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빌립보서 3장 1-11절
데이비드 폴리슨은 사람의 분노에는 심리적인 요인 외에 영적인 면이 있다고 간파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섬뜩한 일입니다. 상황을 자신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 그 밑뿌리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신의 자아가 있습니다. 바로 근원적인 죄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겠다고 말할 후 주제를 바꾸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들로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하나님 백성의 자격으로 가르쳐서 교회들을 어렵게 한 자들입니다. 아직 빌립보 교회로 들어오지 않은 듯 보이지만, 바울은 그들의 영향력을 조심하고 바른 진리로 분별하라고 요청합니다.
할례주의자로 인한 위험을 경고(1-11)
배움이 멈춘 사람들은 교만과 자만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때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세상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누리는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율법주의 선생들에 대해 설명해 나고 있습니다.
1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1)
바울은 그리스도보다 육체를 자랑하는 할례파들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는 몸에 해를 입히는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자랑과 영광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부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되게 합니다.
(1) 새로운 권면을 시작함(1)
앞 강에서 다른 새로운 주제로 전환했습니다. ‘나의 형제들’이란 말로 빌립보 성도들과의 친밀감을 드러내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기뻐할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수고스러움이 아니며, 그들에게 안전하다는 내용을 추가합니다. ‘같은 말’이란 2절부터 말할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했던 내용일 것입니다. 주 안에서 진리로 인한 바른 삶을 조심해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그 삶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2) 할례주의자들을 조심하라(2-3)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 기독교인으로서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할례는 옛 언약 요소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외적 증거입니다(창세기 17:10-14). 아마도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고, 그것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창세기 17:13-14을 근거로 예수로 인한 새 언약 안에서도 할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듯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먼저 2절에서 몇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 수위를 높입니다. 첫째, ‘삼가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해 강조합니다. 둘째, ‘개’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맨 앞에 위치시킵니다. 다짜고짜 ‘개들’이라고 말한 듯한 느낌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것은 충격요법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인 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여겼겠지만, 실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그들이 ‘개’라고 말합니다. 셋째, 그들을 ‘악을 행하는 자’로 말합니다. 단순히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를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그들이 주장하는 할례를 거세라는 말로 비하합니다. 이 모든 것은 독자들을 보호하고픈 바울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왜 문제인지를 3절에서 설명합니다. 할례를 가진 자기들만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방인 독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 ‘우리’가 새 언약의 참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섬깁니다. 성령은 새 언약 백성의 증거로 약속된 것이기에, 그 성령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가 진짜 하나님 백성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예수는 새 언약에 대한 구약 예언을 성취한 분입니다. 신자는 그 예수와 관계 맺고 있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육체’란 몸이나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 얻은 자로서 복음에 합당치 않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단순한 육체의 표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곧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설명입니다.
(3) 바울의 예 1: 회심 이전 상태(5-6)
할례주의자에 대한 반박으로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육체, 곧 그리스도와 무관한 세상 것들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다고 하지만, 바울은 회심 이전의 자기가 휠씬 더 많다고 말하고 그 내용을 열거합니다.
총 일곱 가지인데, 유대인으로서의 자격과 율법과 관련된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자격은 8일 만에 할례 받은 것과 이스라엘 족속, 베나냐민 지파 출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입니다. 뒤의 두 개는 정말 자랑할 만합니다. 베냐민은 첫 번째 왕을 배출한 지파요 남유다 왕국을 이루었던 지파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팔레스틴 출신 유대인처럼 아람어를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것에도 자랑할 만합니다. 율법학자 그룹인 바리새파 출신이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율법 준수에 열심이었으며, 그 율법의 의로는 홈이 없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박해했다는 거의 예수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여겨 그들을 막는 것이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란 율법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행했다는 의미로 언약 관계의 신실함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전 바울의 입장에서는 언약 백성의 의무를 자기만큼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완벽합니다.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을 만한 조건들입니다.
(4) 바울의 예 2: 회심 이후 상태 1(7-11)
5-8절에서 말한 놀라운 조건들을 무색하게 하는 반전이 시작됩니다. 현재 입장에서 과거의 그 모습은 전혀 쓸모없는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가치는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게 하신 그리스도(메시아) 예수입니다. 바울은 왜 그분이 더 나은 가치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비록 2:6-11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미 독자들에게 전했었고, 그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의 변화의 핵심과 이후 모습을 소개합니다.
먼저, 변화의 핵심 모습은 가치 비교를 통한 분별입니다. 행위가 중요하지만 우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먼저 생각과 사고 영역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우선적 가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입니다. 7-11절에 열 번이나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표현(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그의 부활의 권능, 그의 고난, 그의 죽으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율법 지킴을 통해 옛 언약 관계에서의 충실함을 최선으로 표현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 바울 역시 옛 언약이 약속했던(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34:23-25) 새로운 언약 관계를 완성해 줄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이미 와서 공적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의 길을 완성했지만, 바울은 몰랐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 받고 마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신실하게 지킨 사람처럼 여김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받은 것입니다. 이후 그에게는 옛엣 언약의 요소보다 새 언약을 시작하고 온전케 하실 그리스도 예수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에 함께하고 싶어졌습니다. 심지어 그의 고난과 죽음도 본받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닐뿐더러, 그의 부활처럼 장차 신자에게도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옛 언약의 요소를 강조하는 할례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할례주의자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은 더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이 독자들 교회에도 미칠 수 있기에 미리 경고했고, 편지로 다시 조심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 시민으로 사는 일은 가치의 전복(顚覆)을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입니다. 현실의 통념과 지배 논리를 거절하고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에서 낯선 자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연한 세계에 당당하게 대항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