초월 할 만큼의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마도 해역 일대의 유물 발굴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재청은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광역조사와 정밀조사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900여년의 장구한 세월을 견디고 나서야 드디어 보물창고의 문이 열렸고 이곳은 세월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가 될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해양연구소(소장 성낙준)는 지난 7월 2일 충남 태안군청 중회의실에서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 대한 수중발굴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2009년 4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 진행됐던 수중발굴조사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도자기 380여점을 인양하고, 2척의 선체가 매장되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 조사에서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종류의 도자기가 발견됐고, 송, 원, 청대의 중국도자기도 발견돼, 이 지역일대가 무역항로의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입증됐다. 특히 송 대의 묵서가 쓰인 도자기가 발견되어 ‘고려와 송이 교역했다’는 <고려사>의 내용을 최초로 증명하게 되었고, 석탄 덩어리가 발견되어 <삼국사기>의 진평왕 31년(609년)에 “땅이 탔다”고 처음 기록된 것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물적 증거를 제시하게 됐다.
이 지역의 수중조사는 Ⅰ구역과 Ⅱ구역으로 나뉘어져 이루어졌으며, Ⅰ구역과 Ⅱ구역은 사이의900미터에 이르는 공간에서도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광역조사 중에 있고, 장기계획을 마련할 전망이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다도해역 위성사진- 국립해양연구소 제공>
1. 고려, 조선 중국 도자기 360여점 인양 및 선체 발견
Ⅰ구역에서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선체 1척과 청자 360여점이 발견됐다. 선체는 길이10m, 폭 2m 정도로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저판(배밑) 5단과 좌우 외판이 2단씩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노출부분은 제한되어 있으나, 한선(우리나라의배)으로 추정되며, 1984년에 발굴된 완도선과 비슷한 크기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있다.
청자 60여점은 11세기~12세기에 발생된 양식으로 추정되며, 중상품에 속한다. 또한 발굴된 도자기 가운데는 그릇 밑면에 묵서가 쓰여진 것이 다량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려와 중국 간의 국제교류가 현재까지 알려진 것 보다 실제로는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양 국간의 무역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묵서가 쓰여진 도자기- 고려시대 활발한 무역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도자기 사용 계층을 나타낸다>
앞서서 주지했듯이 가장 특이할 만한 것은 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인데, 한반도에서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부터 석탄을 사용했는가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육상발굴과 해상발굴의 경우를 모두 포함하여 처음으로Ⅰ 구역에서 석탄이 발견됨으로써, 석탄 사용 시기추정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발견된 석탄덩어리- 삼국사기의 진평왕 31년(609년)에 “땅이 탔다”고 처음 기록된 것 이후로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물적 증거를 제시하게 됐다>
식량으로 보이는 볍씨도 발견되었는데, 선사시대의 볍씨모양과 오늘날의 볍씨모양과 다른 것이 발견된 것으로 선사시대와 오늘날의 벼의 발전과정의 중간 연결고리를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Ⅰ구역은 향후 정밀 발굴에 착수할 계획이다.
Ⅱ 구역에서는 고려와 조선, 중국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 300여점이 인양되었다. 우리나라의 도자기의 경우 10세기 말의 중상품정도 수준의 청자부터 14세기 후반 상감청자의 최고 수준에 이른 최고급품 도자기 까지 발견되었으며 이후 퇴락한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행하는 단계의 도자기까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만으로도 도자기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가치를 지닌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문화재 지도위원인 김영은 국립전주박물관장은 “고려와 송이 교역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증명해주는 유물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고 밝히고 “이 구역에서 발견된 청자는 무늬와 구도의 차별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신안지역에서 발견된 청자와는 다른 층위의 명품청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4세기 상감청자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이른바 "명품청자"들이다 >
Ⅱ 구역에는 다량다종의 도자기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것은 나무 닻에 매달에 사용했던 닻돌 11개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큰 배의 경우 앞뒤에 닻돌을 2개 쓴다고 보면 적어도 5척 이상의 배가 이 곳에서 침몰돼 있는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며, 앞으로의 발굴 작업을 통해서 그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닻돌- 총 11개의 닻돌이 발견 되었고,
최소 5척 이상의 배가 이곳에서 침몰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 그 시절, 마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기에
태안 앞바다는 1981년 해군과 함께 수중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한 이래,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는 곳으로 손꼽혀 왔다. 지난 2007년 쭈꾸미 조업을 하던 어민이 우연히 쭈꾸미를 잡기 위한 소라 껍떼기에 주꾸미와 함께 고려청자가 딸려 온 것을 신고한 것을 시작으로 이번 조사를 포함하여 2007년 이후로 943점의 유물이 인양 되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태안 앞바다 마도 일대에서 마치 노다지 탄광처럼 이다지도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가지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했다고 보여진다. 먼저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안흥정이라는 국제적 객관(외국 사신들의 숙소)이 위치해 있으면서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요인은 이곳이 통행이 어려운 여물목이라는 뜻인 난행량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저지형이 복잡하고 조류가 빨라 해난사고가 잦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배들이 드나드는 곳인 동시에 많은 배들이 침몰한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900년 동안이나 수면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던 보물 창고는 최근에 서해안 간척사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세상에 문을 열게 된다. 기반공사로 대규모 매립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조류자체가 바뀌면서 유물 위로 퇴적되어 있던 뻘들이 씻겨 내려가면서 유물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특히 현재 조사중인Ⅰ구역과 Ⅱ구역 사이 900미터에 이르는 구간 곳곳에서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그 공간에 몇 척의 배가 침몰해 있을지, 어느 정도의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케일을 구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도 일대에 대한 수중발굴조사가 진행되면 유물 발견의 일차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국제교류사, 도자사, 수중 고고학 전반에 획기적인 연구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이에따라 국립해양연구소는 발굴조사를 오는 10월말까지 연장하기로 했고, 문화재청은 마도 인근 해역의 중요성을 고려해 10~20년 장기계획을 마련하여 체계적이고 치밀한 조사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3. 바다가 육지라면? 수중발굴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육상의 매장 문화재를 발굴하는 것은 소위 삽질, 호미질에서부터 시작한다. 지표면 위로 드러난 유물을 근거로 그 일대를 시굴하면서 발굴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태안 마도의 경우처럼 문화재가 땅속이 아닌 바다 속에 매장되어 있는 경우에는 발굴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그 수중발굴과정은 발표회장에서 보았던 유물들에 자체에 관한 호기심만큼이나 궁금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날 발표행사에서 수중발굴 현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어떤 과정을 통하여 발굴하게 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입수 준비중인 발굴사>
Ⅰ구역의 경우 수심 17미터 아래로 내려가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작업을 하고, 2구역의 경우 수심 5미터에서 7미터 아래로 내려가 1시간정도 작업이 가능하다고 한다. 2인이 1개조로 움직이면서 수중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바지선 위에 설치된 CCTV를 통해 모니터링을 하면서 수면 위에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날은 닻돌을 수면아래에서 바지선 위까지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먼저 장비를 모두 갖춘 발굴사(다이버) 두명이 바다 아래로 내려갔다.
<장비 점검 후 입수 직전의 모습>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장엄하게 입수하고 있는 발굴사>
두 명의 다이버들의 웅장한 모습이 바다 아래로 사라지면서 10여부 정도 지나자, 바지선위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크레인이 육중한 기계음을 내면서 작동을 했고, 고요했던 바다위로 무언가 떠올랐다.
<두명의 발굴사가 유물을 해수면까지 인양한 후에, 크레인에 의해서 바지선 위로 옮겨지게 된다.>
<발굴사가 잠수한지 몇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물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발굴사들이 닻돌을 가지고 올라온 것이었다. 발굴사들의 민첩한 몸놀림으로 바지선 가까이까지 닻돌을 끌고 오자, 크레인의 고리에 닻돌을 연결시켰다. 더욱 거센 기계음이 들리면서 닻돌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들은 일제히 닻돌을 보면서 감탄했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입이 쫙 벌어지는 현상을 면할 수 없는 나름의 환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닻돌>
<900여년의 세월을 바닷속에서 인고한 닻돌의 모습>
약 7미터의 바다아래에서 길이 172센티 무게는 약 300킬로에 달하는 닻돌을 어렵지 않게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인양된 닻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인양된 닻돌에 대해서 성낙준 국립해양연구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성낙준 소장은 "마도 Ⅰ구역과 Ⅱ구역 900미터 사이에 유물이 산재해 몇척의 배가 있을지 가늠조차 못한다"고 밝혔다
<인양된 닻돌에 대해서 설명중인 성낙준 국립해양연구소장>
2009년 4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 두달여간의 조사만으로도 상상을 초월 할 만큼의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마도 해역 일대의 유물 발굴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재청은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광역조사와 정밀조사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900여년의 장구한 세월을 견디고 나서야 드디어 보물창고의 문이 열렸고 이곳은 세월의 비밀을 밝혀줄 열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