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7장 1-5절
비판하지 말라
지난 몇 주 동안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방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것으로 대표되는 재물을 그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재물에 대한 염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모든 염려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 자신, 그분의 영광 그리고 그 영광에 합당한 열매들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방향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비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시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일단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만 생각해 본다면 일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문자적으로 모든 비판을 금하고 있는 그런 말씀은 분명 아닙니다. 다시 말해 비판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용납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역으로 이용해서 자신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거절하기 위해서 이용하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가 분명 아니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살펴오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신랄할 비판을 하셨고, 마태복음 7장만 하더라도 분명 비판하시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주에 살피게 될 마태복음 7장 6절의 경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5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하여 비판을 금하는 말씀이라면 6절이나 15절과 같은 말씀은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개 혹은 돼지라고 부를 정도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또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하실 정도로 분별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비판에 대하여 금하고 계신 것은 분명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하실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무엇보다 참과 거짓, 선과 악에 대한 분별과 그것에 대한 판단 그리고 비판이 분명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판하다’는 말의 뜻은 단지 비판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다, 결정하다, 선택하다, 정죄하다’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김성수).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모든 판단을 멈추고, 모든 선택을 멈추고, 아무 것도 정죄하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는 진리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진리를 세우고 따르기 위해서, 그리고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기 위해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곧 66권으로 된 이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규범이 있는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지만, 한편으로는 말씀을 받되 간절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서도 살펴야 합니다(행17:11). 왜냐하면 같은 성경을 통해서도 다른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어디까지 말씀하시는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보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왜 저주까지 말씀하시느냐?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로 바르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 없이 이것도 괜찮다, 저것도 괜찮다고 다 수용하게 되면, 다시 말해 아무런 비판 없이 다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교회라는 이름만 있을 뿐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그런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다원주의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원주의라는 것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 진리가 사라진 교회, 참과 거짓에 대한 분별이 없는 교회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경계가 있어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 분별과 판단, 비판하는 일이 교회 안에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비난하거나 혹은 지금 시대에 걸맞지 않는 종교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복인 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를 위한 박해요, 마지막에 가서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5:10-12).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WCC(세계교회협의회) 운동이라고 해서 말로는 일치요 화합, 평화와 사랑, 관용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미 거기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음이 분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듣기에는 좋은 말로 위장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 외에 결과되어지는 것이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어떤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 내용인가? 일단 본문의 맥락부터 살피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는데,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어떤 말씀과 함께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안에서는 마태복음 5장과 함께 연결해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으로 가시겠습니다. 먼저 36절을 보시면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씀이 마태복음 5장 48절과 상응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 누가복음 6장 37절에 보시면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씀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자비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자가 되는 방향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뭐냐? 함부로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금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누가복음 6장에서는 마태복음 6장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지만, 오히려 다른 장(눅11장)을 통해 마태복음 6장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서두에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그 영광에 합당한 열매들을 추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특히 열매와 관련하여 그 방향은 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이나 같은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고자 하는 자들의 주의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만 나오고 있지만, 누가복음 6장에서는 어디까지 말하느냐? 다시 37절을 보시면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그러니까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오히려 용서하라, 그리고 38절에서는 주라는 것까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분별, 거짓에 대한 비판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대하지 않는 비판, 정죄만을 위한 비판, 용서가 없는 비판, 주고 주고 또 줘야 하는 자들이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만 비판하는 것을 금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말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나 되는 양 그렇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정죄하는 그런 것을 금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마치 자신이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심판하고자 하는 그런 것에 대한 경계가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하여 칼빈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가운데 남의 행동에 대해 정도 이상으로 간섭하는 사람은 없는가? 하찮은 잘못을 가지고 법석을 피우는 자는 누구인가? 문제 그 자체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크게 떠벌려 놓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우리가 어느 정까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간섭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찮은 잘못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수준이 다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잘못을 했지만 같은 잘못이라도 대상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야 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는 항상 부드럽게만 말해야 하는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때로는 강하게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지혜가 요구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실 때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비판을 위한 비판, 정죄를 위한 비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근거로 하지 않는 비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분명 금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죄 문제라 할지라도 용서가 없이 비판하는 것만 있다면 그것은 성도의 열매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인간이란 존재를 생각해 보자면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실제 우리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사고요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추악한 말이지만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 죄악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반면, 다른 사람이 죄에 대해서는 엄격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러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때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고 비판할 때가 많고, 그런 기준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인생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비난하길 좋아하며, 동시에 같은 죄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한 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소위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특히 신학적으로 우리가 개혁주의 신앙을 목표로 한다고 할 때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칼날을 들고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달리 말하면 주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비판하고 있는가? 누가복음의 말씀처럼 정죄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용서하고, 우리의 것을 주기 위한 비판인가? 아니면 단순히 내가 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비난하고 심판하기 위한 비판인가? 내가 비판하면서 나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는 교만에 근거한 비판은 아닌가?
여러분, 개혁신앙이 아니더라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신앙의 열심을 가진 분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비판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이런 우월의식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개혁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그런 우월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교회들을 비판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진리 때문에 비판하는 것을 뭐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판이 자기의 자랑이 되고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들에 대하여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물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것, 잘 하는 것이고 그것보다 앞서 감사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찾아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가게 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길을 소개해 줘야 합니다. 옛적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선한 길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알려줄 때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별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고,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 참과 거짓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도 주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 가장 잘 되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비판을 위한 비판, 정죄를 위한 정죄라면 좋은 길, 선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오늘 본문으로부터는 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칼빈도 그의 주석에서 이런 말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좋게 볼 수 있을 때에도 교만한 우월감으로 매사를 부당하게 판단하게 된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칼빈의 주석을 좀 더 읽어드리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너무 열을 올리거나 악의적으로 나오거나 또는 과도한 호기심을 발동하지 말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따라 판단하며, 사랑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는 자는 언제든지 자신을 먼저 혹평하기 마련이요, 이렇게 함으로써 판단에 있어서 올바른 한계와 질서가 유지된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선악에 대한 모든 구별을 그만두라는 핑계로 받아 들이는 자는 이 말씀을 악용하는 자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실 때 그것은 일차적으로 진리의 문제, 선과 악에 대한 문제까지 다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마치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교만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아무런 근거 없이, 단지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심술 때문에 형제를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속단해 버리거나 불쾌한 일들을 추측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마음, 잔혹한 마음 혹은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거나 남을 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 성경은 그것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매튜 헨리 주석 참조).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 4장 11절과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로마서 14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러나 진리와 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의 시각을 가지되, 매우 지혜롭게 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비난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느냐? 갈라디아서 6장 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잘못에 대하여 바로 잡되 온유한 심령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그가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 것이 자기 자신도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와서 1절을 보시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 논조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투입니다.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비판하게 되면 도리어 너희가 비판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네가 싫어하면 남도 싫어하니까 싫어하는 짓 하지 말라” 이렇게 단순하게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앞서 살핀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분명 비판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망이 싫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에 대하여 귀를 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책망의 말씀이 많이 있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책망이요, 때문에 버리기 위한 책망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책망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꺼이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형식으로 말씀하시는가? 우리 편에서 좀 더 알아듣기 쉽게, 그리고 가까운 방식으로서 설득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남에게 대접 받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 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마음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 지금 이런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의 마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라는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 없이, 오직 정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너희 역시 그런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라 할지라도, 특별히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자라 할지라도 비판 받을 죄악된 행동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비판을 하게 되는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위선자들은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남보다 낫다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는 죄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 보자면 소위 완전성화를 인정했던 부류들이 이런 비판의 칼을 들이댈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 때문에, 점도 없고 흠도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날카로운 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완전성화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내용 속에서는 어떤 것까지 말하는가? 중생한 자의 선이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부패함 때문에 선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을 바라기도 한다고 고백합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4항).
그러므로 정죄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긍휼의 비판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 좀 더 올라가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비판과 책망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1절과 2절의 형식인 것입니다. 정죄를 위한 비판은 정죄를 위한 비판을 부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하나님도 너희를 정죄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어떤 존재냐?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이 아니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3절 이하 5절은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이 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분, 자신이 마치 심판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하는 자들, 한 마디로 위선자들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티는 우리가 확인하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신 들보는 눈 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만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를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자세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기 위하여 열심히 찾아내고 있는 모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6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부류들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누구만을 의식하는 자들인가? 사람들만을 의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들은 하나님이 기준으로 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말씀을 말하긴 합니다만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말씀, 성령의 조명으로서 바른 해석 가운데 있지 못하고 사람의 전통만을 내세우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하여 내 놓을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기준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구하며, 사람의 이목만을 신경 쓸 뿐입니다.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기 때문에 외적인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는 듯 하지만, 내적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바로 그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만 들추려고 하는 자들,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인 겁니다.
그럼 그들만 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만 들춰낸다면 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면 지금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말씀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하고 있다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용어로서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하고, 화평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비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용서, 화평을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랑, 성경이 말하고 있는 용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화평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 인본주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을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으로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해석의 잣대를 댐으로 인간의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는 성격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서 부르셨습니다. 때문에 정죄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합니다.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우리 자신도 비판 받아야 할 자리에 이르지나 않을까 자신을 돌아보는 자이어야 합니다(갈6:1). 혹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펴야 하고, 특별히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만을 살핀다면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기에 앞서 고린도전서 10장만 찾아보겠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1절 앞에 보면 광야에서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났습니다. 그것을 세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 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는데 그것을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나 성찬이나 그것 자체가 구원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런 구원의 은혜의 외적인 것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광야에서 멸망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들이 기록되고 있는가? 그것을 본보기로 우리는 그와 같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절 이하를 보시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6-10)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11절과 12절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러분, 우리는 마태복음 5장 마지막 절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따라 온전함으로 나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전함을 추구할 때,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은혜를 많이 주실 때 더 이상 온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온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고, 또 서 있다는 생각도 어떤 면에서는 교만인 줄 아셔야 합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서 있다고 넘어지는 자요, 넘어졌으면 우리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자입니다. 일어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때문에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음행 중에 잡힌 여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다 율법대로 하자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간음하다 잡혔기 때문에 즉결심판, 즉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여러분, 이 말씀을 죄 지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실제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매튜 풀 주석). 즉 우리는 어느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예수님 당시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았습니다. 아니 그들 스스로 알았다가 아니라, 그때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그들 마음속에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들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데,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그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겁니다. 아무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던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누구를 비난하겠습니까? 이미 살핀 바 있지만 마음으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봐도 간음함이요 미워하는 마음조차 살인이라 말씀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건전한 비판과 분별을 갖추어야 합니다. 먼저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고, 혹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비판과 정죄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혜롭게, 조심스럽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성도는 각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함께 온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런 부분에 있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귀한 말씀에 감사